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옥 박사, 이승만포럼서 당시 전황 기초로 한 분석 결과 설명
  • ▲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55회 이승만포럼이, 16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55회 이승만포럼이, 16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 및 우리 군의 한강교 폭파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일부 친북 좌편향 역사학자와 언론의 비난에 대해, 당시 전황을 고려할 때 대통령의 전시피난과 한강교 폭파는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며, 특히 한강교 폭파는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결정적 판단이었다는 전문가의 반론이 나왔다.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고 뉴데일리와 대한민국사랑회가 후원하는 55회 이승만 포럼이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이날 포럼 발제자로 나선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좌파 진영의 비판을 전쟁사적 측면에서 조목조목 반박했다.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에 대한 좌파 진영의 원색적인 비판이 마치 정설처럼 굳어지면서, 이 부분이 아예 학문적 연구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전시피란'과 '한강교 폭파' 두 가지 문제를 '이승만의 무능과 부도덕성이 드러난 대표적 예'로 들면서, 끊임없이 비난을 가하고 있다.”

    두 가지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없이 많은 세월이 지나다보니, 이제는 이런 비난이 역사적 사실인양 굳어져 버렸고, 급기야는 이승만 대통령을 학생들을 버리고 도망간 '세월호 선장'에 빗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정옥 연구원은 위 두 가지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분석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어떤 상황에서 피란에 나섰는지, 한강교가 정말 조기에 폭파된 것이 맞는지, 그리고 그 결과 향후 전쟁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한강교 폭파의 실제 피해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등을 당시 전황을 기초로 분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남정옥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각료들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피란에 올랐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전쟁 초기 상황을 소개했다.

    북한은 전쟁의 승리 조건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남침을 강행했고, 서울의 북쪽 관문인 개성과 동두천이 전쟁 당일 함락됐다. 다음날 정오쯤 서울에서 불과 18km 떨어진 의정부가 적에게 점령돼 서울은 적의 야포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다.”

    북한전투기는 전쟁 당일부터 서울을 제집 드나들 듯 돌아다니며, 서울 주요 시설을 공격했다.”


    6.25전쟁 당시 수도 서울은 38선으로부터 불과 45km 떨어져 있었다. 이 거리는 최고시속이  55km에 달하는 북한의 T-34 전차로 1시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의정부의 함락은 대통령의 안전이 급박한 위험에 처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원수의 안위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전쟁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더 빨리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고 남 연구원은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났는데, 이때 대통령 옆에는 군도 경찰도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장한 군이나 경찰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경무대 비서와 경호원 몇 명만 대동한 채 북한군의 포위망을 간신히 벗어났다.

    남 연구원에 따르면, 전쟁 발발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곧 한강교 차단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북한군 전력의 3분의 2가 수도권에 투입됐다.

    그러나 북한은 작전 미숙으로 서울을 점령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써야만 했다.

    이와 관련된 남정옥 연구원의 발언.

    당시 남침을 저지른 북한군 수뇌부는 대부분 일제강점기 중국과 소련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독소전에 참가했던 위관급 장교였다.

    그런 이유에서 소련 군사고문단의 유능한 대령급 고급장교들이 작성해 준 남침계획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며 작전이 지체됐다.

    서울로 진입할 부대들에 대한 교통통제도 이뤄지지 않아, 서울로 향하는 좁은 도로에 병력과 차량이 몰리면서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북한은 애초 서울에 진입하면 한강교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서울 진입과정에서 김일성의 지시로 한강교가 아닌 한국정부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을 점거했다. 이 덕분에 우리 군은 한강교를 폭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생포작전을 계획하지 않은 것도 북한군의 ‘작전 실수’라는 것이 남 연구원의 평가다. 
     

  • ▲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6월25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과 함께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모습. ⓒ 국가기록원
    ▲ 이승만 대통령이 1951년 6월25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과 함께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의 사열을 받고 있는 모습. ⓒ 국가기록원


    남정옥 연구원은 이어 우리군의 한강교 폭파는 조기에 이뤄지지 않았고, 미군과 UN군 참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한강교 폭파에 대한 피해통계도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북한군 남침 당시 우리 군에게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소련제 T-34전차였다. 우리 군에는 이를 저지할 대전차 무기가 없었다.

    실제 북한은 242대에 달하는 전차를 앞세워 개전 2일차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과 한강 이남을 잇는 한강교를 선점해 우리군의 퇴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우리 병사들은 북한 전차를 육탄으로 막았다. 특공대를 조직해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에 뛰어 오르고, 대전차포나 박격포탄에 수류탄을 묶어 적 전차 밑으로 들어가 북한군 전차와 함께 산화하며, 북한군 전차를 저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북한군 전차는 너무 많았다. 북한에 전쟁 이틀 만에 서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전차의 압도적 위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 연구원은 바로 이점에서 우리 정부의 한강교 폭파는 정당했으며,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군사작전 상으로 늦은 결정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에 관한 남정옥 연구원의 설명.

    북한군 전차는 6월 28일 00시 30분에서 01시 사이에 서울시내에 진입했다.

    우리군은 이날 02시 30분쯤 한강교 상의 인도교를 비롯한 철교를 폭파했고, 광진교는 이보다 늦은 04시에 폭파했다.

    우리군 한강폭파는 북한군 전차가 서울시내에 진입한 걸 따지면 늦은 결정이었다.”


    남 연구원은 “한강교 폭발로 북한군은 전쟁 초기 귀중한 3일이란 시간을 서울시내에서 허비했다”며, 한강교를 조기 폭파했다는 일각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했다.
     

  • ▲ 6.25전쟁에서 피란하고 있는 국민들 모습.(자료사진)  ⓒ뉴데일리DB
    ▲ 6.25전쟁에서 피란하고 있는 국민들 모습.(자료사진) ⓒ뉴데일리DB


    한강교 폭파는 우리 군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첫째 한강교 폭파로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을 수 있었고, 둘째 미군과 UN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 군이 한강교 폭파에 실패했다면, 한강방어선 구축은 불가능했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다면, 유엔안보리의 참전 결의도 무위로 끝났을 것이다.

    우리 군의 한강교 폭파는 친북적 민중사관에 물든 좌편향 역사학자와 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결코 섣부른 결정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군사작선 상으로 보면 늦은 판단이었다.

    나아가 한강교 폭파가 없었다면, 북한군은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하기도 전에 남한 전역을 적화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이승만 대통령의 대표적 실정으로 한강표 폭파를 꼽는 좌파 역사학자와 언론의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선동이나 다름이 없다. 결론적으로 한강교 폭파는 대한민국을 구한 결정적 선택이었다.

    한강교 폭파에 따른 희생자 규모도 지나치게 부풀려졌다.

    남 연구원은 “한강교 폭파로 당시 교량을 건너던 500~800여 명과 40~50대 가량의 차량이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7만2천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한강교 폭파 이전 철수한 병력은 6월 30일 기준으로 2만4천명에 불과하고, 당시 전체 우리 군 병력이 9만6천명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7만2천명이 한강교 폭파로 희생됐다는 주장은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다.

    당시까지 우리 군 손실은 1만4천명 정도였다. 서울전선에 투입되지 않은 후방부대 인원, 미처 동원되지 않은 인력, 한강교 폭파 이전 이미 철수한 병력, 폭파 이후 부대 복귀 인력 등을 고려하면, 우리 군과 민간인 피해는 훨씬 적은 수준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마지막으로 남정옥 연구원은 이승만 대통령의 그후 정책을 소개하면서, 친북-반국가적 성향의 학자와 언론이 ‘이승만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초기 서울시민들을 빨리 피란시키지 못한 점을 회한으로 여겨, 1.4후퇴 이전 20여일에 걸쳐 군과 행정관서를 동원해 서울시민을 한강 이남으로 피란시키는 등 국민에게 아픔을 주는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무단히 애썼다.”

    맥아더, 리지웨이, 밴플리트, 테일러, 클라크 장군 등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명장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하나같이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지도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이승만을 여전히 폄훼하고 있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