인권위 “정신질환자 인권 보호…경찰청장·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징계, 손해배상 권고”
  • 소위 '해운대 교통사고'로 알려진 사고의 블랙박스 촬영 장면. 사고를 낸 푸조 승용차 운전자 김 모 씨는 간질(뇌전증) 환자로 밝혀졌다. ⓒJTBC 관련보도 화면 캡쳐
    ▲ 소위 '해운대 교통사고'로 알려진 사고의 블랙박스 촬영 장면. 사고를 낸 푸조 승용차 운전자 김 모 씨는 간질(뇌전증) 환자로 밝혀졌다. ⓒJTBC 관련보도 화면 캡쳐


    지난 7월 31일 오후 5시 16분경 부산 해운대에서는 50대 남성 운전자가 신호를 무시하고 교차로를 질주, 횡단보도를 건너던 행인 3명을 살해한 뒤 연이어 6중 추돌사고를 일으켜 1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경찰 조사 결과 운전자 김 모(53세) 씨는 ‘간질병(뇌전증)’ 환자로 밝혀졌다. 간질병 환자의 경우 꾸준한 약물복용과 관리를 받으면 일상생활 중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오랜 시간 동안 운전을 하거나 비행기를 타는 등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신을 잃고 발작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간질병 환자’는 오랜 기간 병원 치료와 약물복용을 통해 지난 2년 동안 발작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또한 신체검사나 적성검사도 일반인과 다르게 받아야 한다.

    하지만 ‘해운대 교통사고’를 일으킨 김 씨는 약물복용도 제때 하지 않았고, 병원 치료 또한 꾸준히 받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김 씨 본인도 경찰 조사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주장, 운전 중 ‘발작’이 일어났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줬다. 게다가 김 씨는 올해 운전면허 갱신 적성검사 등도 아무런 검사도 받지 않고 통과했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간질병 환자’가 이처럼 쉽게 운전을 할 수 있게 된 걸까. 일각에서는 그 이유를 “운전면허 취득을 쉽게 만든 이명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확인 결과 이런 문제의 발단은 2002년 7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2002년 7월 30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청장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에 대한 징계 및 피해자 손해배상 등을 권고한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 2002년 7월 30일 국가인권위가 배포한 보도자료. 현재는 '모바일' 화면만 검색된다. ⓒ국가인권위 모바일 홈페이지 캡쳐
    ▲ 2002년 7월 30일 국가인권위가 배포한 보도자료. 현재는 '모바일' 화면만 검색된다. ⓒ국가인권위 모바일 홈페이지 캡쳐

    당시 인권위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보면, 문 모 씨 등 15명은 2001년 경찰청장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을 상대로 ‘정신과 진료 개인정보 제공 및 이용’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경찰청에 ‘정신과 진료 관련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경찰청이 이 정보를 운전면허 수시 적성검사 자료로 이용한 것은 헌법 제17조에 명시된 사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 ‘위법 행위’라는 주장이었다.

    인권위 측이 밝힌 상황은 대략 이랬다 문 씨 등이 병원 정신과 진료를 받은 뒤 해당 자료를 수집한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정보가 경찰청으로 넘어갔고, 경찰청은 이를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 선정 자료로 사용, 1만 2,800여 명이 검사 대상자로 통보를 받고, 이들 가운데 3,000여 명이 수시 적성검사를 받게 됐다고 한다.

    이는 2001년 3월 감사원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게 정신질환자, 간질병 환자 등의 진료 내역을 요청한 뒤 같은 해 9월에는 경찰청장에게 일정 기준에 해당하는 정신질환자 2만 5,510명에 대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한 개인정보를 통보받아 수시 적성검사 대상자 지정 여부를 정하도록 권고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경찰청은 감사원 권고에 따라 2001년 5월, 2002년 3월에 알츠하이머병에 따른 치매 및 정신분열증(조현병)으로 총 진료일수가 180일을 넘는 사람 1만 3,328명에 대한 정보 제공을 요청했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를 제공한 것이 ‘범법행위’라는 것이다.

    인권위는 관련 내용을 복기(復棋)한 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과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감안할 때, 일정 기간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주위에 알려질 경우 심각한 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진정인들은 정신과 치료 사실을 주변인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숨기고 있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또한 “경찰청은 이미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52조의 5항에 따라 광역 지자체장 등 10여 개 기관으로부터 운전면허 수시적성검사와 관련이 있는 개인정보를 통보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보건법 제24조 및 제25조에 따라 정신병으로 보호자의 동의에 의해 입원치료 중인 사람에 대한 자료를 광역 지자체장이 정기적으로 경찰청에 통보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인권위의 ‘권고’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인권위가 해당 권고에서 실제 우리 사회에서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은 빼먹은 점은 문제로 보인다.

    운전면허 관련법으로 지정된 ‘수시적성검사’는 1년에 한 차례 받는 것이다. 그 대상은 7년마다 한 번 적성검사를 받는 일반인과는 다른 사람들, 즉 간질 환자나 정신질환자 등이다.

    문제는 지난 15년 사이에 ‘약자에 대한 인권보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들이 크게 줄었다는 점이다. 정신질환자와 간질환자도 빠지다시피 했다. 이로 인해 꾸준히 문제가 발생하자 법률을 바꾸려는 시도도 있었다.

  • 현행 법령에 따르면 뇌전증(간질) 환자라도 전문의의 '운전불가' 진단이 있어야만 '수시적성검사' 대상이 된다. ⓒ정부의 '알기쉬운 생활법령' 화면캡쳐
    ▲ 현행 법령에 따르면 뇌전증(간질) 환자라도 전문의의 '운전불가' 진단이 있어야만 '수시적성검사' 대상이 된다. ⓒ정부의 '알기쉬운 생활법령' 화면캡쳐

    2009년 6월 경찰은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를 확대하는 도로교통법 시행령 개정을 준비했다. 이전까지는 마약류 관리법에 따라 마약중독 치료보호기관에서 치료 중인 사람에 대해서만 자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이에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를 ‘정신장애 또는 간질로 인해 장애인 등록이 된 사람’까지 확대, 보건복지부로부터 자료를 통보받을 했다. 하지만 입법예고 기간인 2009년 6월 18일, 인권위 측에서 “교통사고 발생의 직접적인 원인 자료 등 명백한 근거자료를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운전면허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를 정신질환자와 간질 환자로 확대하는 것을 두고 경찰청과 인권위의 줄다리기는 해를 넘겼다. 경찰은 2011년 5월 22일에는 ‘신경정신의학회’에 “정신질환자와 간질환자를 수시적성검사 대상에 포함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자문을 요청했다”고 한다.

    2011년 6월 8일 ‘신경정신의학회’ 측은 “정신질환자와 간질환자의 운전가능여부는 의사가 개별적으로 판단하여야 하고, 이들을 수시적성검사 대상으로 통보하려면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보내왔다고 한다. 결국 경찰청은 인권위와 신경정신의학회 의견에 따라 관련 연구용역을 발주하기로 했다는 것이 2011년 말까지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2016년 현재 상황은 어떨까. 정부가 제공하는 ‘찾기 쉬운 생활법령’ 정보에 따르면, ‘수시적성검사’ 대상은 도로교통법 제88조 제1항 및 시행령 제56조 제1항에 규정돼 있었다.

    이에 따르면, 치매, 정신분열증(조현병), 분열형 정동장애, 양극성 정동장애, 재발성 우울장애 등의 정신질환, 정신 발육지연, 간질(뇌전증)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해당 분야 전문의가 인정하는 사람, 향정신성 의약품(마약) 또는 알코올 관련 중독으로 인해 정상적인 운전을 할 수 없다고 해당 분야 전문의가 인정하는 사람 등이 해당된다.

    또한 병무청장, 식품의약품안전처장, 광역지자체장, 각 군 참모총장, 근로복지공단이사장, 보험요율 산출기관장, 공제조합 이사장 등이 관련 정보를 경찰청장에 통보한 대상자도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다.

    오히려 듣지 못하는 사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다리나 머리, 척추 등의 신체장애로 앉아 있을 수 없는 사람, 양팔의 팔꿈치 관절 이상을 잃은 사람, 양팔을 전혀 쓸 수 없는 사람 등의 신체 장애인은 자신의 신체 장애에 맞게 개조한 차량을 이용해 정상적으로 운전을 할 수 있으면 '수시적성검사' 대상자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관련 법령에 따르면, ‘해운대 교통사고’를 낸 김 씨처럼 후천적으로 간질에 걸린 사람은 물론 정신질환이나 간질 환자, 청력 및 시력 문제로 병역 면제를 받은 사람 또한 운전면허 취득에 제한을 받아야 하거나, 이미 면허가 있다면 ‘수시적성검사’ 대상자에 포함되어야 한다.

  • 대한뇌전증학회의 2010년 5월 18일 공지사항. 운전면허에 관한 내용이다. ⓒ대한뇌전증학회 홈페이지 화면캡쳐
    ▲ 대한뇌전증학회의 2010년 5월 18일 공지사항. 운전면허에 관한 내용이다. ⓒ대한뇌전증학회 홈페이지 화면캡쳐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010년 3월 감사원은 병무청에 대한 감사 결과 시력 상실과 양극성 정동장애(외부 자극 없이 조울증 또는 우울증이 있는 장애)로 병역 면제 처분을 받은 사람들이 버젓이 1종 보통면허를 취득한 뒤에도 ‘수시적성검사’를 받지 않은 사실을 적발, 공개했다.

    참고로 1종 보통면허를 취득하려면 안경을 꼈을 때 양쪽 다 0.8 이상, 안경을 벗었을 때 0.5 이상이어야 한다. 병역 면제를 받으려면 안경을 꼈을 때 양쪽 시력이 0.02 미만이어야 한다. 즉 ‘눈 뜬 장님들’이 1종 보통면허를 취득한 뒤 일반인처럼 운전을 하고 다닌다는 뜻이다.

    감사원의 감사 이후 상황은 개선되었을까. 2013년 10월 22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안형철 새누리당 의원이 도로교통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시력 문제로 병역 면제 처분을 받아 ‘수시적성검사’ 대상이 된 943명 가운데 615명(65.2%)가 검사를 통과, 운전면허를 취득했다고 한다.

    도로교통공단은 또한 2008년부터 2013년까지 233명의 치매 환자 159명에 대해서도 ‘수시적성검사’에 합격시켜줬다고 한다. 당시 도로교통공단 측의 해명은 기가 막히는 것이었다.

    “수시적성검사는 녹내장 같은 안과 질환이 있거나 한쪽 눈이 완전히 안보인다 해도 양안 시력이 0.6 이상이면 통과시켜주므로, 군 병역신체검사와는 많이 다르다. 치매 또한 수시적성검사 당일에 검사에 합격하면 운전을 계속할 수 있다.”


    즉 운전면허를 오랜 기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도로교통공단은 면허 적성검사를 하나마나 한 ‘요식행위’로 관리해 왔다는 뜻이다.

    국가인권위의 ‘정신질환자 및 간질환자 개인의료기록 사용불가’ 권고와 도로교통공단의 ‘무사안일 수시적성검사’가 자동차를 ‘도로 위의 대량살상무기’로 만드는 데 일조 했다는 뜻이다.

    언론과 국민의 질타를 받은 정부는 지난 8월 2일 “운전면허 수시적성검사 대상에 간질 환자도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017년 대선 이후 다시 국가인권위가 나서서 “개인정보 침해”를 주장하고, 도로교통공단의 무사안일 한 ‘적성검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해운대 교통사고’와 같은 일은 언제 어디서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