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미국·프랑스는 지역구 뿐… 독일은 비례대표 때문에 나라 망해지역 구도 극복도 비례대표제와 무관… 영국·미국·독일도 지역별 몰표 현상
  • 8월 31일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정개특위)의 활동 시한이 만료된 데 이어, 9월 2~3일에는 정개특위의 여야 양당 간사가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의결 데드라인으로 설정한 교섭단체 대표연설이 진행된다. 대외적으로는 남북 문제와 주변 4강 관계가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방중을 계기로 긴박한 흐름을 탄 가운데, 국회에서는 내년 4월 13일에 치러질 총선 룰 관련 논의로 막판 진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은 8월 28일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정개특위 여당 간사인 정문헌 의원에게 "지역구를 늘리고 비례대표를 줄이는 방향으로 협상에 임하라"며 이례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내렸다. 반면 문재인 대표는 "국민의 뜻은 비례대표를 줄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맞서고 있다.

    비례대표 의원 수의 축소 여부를 놓고 여야 양당의 대표가 직접적으로 칼날을 맞댄 것이다. 정치권과 국민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비례대표 의원 정수 문제의 올바른 해결 방안은 무엇이며, 진정한 정치 혁신의 길은 어떠한 방향일까. 〈뉴데일리〉는 5회 연속 기획 연재를 통해 국내외 비례대표제의 운용 현황을 살펴보고, 올바른 정치 개혁과 혁신의 방향을 모색해 본다.

    [비례대표 정수 논란… 올바른 정치 혁신의 방향은]

    ① 문재인의 '국민'은 누구?… 여론은 "비례대표 줄여라"
    ② 문재인·안철수의 정치혁신론은 '오발탄'
    ③ 비례대표에 고사 위기 처한 농어촌 지역대표성
    ④ 해외 사례는… "선진 민주국가는 비례대표 없어"
    ⑤ 올바른 정치 혁신의 방향은 비례대표 축소


  •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3일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통해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3일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을 통해 권역별 비례대표제의 도입을 주장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역대표성이 위협받고 있는데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비례대표를 현원(54석) 유지하거나 되레 늘리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표를 방지하자거나 지역 감정을 극복하자는 등 명분도 갖가지다. 의회민주주의의 발상지 영국, 그리고 시민혁명을 통해 근대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미국·프랑스 등 선진 민주주의 국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영국… 비례대표 없고 지역구 상하한도 4대1 수준

    1066년 정복왕 윌리엄 1세 이후 귀족·성직자가 참여하는 대평의회(The Great Council)와 1265년 시몽 드 몽포르에 의한 기사·시민 계급까지 참여하는 의회를 통해 수백 년간의 양원제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발전시켜 온 영국에는 지금도 비례대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650명으로 구성되는 하원이 모두 지역구 소선거구제에 의해 선출되고 있다.

    선거구 인구 상하한 편차 조정 문제의 원조(元祖) 또한 영국이다. 워낙 옛날부터 의회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선거구를 획정해 왔는데, 근세 이후 인클로저 운동과 산업 혁명 등을 거치며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 세계 최초로 나타나자 논란이 생긴 것이다.

    1831년 4월 총선에서는 전체 406석 중 총 유권자 100명 이하의 지역구가 152석이 있었으며 심지어 유권자 50명 이하의 지역구도 88석에 달했다. 최소 지역구에서는 7명의 유권자가 의원 1석을 선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은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중세 이래로 내려오던 여러 선거구를 통폐합하고 인구비례에 따른 선거구 획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양차대전을 거치며 영국의 제조업이 몰락하자, 금융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번성하는 런던과 기타 농어촌 및 지방 공단 지역의 격차가 나날이 심각해졌다.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한국특파원은 올해 3월 7일 중앙일보 기고문에서 "런던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은 부티 나는 거리를 봤겠지만, 내 고향은 쇠퇴 일로이고 가게의 반에 방범용 쇠창살이 꽂혀 있다"며 "다른 나라 같은 런던과 지방 사이를 오갈 때 '여권을 챙겨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고 밝혔다.

    이처럼 서로 다른 나라 같이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도농(都農) 간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인구비례에 따른 선거구 획정을 가장 먼저 시작했음에도, 지금까지 국회의원 선거구 간의 인구 상하한 편차를 3.9대1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물론 이는 비례대표 없이 하원의 모든 의석을 지역구로 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 사표 방지와 표의 등가성, 투표의 비례성 보장을 위해 봉쇄조항 없는 순수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 때문에 멸망했다. 사진은 1932년 총선거에서 정당 투표를 호소하고 있는 선거운동원들. 기호 2번이 나치당, 기호 4번이 중앙당, 기호 1번이 사민당이다. ⓒ위키백과
    ▲ 사표 방지와 표의 등가성, 투표의 비례성 보장을 위해 봉쇄조항 없는 순수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 때문에 멸망했다. 사진은 1932년 총선거에서 정당 투표를 호소하고 있는 선거운동원들. 기호 2번이 나치당, 기호 4번이 중앙당, 기호 1번이 사민당이다. ⓒ위키백과


    ◆미국·프랑스도 비례대표 없이 전 의석 지역구 선출

    미국 역시 상원 100석과 하원 435석 모두가 지역구에서 선출된다. 대혁명을 통해 근대민주주의의 서막을 열었던 프랑스도 상원 348석과 하원 577석 모두를 지역구에서 선출하고 있으며, 비례대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비례대표를 확대하는 것이 정치 혁신인 양 주장하며 국민을 호도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알려주는 사례다. 비례대표를 줄이는 것이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정치의 퇴행이라면, 수백 년간 비례대표 없이 의회제를 운영해 온 영국·미국·프랑스는 정치가 퇴행하다 못해 민주주의가 붕괴됐겠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독일과 일본에는 비례대표제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는 영국·미국·프랑스에 비해 후발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영국이 1688년 명예 혁명과 1714년 하노버 왕조의 성립으로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했고, 미국은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부터 민주공화정으로 운영됐으며,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를 폐위한 1871년부터 공화국 전통을 이어갔다. 이들 선진민주주의 국가에는 비례대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독일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도 군주가 실질적인 통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비스마르크 헌법에 따르면 재상은 의회로부터 독립된 존재로 군주에 대해서만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일본은 1945년 패전할 때까지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없었다. 비례대표제는 이러한 후발 민주주의 국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따르는 것이 정치 혁신의 길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순수비례대표제 시행했던 독일, 나라 망해

    게다가 독일은 비례대표제 때문에 나라가 망한 적도 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인 1919년 바이마르 헌법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봉쇄조항이 없는 순수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 이론상으로 보면, 사표가 전혀 발생하지 않고 유권자의 표의 등가성이 가장 보장받는 제도이다.

    중도좌파 정당인 사민당, 중도우파 정당인 기독교중앙당, 중도 정당인 민주당의 3당이 의석의 85%를 차지한 상황에서 연립을 시도하던 초창기에는 헌정이 원활히 운영됐으나, 제도의 특성상 곧 극좌·극우 세력들이 원내에 진입하면서 헌정은 혼란에 빠졌다. 1930년 총선에서는 나치당과 공산당의 의석 비율이 31%에 달해 합리적인 내각 구성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결국 비례대표제가 독일의 민주적인 헌정을 무너뜨리고 나치 독재로 가는 길을 연 셈이다. 이후 독일 국민은 나라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화에 휩싸이고 패망하면서 엄청난 재앙을 맞이했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망국적인 지역 감정과 지역 구도를 극복하자면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망국적인 지역 감정과 지역 구도를 극복하자면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지역 구도, 영국·미국·독일에도 다 존재

    정치권 일각에서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통해 망국적인 지역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그러한 주장의 선봉에 서 있다.

    하지만 지역 감정은 선거 제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문화적 유래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이해 관계에 따른 감정이 선거로 표출되는 것이다. 즉, 지역 감정의 결과가 선거로 나타나는 것이지, 선거의 결과로 지역 감정의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무시하고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지역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지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이라는 지적이다.

    영국은 런던·맨체스터·리버풀·버밍엄·글래스고 등 5대 도시와 웨일스·스코틀랜드 등 비(非)잉글랜드 지방이 노동당의 텃밭이고, 그 외 지방은 보수당의 텃밭인 상황이 100여 년째 계속되고 있다. 보수당·노동당 양대 정당도 모든 선거구에 입후보자를 내지 못할 정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망국적(?)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논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국도 지역에 따라 양대 정당을 향한 몰표 현상이 뚜렷하다. 특히 공화당의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을 이끌며 1865년 남부맹방을 무너뜨린 이래로 남부는 민주당 텃밭, 북동부는 공화당 텃밭이라는 구도가 백 년 가까이 계속됐다. 딕시크랫(Dixiecrat)이라고 불리는 보수 성향의 남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따뜻한 남부 사나이' 린든 존슨(텍사스주 출신)과 지미 카터(조지아주 출신) 등에게 몰표를 던져 민주당 대통령을 당선시키던 때가 이 때였다.

    하지만 텍사스주 상원의원 출신인 린든 존슨이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라는 기치 하에 민권 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면서 남부 민심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당시 공화당을 이끌던 배리 골드워터는 이 틈을 파고 들어 1964년 대통령 선거부터 '남부 공략'에 나섰다.

    이 전략이 성공하면서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H W 부시로 이어지는 12년 공화당 천하가 도래했지만, 그 결과 양당의 텃밭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면서 지금은 남부가 공화당에 몰표를 던지는 대신 북동부는 민주당에게 몰표를 던지는 것으로 변모돼 버렸다. 아무튼 '몰표' 현상 자체만은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도 역시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 논의는 없다.

  • 미국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의 모습. 존슨 대통령이 민권 운동을 지지하며 남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생각과 엇나가기 시작하자, 골드워터는 강력한 보수주의 정책을 통해 남부 공략에 나섰는데, 훗날 공화당과 민주당의 텃밭이 완전히 뒤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위키백과
    ▲ 미국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대통령 후보와 민주당의 린든 존슨 대통령의 모습. 존슨 대통령이 민권 운동을 지지하며 남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생각과 엇나가기 시작하자, 골드워터는 강력한 보수주의 정책을 통해 남부 공략에 나섰는데, 훗날 공화당과 민주당의 텃밭이 완전히 뒤바뀌는 결과를 낳았다. ⓒ위키백과

    ◆특정 지역 몰표는 정당민주주의에 따른 당연한 결과

    특정 지역에서 특정 정당에서 몰표가 나오는 것을 망국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면, 세계 그 어떤 나라도 망국을 면할 방법이 없다. 의회민주주의를 시행하고 있는 그 어떤 나라도 모든 지역이 스윙 스테이트(Swing State)인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나라가 있다면, 그 자체로 정당민주주의가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특정 지역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특정 정책에 대한 호불호를 공유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며, 이러한 성향을 대변하는 정당을 향해 몰표를 던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대표적인 예로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 디트로이트가 소재한 미시간 주(州)가 있다. 미시간주는 1854년 공화당이 창당된 곳이지만, 지금은 민주당의 텃밭으로 바뀌어 버렸다.

    미국이 자동차를 한창 전 세계로 수출할 때야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공화당을 찍었지만, 전 세계 자동차 메이커가 미국 시장을 노리고 달려들고 내수 시장 방어에 급급한 현 상황에서는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민주당으로 돌아서는 게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포함한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특정 정당에 몰표를 주는 유권자들의 심리를 바꿔놓을 수는 없다.

    이는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독일도 마찬가지다. 양대 정당인 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은 각각 중부 독일과 북부 독일이라는 텃밭이 따로 있다. 게다가 바이에른 주만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지역 정당인 기독교사회당이 존재하고, 동부 지역에서만 맹위를 떨치는 구 민주사회당도 존재했다.

    사민당의 아성인 북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서는 39년 동안 사민당이 승승장구했고, 기민당의 아성인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는 2차대전 종전 이후로 한 번도 기민당이 선거에서 진 적이 없다가 58년 만에야 이 기록이 깨질 정도다.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지역 감정, 그리고 지역에 따른 몰표는 상호 간에 전혀 무관한 사안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장하는 일부 정치학자와 헌법학자들도 이 제도가 사표 방지와 표의 등가성, 투표 결과의 비례성 보장에 도움이 되는 제도라는 주장은 하지만, 지역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