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의 흐트러짐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
  • ▲ 영화 '연평해전' 중 한장면.ⓒ영화사 NEW
    ▲ 영화 '연평해전' 중 한장면.ⓒ영화사 NEW


    ◇'제2연평해전' 영웅 이희완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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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연평해전’, 6용사 군인정신,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계기 바란다"

    2002년 6월, 대한민국이 월드컵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그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제2연평해전이 영화화돼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실제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북한경비정이 서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해 우리해군 고속정 참수리-357호정에 대해 사전 경고 없이 기습공격을 하면서 발발한 해전이다.

    북한과 교전 중 정장 故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6명이 전사하고, 함교, 조타실 등이 피격된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의 조국과 바다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전투의지와 필승의 신념으로 북한경비정을 격퇴시켜 NLL을 수호, 승리한 해전으로 기록됐다.

    뉴데일리는 제2연평해전에서 부정장(부장)으로 교전 중 부상을 입고도 NLL사수를 위해 북한 경비정 퇴치한 이희완 소령(당시 중위)을 만났다.

    당시, 이희완 소령은 은 왼쪽 다리뼈가 포탄 파편에 맞아 으스러지고 오른쪽 다리는 파편이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상태로 승조원들을 지휘해 북한경비정을 물리쳤다. 현재 이희완 소령은 합동군사대학교 해군작전전술 교관으로 당시 겪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해군전술 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다.

    ◇357 고속정 부장 이희완 소령 "제2연평해전은 북한이 사전에 준비한 도발"

  • ▲ 이희완 해군 소령.ⓒ해군본부
    ▲ 이희완 해군 소령.ⓒ해군본부


    실제 제2연평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한 이희완 소령은 영화 ‘연평해전’을 본 대한 소감에 대해 “우선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며 “(이 영화가)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군인정신을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에 따른 국가의 중요성과 안보의식이 제고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이희완 소령은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날, 북한군이 일종의 도발연습을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감을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북한군의) 도발 느낌은 있었다. 6월에 어느 때보다 NLL침범을 많이 했다. 특히 해전 전날(2002.6.28)에 도발 연습(리허설)을 함포만 발사하지 않았을 뿐, 같은 시간에 동일한 기동을 했다.” 

    제2연평해전은 서해 NLL을 우리 군이 피 흘려 지켜낸 빛나는 전과임에도 불구, 당시 2002년 한일월드컵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러나 이희완 소령은 직접 현장에 전투를 겪은 군인다운 발언을 던졌다.“군인은 관심을 받고자 국가를 지키지는 않다. 주어진 명령에 언제든지 목숨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명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시에는 전 국민이 관심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 ▲ 강연하는 이희완 해군 소령.ⓒ해군본부
    ▲ 강연하는 이희완 해군 소령.ⓒ해군본부


    이희완 소령은 제2연평해전에서 왼쪽 다리를 잃는 부상을 입은바 있다. 이후 달라진 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달라진 것은 없다. 단지, 해전으로 인한 부상으로 신체장애유공자로서 군 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결같이 당당하게 해군장교의 삶을 지낼 것이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희완 소령은 NLL사수를 위해 불철주야 임무에 매진하는 후배들에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는 큰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북괴는 언제든지 도발을 할 것이다. 1초의 흐트러짐은 국가의 존망과 직결될 것이다.”


    '제2 연평해전'은?

    북한해군은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완패한 이후 3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전 세계인이 월드컵 열풍에 휩싸여 있던 2002년 6월 29일 도발을 감행했다.

    해전 당일 우리 고속정은 꽃게잡이 어선에 대한 조업통제 및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이었으며, 오전 09시 54분 북한경비정 2척이 연평도 서북방 7마일 해상의 NLL을 의도적으로 침범하자 일사분란하게 대응 기동 했다.

    우리군의 퇴각 경고방송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비정이 계속 남하하자 참수리-357호정이 진로를 차단하기 위해 기동하던 중, 10시 25분 북한 경비정 684호정이 85미리, 37미리 함포와 휴대용 로켓포 등을 이용해 선제기습공격을 가하고, 우리 함정이 이에 적극 대응함으로써 31분간의 해전이 시작됐다.

  • ▲ 2002년 당시 인양되는 357 고속정 모습. 당시의 처참한 피탄모습이 생생하다.ⓒ해군본부
    ▲ 2002년 당시 인양되는 357 고속정 모습. 당시의 처참한 피탄모습이 생생하다.ⓒ해군본부


    당시, 참수리-357호정은 기관실에 지름 20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려 침수되는 상태로 아 고속정에 의해 예인 중 생존자들의 결사적인 방수작업에도 불구하고 11시 59분에 침몰하였고, 전사자 및 부상자는 헬기로 국군 수도병원으로 후송됐다.

    그러나, 조타장 고 한상국 중사는 시신을 찾지 못하던 중 실종 41일 만인 8월 9일에 침몰된 참수리-357호정에서 타기를 놓지 않은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체를 인양했으며, 참수리-357호정은 계속되는 남북한간 긴장상황 속에서 침몰 53일 만인 8월 21일 인양됐다.

    국군 수도병원으로 후송되어 생사를 오가며 투병 중이던 의무병 故 박동혁 병장은 교전 후 83일 만인 9월 20일 사랑하는 가족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제2연평해전은 불의의 기습공격으로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지만, 우리의 조국과 바다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전투의지로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NLL을 사수한 승리한 해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