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 토론회, 신생국 대한민국 생존 위해 美 국무부와 끝까지 대립
  • ▲ 자유경제원이 주최하는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제4차토론회가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자유경제원이 주최하는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 제4차토론회가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개최됐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받는 현실은, 역사적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나왔다. 오히려 전문가들은 미국이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려는 계획까지 세운 사실을 강조하면서,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왜곡이라고 설명했다.

    자유경제원은 24일 자유경제원 회의실에서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앞잡이’로 각인된 현실을 바로잡는데 맞춰졌다.

  • ▲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날 토론회는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의 사회와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의 발제로 이어졌다. 토론자로는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이 나섰다.

    배진영 차장은 발제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미국이 이승만의 앞잡이”라는 표현을 썼다.

    수십 년 동안 미국 유학과 망명생활을 하면서 미국이 저질렀던 배신행위와 기만, 무관심 등으로 겪은 쓰라린 체험이 이승만 대통령을 맹목적인 친미주의자가 아닌, 철저한 지미(知美주)의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1895년 청년 이승만은 친구 신흥우의 권유로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배재학당을 찾는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시 한민족이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자유·민주·평등·인권·공화와 같은 가치를 배운다.

    미국에 대한 청년 이승만의 인식은 지극히 긍정적이었으며 미국을 하나의 기독교적 이상국가로 생각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생각은 그의 저서 <독립정신>에서 ▲미국 백성들이 누리는 권리 ▲미국 독립의 역사 ▲미국 독립선언문 ▲미국의 남북전쟁 소개 등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믿음은 얼마가지 않아 깨진다.

  •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배진영 월간조선 차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청년 이승만은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명을 받아 1905년 8월 4일 휴양지 오이스터베이에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난다. 여기서 이승만은 루즈벨트에게 하와이 교민들의 청원서를 전달하면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써달라고 호소했다.

    루즈벨트는 이승만에게 “이 일은 대단히 중대하기 때문에 청원서를 사사로이 받을 수 없다”며, “만약 이 문서를 귀국의 공관을 통해 제출한다면 중국의 청원서와 함께 강화회의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이 약속을 굳게 믿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 믿음은 청년 이승만에게 커다란 상처로 돌아왔다. 미국은 이미 대통령 루즈벨트의 밀명을 받은 태프트 육군장관이 1905년 7월 31일,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를 만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은 상태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에는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배진영 차장은 이 같은 이승만의 밀사외교 일화를 통해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미국의 호의에 기대 조국의 독립을 보장받으려 했다가 결국 잔인하게 배신당한 이승만이 어떻게 ‘미국의 앞잡이’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배진영 차장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기간 동안, 국내·외 외교관들에게 루즈벨트 시절 미국의 배신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 주미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알 수 있듯, 미국은 또다시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에 대해 김용삼 편집장은 “극비사항이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19년 뒤인 1924년 미국의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폭로되자, 이승만은 미국의 배신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다”며, “이승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외교관계에서 약소국이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는지, 그리고 강대국들이 흥정의 대상으로 약소국을 팔아넘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했다”고 설명했다.

    둘째는 미국의 배신을 계기로 이승만은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을 깨닫고, 후일 ‘외교의 신’으로 불릴 만큼 능수능란한 외교가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독립국가의 생존과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최선의 처방책으로 한미군사동맹 체결을 추진했고, 대미협상과정에서 반세기 전 ‘미국의 배신’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끝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과였다.

    권혁철 소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며, 오히려 용미(用美)주의자이자 대미투사(對美鬪士)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의 철저한 반공주의는 당시 미국의 세계전략과 완전히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은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했다”고 설명했다.


    ◆ 건국부터 휴전까지 이어진 이승만과 美 국무부의 첨예한 대립

    배진영 차장은 이승만이 1919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자 구미위원부 대표, 워싱턴군축회의·국제연맹 한국대표단 전권대사로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학은 교수는 그의 저서 <이승만과 마사리크>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이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것은, ▲개인적으로 무력과 폭력을 극히 혐오했다는 점에 더해 당시 국제사회가 기존의 평화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고, ▲약소국의 힘으로 강대국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점, 아울러 ▲독립 후에 집단안보체제에 의존해야만 하는 약소국으로서의 운명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의 외교노선은 무장투쟁론이나 실력양성론과 같은 독립운동 방법론에 그치지 않고, 독립 후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에 바탕을 둔 국가를 세운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있었다.

    김학은 교수는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 동료들을 상대로 한 발언을 소개했다,

    “홀로 독립할 순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의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도움을 받는 관계여야 한다.

    강대국은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이 있는데 영국은 식민지를 해방시켜준 적이 없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러시아는 뒤늦게 식민지를 찾기에 혈안이 된 나라고 중국은 자체적인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미국이다.“


    그러나 약소국인 신생 대한민국에게 미국은 마냥 친절하기만 한 나라는 아니었다.

  • ▲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1945년 8월 9일 소련의 남하를 막기위해 미국은 서둘러 3.8선을 긋고 오키나와에 있던 미 24군단을 남한에 진주시킨다. 미군정 책임자였던 하지 중장은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다. 게다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는 기관인 미 국무부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내내 갈등을 빚어온 ‘리버럴’한 관료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과 하지 중장의 갈등과 대립이 곧 이승만과 미 국무부 관료들과의 갈등과 대립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의 미군정은 김규식과 여운형을 앞세워 좌우합작을 추진했고, 이로 인해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된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과 그 지지세력을 중앙으로부터 배제하기 위해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기도 했다. 그는 1946년 10월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선의원 선거에서 이승만을 위시한 우익진영이 압승을 거두자, 좌우합작위원회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여 서울과 강원지역 선거결과를 타당한 이유 없이 무효화했다.

    김용삼 편집장은 “미 국무부의 실력자 엘저 히스는 소련을 위해 일하는 간첩이었다”며, “당시 미국은 미국판 햇볕정책으로 소련에 엄청난 퍼주기를 하고 있었고, 이 틈을 타 엘저 히스 등 수많은 소련 간첩들이 미 행정부 고위직에 대대적으로 침투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승만이 좌우합작을 거부하고, 1946년 6월 4일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 단정론을 제시하자 미군정은 이승만을 실각시키고 가택연금했다”며, “외부인사의 이승만 자택 출입을 통제하고 모든 우편물에 대한 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정치자금 루트를 봉쇄했다”고 말했다.

  • ▲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남정욱 숭실대 겸임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남정욱 교수는 “당시 미군정은 공산주의를 잘 몰랐고 그저 성질이 있는 살쾡이 정도로만 생각했다”며, “이승만 대통령은 그 살쾡이가 황소만한 맹수가 될 것이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미군정은 갈라진 나라를 봉합해 대략의 수습으로 마무리 짓고 싶어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정세가 이미 냉전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며, “자유와 번영의 길과 노예예속·비인간적인 사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은 이해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4월 조병옥을 미국에 특사로 파견했다. 조병옥은 에치슨 미 국무장관을 만나 한국군의 규모를 6만 5천명에서 10만명으로 확대하고, 무기와 장비지원을 요청했다. 이와 함께 한국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 미국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에치슨은 “특정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구체적인 군사공약은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며 거절했다. 에치슨은 무기와 탄약, 군함을 공급해 달라는 이승만 정부의 요청에도 “한국이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군사력 유지보다는 건실한 경제개발이 더 중요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박대’는 계속됐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은 ‘에치슨 라인 선언’으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배제했다. 이는 남침을 모의하던 김일성과 스탈린, 마오쩌둥에게는 더할 수 없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 "나 이승만은 미국인이 아니오. 아이젠하워 당신도 한국의 대통령이 아니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을 비롯해, 밴플리트, 리지웨이, 클라크 등의 미군 장성들과 대체적으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51년 이후 휴전협정이 시작되면서 이승만과 미국의 갈등이 다시 불거지게 된다.

    미국은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협조를 요청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겠소. 우리 민족은 영원히 존속해야 하오. 민족의 생존권은 어느 누구도 박탈할 수 없소. 미국이? 천만에. 좀 안됐지만 나는 이러한 정세 아래에서 협력하겠다는 보장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할 수 없소.

    나 이승만은 미국인이 아니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한국의 대통령이 아니오. 이 나라의 대통령은 나요. 나는 내 민족을 위해 분명히 내 주장을 펼치겠소.“

     
    같은 달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2만 7천여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발을 빼려는 미국에 압박을 가했다.

  •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급기야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에버레디 계획’을 세웠다. 한국군이 유엔군의 작전권을 벗어날 경우 반항적인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필요할 경우 유엔군 지휘 아래 군사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계획은 미 행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됐다.

    결국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는 반공포로 석방 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전후복구를 위한 경제원조, 20개 사단의 한국군 증강 등을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된 다음날인 1953년 8월 9일, 대국민담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우리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한미양국의 공동노력으로 외부침략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의 안보를 오랫동안 보장할 것이다.”


    배진영 차장은 “이승만의 말처럼 우리는 지난 60여년동안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인한 갖가지 혜택을 만끽했다”며, “지난 60여년동안 전쟁없이 경제개발에 매진하고, 산업화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화로 이행했던 것도, 1980년대 데모와 파업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이 지켜진 것도, GDP 가운데 국방비 지출이 2.24%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유유자적할 수 있는 것도 한미상호방위조약 덕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결코 미국이 ‘앞잡이’ 이승만에게 거저 준 선물이 아니었다”며,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걸어 미국의 휴전 움직임에 완강히 저항해 쟁취해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 ▲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류석춘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 원장.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류석춘 원장은 “일제시대 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소련이나 중국으로 바꿨던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국적을 단 한번도 취득하지 않았다는 점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승만 대통령은 선교사들의 추천서 19통을 들고 가 대학교에 진학했다”며, “당시 미국에는 석박사통합과정이 있었고 이를 통해 청년 이승만은 박사 학위를 먼저 받고 석사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게다가 박사학위 논문도 매우 탁월했다”고 전했다.

    권혁철 소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앞잡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누명”이라며, “오히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미군정과 힘겹게 싸워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켜냈다는 평가가 맞다”고 말했다.

    남정욱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과 발언을 봤을 때, 그를 미국의 앞잡이였다고 볼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고 설명하면서, 남한 좌익들이 김일성을 변호하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을 왜곡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남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승만 미국 앞잡이설(說)'은, 80년대 좌익들이 만들어낸 나름의 돌파구다.

    김일성은 국내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지만 괴뢰국을 만들려는 소련의 후원을 업고 권력을 장악한 만큼, ‘소련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좌익들이 ‘이승만도 미국의 앞잡이’라며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날 토론에서는 대표적 좌파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그의 저서 <대한민국사1>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한 부분이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승만을 미국에 예속된 존재로 보았으나, 이승만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중략)....이승만의 (반미적인) 태도는 미국의 약점을 꿰뚫어본 상태에서 철저하게 계산된 ‘몽니’였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