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문화의 지체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교육운동 방향

    김주성 /한국교원대학교

  • 우리나라는 고성장 저령화 사회에서 급격히 저성장 고령화사회로 진입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경제프레임은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고성장 저령화 사회를 떠받혔던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경제프레임은 이제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 알맞은 저생산 저소비의 경제프레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데 경제프레임의 전환은 경제제도의 변경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법적, 제도적, 문화적 프레임의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런 까닭에 경제학자인 김용하 교수가 오히려 문화제도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실천운동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김 교수의 제안들이 실행된다면 우리는 저성장 고령화 사회에서도 큰 무리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오히려 대량생산 대량소비사회에서보다도 더 가치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토론자는 특히 문화 제도적인 변화를 추구하려면 결국 교육프레임의 변화가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교육프레임이 바뀌지 않고는 저성장 고령화시대를 이끌어갈 후속세대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김용하 교수의 문제의식을 교육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 그동안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떠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짚어보자.

    우리교육은 그동안 고성장 저령화 시대에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선진사회를 따라잡기 위한 인재를 양성 공급해 왔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추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베이비붐세대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물질적인 욕망을 심어주었다. 1970년 대 초반의 “소득 1000불, 마이카 시대”라는 슬로간은 이를 대변한다. 더욱이 따라잡기 고도 성장전략을 구사했으므로, “너도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can-do spirit와 성과주의를 금과옥조로 삼는 “빨리빨리” 정신을 심어주었다.

    물질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한 우리교육은 대학보내기 학벌주의, 암기력 위주의 성적지상주의, 수도원 같은 금욕주의 학교생활을 강제했다. 학부모들은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으로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으며, 학교에서는 성적이 높은 아이는 좋은 아이로 성적이 낮은 아이는 나쁜 아이로 취급했고, 수도원 같은 입시생활은 본질적으로 연기된 쾌락주의를 동력으로 삼았기에, 대학에서는 방향 없는 낭만주의가, 사회에서는 절제 없는 쾌락주의가 만연했다.

    전통윤리의 기반이었던 가정은 입시준비의 교두보로 전락하여 대부분의 미풍양속은 형식화되었다. 고성장사회의 물질주의는 정신적인 삶의 유형이 시야에서 사라지게 했으며, “나‘도’ 할 수 있다”는 can-do spirit는 남을 기준으로 나를 부추기는 시기심을 불러일으켰으며, 빨리 빨리의 성과주의는 행복이란 눈앞의 목표를 모두 이룬 뒤에나 누릴 수 있다는 사치로 여기게 하였다. 이리하여 행복은 외면적인 물질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정신생활에 있다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지혜는 저 멀리 추방되고 말았고, 우리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도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추락하고 말았다.
     
    우리는 저성장 고령화시대를 무리 없이 맞이하려면, 먼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물질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저생산 저소비의 문화주의가 사회주도권을 잡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현장에 문화지체현상이 만연되어 있고,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물질주의적인 교육관을 벗어나고자 우리는 일찍이 1995년에 5.31교육개혁안을 마련했으며 정권마다 교육개혁을 되풀이 하였다. 그러나 교육현장은 개혁만능주의 때문에 오히려 개혁피로증에 시달리고 있고, 따라잡기 시대의 후유증인 이념대립이 교육현장을 지배함으로써 후속세대들의

    공동체의식을 일깨울 국가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교육현장은 전반적으로 아직도 따라잡기 시대의 물질주의적인 교육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교육의 제도적 개혁에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교육계에 풍미한 문화지체현상의 본질을 파헤쳐서 해소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계의 문화지체현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저성장 고령화 사회, 나아가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일어날 제4차 산업혁명은 앞으로 일자리 부족이 만연한 세상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는 대학을 나와도 쉽사리 일자리를 잡을 수 없다. 이제 “대학을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따라잡기 물질주의 시대의 명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다가오는데도 우리의 교육계는 “대학보내기” 교육에 목숨을 걸고 있는 형국이다. 수많은 교육운동과 교육개혁에도 불구하고 교육문화는 왜 이렇게 지체되어 있는가? 아마도 우리의 교육계 또는 교육서비스의 소비자인 학부모들이 모두 “일자리가 줄어든다면 더욱 열심히 해서 더 좋은 학벌을 쌓아야 되지 않을까”하는 잠재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싶다. 이 의식이 바로 교육문화지체의 주범으로서 따라잡기 시대보다 더욱 경쟁적으로 성적과 학벌에 매달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베이비 붐 세대는 은퇴하는 시기에 들어와 성숙한 삶을 누리면서 물질주의 세계관에서 많이 벗어났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들은 물질주의적인 욕망에 충실했던 부모 밑에서 자랐고 아직도 혈기왕성한 장년들이기에 학부모로서 불안감과 조급함이 증폭되어 있는 듯싶다. 베이비 붐 후속세대의 불안감과 조급함이 바로 교육문화의 지체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본질적으로 학부모들의 불안감과 조급함은 대학진학률을 100%로 올려도 풀 수 없다. 대학진학률이 100%가 된다면 오히려 일자리 경쟁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대학의 문을 넓히는 쪽으로 해결책을 구했지만 오히려 교육문제만 더 키웠을 뿐이다. 그러기에 학부모들의 불안감과 조급함은 교육문화운동으로 풀 수밖에 없다.

    앞으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사회가 될수록 아이들을 단거리 선수로 키우지 말고 장거리 선수로 키워야 한다. 단거리 선수처럼 앞만 보고 서둘러 뛰다가 넘어지면 그 자리에서 경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저성장 고령화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장거리 선수처럼 멀리보고 자기 페이스대로 뛰다가 넘어져도 곧바로 일어나 용감하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앞으로 나가가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그러므로 교육이란 결국 자기 좋아하는 것을 하도록, 자기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옆에서 지켜보고 밀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모든 학부모들이 깨달아야 한다. 후속세대들에게 독립심 있는 자아를 키워주고 평생 동안 스스로 교육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해나갈 수 있는 인간으로 키워줘야 하지 않을까?

    교육문화의 지체현상을 해소하려면 학부모의 마음을 바꾸어내는 교육운동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 모두는 학부모들이다. 일선학교의 교사를 비롯한 교육계의 사람은 물론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학부모들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학부모로서의 마음을 돌려놓지 않는 한, 아무리 교육제도를 개혁해도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후속세대를 제대로 키워낼 수 없다. 학부모의 의식개혁운동을 선진화 교육운동의 첫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