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국방장관보다 한 박자 빠른 결단, 성공적인 한강방어전 이끌어내
  • ▲ 6.25전쟁 기간인 1952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앞 좌석)이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 제주도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뒷줄 오른쪽부터)과 제주도를 시찰하는 모습. ⓒ 정부기록보존소
    ▲ 6.25전쟁 기간인 1952년 7월 3일 이승만 대통령(앞 좌석)이 미8군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 제주도 제1훈련소장 장도영 준장(뒷줄 오른쪽부터)과 제주도를 시찰하는 모습. ⓒ 정부기록보존소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기습남침 이후 급박했던 3일(72시간)동안 전쟁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완벽히 수행해, 대한민국 수호에 큰 역할을 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특히, 학계 등에 퍼져있는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은 크게 왜곡된 것이며, 오히려 ‘벼랑 끝 전술’과 ‘북진통일’을 목표로 하는 결사항전의 의지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도 이어졌다.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하는 52회 이승만포럼이, 21일 서울 중구 정동 정동제일감리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열렸다.

    <남침 이후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문학박사)은, 북한의 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3일간,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에 필요한 사안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침착하게 처리함으로서, 김일성의 적화야욕을 꺾었다고 설명했다.

    남정옥 박사는 6.25전쟁에 대해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 미국에 대항한 ‘이승만의 전쟁’이었다”고 운을 뗀 뒤, “이승만 대통령은 김일성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북진통일을 가로막은 워싱턴과 대립하며, 대한민국의 운명과 민족의 생존권을 지켜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이 극적으로 살아났고,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따른 한미동맹과 국군 20개 사단 증강, 해·공군 현대화, 전후 복구·경제부흥을 위한 토대 마련 등 견고한 안보적, 경제적 기틀을 다졌다”고 말했다.

    남정옥 박사는 국내 사회와 학계 일각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남침 이후 별로 하는 것 없이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피란을 간 무책임한 지도자’로 매도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나타내면서, 역사적 사료와 당시 증언을 바탕으로 이를 반박했다.

  • ▲ [제 52회 이승만 포럼]이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홀에서 열렸다. 이날 포럼은 [남침 이후 3일간 (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주제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발표자로 나섰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제 52회 이승만 포럼]이 18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 홀에서 열렸다. 이날 포럼은 [남침 이후 3일간 (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주제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발표자로 나섰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는 이승만 정부 당시 주한미국대사였던 무초 대사와 미 국부무 사이의 통신 전문, 1976년 발간된 미 국부무 대외자료, 1977년 국방부가 발행한 6.25전쟁사 기록물, 주미대사관 한표욱 참사관이 1984년 쓴 회고록 ‘한미외교요람기‘, 남시욱 교수의 ’6.25 전쟁과 미국‘ 등을 인용해 왜곡된 ’이승만의 역사‘을 복원했다.

    남 박사에 따르면,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국군이 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한 전차 242대, 전투기 226대 등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새벽 4를 기해 공격을 감행했다. 한 시간 뒤인 5시, 육군본부 상황실은 북한의 기습남침 상황을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에게 보고했다.

    이에 채병덕 소장은 전군에 비상을 알리고 소집을 명령한 뒤, 북한의 기습남침이 전면전인지 1949년부터 이어진 국경충돌 상황인지 판단하기 위해 수색 1사단 사령부를 불시 방문하고, 의정부 7사단 사령부를 오전 10시 방문해 북한의 전면 남침 사실을 확인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사실을 당시 3.8도선에 배치돼 있던 경찰과 신성모 국방장관 등으로부터 오전 10시 보고 받았다.

    일각에서 남침 후 6시간 동안 군의 대응에 의문을 나타내고 있는 것과 관련, 남 박사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당시 우리는 무전기 성능이 좋지 않아 전방과의 연락망이 대부분 유선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포격으로 유선 연락망이 일부 두절됐다. 새벽 5시 채병덕 총장은 육군본부 상황실로부터 기습남침 보고를 받고, 7시 공관을 들러 신성모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다.

    이후 신성모 장관은 무초 대사의 숙소를 방문해 보다 정확한 상황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초 대사와 신 장관의 친분이 두터웠고 자주 만났다는 것이 기록에 있다. 그리고 나서 신 장관이 오전 10시에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남정옥 박사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72시간동안 굉장히 놀라운 일들을 한다”며, 이승만 대통령의 신속했던 대응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1시 35분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전쟁 상황을 논의한 뒤,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손원일 해군총장에게 군함 3척을 끌고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 ▲ [이승만 포럼]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연구하는 포럼으로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한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이승만 포럼]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과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연구하는 포럼으로 (사)건국이념보급회(사무총장 김효선)가 주최하고, 뉴데일리(회장 인보길)와 대한민국사랑회(회장 김길자)가 후원한다. ⓒ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당시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 장관이 오전 11시 국무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했지만 정부는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했다. 반면 그 시각,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대사를 만나 105mm 곡사포 90문, 60mm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 등의 지원을 요청했다.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민적 총력전을 강조하며, 무초 대사로 하여금 미국에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는 한편, 이 전쟁을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국군의 단독 북진 통일을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남정옥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 공군의 F-51 전투기 보유였다.

    남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1949년 미국은 한국군의 공군 창설에 회의적이었고 육군에 배속된 항공대만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이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공군을 독립시키고 베테랑 조종사들을 확보했다.

    실제 6.25 이전에 미국은 이승만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F-51 전투기를 제공하지 않다가, 북한의 남침이 있은 다음날에야  F-51 전투기 10대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방부가 발행한 한국전쟁사를 보면, 당시 미 극동군사령부 미군 참모는 김정렬 공군총장에게 ‘F-51 전투기를 조종할 수 있는 조종사가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물었고, 김 총장은 ‘10명이 가능하다’고 말한 기록이 있다.

    남정옥 박사는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공군을 독립시키지 않았더라면 이 10명의 조종사를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조종사들은 남침이 일어나고 불과 3일 뒤 전쟁 지원에 나섰고, 대한민국 공군의 출발점이 됐다”고 강조했다.

    남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밤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들의 자문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다음날인 26일 오전 10시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육군총장, 김정렬 공군총장, 김영철 해군총장 대리, 김홍일 소장, 송호성 준장, 유동열 전 통위부장, 이범석 전 국무총리, 지청천 전 광복군사령관, 김석원 예비역 준장 등이 모였다”고 설명했다.

  • ▲ 김일성의 6.25 남침을 적극 지원한 중국 마오쩌둥(왼쪽), 소련 스탈린(오른쪽). ⓒ 뉴데일리DB
    ▲ 김일성의 6.25 남침을 적극 지원한 중국 마오쩌둥(왼쪽), 소련 스탈린(오른쪽). ⓒ 뉴데일리DB

    “이날 회의에서 김홍일 소장은 작전지도 방침을 확립하고,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보다는 한강 이남에서의 방어를 주장했다.

    회의가 끝나고 이틀 뒤인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채병덕 총장은 지체 없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에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한강방어전이 이뤄졌다.

    김홍일 장군은 7월 3일까지 6일을 버티면서, 미 지상군과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피란결정을 내린 것과 관련해서도 남정옥 박사는, “26일부터 북한 전투기들이 경무대 일대에 나타나 기총사격을 하고,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지까지 살포했다”며, “더구나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좌익사범 7천여명이 수감돼 있었고, 마포형무소에도 3천5백여명의 죄수가 있어, 이들이 탈옥할 경우 대통령의 신변을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25일 무초 대사와의 면담에서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겠다’고 엄포를 놓는 심리전을 펼치면서도, 실제로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남겠다는 고집을 쉽사리 꺾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신성모 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 조병옥 박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피란을 건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날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비서들의 피란 건의에도 ‘안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라고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전선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돌린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역을 27일 오전 4시에서야 출발하면서 ‘내가 서울시민들하고 같이 죽더라도 남아서 싸워야 할텐데...그러나 내가 잡히면 다 되는거야’라고 혼잣말을 했다.“

    남정옥 박사는 이승만 대통령이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내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침통해하며,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 했다고 말했다.

    남정옥 박사는 “결론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국군통수권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매우 적절하고 정확히 수행했다”고 평가하면서, “그가 보여준 3일간의 전시활동은 대한민국의 향후 전시 국정지침이 됐고, 이 틀 안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