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옥 박사,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 의혹 정면 반박
  • ▲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고 뉴데일리와 대한민국사랑회가 후원한 이날 포험에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6.25전야, 대북첩보와 군사대비는 어떻게 진행되었나?'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6.25 발발 이전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대북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있었고, 특히 우리 군은 취합한 대북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발생에 대비한 자체 방어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고 뉴데일리와 대한민국사랑회가 후원한 이날 포험에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6.25전야, 대북첩보와 군사대비는 어떻게 진행되었나?'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6.25 발발 이전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대북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있었고, 특히 우리 군은 취합한 대북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발생에 대비한 자체 방어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관련돼, 이승만 정부가 북한군의 도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허술한 대응으로 우리 군과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을 초래했다는 기존 학계의 견해를 정면 반박하는 전문가의 반론이 나왔다.

    이런 주장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린 53회 이승만포럼에서 나왔다.

    (사)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하고 뉴데일리와 대한민국사랑회가 후원한 이날 포험에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6.25전야, 대북첩보와 군사대비는 어떻게 진행되었나?'라는 주제의 강연을 통해, 6.25 발발 이전 이승만 정부는 북한의 남침에 대비해 대북정보를 수집 분석하고 있었고, 특히 우리 군은 취합한 대북정보를 바탕으로 전쟁 발생에 대비한 자체 방어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남정옥 책임연구원의 분석은, 6.25 초기 이승만 정부가 부실한 대응과 전략 전술의 부재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군과 민간인의 희생을 키웠다는 일반화된 견해를 뒤집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점에서, 그 파장이 적지 않을 전망이다.

  •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국내 학계는 지금도 전쟁 이전 우리 정부와 군이 전쟁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기습남침을 당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면서, 이런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 의혹을 항목별로 반박했다.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주장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는, 6.25와 관련돼, 주로 좌파 성향의 역사학자들이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는데 있어 단골 메뉴처럼 쓰였다.

    특히 이 주장을 한 사람이 대한민국 ‘군번 1번’ 보유자로, 우리 군의 대표적 원로 가운데 한 명인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점 때문에,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는 마치 정설처럼 받아들여졌다.

    6.25 전쟁 중 ‘군번 1번’을 부여받은 이형근 장군은 1954년 백선엽, 정일권 장군과 함께 대장계급장을 단 우리 군의 초대 원로 가운데 한 명이다.

    이형근 장군은 이후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본부의장을 지냈으며, 나중에 ‘군번1번의 외길인생 : 이형근 회고록’이란 책자를 발간했다.

  • ▲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 ⓒ KBS 화면 캡처
    ▲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 ⓒ KBS 화면 캡처

    문제는 이형근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라는 의혹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이형근 장군은 이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과 우리 군이 6.25 발발 직전까지 북한군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아무런 대응계획도 수립하지 않고 있다가 기습남침을 당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6.25 전쟁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의 무능을 강하게 시사하는 이 의혹이, 군의 대표적 원로를 통해 제기됐다는 점에서, 이형근 장군의 주장은 이승만 대통령을 비하하는 세력에게 더 없이 좋은 재료가 됐다.

    그러나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 내용을 항목별로 분석해, 이형근 장군 주장의 맹점을 반박했다.

    이형근 장군이 주장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군 남침 징후를 무시·묵살했다.
    ▲6.25전쟁 직전, 각급 주요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이동을 이뤄졌다.
    ▲전쟁 직전 전·후방 부대가 대대적인 교대·이동을 단행했다.
    ▲6월 23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장병들의 휴가와 외출·외박을 실시했다.
    ▲6월 24일 밤, 육군 장교클럽 개관 파티를 열었다.
    ▲의정부-포천 축선에 병력을 축차 투입했다.
    ▲전쟁 직후 허위로 국군의 반격·북진 방송을 내보냈다.
    ▲한강교를 조기 폭파했다.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조기사형 집행했다.


    위 의혹들에 대해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먼저 이형근 장군과 채병덕 장군의 악연에 주목했다.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이형근 장군이 제기한 10대 불가사의의 중심에는, 6.25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채병덕 장군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남 책임염구원은 “10대 불가사의에서 8번째와 10번째 의혹을 제외한 나머지 내용은 채병덕 장군에 대한 직접적인 비난이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형근 장군과 채병덕 장군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동문으로, 채병덕 장군이 이형근 장군보다 7년 선배다.

  • ▲ 채병덕 전 육군참모총장. ⓒ KBS 화면 캡처
    ▲ 채병덕 전 육군참모총장. ⓒ KBS 화면 캡처

    이들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는 ‘군번 1번’에 대한 오해와 불신 때문이었다.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7년 선배인 채병덕 장군이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이형근 장군이 ‘군번 1번’을 부여받은 사실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채병덕 장군은 군 선배인 자신을 제쳐두고, 7년 후배인 이형근 장군이 군번 1번을 받은 것에 대해 모종의 음모가 있다고 판단했다.

    채병덕 장군의 의혹에 이형근 장군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지만, 이들의 관계는 이 일로 인해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사건건 부딪히며 앙숙관계를 이어갔고, 급기야 견원지간처럼 절대 친해질 수 없는 사이로 변모했다.

    채병덕 장군이 6.25 전쟁에서 전사하며, 이들의 악연 고리는 끊어진 것으로 여겨졌으나, 약 40년이 흐른 후인 1993년, 이형근 장군이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채병덕 장군을 정면 공격하고 나서면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가 채병덕 장군을 향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났다.“


    그러면서 남정옥 책임연구원은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 의혹을 항목별로 분석하면서, 10가지 주장 모두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 ▲ 1952년 여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부전선을 찾아 해병 1연대 장교들을 격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 뉴데일리DB
    ▲ 1952년 여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맞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서부전선을 찾아 해병 1연대 장교들을 격려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 ⓒ 뉴데일리DB

    첫 번째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무시·묵살했다’는 주장에 대해 남 책임연구원은, “1949년 12월 27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작성한 ‘1949년 말 종합정보보고’와, 이에 기초한 국군방어계획을 보면, 이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남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우리 군은 1950년 3월부터 각 사단별로 작전계획을 수립해 적의 도발을 38선에서 막아내지 못할 경우, 강을 이용한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국군방어계획’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 이보다 2년 앞선 1948년부터 이승만 정부는 군사훈련을 받은 청년방위대와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만약에 있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은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무시하거나 묵살했다’는 이형근 장군의 주장과 정면 배치되는 것으로,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의 신뢰도에 의문을 갖도록 만든다.

    남 책임연구원은 이 밖에도 ‘6.25 직전 주요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이동’, ‘같은 시기 전후방 부대의 교대 및 이동’, ‘6월23일 비상계엄령 해제와 장병들에 대한 외출·외박 실시’, ‘6월24일 밤 육군장교 클럽 개관 파티’ 등과 관련된 이형근 장군의 의혹제기에 대해서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났다는 결과를 앞세워 그 전에 있었던 정황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억지”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남 책임연구원은 ‘전술학의 기본을 무시한 채 의정부-포천 축선에 병력을 축차 투입했다’는 주장이나, ‘전쟁 직후 허위로 국군의 반격·북진 방송을 한 사실’, ‘한강교 조기 폭파’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대한 조기 사형집행’ 등을 가지고 의혹을 주장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반대의견을 냈다.

    남 책임연구원의 반론을 종합하면, “전쟁 당시의 구체적 사정과 그 이후 밝혀진 사실 등을 고려할 때 의혹이라 할 만한 것들이 못 된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특히 이승만 정부 최대 패착 가운데 하나로 지적받고 있는 ‘한강교 조기 폭파’ 의혹과 관련돼, 남 책임연구원은 “조기 폭파에 대한 군사적 기준이 없고, 당시 우리 군이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는 그 이후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며, “군사적 견지에서 조기 폭파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음은 ‘6.25 전쟁 10대 불가사의’에 대한 남정옥 책임연구원의 반론 전문이다.

    첫 번째 ‘북한군 남침 징후를 무시·묵살했다’는 주장은, 1949년 12월 27일 육군본부 정보국이 작성한 ‘1949년 말 종합정보보고’와 이어 기초한 ‘국군방어계획’을 보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국군방어계획’은 1950년 3월부터 각 사단별로 작전계획을 수립해, 적의 공격을 38선에서 저지하지 못할 경우 강을 이용한 축차적인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보다 2년 앞선 1948년부터 이승만 정부는 청년단을 통합해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청년방위대와 학도호국단을 조직해 만약에 있을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6.25 직전, 각급 주요 지휘관에 대한 대규모 인사이동을 했다’는 주장은, 당시 대령급 이상 고급장교가 35명으로, 인력 풀이 적었던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인사이동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전방 사단장으로 젊고 유능한 장교들을 임명했는데, 일선 사단장들이 6.25전쟁 이후에도 군의 주요 보직을 계속 맡았다는 점에서, 당시 인사이동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세 번째 ‘전쟁 직전 전·후방 부대가 대대적인 교대·이동을 단행했다’는 주장 역시 그 이후 결과를 보면, 의혹이라 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형근 장군의 주장처럼 6.25 전쟁이 일어나지 전에 몇 몇 연대급 부대의 전·후방 교체는 실제로 일어났다. 그러나 후방에서 교체된 2연대를 예로 든다면, 옹진지구에서 북한군과 많은 전투경험을 갖고 있던 2연대가, 전쟁 초기 북한군 12사단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저지했다. 이런 결과는 전쟁 전·후방 부대의 이동이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네 번째 ‘6월 23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을 해제했다’는 주장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첩보능력을 갖고 있는 미국의 정보기관과 군 정보기관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상경계령 해제 자체를 문제로 삼을 수는 없다.


    다섯 번째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장병들의 휴가와 외출·외박을 실시했다’는 부분도 의혹이라 하기 어렵다. 전쟁 전날 전 군의 외출·외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전쟁 즉시 외출병력들이 라디오와 방송을 듣고 즉각 부대에 복귀해 전선으로 달려갔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이들 장병들의 군인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봐야 한다.


    여섯 번째 ‘6월 24일 밤, 육군 장교클럽 개관 파티를 열었다’는 주장은, 전쟁 당일 새벽까지 어떻게 군 수뇌부가 술을 마실 수 있느냐는 질타로 이어지며, 적과 내통한 통적분자가 있다는 의혹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날 전쟁이 일어났다는 결과만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억지다.


    일곱 번째 당시 군 지휘부가 의정부-포천 축선에 병력을 축차(逐次) 투입한 것은 사실이다. 이형근 장군의 말처럼 일반적인 전술학에서 병력의 축차 투입은 금기사항이다.

    6.25전쟁 초기 서울의 관문에 해당하는 의정부-포천 축선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북한군이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계속 남진해 오는 상황에서 병력을 집결해 완전히 막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의정부-포선 전선에 대한 병역의 축차 투입 의혹에 대해서는 전혀 새로운 반론도 있다.

    전술학에서 금기시되는 이 명령을 부대 지휘관들에게 하달한 사람이 바로 이형근 장군 본인이란 주장이 그것이다.

    2사단 16연대장 문용채 대령은 제 1대대만을 이끌고 26일 04시 창동역에 하차하여 즉시 도보행군으로 북상했다고 한다. 문용채 연대장은 이형근 사단장으로부터 “즉시 전진하여 축석령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 연대장은 “얼마 있으면 또 대대가 도착하여 올 것이므로 전 부대를 장악하여 전진하고 싶다”고 간청했으나 “시간이 없다”고 엄명했다고 한다.

       - 6.25 전쟁사 2권, p372


    여덟 번째, 우리 군과 정부가 전쟁 직후 국군의 북한군을 격퇴하고 북진하고 있다는 방송을 내보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는 수집된 정보보다 상황이 더 빨리 전개될 만큼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런 데서 오보의 이유를 찾는 것이 합리적이며, 국민들에게 비관적인 내용을 알리기보다 낙관적인 내용을 보도하려고 한 정부나 군의 태도도 한 몫 한 것으로 파악된다.


    아홉 번째, 한강교를 조기 폭파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교량 폭파 전까지 우리 군과 민간인의 철수가 채 끝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조기 폭파’에 대한 군사적 기준은 없다.

    한강교 폭파로 많은 이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희생당한 것도 사실이나, 당시 정부와 군의 여건상 한강교를 폭파하지 않고서는 차기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한강교 폭파는 군사적인 견지에서 볼 때 조기 폭파로 단정할 수 없다.


    열 번째, ‘공병감 최창식 대령을 조기 사형했다’는 주장은, 이형근 장군과 최창식 대령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56기 동기라는 점에서 이형근 장군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이형근 장군은 최창식 대령의 사형을 불가사의 마지막에 슬쩍 끼워 넣었다. 최창식 대령은 한강교를 폭파한 이유로 1950년 9월 20일 사형된다. 하지만 이후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열린 재심을 통해 최창식 대령은 무죄를 선고받는다.

    억울하게 죽은 동기 최창식 대령에 대한 분노가, ‘10대 불가사의’ 의혹의 제기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