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은 [무장사수-유혈충돌 노선] 주창자 …그 노선이 옳았는가?"
  •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 기념곡으로 만들어 제창해야 한다는 공세가 거세다.
    새누리의 핵심부를 구성하는 넋 빠진 국회의원들조차 [협치]를 위해 이 노래를 제창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노래의 원전인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또한 광주의 민낯을 약간이라도 이해한다면 감히 이 노래를 국가기념곡으로 제창하자는 소리는 결코 나올 수 없다.

    필자는 지금 “평양에서 만든 <임을 위한 교향시>라는 영화에서 이 노래가 사용됐기 때문에 이 노래를 국가기념곡으로 삼을 수 없다”라는 북풍(北風)스러운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또한 애국가도 국가기념곡이 아닌 마당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기념곡으로 삼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지도 않다.
    필자는 미학(
    美學—아름다움과 추함, 혹은 생명과 죽음)의 차원에서, 또한 역사해석의 문맥에서 이 노래를 [비평]하고자 한다.


  • ▲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악보 ⓒ 자료사진
    ▲ 1982년 만들어진, '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악보 ⓒ 자료사진


    1. [피바다]인가? [생명의 길]인가?

    <님을 위한 행진곡>의 노래의 가사는, “이 썩은 세상을—양키와 가진자 들을—노동자, 민중이 쳐부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일부이다.
    이 시가 어떤 언어로 이루어졌는지 잠시 살펴 보자.
    아래는 백기완의 시에서 등장하는 구절들이다.

    필자 주 :
    보다 알기 쉽게 바꾼 경우, 괄호 속에 실제 표현을 나타냈다.


    이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

    뎅그렁 원한만 남은 해골

    그대 등짝에 쏟아지는 주인놈의 모진 매질

    천추에 맺힌 원한

    군바리를 꺾고(고꾸라지고) 양키(코배기)를 박살내고

    제국주의(제국)의 불야성

    피에 젖은 대지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

    손톱을 빼고 여성 생식기(그곳)까지 무(언무)를 쑤셔 넣고

    사람을 산 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가진자들

    노동자의 팔뚝에 안기라

    온몸을 해방의 강물에 던져라

    가진자들의 거짓된 껍질을 벗겨라(털어라)


    이것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의 실체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는, 이 피비린내 나는 시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해당한다.
    이런 노래가 대한민국 국가기념곡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잠시 대한민국의 주춧돌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번영은 <묏비나리>가 찬양하는 [피바다]가 아니라 [생명의 길]에 대한 고뇌 어린 통찰이 주춧돌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약 160년전에, 거세게 덮쳐오는 현대문명의 파도 속에서, 선배세대는 [생명의 길]에 대한 고뇌 어린 통찰을 시작했다.

    1860년에 동아시아의 세계질서--중화질서가 무너졌다.
    이 해에,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농민반란인 <태평천국> 세력의 군대가 양자강 이남을 완전히 장악하고 강을 건너 남경까지 손에 넣었다.
    또한 이 해에,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천진과 북경을 포격해서 청을 굴복시켰다.
    중화질서가 붕괴한 것이다.

    조선 지배층은 공포에 질려 잔혹한 위정척사(衛正斥邪“중화정신을 우뚝 세워 사악한 서양 것들을 물리친다”라는 망상) 정책을 폈지만 민초 지식인들은 매우 진지하게 [생명의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첫 결과가 최제우의 <동학>과 김일부의 <정역>(正易)으로 나타났다.

    필자 주 :
    1894년 동학봉기의 두 노선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전봉준-김개남은 매우 위험한 폭력 정변/혁명 노선이었고,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온건한 국가수호/왕실수호 노선이었다.

    한마디로, 1860년대에 선배 세대는, 중국의 <태평천국>과 같은 잔혹하기 짝이 없는 광기로 발작하는 대신에, 인간과 문명에 대해, (서양문명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도) 개방적 자세로 통찰하려 최선을 다했다.

    <태평천국>과 <동학/정역>은 완전히 다른 태도이다.
    태평천국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나, 홍수전은 여호와 하나님의 둘째 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다.
    성경을 손에 들고 피바다를 만들면, 이승에서 천국을 만들 수 있다!”

    반면 <동학/정역>의 메시지는 이렇다.

    필자 주 :
    물론 현대문명을 이해하지 못 한 민초 지식층의 깨달음이었다는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아래 메시지는 필자가 해석한 최제우와 김일부이다.


    “여자든 아이든 노비든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존엄한 존재다.
    수련을 하면 이 지극한 존엄성을 깨달을 수 있다. 열심히 수련하자.”

    - 최제우의 <동학>

    “우주질서가 바뀌었다.
    예전에는 한 명의 지배자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 한 명 지배자의 [관점]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처지와 입장에서 천하의 커다란 이익과 공의(
    公義)를 바라보며 서로 조화해야 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지만 서로 어울려 조화될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다.”

    - 김일부의 <정역>(正易)

    중국의 홍수전과 한국의 최제우/김일부를 비교해 보면, 160년전 선배세대들이 삶에 대해 가졌던 태도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춧돌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 최제우김일부 생각 자체에 대해 맞다, 틀리다를 이야기 하는 중이 아니다.
    최제우, 김일부 뿐 아니라 그 당시 이 땅의 민초 지식층 대부분이 가졌던 [삶에 대한 태도]를 이야기하는 중이다.
    [피바다]를 멀리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였다.
    자신들의 지식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변화와 충격 속에 내동댕이쳐졌음에도, 광기 어린 발작을 일으키는 대신에, 오직 [영성어린 통찰]을 조심스레 시도했을 뿐이다.

    이 태도의 차이가 오늘 중국과 대한민국의 차이를 만들어낸 시원(始原)이다.
    백기완<묏비나리>최제우김일부가 아니라 (중국 <태평천국> 학살을 주도했던) 홍수전의 멘탈에서 나온 시이다.

    이는 [생명]이 아니라 [피바다]를 찬양하는 시이며, [영성어린 통찰]이 아니라 [광기 들린 발작]에서 나온 시이다.

    이런 시의 클라이맥스 부분이 바로 <임을 향한 행진곡>의 가사다.
    이런 노래는,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와 마찬가지로, 중국 <태평천국> 반란군의 학살극에 적합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국가기념곡이 될 수 없다. 

  • ▲ 광주 사태 당시 전남도청안에서 담배를 피는 윤상원 ⓒ 자료사진
    ▲ 광주 사태 당시 전남도청안에서 담배를 피는 윤상원 ⓒ 자료사진

    2. 그 해 5월의 두 얼굴

    그뿐 아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고(
    ) 윤상원에게 바쳐진 노래다.
    윤상원은 무장사수(
    死守)-유혈종국(終局) 노선(끝까지 결사항전하여 여러 사람의 죽음으로 끝을 맺겠다는 노선)을 관철시킨 인물이다.

    1980년 5월 26일 24:00에 외부와의 전화 연결이 일체 차단되기 직전, 윤상원은 서울의 [동지]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여기서 죽겠네”라고 명확하게 의도를 밝혔다.
    5월 24일경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의 브래들리 마틴(B. Martin) 기자와 인터뷰했을 때, 이미 그의 얼굴에는 [끝까지 항전하여 죽음으로써, 미래에 일어날 운동을 위한 씨앗이 되겠다는 뜻]을 굳힌 전사(
    戰士) 특유의 기이한 평온함이 나타나 있었다.

    당시 <볼티모어 선>의 1면 톱 박스 기사에서 마틴 기자는 다음과 같은 취지로 윤상원을 그렸다.

    필자 주:
    윤상원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에, 마틴 기자는 그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DJ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광주항쟁>의 대명사를 DJ로 만들기 위해 윤상원을 전혀 조명하지 않았다.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한국에 올 때마다 [이름 모를 시민군 대변인]의 정체를 찾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윤상원 생가로 안내하지 않았다.

    1994년에 필자가 브래들리 마틴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를 광주의 윤상원 생가로 안내해서 그의 가족과 만나게 만들어 주었다.
    필자는 1980년 10월에—윤상원이 숨진 이후에—윤상원이 속했던 조직(<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전신)과 결합하여 <전국민주학생연맹>(이른바 <학림>)을 조직했기 때문에, 윤상원의 주변인물들을 바삭하게 알고 있는 편이다.


    “나는 아프리카, 아프가니스탄 등 살벌한 분쟁 지역을 여러 번 취재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이 시민군 대변인과 같은 얼굴 분위기를 가진 사람을 본 적 없다.
    곱슬 머리카락을 한 이 청년의 얼굴은 매우 평온했다.
    그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평온함이었다.”


    1994년에 윤상원의 부친을 만나고 나서 마틴과 필자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이 대화의 요지는 그 무렵에 나온 잡지 <샘이 깊은 물>에 잘 나와 있다.  

    마틴
    “윤상원은 왜 죽음을 택했던 거야?”

    필자
    “순교지.
    나의 피로 적의 얼굴에 피칠을 하는 거야.
    [이게 적이야. 이 적을 죽여!]라고 선언하는 거지.
    힘이 부족한 세력이 힘이 강한 세력을 굴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 길뿐이었다고 보았던 거지.
    뭐라고 해야 할까?
    저항근거지(pockets of resistance) 전략이라고 해야 하나?
    근거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을 택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미래에 일어날 운동을 위한 순교 씨앗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에게 겁을 주는 거지.
    신군부를 향해 [너.. 이 피바다를 원해? 이 피바다를 감당할 자신 있어? 없으면 까불지 마!]—이렇게 선언했던 거야.
    이 선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친 거지.”


    윤상원은 [무장사수-유혈종국 노선]을 만들어 이를 관철시킨 인물이다.
    이 노선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이 노선을 완성시켰다.

    5월 27일 새벽, 광주 금남로 도청 건물에서, 진압군이 반복해서 “총을 내려놓고 투항하라”고 방송했지만 윤상원은 복도로 걸어나가며 카빈 총을 쏘았다.
    진압군의 M16에 복부가 관통되어 몸통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 숨을 할딱거리자, 그의 보디가드 세 명이 그의 몸을 다시 방으로 끌어들여 커텐을 뜯어 그의 몸을 싸서 탁자 위에 올려 놓고 투항했다.
    그 후 불이 나서 윤상원의 시신은 절반이 그을린 상태가 됐다..

  • ▲ 무기를 나누고 폭탄을 제조하는 당시 상황 ⓒ 자료사진
    ▲ 무기를 나누고 폭탄을 제조하는 당시 상황 ⓒ 자료사진


    이제, 그 해 5월에서 무려 36년이 지났다.
    지금, 좀 냉정하게 당시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때가 됐다.

    필자에게 채무가 있다면 “윤상원을 따라 극한 투쟁을 해야 한다”라는 채무가 아니라 “그 해 5월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라는 채무다.
    냉정하고 정확한 해석이 필자가 (죽음 이후에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던) 윤상원 [선배]에게 바쳐야 할 제물이다.
    그를 제자리로 돌려 놓음으로써, 그의 혼과 백이 흩어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그것이 나의 [채무]이다.
    그래서 필자가 아는 [5월의 진실]을 말한다.

    그 해 5월 광주에서는 두 개의 노선이 충돌했다.
    처음에는 조비오-명노근과 같은 재야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무기를 반납하고 상황을 수습하자는 [무기회수-자체수습 노선]이 우세했다.

    그러나 5월 23일 시민대회에서 윤상원이 주장하는 [무장사수-유혈종국 노선]이 승리했다.
    이날 시민대회에서 아직까지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연사로 등장하여 "경상도것들이 우리 딸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내었지라~~", "우리 며늘아가가 새끼를 밴 채 배에 총을 맞아 죽어부렀소잉~"이라 울부짖었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광주를 기리는 국가기념곡으로 제정하는 것은

    • (1) [무기반납-자체수습 노선]을 추구했던 온건 재야 (조비오 신부 등)를 비겁자로 낙인찍는 역사해석이며

    • (2) [무기반납-자체수습 노선]을 엎어버리고 [도청사수-유혈종국 노선]으로 몰고간 윤상원이 옳았다고 천명하는 역사해석이며

    • (3) 도청앞 시민대회에서, 거짓을 울부짖으며 선동했던,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아주머니들을 찬양하는 역사해석이다.


    이렇듯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기념곡으로 정하자는 주장은, 생명과 화해를 중시하는 온건 노선을 거부하고 극한적 유혈투쟁을 찬양하는 역사해석과 맞물려 있다.
    이는 1860년 최제우/김일부 이후 한국인의 발걸음 전체에 면면히 배어 있는 유장하고 심오한 태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윤상원 본인도 원하지 않았을 일이다.

  • ▲ 17일 5.18 기념식 전야제를 앞두고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 뉴데일리 이종현 사진기자
    ▲ 17일 5.18 기념식 전야제를 앞두고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 뉴데일리 이종현 사진기자


    3. 맺음

    거듭 말하지만, 윤상원을 기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국가 기념곡으로 만들어 제창하는 행위는 [피바다 극한투쟁 노선]을 찬양하는 것과 진배 없다. 
    따라서 이 같은 행위는 [그 해 5월]에 관한 두 개의 근본적 질문을 전국민적 차원에서 오픈시키게 된다.  


    첫째, [무기반납-자체수습 노선]이 옳았는가? 아니면 [무장사수-유혈종국 노선]이 옳았는가?

    둘째, 5월 23일 도청앞 시민대회에서 “딸 아이의 유방이 대검으로 썰려 나갔다”는 둥, “임신한 며느리가 배에 총을 맞아 태아와 함께 숨졌다”는 둥 거짓 선동으로 울부짖었던 아주머니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 근본적 질문은 언젠가는 반드시 조명되어야 할 이슈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되짚어 볼 문제가 있다.
    36년전 이맘때 윤상원은 신군부에게 물었다.

    “과연 너희는 내 목숨을 바쳐 완성할 대량 유혈사태를 감당할 수 있는가?”

    36년 후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 봐야 한다.

    “과연 우리는 두 개의 치명적 질문—노선충돌에 대한 질문 및 정체불명 아주머니들에 대한 질문—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을 성숙하게 다뤄내지 못 하면 우리 사회는 다시 한 번 거대한 분열 속으로 처박히고 만다.
    헬 게이트가 열리는 셈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헬 게이트를 향한 행진곡’에 다름 아니다.



  • ▲ 17일 5.18 기념식 전야제를 앞두고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 뉴데일리 이종현 사진기자

    박성현 저술가/뉴데일리 주필.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공산주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저술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웹사이트 : www.bangmo.net
    이메일 : bang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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