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라면 10·28 재보선 활용해 정국 흐름 바꿨을 것전병헌이 제시한 민생 프레임… 文, 떠먹여줘도 못 삼켜
  •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계기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정치력 부재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이렇다할 전략·전술도 없고, 적절한 정무 판단도 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선거와 핵심 이슈에서 동시에 패했기 때문에, 내년 4·13 총선을 이대로 맞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문재인 체제를 대신할 조기 선대위 발족이나 비대위 출범 요구가 더욱 불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확정고시가 발표됨에 따라 문재인 대표가 이번 정국에서 또 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4월 30일 4·29 재보선 영패 직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재인 대표.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확정고시가 발표됨에 따라 문재인 대표가 이번 정국에서 또 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지난 4월 30일 4·29 재보선 영패 직후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문재인 대표.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확정고시로 상황 종료… 문재인, 또 졌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3일 오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발표하며 국민의 이해를 당부했다. 교과서 국정화는 입법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행정고시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화된 것이다.

    귀국 항공권 값까지 전부 바카라 테이블에 올인하는 카지노 관광객마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투쟁에 매몰돼 있던 문재인 대표로서는 10·28 재·보궐선거도 지고, 교과서 싸움도 지고, 모든 것을 잃은 셈이다.

    한바탕 휘몰아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광풍이 끝난 뒤 문재인 대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0·28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추궁하며 대표 퇴진 촉구 성명을 준비하고 있는 당내 비주류 의원들과 3자 연석회의 테이블을 걷어치우고 창당추진위 발족을 서두르는 무소속 천정배 의원, 본질적인 혁신을 놓고 끝장토론을 낼 기세인 안철수 전 대표 등이다.

    ◆변곡점 10·28 재보선 '박지원이 필요했다'

    문재인 대표는 왜 교과서 정국에서 모든 것을 다 잃었나. 무엇이 문제였나. 그럴 수밖에 없었나. 만일 다른 사람이 대표였다면 어땠을까.

    2·8 전당대회에서 친노(親盧) 계파의 '여론조사 룰 해석 변경'에 밀려 분루를 삼켰던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당대표였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으로 보는 야권 관계자들이 적지 않았다.

    야권 관계자는 "박지원 의원이 대표라면 교과서 정국을 10·28 재보선에서 고정 지지층을 최대한 투표장으로 끌어내는데 활용했을 것"이라며 "지난해 7·30, 올해 4·29 등 재보선마다 연전연승해왔던 정부·여당이 10·28에서 크게 졌다면 교과서 국정화의 동력이 상실되지 않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관계자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빨간 불까지는 몰라도 노란 불은 들어왔을테고, 여당은 정부의 방침에 총대를 메고 나섰다가 선거를 망쳤다고 생각할테니 당청 갈등이 유발됐을 수도 있다"면서도 "현실은 오히려 선거를 크게 지면서 반대 투쟁의 동력을 잃은 건 우리"라고 혀를 찼다.

    실제로 박지원 전 대표는 10·28 재보선 당락의 윤곽이 드러난 지난달 29일 새벽,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정당은 선거를 위해 존재하고 선거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천명했다. '선거 승리'야말로 '정당의 지상 과제'이고 '최선의 투쟁 방식'이라는 실용주의적 태도는 박지원 전 대표의 지론으로 알려져 있다.

    문재인 대표처럼 서명 운동을 한다는 둥 버스 투어를 한다는 둥 장외를 돌아다니면서도 정작 선거와는 전혀 무관한 곳만 돌아다녔을 가능성은 없다는 지적이다. 박지원 전 대표는 지난달 29일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야당은 아무리 지방선거, 재보궐선거라고 하더라도 중앙당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며 "쥐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라도 호랑이가 큰 노력을 하는 법인데, 우리는 이번에 그러한 노력도 하지 않고 훌륭한 후보들에게만 맡겨놨다가 참패한 것에 대해 참으로 한심하게 생각한다"고 이를 꼬집었다.

  • 지난 2·8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당대표로 선출됐더라면 10·28 재보선의 결과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정국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 2·8 전대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지원 전 원내대표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지난 2·8 전당대회에서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당대표로 선출됐더라면 10·28 재보선의 결과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정국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 2·8 전대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지원 전 원내대표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문재인 "누가 이길 수 있겠느냐"고 했는데 뭘 이겼나

    박지원 전 대표가 2·8 전대에서 대표로 선출됐을 경우, 당권·대권 분리 상황이 된다는 점을 꼽은 야권 관계자도 있었다.

    이 관계자는 "당권·대권 분리 상황에서는 당내 대권 주자들이 우리 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10·28 재보선 지원 유세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보다 일사불란한 대오로 나섰을 것"이라며 "박지원 의원이 대표가 됐다면 4·29 재보선 완패와 '총기 난사' 혁신도 없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에 지금 우리 당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었을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송영길 전 인천광역시장은 10·28 재보선에서 광역의원 재선거가 치러진 인천광역시 서구2선거구에 네 차례 지원 유세를 나가 새정치연합 김종인 후보를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천 서구는 전남 함평과 함께 이번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이 승리를 거둔 두 곳 중 한 곳이다. 문재인 대표가 수도권 선거 현장에 단 한 차례도 지원 유세를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한 당내 비판이 높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관계자는 "당권·대권 분리가 돼 있었더라면 스타성 있는 당내 잠룡들이 선거 현장에 나가 10·28 재보선 결과를 뒤바꿔놓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문재인 대표는 2·8 전대에서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도대체 뭐 하나 이긴 것이 있느냐"고 쓴소리를 했다.

    ◆'실력으로 보수 압도하겠다'던 전병헌이었다면

    2·8 전당대회 당시 대표와 최고위원 사이에서 숙고하다 결국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린 전병헌 최고위원의 정무 감각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전병헌 최고위원은 교과서 정국이 막 불붙기 시작하던 지난달 14일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수능이 어려워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능 한국사의 평균 점수와 최고표준점수 등 객관적인 데이터를 자료로 제시하며 "여러 종의 검인정 교과서가 있을 경우 모든 교과서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만 문제를 내지만, 1종으로 국정화가 되면 지엽적인 부분까지 출제가 이뤄질 수 있어 난이도가 급상승하게 된다"고 밝혔다.

    나아가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화되면 수험생과 학부모의 고통이 가중될 것"이라며 "한국사 사교육 열풍이 부는 등 부작용까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전병헌 최고위원이 제시한 프레임은 정부·여당을 긴장시켰다. 2·8 전대 때 전병헌 최고위원이 내걸었던 슬로건 '실력으로 보수를 압도하라'는 그 말 그대로의 상황이 조성됐던 셈이다.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 공방은 무소속 박주선 의원이 지난달 29일 YTN라디오 〈출발 새아침〉에 출연해 밝힌대로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어렵고, 일자리 문제가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는" 이야기지만, 사교육비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가정경제에 부담이 온다는 것은 피부로 와닿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야권 관계자는 "백 마디 이념 논쟁보다 훨씬 파괴력이 강한 프레임"이라며 "자녀 교육열이 높은 고소득·전문직종은 대체로 저쪽 (새누리당) 당 지지자들인데 그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을 수 있다"고 평했다.

  • 당의 공조직인 최고위 내에 정무 판단이 밝은 인재들이 많은데도 문재인 대표가 거듭 헛발질을 하는 것에 대해 비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은 지난 9월 3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전병헌 최고위원(사진 왼쪽)과 주승용 최고위원.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당의 공조직인 최고위 내에 정무 판단이 밝은 인재들이 많은데도 문재인 대표가 거듭 헛발질을 하는 것에 대해 비선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진은 지난 9월 3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전병헌 최고위원(사진 왼쪽)과 주승용 최고위원.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떠먹여줘도 못 삼키는 문재인, 아직도 비선이…?

    하지만 문재인 대표는 전병헌 최고위원이 제시한 프레임을 외면하고, 시민단체 대표처럼 이념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스스로 지난 대선에서 패했던 51대49의 함정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제갈량처럼 싸움에서 이길 묘계(妙計)를 스스로 생각해내면 상책(上策)이지만, 유비처럼 무엇이 묘계인지 듣고 채택할 수만 있어도 중책(中策)은 간다. 그러나 문재인 대표는 민생경제 파이팅 이슈를 누가 옆에서 떠먹여주려고 해도 삼키지를 못한다는 점에서, 당대표로서는 하책(下策) 외에는 취할 줄 모르는 인물이라는 지적이다.

    새정치연합의 핵심 당직을 맡고 있는 의원은 이를 가리켜 "나는 최고위에 배석하기 전까지는 문재인 대표가 그렇게 고집이 센 사람인지는 미처 몰랐다"며 "누가 좋은 의견을 내더라도 애초 자기 생각과 다르면 절대 마음을 바꾸는 법이 없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지난 4·29 재보선도 그런 식으로 국회의원 선거구 네 곳 모두를 속절없이 지는 방향으로 흘러갔었다. 재보선을 마친 직후인 지난 5월 7일 전병헌 최고위원은 MBC라디오 〈시선집중〉에 출연해 "대선도 실패했던 정무적 판단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대표를 보이지 않게 보좌하고 있다면 당대표로서도 성공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며 "이런 것들이 만약에 남아 있다면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대표로서도 당을 공조직 중심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었다.

    전병헌 최고위원은 당시 "정무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고 하자가 있는 판단이 어디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찾아서 바로 잡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이와 같은 실수와 실패가 반복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며, 문재인 대표 주변의 정무 판단이 한심한 측근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교과서 정국과 10·28 재보선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거듭된 판단 착오를 보면 이것이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다.

    이와 관련, 또다른 야권 관계자는 "재보선에서 진 이튿날 박근혜 대통령을 상대로 '정말 마지막 기회를 준다'며 긴급 기자회견을 한 것은 정말 코메디 아니었느냐"며 "어느 정무 비선(秘線) 라인에서 짜낸 아이디어인지 궁금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관계자는 "좌해철 우영민(최측근으로 자주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해철·노영민 의원을 지칭)이든 누구든 진작 쳐내고 정무 감각이 밝은 사람이라면 비노(非盧)라도 가리지 말고 탕평(蕩平)했어야 했는데…"라고 개탄했다.

  • 지난 2·8 전대 과정에서 문재인 대표가 내건 누가 이길 수 있겠느냐는 슬로건은 이제 와서는 터무니 없다는 비판이 많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지난 2·8 전대 과정에서 문재인 대표가 내건 누가 이길 수 있겠느냐는 슬로건은 이제 와서는 터무니 없다는 비판이 많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세 가지 없고, 세 가지 모르는 문재인으로는 안 된다

    2·8 전대는 이미 흘러간 옛 이야기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당대표가 박지원 전 원내대표였더라면, 전병헌 최고위원이었더라면 하고 탄식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이야기이기는 하다. 그러나 많은 야권 관계자들이 밝힌 이야기로부터 유추하건데 극도의 정치력 부재를 드러낸 문재인 대표로부터 당심(黨心)이 떠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당내 여러 인사들과 대조해보니 전략도, 전술도, 정무 감각도 없고, 민생도, 민심도, 이기는 방법도 모르는 문재인 대표의 단점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 것이다.

    조기 선거대책위원회를 발족시키든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든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난파선의 선장 문재인 대표와 함께 모두가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는 위기감이 당 안팎에 감돌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하면 그 패배에 의미 부여를 하고 반성을 할 생각을 해야 한다"며 "'나는 책임이 없다'고 콧방귀를 뀌고 적당하게 넘어간다면 다음 총선에서도 또 적당하게 패배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박주선 의원도 "정당은 민심의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에 불과하다"며 "바닷속으로 침몰하는 새정치호에 대책없이 안주해 패배의 운명을 공동으로 맞이하는 자세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