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호 35호 전재> 건국 대통령 바로알기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공감대
    = 6·25전쟁 시 미군 장성들이 이승만을 존경한 이유 =

    남 정 옥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 6·25 직후 달려온 맥아더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6·25 직후 달려온 맥아더를 맞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6·25전쟁 때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도우러 온 미국 및 유엔참전국 지휘관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선을 총책임지는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비롯한 유엔군사령관과 한국전선에서 모든 유엔군지상군을 지휘하는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을 비롯한 역대 미 제8군사령관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또한 조이(Turner Joy) 미 극동해군사령관과 스트래트메이어(George Stratemeyer)  미 극동공군사령들도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해마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모든 주한미군 장성들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경외(敬畏)의 대상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미군 장성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여기며 각별히 대했다.
    유엔군 및 미군지휘관과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에는 존경과 신뢰로 맺어져 있었다.
    그런 관계는 6·25전쟁이 끝난 후까지 계속 이어지며 한미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그렇다고 미군 장성들이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잘 몰랐다. 한국에 와서야 이승만을 만나,
    전쟁을 지도하고 전선을 누비는 과정에서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노대통령(老大統領) 이승만을 존경하며 따르게 됐다. 그들이 이승만을 그토록 존경하며 따랐던 이유는 바로 그의 뛰어난
    애국심과 미국 명문대학을 나온 당대의 석학(碩學)으로서 그가 지니고 있는 해박하면서도 정통한 국제정치 및 역사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었다.
    이승만은 한국에 온 그 어떤 미군 장성보다 미국정치와 역사에 정통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한국에 온 미군 장성들의 ‘학문적 스승 또는 인생의 대선배’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 ▲ 상해에서 귀국한 임정주석 김구(가운데)를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자료사진)
    ▲ 상해에서 귀국한 임정주석 김구(가운데)를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자료사진)

      미군정기 ‘남한지역의 미국총독’이자 점령군사령관이었던 하지(John R. Hodge) 육군중장과는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시 ‘태평양의 패튼(Patton)’으로 불리며 ‘군인중의 군인’으로 높이 평가받았던 하지 장군도 8·15광복이후 남한의 총독(總督)과 같은 지위에 있었지만, 이승만의 카리스마, 애국심, 해박한 국제정세와 학식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하지에게 3년간의 남한에서의 기간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 할 정도로 지겹고 힘겨운 세월이었다. 하지를 힘들게 했던 그 중심에는 논리에 강한 이승만이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 후 서울을 떠나게 된 하지 장군은 “미군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직책은 지금까지 맡았던 직책들 가운데 최악이었다. 내가 정부명령을 받지 않는 민간인이었다면 1년에 백만 달러를 줘도 그 직책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승만 박사 같은 한국지도자를 상대했던 군정은 생각하기조차 끔찍했다”고 회고했다. 미 군정기 그런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를 학계에서는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비유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취임이후 한국을 떠나는 하지 장군에게 “비록 당신과 나 사이에 때로는 약간의 오해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 우리 모두가 완전한 자유 독립의 주권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을 수립하기 위한 당신의 결의가 성공하였음을 잘 알고 있소... 하지 중장은 한국민의 가슴속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당신에 대한 우리들의 기억은 영원한 것이오”라며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잊지 않았다.

    미 군정기 이승만 대통령이 하지 장군을 심하게 대했던 것은 한국의 이익에 저해되는 미국의 대한(對韓)정책 때문이었지, 하지 장군 개인에게 그 어떤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하지 장군도 본국으로 돌아간 후, 1952년 대장으로 승진하여 미 본토 야전군사령군으로서 1952년 10월 17일 한국을 방문하여 밴플리트 미 제8군사령관의 안내를 받아 경무대(景武臺)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그동안의 묵은 감정을 떨쳐내며 회포(懷抱)를 풀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고지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때 하지 대장은 젠킨스(Jennkins) 미 제9군단장의 안내로 당시 고지쟁탈전의 백미(白眉)이자 최대의 격전지로 꼽혔던 국군 제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현장을 방문하고, 백마고지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종오 사단장을 비롯해 제9사단의 전 장병들에게 승리를 축하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했다. ‘태평양의 패튼’으로 불렀던 야전지휘관, 하지 장군다운 행동이었다. 

  • ▲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맥아더(자료사진)
    ▲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맥아더(자료사진)

      초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와 이승만 대통령과의 인연은 일찍부터 시작됐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소령 때부터 알고 있었고, 그런 인연은 계속돼 8·15광복 후 이승만은 주일연합군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의 조치로 서울에 올 수 있었다. 이때 맥아더 원수는 남한점령군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이승만을 소개하기도 했다. 맥아더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및 건국선포식에도 부인과 함께 참석하며 이승만과의 우의를 다졌고, 2개월 뒤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1950년 초 맥아더의 초청으로 이승만이 다시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맥아더는 유사시 “캘리포니아를 방위하듯 대한민국을 방위하겠다”며 이승만에게 약속했다.
    맥아더는 6·25가 발발하자 그 약속을 지켰다. 맥아더는 악천후와 제공권을 장악한 북한공군의 위협 속에 1950년 6월 29일 한국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수원비행장으로 달려와 이승만 대통령과 요담한 후 한강방어선을 시찰했다. 그리고 워싱턴에 “현재의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 해·공군 외에도 미 지상군이 파견되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미 지상군을 한국전선에 파병했다. 맥아더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써 전쟁은 미국이 포함된 유엔의 전쟁으로 확대됐다. 이는 맥아더의 한국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오랫동안 쌓아 다져온 깊은 신뢰가 낳은 결과였다.
    이후 맥아더는 자신의 조국인 미국을 위해 싸우듯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맥아더를 군신(軍神)으로 추앙케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북진으로 이어진 통일의 문턱에서 맥아더와 이승만의 통일의 꿈은 무산됐다. 중공군의 개입 때문이었다. 이후 맥아더의 중국본토로의 확전발언은 결국 트루먼 대통령으로 하여금 그를 해임케 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의 해임에 경악했다. “워싱턴은 한국전선의 기둥을 뽑아가 버렸다”며 개탄했다. 맥아더의 해임 이후 전쟁의 양상은 휴전협상에 의한 종결이었다.
    그에 따라 이승만이 그토록 바랬던 북진통일은 사라졌다.

  • ▲ 이승만 대통령과 워커 장군(자료사진)
    ▲ 이승만 대통령과 워커 장군(자료사진)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밑에서 한국전선을 책임졌던 미 제8군사령관은 워커장군과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이었다. 초대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워커 장군은 불운했다. 제2차 대전시 미국의 맹장(猛將)이던 패튼 장군의 선봉장 역할을 자임하며 유럽전선을 누볐던 워커 장군은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인 1950년 7월 중순 한국에 부임했다. 당시는 국군과 미군이 북한군에게 낙동강으로 밀리는 시기였다. 대한민국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급한 시기였다. 그런 워커 장군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자주 실망했다. 이승만은 후퇴만 거듭하던 워커를 영 미덥지 않게 여겼다. 이승만은 승리하는 장군, 후퇴하지 않는 지휘관을 신뢰했다. 그런데 당시 전황은 이승만에게 워커를 승리하지 못한 장군, 후퇴만 거듭하는 지휘관으로 비쳐지게 했다. 결국 워커는 이승만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중공군 개입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1950년 12월 23일 자동차사고로 순직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워커 장군의 죽음을 누구 못지않게 애도하며 서울시민들에게 집집마다 조기(弔旗)를 달도록 했다.  

  • ▲ 한국 전선 부임 직후 이승만 대통령(왼쪽)을 방문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자료사진)
    ▲ 한국 전선 부임 직후 이승만 대통령(왼쪽)을 방문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자료사진)

     

      워커 후임의 제2대 미 제8군사령관 겸 맥아더 후임의 제2대 유엔군사령관은 리지웨이 장군이었다. 워커의 죽음과 맥아더의 돌연 해임으로 따라 취임하게 된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에게 지휘관으로서 강한 첫인상을 심어줬다. 취임 직후 경무대를 방문한 리지웨이 장군은 복장부터 이제까지 어느 미군장성과는 달랐다. 야전복 차림에 양쪽가슴에는 수류탄을 달고 방한모를 눌러쓴 리지웨이의 모습은 대한민국을 구하러 온 용장(勇壯)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나는 후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싸우러 왔다”는 제일성(第一聲)은 이승만에게 커다란 호감을 줬다. 실제로 리지웨이는 그렇게 했다. 반면 리지웨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에 감복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는 타협을 몰랐고, 국민에 대한 편애가 심했고, 불가능한 일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마음속에는 깊은 애국심으로 가득했고, 애국심에 의지해 오랜 망명생활을 보내고 귀국 후 눈 뜬 시간의 거의 전부를 나라를 위해 바쳤다”며 존경심을 표했다. 

  • ▲ 이승만과 밴플리트 장군(자료사진)
    ▲ 이승만과 밴플리트 장군(자료사진)

      이승만 대통령이 역대 미군 장성 중 가장 좋아했던 장군은 맥아더와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그 중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은 맥아더 해임 후 리지웨이가 유엔군사령관으로 취임하자 미 제8군사령관에 임명됐다. 1951년 4월 중순의 일이다.

    밴플리트는 부임 후 곧바로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한 후 그의 내면적인 강인함에 감탄했다.
    밴플리트는 일제강점기 조국광복을 위해 옥고(獄苦)를 치르며 고통당했던 애국자인 이승만 대통령의 강인함과 결의를 존경했고, 서양인이 한국인의 강인함을 보고 ‘동양의 아일랜드인’로 부르는 것을 이해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향후 길고 깊은 우정의 초석이 됐다. 그래서 밴프리트 장군은 전쟁 중 양국 간에 의견 대립이 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을 이해하며 친분을 유지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위대한 애국자, 강력한 지도자, 강철같은 사나이, 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며 흠모했다.

      밴플리트 장군이 1951년 중공군 4월 공세 때 서울은 프랑스의 파리나 그리스의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중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해 서울을 사수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밴플리트 장군은 워싱턴과 이승만 대통령 사이에 논쟁이 있을 때는 이승만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한국군 증강 이유를 알았기 때문 때문에 이를 적극 지원했다. 또한 밴플리트 장군은 사령관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후 주한미국대사를 맡아달라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유는 미국의 휴전정책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강요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밴플리트는 이승만이 얼마나 통일을 원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승만에게 휴전을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밴플리트를 이승만은 싫어할 수가 없었다. 그 후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1965. 7.19)하자, 유해를 모시고 한국에 와 장례식을 모두 지켜 본 뒤 귀국했다. 그런 점에서 밴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밴플리트도 이승만의 조국,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으로 여겼다.   

  • ▲ 경무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이승만, 아이젠하워,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1952년 12월)(자료사진)
    ▲ 경무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가 이승만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총사령관, 이승만, 아이젠하워, 그의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1952년 12월)(자료사진)

      유엔군사령관을 지낸 클라크(Mark W. Clark) 장군도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한다”라며 치켜세웠고, 밴플리트 장군 후임인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도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렇듯 이승만과 미군 지휘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조국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었고, 그것을 위험한 전선에서 목숨바쳐가며 평생에 걸쳐 실천에 옮겼던 미군 장성들에게 국적(國籍)을 떠나서, 이승만은 ‘위대한 애국자 및 국가지도자’로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