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신상필벌' 원칙 따라 국민을 창조자로 변신시켜"
  • ▲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를 박정희 식으로 풀어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를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1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했다. ⓒ 뉴데일리
    ▲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를 박정희 식으로 풀어갈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 위해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를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1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했다. ⓒ 뉴데일리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보다 논쟁이 많은 인물은 없다. 박정희를 사악한 독재자로 폄하하는 일부 세력도 있지만, 박정희의 과(過)보다 공(功)이 많았음을 인정하는 국민이 대다수다.

    박정희 집권 18년은 전 세계가 '격변의 시대'였다. 특히 한국에게는 그랬다. 쿠바 미사일 위기와 냉전 심화, 베트남 전쟁, 카터의 주한미군 철군 정책, 김일성의 대남 무력도발 등은 박정희 정권이 헤쳐 나가야했던 사건들이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이 난관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은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문제를 박정희 식으로 풀어갈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자 1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위기의 대한민국, 박정희에게 길을 묻다'를 주제로 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심포지엄 1부에서는 '박정희 산업혁명: 세계 최고의 동반성장'을 주제로 좌승희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김준경 KDI 원장, 조장옥 한국경제학회 회장의 발표가 있었다.

  • ▲ 좌승희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 뉴데일리
    ▲ 좌승희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 ⓒ 뉴데일리


    1부 발제를 맡은 좌승희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이사장은 박정희 시대 발전 전략의 핵심은 '창조자에 대한 우대'라고 지적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은 구성원간 비선형적 상호작용 속에서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으로, 마치 마차 경제에서 기차, 자동차, 비행기, 우주선으로 복잡성이 증가하는 창조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차에서 자동차까지를 일거에 창발한 박정희식 산업혁명은 세계최고의 창조경제경험으로, 이 시기 경제는 기존 세계관과는 크게 다르다"고 주장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박정희식 산업혁명은 경제적 차별화 전략을 통해 창조자들을 우대, 창조자에게 불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바로잡았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거꾸로 창조자들을 착취자라 폄훼하는 칼 마르크스나 또는 무임승차 당하는 창조자들을 방치하는 주류 경제학은 발전을 가져오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결국 박정희식 산업혁명은 창조자에게 정의롭지 못한 시장을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바로 잡음으로써 국민, 기업 모두를 창조자로 변신시킨 결과"라고 지적했다.

    1993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20세기 최고의 동반성장을 실현했다. 이 시대 성장을 주도한 박정희 집권 18년 간 한국은 좋은 성과를 우대하는 인센티브 구조를 통해 성장을 극대화했다는 것이다. 즉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개선하는 최고의 동반성장을 실현했다는 풀이였다.

    좌승희 이사장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육성정책으로 중소기업 및 서비스업과 농업 등에 대한 유발 수요를 창출했다. 이를 통해 일자리 창출도 주도했고 내·외수, 대·중소기업, 제조업·서비스업, 제조업·농업 간의 동반성장의 선순환구조를 형성했다. 결국 이런 노력이 중산층을 확산시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하지만 요즘의 경제·사회 제도는 사회정의와 균형발전이라는 이념적 깃발 아래 성과를 폄하하는 역차별 인센티브 구조로 바뀌기 시작했다"면서 "구체적으로는 ▲성장하는 대기업에 대한 무조건적 규제 ▲중소기업에 대한 신상필벌에 역행하는 평등주의 지원 ▲무조건적 수도권 규제 ▲지역균형발전과 행정수도 이전 ▲전투적 노조 등장 ▲중등교육 평준화 강화 ▲대학 평준화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이처럼 성과와 우월성을 폄하하는 경제·사회적 평등주의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신상필벌에 충실해야할 경제 정책이 모두 1/n 평등 정책으로 변질되고, 성과를 경시하는 민주적 평등 이념에 치우치게 됐다"며 "이러한 이념이 온 사회를 물들이면서 역동적이던 한국 사회의 성장 요인은 점차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박정희가 신상필벌의 원칙하에 '관치에 의한 경제적 차별화 정책'을 추진했고, 이 정책이 경제도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것이 좌승희 이사장의 설명이었다.

    좌승희 이사장은 "경제적 차별화 정책은 좋은 성과를 우대함으로써 시장의 경쟁 기능을 강화해 경제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경제적 차별화 원리에 따라 기업 육성 전략을 창의적으로 추진해 짧은 기간 동안에 중소기업을 대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것이 그렇다"고 예를 들었다.

    발제 끝 무렵 좌승희 이사장은 "오늘날 세계 경제는 물론 한국 경제도 저성장과 소득불평등 심화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래서 동반성장이니 포용적 성장이니 하면서 모두 더불어 잘 사는 나라를 만든다고 정치권이나 학계가 요란을 떨고 있다. 하지만 뾰쪽한 해답은 없고 성과도 없이 말의 성찬에 그치고 있다"며 현재 국내 여론 상황을 비판했다.

    좌승희 이사장은 "한국 경제가 성장의 역동성과 본연의 동반성장을 회복하는 길은 하루 빨리 평등주의적 포퓰리즘 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며 "경제적 차별화 원리에 따라 열심히 노력해 성공하는 국민들을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 한국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마저도 '박정희 산업 혁명'에 길을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역설했다.

  • ▲ 김준경 KDI 원장 ⓒ 뉴데일리
    ▲ 김준경 KDI 원장 ⓒ 뉴데일리


    이어 첫 번째 토론자인 김준경 KDI 원장이 한국 경제의 성장 배경을 설명했다.

    김준경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가와 혁명과 나'를 읽어보면 한국경제는 혁명이 나던 1961년에는 나라 예산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며 "한국 경제의 심각함을 인지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10월 대선에서 '우리는 자주적 기초 위에서 미국원조를 정당히 받아 계획성 있게 써야한다'는 슬로건과 함께 선거운동을 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선 후 가장 처음으로 세정개혁과 재정 자립을 시도했다고 한다.

    김준경 원장은 "1966년 3월 국세청 설치를 계기로 세무행정력이 강화됐다. 단시일 내에 세수기반이 획기적으로 확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1974년에는 해외원조 의존도 0%를 기록하며 자정자립에 달성했다"고 말했다.

    김준경 원장은 "세정 개혁 이전에는 부정부패가 심각했다. 세무당국은 세금 대신 뇌물을 걷었고 권력자에게 정치자금으로 전달했다. 세무공무원은 성과와 관계 없이 권력자의 '빽'으로 승진하는 관행이 고착돼 있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세무공무원 인사혁신과 감찰기능을 통해 기강을 확립했다. 전국 6대 도시 세무관서의 6급이상 공무원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인사조치를 한 것이 그렇다"고 설명했다.

    김준경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또 다른 리더십 사례로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들 수 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일본에서 확보하기 위해 집권 초부터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을 통해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경제협력차관 명목으로 무상 3억달러와 유상 2억달러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김준경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 협력차관을 포항제철,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에 투자했기 때문에 한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이뤄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김준경 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수마을 우선지원 원칙'을 바탕으로 한 새마을 운동도 우리 경제 성장의 큰 움직임"이라며 "박정희 대통령은 농촌을 빨리 근대화하기 위해 전기를 보급했고, 의욕적으로 일하는 마을에 전기를 우선 지원하면서 농촌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 ▲ 조장옥 한국경제학회 회장 ⓒ 뉴데일리
    ▲ 조장옥 한국경제학회 회장 ⓒ 뉴데일리


    두 번째 토론자인 조장옥 한국경제학회 회장 또한 박정희 시대의 고도 성장 배경을 설명했다.

    조장옥 회장은 "1953년부터 1965년까지 한국의 1인당 GDP는 미국의 10%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66년 이후 한국은 미국을 빠르게 따라 잡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조장옥 회장은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 1979년 한국의 1인당 GDP는 미국의 23%였다. 그리고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는 미국의 34%였으며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에는 52%였다"면서 "2010년 한국의 1인당 GDP는 미국의 70% 이상으로, 이는 많은 선진국과 유사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조장옥 회장은 "한국의 경제발전은 '기적'이라는 평가가 어울릴 정도로 눈부신데 그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은 크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였다고 생각된다"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조장옥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은 국민에게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한 것, 두 번째는 노동과 자본과 같은 생산요소를 동원해 관리할 수 있는 기업가와 같은 지도자 집단을 양성한 것, 마지막으로는 부족한 투자 자원과 기술을 해외로부터 확보해 낭비하지 않은 것을 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장옥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 세 가지를 위해 하나의 '제도로서의 역할'을 맡았다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발전 전략을 추진함에 있어 모든 면에서 일이 막히지 않고 순리대로 흐르도록 하는 최후의 해결사가 됐다고 칭송했다.

    조장옥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역사에 어떤 형식으로든 길이 남을 것"이라며 "이 심포지엄이 그 분의 업적과 실패를 바르게 조명해 한편으로는 역사의 바른 위치에 모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미래를 여는 교훈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발언을 마무리 했다.

    이어 심포지움 2부에서는 '집권 18년의 박정희: 혁명가인가? 정치가인가?'를 주제로 이주천 원광대 교수,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광동 나라정책원 원장, 이철순 부산대 교수의 열띤 토론과 발표가 이어졌다.

    3부에서는 '박정희의 부국강병책: 우리나라는 우리 힘으로 지킨다'를 주제로 김세중 연세대 명예교수, 이춘근 이화여대 겸임교수, 조원일 전 베트남 대사, 성한용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등의 토론이 열렸다.

    '박정희에 길을 묻다' (中) 박정희, 혁명가인가 정치가인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