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용 성교육 자료' 논란, 남녀갈등 해소의 계기로 삼아야"

  • 1976년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과 결혼함으로써 ‘현실 속의 신데렐라’로 주목받았으나 1998년 이혼한 가수 배인순씨는 오래 전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다룬 시사프로그램에서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내가 금덩어리를 얻을 때는 다른 무엇을 꼭 잃는다”고 역설해 화제가 됐다.

    굳이 ‘백마 탄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보기 드문 상황을 상정하지 않아도, 또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구호를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그녀의 발언은 인간성의 현실을 직시한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남녀관계는 ‘상호관계’

    2015년 3월, 교육부가 제작해 일선 학교에 배포한 〈교사용 성교육 자료〉가 최근 구설수에 올랐다.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은 “남성은 돈, 여성은 몸이라는 공식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데이트비용을 많이 사용하게 되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여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원하게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원치 않는 데이트 성폭력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부분이었다.

    최근 크고 작은 성폭력이 사회문제가 된 상황에서 데이트 성폭력을 데이트비용과 결부시킨 교육부의 주장을 놓고 네티즌들은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한겨레』, 215.8.12, 「여자가 데이트 비용 안내 성폭력? …황당한 교육부」).

    물론 더 많은 데이트비용을 지불했다 해서 데이트 성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하지만 전통적 남녀관계가 남성의 성욕과 여성의 물욕을 매개로 맺어졌다는 교육부의 주장은 역사적으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비단 성욕과 물욕에만 국한시키지 않은 채 좀 더 넓게 보면, 전통적 남녀관계에서 매개가 되는 것은 ‘보호’와 ‘복종’이다. 즉 더 강고한 육체를 가진 남성이 외부의 위협에 맞서 여성의 생활과 안전을 보장하고, 여성은 그 대가로 남성을 내조하며 순종과 순애를 바치는 것은 전통적 남녀관계의 기본적 틀로 존재했다.

    남성도 여성도 ‘보답’을 바란다

    그렇다면 교육부의 주장을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교육부의 주장은 마냥 황당하기만 할까? 우리 결혼문화를 ‘남고여저(男高女低)’라는 단어로 정의한 결혼문화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오늘날에도 경제력 유무에 관계없이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데이트비용은 물론, 더 많은 결혼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받는다.

    많은 여성들은 이를 부담 못하는 약한 남성과 관계를 맺기를 꺼려하며, 고(故) 정채기 교수 등 여러 젠더연구자들의 지적처럼 이런 현상은 남성 개개인의 능력 수준 및 적성과 무관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남성이기에 요구받는 이런 부담에 대해 남성이 여성에게 ‘보답’을 바라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와 같은 맥락에서, 가사노동이라는 여성의 수고에 대해 남성이 ‘보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때 여성이 느끼는 모멸감에 대해서도 필자는 공감한다. 남녀관계에서 둘 중 어느 쪽도 상대에게 일방적인 부담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남녀를 막론한 모든 인간은 욕망과 이기심을 가진 존재이기에, 남녀관계에서 공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학도인 필자가 몇 달 전 한 계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지적했듯이 남녀의 위상에 차이가 있었을 뿐, 역사적으로 거의 모든 남녀관계는 기본적으로 상호적 성격을 띠었다(한지환, 「한국사회 성(性)해방의 미래」, 『계간 시대정신』 2015년 봄호, 199-215쪽). 그리고 그 내용은 바뀔지라도,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상호성의 원칙은 앞으로도 남녀관계의 기본원리가 될 수밖에 없다.

    남녀는 상대의 부담이나 수고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는 것이 옳다. 물론 그 대가가 무분별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데이트비용 및 결혼비용에서 가사노동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주고받는 어떤 것도 장기적으로 볼 때 공짜일 수 없으며 또 공짜여서도 안 된다.

    ‘상호성의 원칙’ 되새기는 계기로 삼아야


    과거 페미니즘은 남성의 보호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 것을 여성에게 촉구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보호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남성들로부터 터져 나왔고, 반대로 남성의 보호에서 벗어나자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더 이상 남성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일베저장소(일베)’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보호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남성들이 보여준 과격함에 대한 반감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오늘날 남성들은 자신들이 요구받는 전통적 책임에 대해 강하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으며, 이에 대해 여성들도 감정적으로 응수하면서 소모적인 남녀갈등이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교사용 성교육 자료〉를 둘러싼 이번 논란도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편견 없는 시각에서 바라보면, 더 많은 데이트비용을 지불했다고 데이트 성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교육부의 진의가 아님은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논란이 불거진 직후 교육부가 홈페이지에 게재한 설명 자료를 보면 교육부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http://www.moe.go.kr/web/100027/ko/board/view.do?bbsId=295&boardSeq=60280&mode=view, 검색일: 2015.8.20).

    즉 남녀가 동등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게만 과중한 책임을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남녀관계에서 상호성의 원칙이 무시될 경우 자칫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교육부가 전하려는 핵심이다.

    경제력과 이에 따른 책임은 남녀관계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며, 불균등한 책임 분담은 데이트 성폭력이 벌어질 상황에서 성적(性的)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교육부의 주장은 인간성의 현실을 고려할 때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필자는 이번 논란을 전화위복으로 삼았으면 한다. 남녀 모두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원칙, 즉 남녀 모두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욕망과 이기심을 가지며, 따라서 자기 몫을 존중받기 위해서는 상대의 몫도 함께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자명한 원칙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번 논란이 한낱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소모적인 남녀갈등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 Pixabay 제공]

    저자 한지환 (韓志煥) = 1984년 생 / 숭실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졸업 / 숭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 / 〈한국남성학연구회〉회원 / 『동서문학』 청소년문학상 독서평론 부문 수상 / 『페미니즘에 대한 남성학과 남성운동』 (도서출판 원미사, 2007) 공동저자 / 『중세 유럽의 사상가들』 (숭실대학교출판부, 2014) 공동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