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청와대에 李承晩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듯이 핵무장을 선언할 것이다.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듯이 NPT를 탈퇴할 것이다.
    그리곤 고자세로 나올 것이다.

    趙甲濟  
이런 일은 군인이나 관료나 외교관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가 이야가하였듯이 '전쟁은 군인에게 맡겨놓기엔
너무나 큰 일이다.'
이런 대전략은 李承晩 같은 위대한 정치인의 몫이다.

 1950년대 말에 벌써 핵무기 제조를 위한 기술을 키우려고
원자력청을 만들고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하였던 이다. 
 
10여년 전에 나온 유영익-이채진 편 [한국과 6.25전쟁](연세대학교 출판부)에 실린
 [李承晩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논문의 著者는 충남대학교 사학과 차상철 교수이다.
그는 李承晩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승만은 분명히 철저한 反蘇주의자요, 동시에 철저한 反日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맹목적인 親美주의자도 결코 아니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자신의 日記에 이승만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이 철저하게 비협조적이고, 나아가 반항적이기까지 한 사례를 담은 긴 목록을
여기서 열거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이는 지금까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은
동맹자였기 때문에 그를 가장 심한 말로 통렬히 비난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李承晩 대통령은 휴전협정을 서두는 미국을 북진통일과 작전지휘권 환수란 카드로 견제하면서 자신의 말이 공갈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1953년6월18일 유엔군이 관할중이던 반공포로 25000명을, 한국 헌병들을 시켜 석방했다. 휴전협정이 깨질 지경에 이르렀다.
휴전협상이 2년간 끈 가장 큰 이유는 반공포로를 강제송환할 것인가, 그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유엔군과 공산군의 異見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날 열린 미국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승만이란) 또 다른 敵을 만난 것 같다.'
   6월19일 주한 미국 대사 브릭스에게 한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후일의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살행위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미국은 한때 李承晩을 제거하는 계획도 세우지만 포기하고 달래는 전략으로 나온다.
한미상호방위 조약, 즉 한미동맹은 그런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과 북한 측의 반응이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을 빌미로 당연히 휴전협상을 깨야 하는데 참는다.
스탈린이 죽고 나서 소련 지도부는 휴전을 결정하였고, 미국의 폭격에 시달리던 중국군과 북한군도 휴전을 원하고 있었다. 
  
  • 85세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최초의 원자력연구소를 설립,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II 기공식에서 첫 삽을 들었다.(1959)
    ▲ 85세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최초의 원자력연구소를 설립,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II 기공식에서 첫 삽을 들었다.(1959)
  •    
    著者 차상철 교수는 이런 말로 논문을 끝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매개로 하여 미국은 남한에 대한 공산주의 세력의 침략위협을 봉쇄함과 동시에 이승만의 北進무력통일 의지도 단념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기대했으며
    반면에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그가 심각하게 우려해온 일본의 팽창주의적 야욕도 저지시키는 이중봉쇄의 효과를 지닌
    법적 장치를 확보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기를 기대했다.
    (중략). 이승만은 신생 독립국인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나아가 그것을 심는 데 성공했다.
    한국민은 그 '나무'의 그늘 덕을 아직까지 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그것은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의 생존이 걸린 정녕 포기할 수 없는
    생명줄이었다.>
      
       이 논문을 읽어보면 이승만이 미국의 멱살을 잡고 벌인 벼랑끝 전술에
    아이젠하워나 덜레스나 로브트슨 특사는 진저리를 쳤지만
    결국 그 뒤 한미동맹이 해낸 일들을 보면 미국의 3인방은 저승에서 李承晩의 억지와 위협이
    韓美 양국의 國益은 물론이고 자유진영, 나아가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란 감회가 생긴다.
      
       이런 李承晩이 지금 청와대에 있다면 北核 문제를 어떻게 요리할까?

       먼저 세계를 향하여 이렇게 경고할 것이다. 
       "한국은 교전중인 敵의 핵무장과 국제사회의 직무유기로 인하여 국가 생존의 위기를 맞았다.
        이런 책임은 유엔 안보리, 6자회담 당사국들, NPT 체제가 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5000만 국민의 운명을 외국이나 이미 실패한 제도에 맡겨놓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자살도 우리의 특권이다."
       
       1.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듯이 자위적 핵무장을 선언할 것이다. 
       2. 유엔군으로부터 국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한 것처럼
         "1년 내로 북핵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NPT를 탈퇴하겠다"고 예고할 것이다. 
       3. 공갈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하여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듯이,
          자위적 핵무장과 거국적 핵방어체제 건설, 그리고 NPT 탈퇴를 걸고 국민투표를 한다. 
       4. 압도적으로 가결되면 북한과 중국의 핵무기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국, 일본, 대만 등
          非核3개국협의체 구성을 제안한다. 
       5. 미국이 말리고 나오면 고자세로 요구한다. 
       -미국이 철수한 전술핵을 재배치하고, 한국과 공동으로 관리하자. 
       -한국 海域에 핵미사일 잠수함을 常時 배치하라.
       -선언적 핵우산은 믿을 수 없다. 핵우산, 즉 확장된 핵억제력의 행사 과정에
        한국이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자.
       -NATO 식의 韓美日 核共有 제도도 검토하자. 
       
      북진통일론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었듯이 핵무장론으로 당당하게 얻을 수 있는
    國益의 메뉴가 많다. 이런 대전략의 출발점은, 북한이 주도하고 중국이 밀어주는 한반도의 핵게임 규칙을 바꾸는 일이다. 한국과 미국이 끌려다니던 판을 깨는 것이다.

    이런 일은 군인이나 관료나 외교관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프랑스의 클레망소가 이야가하였듯이 '전쟁은 군인에게 맡겨놓기엔 너무나 큰 일이다.'
    이런 대전략은 李承晩 같은 위대한 정치인의 몫이다.
    1950년대 말에 벌써 핵무기 제조를 위한 기술을 키우려고 원자력청을 만들고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하였던 이다. 
       
       63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힘 없는 정부가 '자살도 우리의 특권'이라면서
    밀어붙였는데 세계 5대 공업국, 세계 6대 수출국인 한국이 못한다?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하나.
    벼랑에 선 국가와 국민이 할 수 없는 일은 없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