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선진화 포럼 <선진화 포커스 290호>
     
    어떻게 ‘절대빈곤’으로부터 위대한 탈출을 할 수 있었는가?

     박정희의 산업혁명

    김 윤 형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 미국 동서문화센터 수석연구위원)

  • 김윤형 박사
    ▲ 김윤형 박사
    <문제의 제기
    >

국가 시스템과 「거버넌스」의 문제인가?
범국민적 발전역량의 결집의 문제인가?

한국 경제는 총체적 위기에 빠져있다.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이 앞으로 계속 하락할 것으로 전망되며, 그 하락 속도가 OECD국가 중에서 최고이다. 구조적 침체요인으로는 요소투입성장 종료와 저출산 및 인구구조 고령화에 따라 생산가능인구는 계속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고 성장요인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으며, 국내기업의 해외직접투자와 외국기업의 국내직접투자간의 역조현상이 구조화되고 있다. 중점과학 기술격차가 미국, EU와 일본에 3-4년 뒤쳐져 있는 반면에 1.4년 후에 중국에게 따라 잡힐 판국이다. 

우리나라의 행복지수와 삶의 만족도 등 사회의 질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 수준이다. 정신적 삶이 피폐화 되고 있으며, 청소년의 자살률과 노인층의 상대적 빈곤율이 OECD국가 중에서 최하위이다. 한국의 소득불평등 수준과 사회갈등 수준 또한 OECD국가 중에서 최상위권이다. 시시각각 우리에게 다가오는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관해서 정부관료들은 복지부동이고 정치지도자들은 당리당략과 이념투쟁으로 혼동에 빠져 있고 지식계층은 잠들어 있는 총체적 위기상황이다.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지 않는가?

정치인, 정부관료, 기업인, 뉴미디어, 지식계층, 노동계 지도자 등 모든 영향력 있는 사회집단이 박정희 대통령의 근대국가 건설 과정을 재조명해 보면, 각자가 반성하게 되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각성할 수 있지 않을까? 

1960년대 초의 낙후된 후진적인 척박한 개발여건과 비교하면 오늘의 한국경제는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여건들은 잘 갖추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어떻게 수립, 집행되어 절대빈곤의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며 후발 자본주의 국가 건설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재조명함으로써 우리는 현재 한국경제의 총체적 위기를 돌파하는데 있어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국가 시스템과 「거버넌스」의 문제인가? 범국민적 발전역량의 결집의 문제인가? 
  • 포항제철소 공사를 진두지취하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박태준 포철사장, 왼쪽 최각규 장관.(자료사진)
    ▲ 포항제철소 공사를 진두지취하는 박정희 대통령. 오른쪽 박태준 포철사장, 왼쪽 최각규 장관.(자료사진)

    1961년의 열악한 개발여건

    박정희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에 착수했던 19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었다. 자본축적이 결핍되었으며, 국내저축률도 극히 낮았으며, 국민경제운영은 미국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더욱이 기능을 잘 발휘하는 자본시장이 부재하였으며, 도로·항만·철도·전력 등 사회간접자본도 부족했으며 근대적 산업도 거의 전무하였다. 근대적 기업을 경영할 능력을 가진 산업자본가가 부족하였으며 일반대중의 산업활동에 대한 불신도 상당했었다. 2,500만명의 인적자원 외에 천연자원 역시 부족했다.

    이 당시의 낙후된 후진성의 조건하에서 공업화의 선도적 추진체로서 국가의 역할이 필연적이라고 믿고, 국가주도형 공업화 노선을 따라 강행군하여 나아갔다. 

    국가주도형 산업혁명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노선은 “선 산업혁명, 후 시민혁명”의 서독과 일본형 근대화 경로를 밟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1년 5·16군사혁명으로 집권하자마자 경제근대화의 민족적 과업에 본격으로 착수하였다. 빈곤, 체념과 무질서 속의 민생고 해결과 자주경제 확립을 위한 경제건설의 비전이 국가의 경제발전은 곧 나의 번영이라는 가능성을 국민들에게 제시하여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신념을 국민들 가슴속에 심어주었다. 공업화가 국가의 기본목표로서 국민적 합의가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기강확립과 정치안정이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하는 신념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 권위주의를 견지하였으며, 그 합법성의 요식행위를 갖추도록 노력하였다. 

    경제발전사적 두 가지 모델이 있다: 「선 시민혁명, 후 산업혁명」모델과 「선 산업혁명, 후 시민혁명」모델. 밑으로부터 격렬한 투쟁에 의해서 기존의 질서를 붕괴시킨 영국의 청교도혁명, 프랑스대혁명 그리고 시민혁명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 및 준 시민혁명으로써 남북전쟁이 먼저 일어났고, 그 후에 밑에서부터 자생적으로 공업화(산업혁명)가 이루어져 영국, 프랑스와 미국은 근대화를 완성시켰다. 이러한 “선 시민혁명, 후 산업혁명”의 근대화 패턴과 달리, 독일과 일본에서는 사회 엘리트 계층에 의한 위로부터 계획해서 공업화를 끌고 나갔으며 밑에서 따라가는 공업화(산업혁명)가 먼저 추진되었으며,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기득권층이 붕괴되었으며, 사회자율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어 선진국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 노선은 “선 산업혁명, 후 시민혁명”의 서독과 일본형 근대화 경로를 밟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 새마을 운동에 앞장선 박정희 대통령. 모내기 모습(자료사진)
    ▲ 새마을 운동에 앞장선 박정희 대통령. 모내기 모습(자료사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수립과 집행

    박정희 정부는 단기적 왜곡의 장기적 편익을 고려한 자원배분의 동태적 효율성을 지향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우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그 결과를 모니터 할 수 있는 강력한 관료제도를 확립하였다. 1961년 7월에 국가의 경제 사회 발전을 위한 종합 계획의 수립·운용, 투자 계획의 조정, 예산편성과 집행, 물가안정시책 및 대외 경제정책의 조정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경제기획원이 수립되었다.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는 재무부, 상공부, 교통부, 농림부, 보건사회부 그리고 과학기술처의 기능을 조정할 수 있는 경제총수의 역할을 수행했다. 

    경제기획원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기간 중에 4차에 걸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 집행하였다: 제1차 계획(1962년 1월 13일~1966년), 제2차 계획(1967년~1971년), 제3차 계획(1972년~1976년), 제4차 계획(1977년~1981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 동안에 한국의 산업자본주의가 창출되고 경이적인 한국경제발전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1977년에 드디어 '국민소득 1천불·수출액 100억불'의 대망의 목표를 달성하였으며, '절대빈곤'의 늪으로부터 '위대한' 탈출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연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은 8,5%를 상회하였다.

    경제기획원은 경제전체의 상황에서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보아 전략산업의 선별적 육성과 동태적 비교우위의 창출을 지향하였다. 신 고전학파가 자원배분의 생산력증대에 대한 효과를 정태적 견지에서 평가한 반면에, 박정희 정부는 단기적 왜곡의 장기적 편익을 고려한 자원배분의 동태적 효율성을 지향하였다.
  • 산업정책의 수립과 집행

    농민들에게 “잘 살아보세” 의 공동체 의식과 “근면ㆍ자조ㆍ협동”의 기본정신을 농민들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1964년에 외환보유 부족현상으로 대폭 축소, 조정됨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국가발전 전략을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 즉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대 전환을 단행하였다. 

    다음으로 산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법제도상의 개혁과 결정적인 정책변혁을 단행하였다. 정부에 의해서 선정된 전략산업에 자금을 집중투입하기 위해서 은행금융기관을 정부의 직접지배하에 두었다. 정부통제은행은 오버·론 (over loan)이라고 불리는 적극적인 과잉대출정책을 채용하였다. 개발우선순위에 따르려는 민간기업가들에게 세제상 혜택은 물론 은행대부와 정보보증하의 해외차입을 제공함으로써 산업자본가의 핵을 단시일 내에 창출할 수 있었다.

    한편 기업가가 당면한 위험의 불확실성을 감소시켜 주었으며, 투자·판매와 수출기회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기업가들의 의식 속에 확대주의 심리를 주입시킴으로써 근대화된 시장기구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끝으로 국가의 공업화 전략을 수행할 수 있고 자유기업정신과 자유경쟁체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의 협조관계를 형성하였으며 국민경제에 대한 시장순응적인 정부의 개입방법을 강구하였다. 한편, 민간기업의 부채를 최종적으로 정부지배하의 한국은행이 보증하게 되는 은행중심 간접금융방식의 산업금융체제하에서 외부자금에의 의존도가 높은 것에 따르는 금융적 위험부담은 크게 완화되었다.
  • 경부고속도로 준공 테이프 커팅.
    ▲ 경부고속도로 준공 테이프 커팅.
    이에 호응하여 민간기업들은 지불능력을 훨씬 넘는 혹은 가끔 총자산을 초과하는 다액의 자금을 은행으로부터 차입하고 외자도 도입하여 전략산업에 집중 투자하였다. 정부는 생산적 투자가 수반하는 위험부담 즉, 과잉생산에 의한 가격폭락, 값싼 수입품과의 경쟁에 지는 위험부담, 그리고 수출하면 밑지는 위험부담을 대폭적으로 경감하기 위한 여러 가지 산업정책을 강구하고 국민경제에 대한 시장순응적인 정부의 개입방법을 완비함으로써 산업은 생산력확충과 수출진흥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박정희 정부는 비교적 단시일 내에 국제경쟁력을 갖춘 근대공업부문의 핵을 조성할 수 있었다. 이 핵을 국민경제 전체로 확대해 나감으로써 경제근대화를 국가전반으로 밀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