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공천·단일화에 좌절 거듭… 20대에서는 주민 판단 받는다
  • ▲ 새정치민주연합 서울 은평을 고연호 위원장.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서울 은평을 고연호 위원장.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20대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여의도에선 이맘때면 공천권을 둔 교섭단체 내 물밑 작업으로 밤낮 분주하다. 재선을 원하는 현역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전 의원과 의원을 꿈꾸는 이들은 더욱 그렇다. 어렵사리 공천권을 따내도,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하는 본선은 보다 피를 말린다. 국회의원 되기란 그렇게 힘들다.

    그런데, 공천만 받는다면 본선은 오히려 '따 놓은 당상'이라고 자신하는 이가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서울 은평을 고연호 위원장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고 위원장은 벌써 정계 입문 11년 차다. 그는 지역 행사가 있을 때마다 초청 인사 0순위로 꼽힐 정도로 주민들 사이에선 높은 신망을 얻고 있다. 은평을에는 20대에 뿌리를 내렸으니 지역 연고도 깊어, 두터운 지지층도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지난 세월도 무색하게 이렇다할 직임이 없었던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고 위원장은 은평구청장과 총선에 도전했지만, 지역 본선에 나가보기도 전에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지역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고 위원장이 본선에 나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나를 외면한 건 주민이 아닌 당이었다"고 말한다. 〈뉴데일리〉는 지난 28일 고연호 위원장과 만나 그 애환을 듣고왔다.

     

    ◆ 가난한 가정 막내딸, 사업 번창 까지

     

    고연호 위원장의 선조 중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과 싸운 고경명 의병장이 있다. 일제 시대 때도 만주에서 활동하신 독립군도 있다.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데 힘썼다는 프라이드가 강한 집안이다.

    그러나 고 위원장은 "우리 집은 잔반(망한 양반집)"이라고 표현했다. 명성은 커녕 생활고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국민학교 3학년으로 학업을 마무리하고는 서울에서 도시 노동자의 길을 선택했다. 7남매 중 막내였던 고 위원장은 집안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먹고살기 힘든 형편에 대해선 사회적 환멸을 느꼈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대학을 졸업한 25살의 고 위원장은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액자 사업 8년, 이후 41살까지는 건축 크레인 사업을 했다. 액자 사업으로 은평에 100평의 땅을 샀으며, 크레인 사업은 크게 번창해 당시 업계 3위권에 들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사업에 성공했느냐고 하는데, 성공이라고 말하면 부담스럽다. 보통 중소기업에서 잘 나가는 정도였는데, 스스로 만족한 적은 없다. 무작정 부딪히고 열심을 다할 뿐이었다"

     

    ◆ 정계 입문은 잘 사는 사회 만들기 위해

     

    고연호 위원장은 아버지를 보면서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는 "어렸을 때 '그 잘난 양반이라며', '훌륭한 집안이라며 뭐 이래'라는 생각이 했다. 우리 아버지 같이 열심히 일 하면 막내 딸 등록금은 내줄 수 있어야 되는데 안되더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잘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 위원장은 학생 운동을 일삼던 '전형적인 386'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그는 "2004년에 열린 우리당 정동영 당대표 시절, 정치권에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정동영 대표가 경제를 주제로 선거를 치르자면서 '민생경제특별본부'를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경제 정책을 다뤘다. 당시 통신비 대폭인하와 아파트 분양가 공개 등의 제안을 했었다"

     

    ◆ 이재오 의원이 내 앞길 가로막아…

     

    고연호 위원장은 2004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2006년 은평구청장, 2008년 전국구의원, 2010년 7·28 재보궐, 2012년 19대 총선 등에 도전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자신의 좌절 뒤에는 당내 파벌 전쟁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2008년, 이명박 대통령에게 진 정동영 후보가 당시 손학규 대표에게 부탁해 나를 전구구로 추천했다. 하지만 손학규 대표는 정동영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잘랐다", "2010년 보궐선거에서도 당시 당대표가 자기 계보가 아니라면서 지역 인물인 나 대신, 외부 인물인 장상 후보를 밀어줬다", "2012년에는 야권 단일화로 천호선 후보가 나갔다"

    19대 총선에서 단일화 후보로 뽑히지 못한 고 위원장은 수면제 30알을 먹고 당에 저항하기도 했다. 자신이 지금껏 당한 전략공천과 단일화 피해에 대해 분통이 터진 이유였다. 그는 카메라 뒷면엔 지역의 모 중진 의원과 새누리당 이재오 의원(은평을)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고 위원장은 5선 의원인 이재오 의원이, 인접 지역구의 새정치연합 모 중진 의원과 서로 도우면서 자신이 본선에 나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말했다.

    "18대 때 유인촌 의원이 은평 갑에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알려주자, 그 의원이 '내가 정리해야지'라고 말하더라. 자신과 친한 이재오 의원한테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돕는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한나라당 당원들이 나에게 둘이 친하다는 것을 알려줬다",

    "이재오 의원이 은평을에서 나를 빼달라고 그 의원에게 부탁했을 것이다. 그는 정세균, 한명숙, 손학규, 문재인 대표 등 실세의 가장 최측근으로 붙어있는 사람이다"

    "2012년 단일화때도 천호선 후보가 당연히 떨어질 걸 알면서도, (이재오 의원의 당선을 위해) 나 대신 천 후보를 밀었던 당내 중진 의원이 있었다. 이런 게 우리 당의 큰 문제다. (수면제를 먹으면서까지) 이에 대해 항의하고 싶었다"

    고연호 위원장은 쓰러질 때마다 오뚜기 같이 일어나 다시 도전한다. 이번 20대 총선에서 당의 공천을 받고 주민들의 선택을 기다리겠다는 각오다. 그는 이번 공천에서는 전략공천이나 야권연대의 폐해를 막기위해 '오픈프라이머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 위원장은 국회에 입성한다면 지역발전을 위해 국토위에 들어가 일을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구상하고 있는 것이 많다며, 열변을 토했다.

     

     

  • ▲ 새정치민주연합 서울 은평을 고연호 위원장.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서울 은평을 고연호 위원장.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다음은 고연호 위원장과의 인터뷰 전문〉

     

    뉴데일리 : 어려서는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고 들었다. 일찍부터 사업에 뛰어들어 사업가로 성공했는데, 성공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고연호 : 사업 성공이 어디까지냐고 하는데, 보통 중소기업에서 잘 나가는 정도였다. 성공했다고 한다면 부담스럽다. 스스로 만족한 적은 없다. 25살부터 액자 프레임을 일본에 수출했다. 일본말을 해본 적도 없지만 무작정 일본으로 갔다. 그런데 첫 방문에 일거리를 주더라. 품질을 지켜주면서 가격은 상대방이 달라는 데로 줬다. 그 당시 일본이 잘 나가던 시기여서 엔화가 좋았다.

    1988년에 사업을 시작해서 94년까지 했는데 그 당시 은평구에 100평 정도 땅을 살 수 있었고, 현금도 있었다. 그런데 도와주던 사람이 망해서 부도를 내 위기를 맞았다. 회사를 그만둘 것인가를 생각하니 자존심이 상하더라. 젊은 날 열심히 했던 만큼 아쉬운 마음에 간판만이라도 놔둬야지 않을까 해서 1억을 대출받고 빈 땅에 건물을 지었다.

    이후 건설업계 타워 크레인을 시작했다. 고가 중장비다. 22년 전엔 그런 장비가 국내에 드물었다. 그 일을 10년간 했는데, 그 때도 무조건 부딪혔다. 현대나 삼성 등 본사를 찾아가서 우리 물건을 쓰라고 부탁 했다. 업계에서 크레인 보유 대수나 작업 수에서 3위안에 들정도로 키웠다. 그 시절엔 여자가 사업한 것이 드물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1997년엔 여성경제인협회를 맡기도 했다.

     

    뉴 : 여성사업가로 성공해서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수도 있었을텐데, 가시밭길이라는 원외 지역위원장을 맡아 정계에 뛰어들었다.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고 : 우리 부모님은 광주 양반의 전형적인 잔반 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고경명 할아버지는 당시 환갑의 나이에 곳간을 열고 의병들 군량미로 재산을 다 썼다. 자신과 큰 아들, 작은 아들, 작은아버지, 고모부, 이모부, 노비 등 다 데리고 가서 싸웠다.

    300년 후 일제가 또 오니까 우리 조상들이 또 일어났다. 만주에서 독립군 한 분도 있고, 창평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운 분도 있다. 우리 아버지는 그런 자부심이 강하다. 그렇지만, 집안은 망하고 혼잔데 뭘 할 수 있나, 서울에 오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노동자였다.

    나는 그 때부터 '그 잘난 양반이라며', '훌륭한 집안이라며 뭐 이래'라고 생각했다. 우리 아버지 같이 열심히 하면 막내 딸 등록금은 내줄 수 있어야 되는데 사회가 잘못된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내가 크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잘 살 수 있는 사회로 만드는일을 해야겟다고 다짐했다.

     

    뉴 :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졌나?

     

    고 :  학생 운동을 해서 김민석 우상호 이인영 의원 등을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사이였다. 전형적인 386이었으니까. 특히 노무현을 대통령만들었던 이광재, 안희정 의원 등은 친했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할 땐 정치보다는 사회변형운동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에 노무현 대통령이 보자고 하더라, 자신이 대통령을 할 거라고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당시 사업으로 바빠서 일요일밖에 시간이 없다고 했다. 이후 15년이 지나고 나는 열린우리당으로 들어갔고,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로 갔다.

    정동영 당대표 시절이었다. 정 대표가 '민생경제특별본부'를 만들고는 경제 프레임으로 선거를 가자고 했다. 그 때 정책들이 지금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나는 통신비를 대폭 인하하자고 했었고, 아파트 분양가도 공개하자고 제안했었다.

     

    뉴 : 제도권 도전에 고배를 많이 마셨는데, 어떤 일들이 있었나?

     

    고 : 2008년도에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니까, 아는 분이 무척 나라가 시끄러울테니 국회로 들어가 일하라고 하더라, 그 분이 정동영 대표에게 부탁하고, 정 대표가 다시 손학규 대표에게 부탁해서 전국구로 가려고 했었다. 정동영 대표는 정말 깨끗하고 멋지다. 내가 돈 한 푼 갖다준 것도 없고 조직에 기여한 것도 없는데, 인물만 보고 나를 도와줬다. 하지만 손학규 대표는 정동영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잘랐다. 그래서 문국현 의원이 된 거다.

    2010년 재보궐에서는 나와 이재오, 장상 후보가 지지율이 비슷했다. 그런데 그 때 또, 정세균 당대표가 자기 계보가 아니라면서 지역 인물인 나 대신, 외부 인물인 장상 후보를 밀었고, 나는 결국 떨어졌다. 우리 당의 고질적인 문제다. 욕심이 눈을 가리면 판단이 안되나 보다. 한명숙 대표도 정세균 대표에게 고연호가 했으면 됐을텐데라고 말할 정도였다.

    2012년 단일화로 떨어졌다. 당내 중진 의원과 은평을의 이재오 의원이 나를 막았다. 둘 다 운동권 출신이고 다선 의원이라 친한 사이로 안다. 18대 때 유인촌 의원이 은평갑 나온다고 한나라당이 결정했다. 이를 해당 의원에게 알려줬더니 '내가 정리해야지'라고 하더라, 그 일을 누구에게 부탁했겠나, 이재오 의원에게 했겠지. 한나라당 당원들이 나에게 두 의원이 친하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재오 의원은 은평을에서 나를 빼달라고 그 의원에게 부탁했을 거다. 그는 정세균, 한명숙, 손학규, 문재인 등 실세의 가장 최측근으로 붙어서 사는 사람이다. 이런 게 우리 당의 아픈 현실이다.

    은평구청장 때도 해당 중진 의원이 개입한 걸로 안다. 정세균 대표 당시 그 의원은 핵심 당직에 있었는데, 구청장 후보에 경선도 없이 시민공천배심원제를 했다. 알 수 없는 천 명을 모아놓고 후보를 찍은 거다. 당에서 천 명을 꾸려놨는데, 그 사람들은 당의 지시대로 뽑지 않겠나.

    2012년 야권 단일화 때도 은평을과 아무 연고도 없는 천호선 대표를 선택했다. 천 대표가 당연히 떨어질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런 것이다. 이재오 의원은 그 때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나갔으면 이재오 의원을 이겼을 것이다.

    나는 내년 총선에서 본선만 나갈 수 있다면 당선될 자신이 있다. 옛날에는 스펙이 좋거나 중앙정치에서 뜬 사람들이 선출됐지만, 지금은 지역 중심으로 바꼈다. 주민들은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을 원한다. 이재오 의원은 현재 주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상태다.

    전략공천이나 야권연대에서 희생당해보니 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론 오픈프라이머리가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야당도 이를 반대하는데, 양심이 있으면 그럴 수 있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국민 100%로 하기 힘들면 당원과 반반으로라도 해야한다.

     

    뉴 : 만약 20대 총선에서 선출되면 주안점을 두고 할 의정활동은 뭔가?

     

    고 :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 은평구는 재정자립도가 25개 구 중에서 24등이다. 현재 전국지자체 중에서 청렴도 꼴찌인 게 은평을의 현실이다. 내가 된다면 은평을이 더 깨끗해지고 잘 살게 하겠다. 돌아나가는 전철 단선도 뚫어서 교통을 편리하게 하는 등 지역 발전도 해야된다. 국회 의정활동으로는 800만 비정규직과 500만 자영업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생각이다.

     

    뉴 :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은?

     

    고 : 최근 '희망이야기'라는 책을 썼다. 다음달 15일에 나온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적었다. 많이 관심가져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현재 딸 아이 둘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다. 3살과 2살이다. 내가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