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군-국민 학살 중공군 열병식에 朴대통령 참석? 메르켈처럼 묘수 찾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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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6.25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얼어죽은 美해병들. 美해병들이 이렇게 희생된 것은 中공산당이 김일성을 도와 30만 명을 파병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60주년 블로그 캡쳐
    ▲ 6.25전쟁 중 장진호 전투에서 얼어죽은 美해병들. 美해병들이 이렇게 희생된 것은 中공산당이 김일성을 도와 30만 명을 파병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60주년 블로그 캡쳐

     

    #. 꽹과리와 나팔 불어대며 대공세


    중공군의 먹잇감

    치욕의 대패(大敗)


    지리에 밝아 중공군에게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 정도의 역할, 아군의 역량이 부족한 곳에 배치돼 다소 가벼운 전투를 수행하는 정도의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다. 아울러 아군의 후방으로 침투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제2선 부대로써 중공군을 돕는 임무도 수행했다.

    중공군은 가능한 한 모든 전선에서 전투력이 크게 떨어지는 국군 사단을 향해 공격을 벌였다. 그들로서는 강력한 화력의 미군을 우회하면서 전선을 돌파하고자 했던, 나름대로 적절한 선택이었다. 따라서 중공군은 참전 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국군에게 총을 겨누고 덤벼들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체가 1950년 10월 말 이후의 북진 공세에서 은밀하게 참전했던 중공군에게 모두 쓰라린 패배를 당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일어설 역량이 있었다. 특히 미군은 중공군 참전 초반의 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으나 그를 극복할 만한 전투 경험, 조직력, 군기(軍紀)를 갖추고 있었다. 더구나 막강한 화력과 함께 상대가 전혀 갖추지 못했던 공습(空襲)능력이 있었다. (중략)

    중공군은 참전 뒤 늘 같은 양상을 보였다. 국군 전면에 몰려들었고, 부대와 부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을 집중적으로 노렸다.

    틈이 뚫려 그곳으로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밀어닥친다면 부대는 위험에 휩싸인다. 더구나 불과 몇 달 전에 중공군에게 포위와 매복을 당해 참혹한 패배를 경험했던 8사단이었다. 따라서 8사단은 또 한 번의 참패에 놓이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불과 반나절 만에 모든 통신선이 끊기고, 후방까지 중공군에게 포위된 상황을 맞았다. 그는 결국 중공군과 접전이 벌어진 뒤 14시간 만에 군단에서 지원한 L-19기를 이용해 '철수 명령서'를 잔뜩 자루에 넣어 연대 지휘소가 있는 곳을 향해 공중에서 투하했다고 한다. 통신선이 끊겨 부대 간 연락이 모두 불가능한 상황에서 취했던 응급조치였다.

    사단의 피해는 혹심했다. 10연대장과 부연대장, 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을 포함한 장교 323명이 실종 또는 사망했다. 사병의 실종 또는 사망자는 7,142명에 달했다. 잔여 병력은 장교 263명, 사병 3,000여 명이었다. 생존자는 절반 이상이 사단 근무요원이었다.

    이 정도면 와해(瓦解)와 해체(解體)의 수준이라고 볼 수 있었다. 후방에 남아 있던 사단 근무요원은 겨우 후방 미군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빠져나온 정도였고, 나머지 전선의 3개 연대 장병 대부분은 결국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1.4 후퇴로 서울을 내주고 북위 37도선까지 밀렸다가 겨우 전열을 수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아군, 특히 국군의 같은 일원으로서는 당시 8사단의 횡성 대패가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리지웨이 부임 뒤 벌어졌던 '울프하운드' '썬더볼트' 작전의 승리가 빛을 크게 바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점이 한 가지 있었다. 중공군 대규모 병력이 달려들었던 지평리에서 미 2사단 23연대장 폴 프리만 대령과 프랑스 대대가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중공군 4차 공세가 그로써 일단 꺾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국군은 쉽게 물러섰지만 미군과 프랑스 군대는 끝내 물러서지 않고 중공군 정면을 강타했다.

     - 조선일보: 백선엽의 6.25 징비록(135)

     

  • ▲ 1951년 5월 16일 사전 포격과 함께 중공군은 소양강을 넘어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공격했다. 소양강을 건너는 당시 중공군 병력으로 추정되는 사진. ⓒ조선일보 DB
    ▲ 1951년 5월 16일 사전 포격과 함께 중공군은 소양강을 넘어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공격했다. 소양강을 건너는 당시 중공군 병력으로 추정되는 사진. ⓒ조선일보 DB

    잊지 못할 아픔과 상처다. 고작 반세기가 조금 지났을 뿐이다.

    일본 뿐만이 아니다. 뼈아픈 과거사를 되새겨보면 얄미운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일부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이 일본을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로 여기듯, 6.25 전쟁 참전용사 중 많은이들이 중국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자신의 동료가 눈 앞에서 중공군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바라봐야 하는 고통을 지금도 가슴 속 깊은 곳에 새겨두고 있는 이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다음달 3일 중국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제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 열병식 참석을 검토하고 있어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찬반 여론이 엇갈리자 청와대는 "제반사항 고려해 박근혜 대통령의 행사 참석을 신중하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참석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이번 열병식에서 전쟁 당시 중국군의 공헌을 부각시키고 전후(戰後) 핵심 강국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과시하는 무대로 활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중국 공산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렇다 할 공헌을 한 일이 없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다르다. 중국 공산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아니었다. 일제가 패망할 당시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주체는 중국 공산당이 아니라, 지금의 대만으로 불리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중화민국 정부였다.

    또한 당시 김구의 임시정부도 장제스 정부로부터 지원과 보호를 받았었다. 다시 말해 항일전쟁을 실제로 수행하고 우리 임시정부를 도운 것은 중국 공산당이 아닌, 대만(Taiwan)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공산당은 6.25 전쟁 때 우리 국군과 유엔(UN) 연합군을 학살한 주체였다.

    북한 김일성이 패망하기 직전, 중국 공산군은 유엔(UN)의 결의를 무시하고 압록강을 넘어와 대한민국을 공격했다. 중국 공산군이 북한을 돕지 않았다면 남북(南北) 분단의 아픔을 겪을 일도 없었다. 

     

  • ▲ 대한민국을 낳은 1943년 카이로회담.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국방최고위원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왼쪽부터) ⓒ조선일보 DB
    ▲ 대한민국을 낳은 1943년 카이로회담.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참석한 장제스 국방최고위원장,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왼쪽부터) ⓒ조선일보 DB

     

    심지어 중국 측은 대한민국을 공격한 데 대해 사과 한마디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위대한 전쟁이자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뺨치는 망언이다.

    무엇보다 명분이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서방 주요국 정상들은 대부분 불참을 기정사실화 했다. 아베 총리도 행사 참석을 거절해 한-중-일(韓中日) 3국 정상회담도 무산된 상황이다.

    중국과 각을 세우고 있는 미-일(美日) 정상이 나란히 행사에 불참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만 홀로 열병식에 참석한다면 향후 한-미 관계와 한-일 관계에 적잖은 부담이 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고조되고 있는 반일(反日) 무드에 편승, 중국 열병식에 참석하는 것은 역사의 실책(失策)으로 남을 일이다. 우리가 6.25 전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퇴색시킨다. 뜨거운 애국심으로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은 호국선열을 무시하는 처사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조선일보 DB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조선일보 DB

    다만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적 실익을 위해 부득불(不得不) 중국 전승절에 참석해야 한다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Angela Merkel)의 지난 5월 행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메르켈 총리도 지난 5월 9일 러시아가 개최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식을 앞두고 비슷한 고민을 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메르켈 총리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묘수를 뒀다. 전승 퍼레이드가 열린 '다음날' 모스크바를 방문해 무명용사 묘에 헌화하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것이다.

    '전승 퍼레이드 참석'의 부담을 내려놓으면서, 시기를 조율해 푸틴 대통령과 만났으니.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원죄에 매인 독일 수장으로서는 할 일을 다 한 셈이다. 아울러 메르켈 총리는 이번에도 중국 전승절 무렵 방중하지만 열병식에는 참석하지 않을 계획으로 알려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결단이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한-중 FTA(자유무역협정)를 시작으로 중국과 굵직한 경제협력을 이뤄내야 한다는 부담에 장고(長考)가 거듭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은 메르켈 총리처럼 전승절에는 참석하되 열병식(閱兵式)을 피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상해 임시정부 재개관식이 열릴 예정이니,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상해에 들렀다가 열병식이 끝난 후 베이징으로 향하는 방법 등 여러가지 방법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국군과 유엔 연합군을 학살한 중국 공산당 열병식에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해 박수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이념(理念)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유일한 국가로, 혼재된 생각들을 바로잡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