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친구 70대 할머니들, 남이섬 여행기>

    "우리 나이가 어때서?"
    황혼 길에 새출발 건배!

    최 신 자 /문화유산 해설가

    중학 때부터 똘똘 뭉친 5인조 우정
    ‘나미나라’에 다녀왔다. 남의 나라? ‘나미나라 공화국’ 남이섬은 한국 유일한 섬나라다.
    “우리 해외여행 왔네. 국내서 외국여행...” 입장권 사려는 긴 행렬에 서는 친구는 신이 났다.
    매표소 입구엔 입장권이 ‘비자’다. 각국의 환율까지 적혀있다. 원화는 1대1.


  • 중학 때부터 꼭 붙어 다닌 단짝친구들 5명, 대학졸업후 미국 가버린 친구가 한국에 오면
    그때처럼 다시 모이곤 한다. 서로 내 집처럼 드나들며 부모형제들 속속들이 어울린 우리는
    그래서 70대 할머니가 되어서도 핏줄보다 더 끈끈한 일심동체로 살아간다.
    이번에도 샹하이 딸네를 찾은 미국 친구가 우리끼리 여행가자는 메일을 보냈다.
    언제 또 갈수 있을지 모르니 미국 돌아가기 전에 아무데나 우리만의 여행을 하고 싶대서
    가깝고 풍광 좋은 남이섬을 찍어 이름난 그 호텔을 예약한 2박3일 우정여행. 
    다리를 다쳐 함께 못 가는 친구를 찾아가 점심을 나눈 뒤 공짜 전철로 달려온 참이다.

  • 하늘에서 본 남이섬.(자료사진)
    ▲ 하늘에서 본 남이섬.(자료사진)


    한해 관광객 300만명을 돌파한 ‘나미나라 공화국’

    “너무 좋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다리를 안 놓는 이유 알겠어. 저 차들 좀 봐.”
    친구가 가리키는 경춘가도에는 밀려든 차들이 주차장이나 다름없이 꼼짝을 못한다. 
    "맞아, 절대로 다리 생기면 안돼" 이구동성으로 환경보호 예찬론을 쏟아낸다.
    차들이 밀려들면 조그만 남이섬 아름다운 숲이 견뎌낼 재간이 없을 터이니까.
    “모르는 소리...1년에 3백만이 들어온대. 3백만명이면 3백억이 넘어, 3백억...”
    워싱턴 IMF에서 장기간 근무했던 친구가 경제전문가답게 정곡을 찌르는 말을 던진다.
    경기도 가평에서 비자 판매, 물 건너면 강원도 나미나라, 300억 세금은 경기도 수입인가?

    동화나라에 들어가는 기분이 이럴까, 2백미터도 안되는 물길을 달려가는 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가랑비가 뿌린다. 물안개 자욱한 북한강 뱃길은 비를 좋아하는 여심을
    적시는 듯, 여고때 수학여행 떠나던 설레임처럼 영낙없는 10대소녀의 가슴을 되살려 놓는다.

    '달라진 한국'에 감동...잃어버린 명품 자켓을 찾다

    “어머, 내 옷!” 팔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훔치던 친구가 놀라 일어선다. 
    할머니 건망증! 어딘가 놓고 왔다는 옷은 남대문 시장에서 3만원 준 자켓,
    값싸고 품질이 좋아 미국서 입으려던 한국산 명품이라고.
    호텔에 도착해서도 찾았지만 못 찾고 마음 졸이며 기다리릴 때 연락이 왔다.
    분실물 센터에 있다는 소식, 섬을 떠나는 날 옷을 받은 친구가 기뻐하던 모습이 기쁘다.
    젊은 직원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예쁘게 행동하는지 우린 다들 놀라고 감사하였다.

    “한국이 이렇게 달라졌어. 내가 강연 다니던 20년전 10년전과도 아주 달라.
    청년들이 예의 바르고 이걸 포장까지 해주잖아. 우리 한국 발전했어. 정말 다른 나라야.”
    자켓을 걸친 미국 친구는 진심으로 감동한 듯, 우리나라도 선진국 되어간다고 좋아한다.

  • 남이섬을 숲으로 가꾼 민병도씨 별세 기사.(남이험 전시물)
    ▲ 남이섬을 숲으로 가꾼 민병도씨 별세 기사.(남이험 전시물)

    “그래, 남이섬도 참 많이 달라졌잖아. 올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아.”
     이 섬나라도 교육자 정신이 남긴 유산이 아닐까.
    1944년 청평댐 건설로 생겨난 강물 속의 모래밭, 물이 빠지면 육지였다는 버려진 땅,
    구한말 휘문학원(휘문중고교)을 설립한 민영휘씨의 손자 민병도씨가 사들여
    척박한 땅에 수십년 동안 갖가지 나무를 심고 심고 또 심었다고 한다. 

    숲이 우거지면서 직장 야유회나 대학생 MT로 북적이던 섬은
    강변가요제가 열리고 인기드라마 ‘겨울 연가’를 찍으면서 일약 한류명소로 뜬다.
    일본인 중국인 동남아 사람들이 1년에 100만명 몰려오는 국제관광 명소,
    한국에서 외국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란다.

    20세 대장부 남이장군이 죽어서 이루어놓은 명소

    북한강 청평호수에 가랑잎처럼 떠있는 반달 모양의 섬,
    입구에 남이(南怡)장군 묘소가 있어 남이섬이라는데,
    정작 남이 장군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13호다.
    17세에 무과급제하고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27세때 병조판서(국방장관)에 올랐으나 역적 음모에 걸려 28세로 처형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이 이곳 강변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이 전해지는 걸 보면
    후손들이 거두어 외가인 화성 쪽으로 옮겼는지도 모르겠다.
  • 남이 장군 묘.(남이섬서 촬영)
    ▲ 남이 장군 묘.(남이섬서 촬영)

    여기 가묘엔 이런 시도 새겨놓았다.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丈夫)--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 평정도 못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함경도 여진 정벌에 나서며 읊었다던 남이장군의 유명한 시, 여고때 배웠다. 
    지금 20세 남자는 겨우 재수생 면하면 다행인데, 그때 장군은 국군 사령관이었나 보다.
    결혼 나이 넘도록 시험지옥에 매달려야 하는 한국 교육 시스템이 사뭇 걱정스럽다.

    '상상력의 백화점' 창조해낸 예술사업가 강우현 대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남이장군 가묘까지 진짜처럼 만들어놓고
    섬 전체를 ‘남이=나미 나라’로 재창조한 천재는 따로 있다.
    홍익대 출신 강우현씨(남이섬 대표)는 남이섬이라는 큰 캔버스에
    타고난 자신의 모든 재능과 땀을 몽땅 쏟아 부은 것 같다.
    그림과 캐릭터 작가이자 디자이너인 강 대표는 상상력의 도전자로 유명하다.
    “버리면 상품이요, 다시 쓰면 작품”이라던 그의 말처럼
    재활용을 통해 신선한 새 문화를 창조해낸 관광예술품들이
    이곳저곳 즐비하게 손님들의 탄성을 자아낸다.

  • '이슬공원'에 세운 '참이슬' 소주병 탑.(남이섬 전시물 촬영)
    ▲ '이슬공원'에 세운 '참이슬' 소주병 탑.(남이섬 전시물 촬영)

    “이슬 공원이 뭐야?” 호기심 많은 친구가 소주병 탑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버려지는 ‘참이슬’ 소주병을 쌓아놓은 예쁜 정원 길, 벼라별 조각들도 눈을 잡는다.
    폐품들을 녹이고 구부리고 비틀어서 작품을 빚어내고 기념품을 올망졸망 만들어내고
    수입을 올리면서 문화시장을 업그레드 시키는 독보적 예술 기업가다.
    길가의 나뭇가지 주워서 십자가 만들고, 선물포장 리본 끈, 한지 끈, 솔방울 등,
    여기에 무언가 붙이고 매듭을 하고 예쁘게 다듬어 누군가에게 선물하는 게 나의 일상 작업인데 나도 남이섬 직원채용에 응시 해 보면 어떨까?
    ‘아이구,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 드라마 '겨울연가'를 찍은 메타세콰이아 숲길.(남이섬서 촬영)
    ▲ 드라마 '겨울연가'를 찍은 메타세콰이아 숲길.(남이섬서 촬영)

    메타세쿼이아를 보면 담양을 떠올리지만 남이섬 울울창창 그 로맨틱한 길 어귀에 서 있는
    ‘겨울 연가’ 남녀 주인공의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 행렬은 각국 인생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이 동상은 남이섬 관광객을 유치한 일등공신으로 강원도청에서 세워주었다고 한다.

    전화도 TV도 없는 완벽한 쉼터...예술 교육장 호텔

    “TV도 없고 전화도 없어...이런 섬에 이런 호텔...진짜 딴 나라야. 기가 막히네.”
    누구나 그러하듯이 친구들도 대열광이다. 정관루(靜觀樓) 호텔방은 완벽한 쉼터!
    본관 별관 50여개 방마다 화가, 공예가, 작가, 가수 등 다양한 예술가들에게
    한 방씩 맡겨주고 “하고 싶은 대로” 디자인하도록 했던 파격적인 기획 덕분에
    똑 같은 방이 하나도 없는 상상력의 파노라마가 장관이다.
    너무나 다양하고 참신한 느낌이 자든지 깨든지 꿈꾸든지 볼수록 새삼스러운
    갤러리 같은 부티끄 호텔방이 늙어가는 두뇌를 다시금 들뜨게 만든다.
    내게 맡겼으면 어떻게 꾸몄을까---투숙객들은 다들 이런 상상을 해볼 것이다.

  • 50여개 방마다 다르게 디자인한 예술품들.(정관루 호텔서 촬영)
    ▲ 50여개 방마다 다르게 디자인한 예술품들.(정관루 호텔서 촬영)


    그러고 보면 아이디어의 대가 강 대표는 예술을 만들고 예술을 팔고 예술을 교육하는,
    모든 손님들의 잠재된 예술 감각을 자극하고 일깨워주는 예술 전도사 아닌가.
    그는 지난해 남이섬을 떠나 제주도로 날아가서 ‘탐나라’ 건설에 몰두한다고 한다.
    탐라(眈羅) 제주도에 건국(?)하는 ‘탐나라’는 또 어떤 모습일까.
    남이섬보다 더 탐나는 탐나라 공화국, 곳곳에 이런 ‘탐나는 나라’들을 만들면
    얼마나 멋진 한국으로 변신해 갈 것인가. 나도 모르게 큰 그림을 그려보게 된다..
    언젠가 제주도에도 우리 함께 가서 탐나라 볼수 있다면 좋으련만...

    제주도에 가면 나는 김영갑 사진 갤러리 ‘두모악‘을 찾곤 하였다.
    혼신을 다해 사진을 찍는 그가 남이섬의 간곡한 부탁으로 가을 겨울 두 차례 와서
    이 섬을 카메라에 담았다. 단풍, 은행잎, 낙엽, 눈송이가 아니라
    물안개 가득 젖은 남이섬을 남긴 그의 새 작품을 이젠 다시 볼 수 없다니.
    제주도밖에 모르던 그가 다녀간 섬이 더 애틋해진다.
    루게릭 병과 싸우다가 10년전 하늘나라에 간 그는 무슨 사진을 찍고 있을지.

  • 정관루 호텔의 별관 기와집.(남이섬서 촬영)
    ▲ 정관루 호텔의 별관 기와집.(남이섬서 촬영)

    우정 60년...행복한 ‘찰떡 보험’에 흐느끼다

    그 다채로운 갤러리 방에서 우리는 새벽 5시에 아침을 먹는 호사를 누렸다.
    너무 맛있는 빵인지라 우리 모두에게 먹이고 싶었다며 먼곳까지 가서 빵을 사온 친구,
    우리는 비 내리는 숲속의 공주들처럼 이야기 꽃을 피웠다.
    중2때 맺어진 우정의 꽃은 나이 들었다고 시들 날이 있을 수 없잖은가.
    6.25후 50년대 그 옛날, 아이스링크는커녕 한강이 얼어붙어야 열리던 빙상대회에서 
    울퉁불퉁 얼음판을 씽씽 달리는 친구를 응원했던 우리들,
    경기마다 빠짐없이 뭉쳐 다니며 교복에 운동화 신고 덜덜 떨면서
    참 열심히도 박수치고 소리소리 질렀던 그 젊은 추억들.
    “너희들 덕분에 매번 1등 했지. 너희들 응원에 올림픽 대표까지...고맙다, 고마워.”
    새삼 울먹이며 두 손 잡는 친구는 “이번 여행경비는 내가 다 낼 테야” 우긴다.

    빵만이 아니다. 동행하지 못한 여고시절 반장 친구가 사준 떡으로 이틀동안 건강식을 즐겼다.
    떡보 미국친구를 위해 준비했다며 '오늘은 이 떡, 내일은 이 떡' 먹으라는 지시까지,
    한번 반장은 영원한 반장인 듯, 지금도 남을 배려하는 깊은 마음이 여전하다.

    사춘기 학교에서 만나 힘든 시절 꿈을 향해 달려온 인생, 어언 60년의 우정!
    옛 말에 여자의 일생은 아버지 복, 남편 복, 아들 복이라던데 
    세월 지날수록 친구 복은 또 얼마나 크나 큰 은혜란 말인가.
    철없던 때 이렇게 행복한 ‘찰떡 보험’에 들었다니 이야밀로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

  • 남이섬 숲길에 걸어놓은 풍선들(남이섬서 촬영)
    ▲ 남이섬 숲길에 걸어놓은 풍선들(남이섬서 촬영)

    80세 평생 보장 복지회사...“나 여기서 살고 싶어”

    하얀 풍선들이 축제날처럼 만국기와 어울려 춤추며 손짓하는 숲 터널을 걷는다.
    우람한 나무 등걸에 기댄 사진 게시판 앞에 발을 멈추는 친구 표정이 심상찮다.
    <부지런하고 근무성적이 우수한 직원은 누구든지 평생직원이 됩니다>
    남이섬이 2008년 발표한 종신고용제도는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고 한다.
    ‘종신’으로 뽑히면 정년 80세, 80세후엔 출근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월급 80만원씩.
    꿈같은 평생복지 제도다. 조건은 단 하나, 청춘을 바칠 것.
    현재 남이섬에 청춘을 다 바친 노년 종신직원이 여러명, 모두 보람찬 얼굴들,
    옹기 굽는 도공, 요리사, 청소부, 선박 선장등 자녀들까지 남이섬 가족들이다.

    “나 여기서 살고 싶어. 봉사하고 일하면서 글도 쓰고...이 공기, 이 환경.” 
    게시판 내용을 읽어보며 너도나도 꿈을 꾸는 할머니들, 마치 백년은 살것 처럼...
    직장인 아니라도 누가 봐도 살고 싶게 만드는 남이섬만의 문화가 참 귀해 보인다.
    이 에너지를 전파하여 ‘살고 싶은 한국’을 가꾸는 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 남이섬 강변 오솔길.(남이섬서 촬영)
    ▲ 남이섬 강변 오솔길.(남이섬서 촬영)


    맞다, 친구야! 끼리끼리 또 새로운 시작을 위해, 건배!

    새소리도 숨 죽인 고요의 나라, 떠나는 날 아침은 다행히 비가 그쳐있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서울은 큰비라는데 해돋이까지 욕심 낼순 없는 것.
    인생70대 황혼의 여행길을 비추는 찬란한 태양을 보고 싶었다.
    햇살은 없어도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따뜻한 햇볕이 가슴을 덥힌다.
    몇 번 와봤던 남이섬이지만 이번엔 왜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는지,
    새벽에 걷는 강변 오솔길도 메타세쿼이아길도 다 좋았지만,
    그 오랜 세월 항상 보듬고 배려하면서 평생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들이 있었기에 남이섬의 모든 것이 더 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다.

    돌아보고 돌아보며 배를 내린 우리는 닭갈비집에 들러
    이곳 명산 ‘가평 잣막걸리’를 나누며 남이섬과 작별 파티를 열었다.
    “남이섬을 위하여 건배” 막걸리 잔을 부딪치는 사진은 상냥한 종업원의 서비스.
    “여행기 쓰면 나 잘나온 사진 올려야 해.” 친구들의 부탁에 웃음으로 끄덕인다.
    세월도 무심하지 잘 나올 턱이 있겠나.
    엄앵란보다 예쁘다며 배우하라던 얼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우리 사진은 이제 우리끼리만 봐야지.
    젊은이들에게 세상을 맡기고 우아하게 품위 있게 소리 없이 퇴장해야 할 나이.
    남이섬 사람들을 겪어보면서 밝은 미래의 희망을 확인하지 않았더냐.
    우리 할 일은 그들에게 박수 치는 응원단이란다.
    “우리 나이가 어때서? 남은 삶을 위하여 건배!”
    옆자리 손님들이 웃으면서 박수를 쳐준다.
    맞다, 친구야! 끼리끼리 여행은 또 새로운 시작이로구나.
    우리 건강을 위하여 건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