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건 식의 북한 自爆 유도

    심층취재/레이건의 對蘇 붕괴 전략 연구

  • 趙甲濟   
      
       -바닥까지 내려갔던 미국을 再生시킨 그는 그 여세를 몰아 소련과 동구
    공산권을 무너뜨렸다. 레이건은 공산주의를 惡으로 규정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증강 경쟁을 벌여 소련이 自爆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전략은
    그의 기독교적 신념과 공산주의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왜 全斗煥을 초청했나?
      
       1980년 11월20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는 며칠 전 大選에서 그에게 일방적으로 패배했던 카터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방문하여 요담했다. 카터는 카드를 꺼내놓고 거기에 적힌 대로 15~20개항의 주요 國政상황을 레이건에게 설명해주었다. 카터는 레이건에게 기록할 백지를 주려고 했으나 레이건은 이를 거절하고 듣기만 했다. 나중에 레이건은 카터의 메모 카드를 복사해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카터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날 듣고만 있던 레이건이 유일하게 의미 있는 발언을 한 것은 한국 문제에 대해서였다고 한다.
       카터는 레이건이 한국의 全斗煥 대통령에게 金大中씨를 살려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데 대해서 감사했다. 화제가 이에 이르자 레이건은 열을 내어서 故朴正熙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에 대해 말하더란 것이다.
       레이건은 '朴 대통령은 대학에서 소요가 일어나자 대학의 문을 닫게 하고 시위학생들을 징집했던'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1970년대 초에 레이건은 한국을 방문하여 朴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었다.
       레이건이 취임하자말자 全斗煥 대통령을 초청하여 頂上회담을 한 것은 流血사태를 통해서 집권한 全 정권의 안정을 도왔고 일부 한국인에게는 레이건이 독재정권의 비호자로 인식되도록 했다. 레이건은 1980년 대통령 선거 기간중 진 J 커크패트릭 여사를 만나 단번에 매료되었다.
       이즈음 커크패트릭 교수는 유명한 기고문을 통해서 '미국은 親美的인 권위주의 정부와 反美的인 전체주의 정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또 美蘇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조국에 먼저 책임을 씌우는 위선적인 민주당원들을 향해서 '항상 미국을 먼저 비난하는 집단'이라고 이름 붙여 공격하기도 했다. 레이건은 커크패트릭 여사를 유엔대사로 임명하고 장관급으로 대우했었다.
       全斗煥 정권은 레이건이 全 대통령을 초청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형을 선고받기 직전에 있던 金大中씨를 살려주겠다는 미끼를 던졌다. 레이건이 全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우방국들에 대해서 자유진영 편에 서 있는 권위주의 정권은 '우리 편'이란 메시지를 던지기 위함이었다. 레이건은 카터의 인권외교가 공산정권엔 먹히지 않고 이란의 팔레비나 한국의 朴正熙 정권과 같은 온건한 親美독재정권에만 타격을 주어 對蘇戰力을 약화시켰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레이건은 필요악과 절대악, 큰 惡과 작은 惡, 敵과 동지를 잘 구분하는 이였다.
      
       대통령의 부탁
      
       1984년 5월19일 아나톨리 도브리닌 駐美소련대사는 로덜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다.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이날 레이건은 비공개적으로 개인적인 부탁을 하나 하고싶다고 했다. 그 부탁의 요지는 이러했다.
       '소련의 反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박사의 부인 엘레나 보너가 아프다고 한다. 보너는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소련의 의학수준을 낮게 평가하지 않지만 보너가 소련에서 죽으면 그 책임을 덮어쓸 것이 아닌가? 그에게 미국行을 허가해주었으면 한다. 죽더라도 미국에서 죽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이 사건이 보도되면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더 나빠질까 걱정된다. 나는 보너의 病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는 잘 모른다. 비공식적인 정보에 근거하여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니 모스크바에 잘 말해주길 바란다'
       1주일 내에 도브리닌 대사는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콘스탄틴 체르넨코로부터 답장을 받고 전화로 레이건에게 통보했다. 그 요지는 '보너는 꾀병을 부리고 있으니 출국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담담하게 이 거절을 받아들였다. 그는 '미국의 유태인 조직이 이 문제를 再起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보너는 유태인系였다. 그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새 서기장이 되고 나서 보너의 해외여행을 허가했다.
       레이건은 소련의 인권탄압을 문제삼아 對蘇 압박정책을 폈다. 그는 인권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성실하게 그 문제를 다뤘다.
       레이건이 1981년에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은 소련의 공세로 最惡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越南과 캄보디아의 赤化에 이어 아프가니스탄도 소련의 침공을 받아 反共세력이 게릴라전으로 버티고 있었다. 카터의 위선적 인권외교는 朴正熙나 팔레비 같은 자유진영의 反共지도자들을 코너로 몰았고 이란의 親美정권이 反美的인 이슬람 원리주의자 손에 넘어가게 만들었다. 중동이 戰禍와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이란에서 인질로 잡힌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구출하려던 미국의 特攻작전은 離陸도 못해 보고 우스꽝스럽게 실패했다. 미국의 경제도 높은 인플레에 휘말려 경쟁력을 상실하고 일본이 세계최강경제국으로 등장했다. 자신감을 잃고 체력이 떨어진 미국을 레이건은 어떻게 回生시키고 내친 김에 소련과 東歐 공산진영까지 무너뜨리게 되었던가?
       극좌파는 국가 조종실을 차지한 이후 親北反美정책으로써 한국을 絶體絶命의 위기속으로 밀어넣었다. 2007년의 한국은 1980년의 미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올해와 내년 선거를 통해서 한국인이 레이건과 같은 지도자나 지도세력을 만들어낸다면 남한내 좌파뿐 아니라 김정일 정권을 소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될 수도 있음을 레이건의 逆轉勝 전략이 보여준다. 


  •    요약: 레이건의 롤 백 작전은 어떻게 성공했나?
      
       1 레이건은 挽回가 아닌 逆轉勝을 목표로 했다.
    레이건은 롤 백 작전의 목표를 挽回가 아닌 소련의 붕괴에 두었다.
    정치나 전쟁에선 일단 반격이 성공하면 예상보다 빨리 完勝을 거두는 경우가 많다.

       2. 레이건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을 善과 惡의 싸움으로 보았다. 南北 대결의 본질도 “민족사의 정통성과 삶의 양식과 善과 惡을 놓고 다투는 타협이 불가능한 총체적 권력투쟁”이다. 공산주의를 惡으로 보아야 자유인들은 도덕적 優位에 서면서 행동해야 할 의무를 진다. 공산주의를 꺾는 데는 합리성만으로썬 충분하지 않고 신념화된 이론(理念)이 있어야 자원을 총동원할 수 있다.
       3. 경제력과 인권과 진실의 무기화: 대한민국 세력의 강점은 경제력과 인권과 진실이고 김정일 세력의 약점은 궁핍과 억압과 거짓이다. 레이건은 減稅정책으로 미국의 경제력을 회복시킨 바탕에서 軍備경쟁을 시작하여 소련의 경제를 망가뜨렸다(1979년에 미국의 국방예산은 1193억 달러였는데 1983년엔 2096억 달러로 거의 倍增했다). 동시에 소련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여 소련내 反체제 인사들을 격려했다. 우리의 强點으로 적의 弱點을 쳐야 이긴다는 뜻이다.
       4. 폴란드와 SDI: 레이건은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지원하여 東歐 공산권을 흔들고, ‘별들의 전쟁 계획’(SDI)으로써 소련 경제를 出血시키는 것을 2대 전략 포인트로 삼았다. 김정일 세력에 결정타가 될 급소가 있다. 납북자, 탈북자, 국군포로, 강제수용소 문제, 특히 중국의 납북자 강제송환 문제가 폴란드인가? 금강산 관광 등 對北현금 지원의 차단이 SDI 역할을 할 것인가?
       5: 데탕트와 햇볕정책: 레이건은 1970년대의 데탕트가 인류의 敵인 공산주의와 공존을 모색하다가 이용만 당한 부도덕하고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비판했다. 대한민국의 롤 백도 6·15 선언을 철저히 비판하고 원인무효임을 선언한 바탕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암시이다.
       6: 압박해야 변화: 레이건의 전방위적인 對蘇압박은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소련공산당 역사상 처음으로 내부 개혁을 결심하게 만들었고 고르바초프를 그 騎手로 등장시켰다.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소련은 체제자살의 길로 달려갔다. 김정일 정권을 압박해야 그런 내부 변화가 생기고 한번 시작된 변화는 정권의 해체로 이어질 것이다. 공산세력을 변화시키는 것은 힘이다.
      
       1. 공산주의를 멸망시킨 戰略 문서 NSC 68
       -군사력은 방패, 인권과 자유는 槍이다. 공산주의는 타협이 불가능한 인간과 자유의 敵이고 惡이다.
      
       ‘NSC 68’이란 유명한 문서가 있다. 1949∼50년 사이에 입안된 백악관 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의 전략문서이다. 이것을 기초한 사람은 당시 국무부의 정책기획실장 폴 니츠였다. 애치슨 국무장관의 후원을 받아 작성되어 트루먼이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對蘇기본전략으로 채택된 이 문서는 그 뒤의 냉전전략과 歷代 美 대통령의 思考에 큰 영향을 끼쳤다. “NSC 68 때문에 미국은 냉전에서 이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이 문서가 작성되고 있던 때 트루먼 대통령은 軍費를 감축하고 국내 복지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려고 했다. 폴 니츠는 NSC 68에서 소련이 西歐문명을 파괴하려는 惡의 세력이라고 단정한 뒤에 對蘇 강경론을 주장하고 군비증강을 요구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4월7일에 이 문서에 서명은 했지만 군비증강 건의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그러다가 두 달 뒤에 6·25 남침이 일어났다. NSC 68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예언한 폴 니츠의 분석이 맞아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트루먼은 당장 다음 회계연도의 국방예산을 세 배로 늘리도록 지시했다.
       소련 공산주의는 서구의 개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非문명적, 非서구적, 非기독교적, 反개인주의적 異端세력이란 것이 이 문서가 서두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는 도덕적 관점이다.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부른 근거가 여기에 있다. 폴 니츠는 소련의 침략노선으로부터 방어해야 할 가치를 개인주의와 자유에 두었다.
       <자유로운 사회는 개인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본다. 개인의 自律과 自重만 있으면 개인과 개인의 권리 사이에는 충돌 없이 공존할 수가 있다. 이런 자유사상에서 놀라울 정도의 다양성과 깊은 관용, 그리고 法治의 전통이 생겨난다. 이것이 자유 사회의 통합성과 활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폴 니츠는 또 “공산주의는 자유사회의 이런 장점을 악용하여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인간의 非이성적인 측면을 선동하여 사회를 파괴하려고 드는,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가치관이다”고 단정했다.
       <소련공산주의의 가치관만큼 우리와 화해가 불가능한 게 없다. 우리를 파괴하려는 집념이 그토록 강한 이념도 없다. 우리 사회의 위험하고 분열적인 성향을 악용하는 데 그토록 유능한 이념도 없다. 인간본성에 내재된 비이성적인 면을 그토록 기술적으로 강력하게 선동할 수 있는 가치관도 없다>

       NSC 68은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쓰는 '평화'를 기만이라고 단정했다.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가 정의한 대로 '평화정책'이란 것은 '자본주의와 싸울 때 쓰는 더 유리한 방식'이며 非공산주의 국가를 분열시키고 마비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요사이 남북한 좌익들이 쓰는 ‘평화’의 뜻도 같다.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유수호 의지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북한정권의 對南적화전략에 대한 저항력을 죽이려고 tM는 말이다.

       NSC 68은, 자유세계의 약점을 지적했다. 그것은 불가피한 최후 수단으로서가 아니면 전쟁이나 폭력수단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對蘇 전략도 자유세계의 이런 약점을 직시한 바탕에서 저들의 군사적 모험주의와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사상의 우월성을 무기화함으로써 “러시아 인민들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니츠는 “소련 체제의 본질적인 성격을 바꾸어놓는 것이 승리의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본질적인 성격변화가 외부로부터 강요되어서가 아니라 “소련 내부의 자체적인 動力에 의하여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라고 니츠는 강조했다. 그는 군사력을 방패로 보고 인권을 槍으로 해석한 것이다. 미국의 군사력을 증강하여 소련의 침략을 저지한 다음에는 자유세계의 강점인 人權과 자유를 무기로 삼아 전체주의의 反인간성을 폭로함으로써 敵의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다.

       NSC 68은 보고서의 끝에서 몇 가지 정책 건의를 하고 있다.
       *소련의 영향력과 國力을 축소시킬 것.
       *러시아가 유엔 헌장의 국제적 행동규범을 따르도록 한다.
       *소련 내부에서 反정부 운동이 일어나도록 공작한다.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한다.
       *미국의 保安태세를 강화하여 간첩, 태업, 반역을 저지한다.
       *경제력을 강화한다.
       *非소련권 국가들이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유도한다.
       *소련 권력층에서 긴장과 분열이 생기도록 유도한다.
       *미국 시민들에게 안보 위협 상황을 알려 경계심을 갖도록 한다.
      
       위의 건의사항에서 소련을 북한정권, 미국을 한국으로 바꾸어 보면 길이 보인다. 
          
       2. 공산권해체 위해 준비된 레이건
       -그는 국내戰線에서 20년간 매일 공산당과 싸워 이겼던 사람이다.
         그는 이 경험을 소련에 적용하여 이겼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을 필두로 하는 국제 공산주의 제국을 붕괴시킨 主役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助役은 요한 바오로 2세, 대처 영국수상, 바웬사, 그리고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다.
       로널드 레이건에 대하여 많은 한국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배우출신의 카우보이’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레이건은 위대한 인물에게 필수적인 ‘위대한 관점’의 소유자였다. 위대한 관점이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능력을 뜻한다.
       레이건이 1981년에 집권하여 1989년에 물러날 때까지 공산주의 세력을 코너로 몰아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조건을 만든 힘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20년간 미국의 국내전선에서 공산주의와 매일 싸워서 이겼던 사람이다.
       배우로서 성공했던 레이건은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영화배우조합(Screen Actors Guild)의 핵심 멤버나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헐리우드의 영화산업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했다. 주먹다짐도 하고 테러위협도 받아가면서 그는 좌익들과 매일 싸웠다. 어릴 때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청년시절엔 溺死 직전의 77명을 구한 人命구조대원이기도 했던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본질과 생리, 그리고 전술을 體得하게 되었고, 대통령이 된 뒤 이 경험을 살려 국제공산세력을 분쇄할 수 있었다.
       레이건도 폴 니츠처럼 공산주의자들을, ‘자유를 파괴하기 위한 敵들중 가장 잘 조직되고 유능한 세력’이라고 평했다. 그는 1960년에 다시 영화배우조합 위원장으로 뽑혔는데 ‘러시아와의 이념전쟁이야말로 이 세계의 가장 큰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는 평화至上주의자들을 경멸했다. 평화至上주의자들이 “지금은 평화시대이므로 이 평화를 깨는 어떤 일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미국을 패배의 길로 내몰고 있는 독약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이미 패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와 전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것이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1960년대 레이건의 이 말은 2007년의 한국인을 향해서 하는 말처럼 들린다. 김정일과 從金세력은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또 “지금은 남북화해 교류의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공산당 운운 하는 당신들은 전쟁하자는 이야기냐”라고 말한다.
       1960년대 레이건은 자신의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 한국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경고를 했다.
       “만약 우리가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서 지고 그리하여 자유를 빼앗기게 된다면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패배를 방지하기 위한 행동에서 가장 비겁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졌노라고”
       이런 레이건이었기 때문에 1980년대 소련의 허점을 발견하자 이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그 허점을 확대시켜갔고, 결국 공산권의 총붕괴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레이건이야말로 ‘惡의 제국’과 정면대결함으로써 이를 해체하기 위하여 훈련받고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3. 공산진영의 急所를 치다

       -미국의 강점(경제와 자유)으로 소련의 약점(경제와 억압)을 쳤다. SDI로써 군비경쟁을 유도하여 소련의 경제를 멍들게 하고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지원하여 공산권의 내부 혼란을 조성했다.
      
       레이건은 1981년에 집권했을 때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소련 제국의 急所로 보았다. 자유노조 운동을 지원하면 동구 위성국들이 흔들리고, 東歐가 자유화되면 소련도 붕괴된다는 것이었다. 즉, 폴란드가 東歐공산권의 안전핀인데 이 안전핀을 빼버리면 東歐가 수류탄처럼 터지면서 그 파편이 소련을 때려 종국엔 소련마저 무너질 것이라고 본 것이다.
       1981년 12월15일,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틀 후 레이건은 국가안보회의(NSC)에서 “이 사건은 소련의 對東歐식민지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기회이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긴밀히 협조해가면서 폴란드의 자유화 운동을 지원했고, 소련이 폴란드의 자유노조 운동을 탄압하는 책임자라고 규정하여 對蘇 압박정책을 폈다. 소련은 폴란드에 무력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으나 레이건은 이를 무시하고 소련을 압박함으로써 폴란드 등 東歐의 반체제 인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레이건은 1970년대의 데탕트 정책, 즉 對蘇유화정책을 뒤엎는 對蘇강경책을 지속하려면 국내의 지지기반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減稅에 의한 경기회복에 성공하여 지지층을 단단히 했고, 기독교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對蘇비판 연설을 통해서 보수층을 단결시켰다. 그런 다음 군비증강 정책을 밀어붙여 소련이 出血 경쟁을 하도록 유도했다. 레이건은 1970년대의 소련이 高油價의 득을 많이 보면서 경제 개혁을 제대로 하지 않고서 군비지출을 많이 했고, 越南赤化에 이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군사적 모험주의로 해서 경제가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는 점에 착안했다. 소련의 경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소련 체제를 붕괴시키는 지름길이라고 본 것이다.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수상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공산권 붕괴의 功을 레이건에게 전적으로 돌리고 있다. 대처는 레이건 대통령이 우직하게 밀어붙인 이른바 '별들의 전쟁 계획'(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이 소련제국 붕괴를 가져온 결정적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SDI란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을 우주에서 요격할 수 있는 기술과 방어망을 가리킨다.
       미국이 사람을 달에 착륙시켰던 그 국가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별들의 전쟁' 계획, 즉 미사일 방어망 연구를 시작하려고 하자 소련 지도부는 겁을 집어먹었다. 미국과 맞서 그런 미사일 방어기술을 개발하고 배치하려면 소련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을 집중시켜야 하는데 그렇게 하다가는 국가財政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부문의 무기개발에 들어갈 돈도 이 대응조치에 전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을 했다.
       그 이후 소련의 對美 정책은 총력을 다해서 SDI를 포기하도록 하는 데 집중되었다. 레이건은 소련의 이런 초조한 자세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SDI를 더욱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척했다. 미국 과학자들도 당시 기술로는 완벽한 核미사일 방어망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레이건은 모른 척하고 이 계획을 밀었다.
       FP이건 대통령은 대처 수상에게 솔직하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 계획을 밀고나간다면 소련의 경제에 큰 압박을 가하게 될 것이다. 소련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희생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결국 소련은 미국의 도전에 굴복하고 말 것이다. 즉 군비경쟁을 포기할 것이다. 이는 미국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개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對美우위의 군사력만이 소련 지도부로 하여금 개혁을 거부하도록 한 마지막 보루였으니까. 그런 근거가 무너지면 비로소 경제개혁으로써 국민들을 먹여살릴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    1986년 10월11~12일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아이슬랜드의 레이캐빅에서 頂上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전략무기 감축과 관련하여 양보를 거듭했다. 고르바초프는, 중거리핵미사일 감축 협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미사일은 제외한다, 美蘇 양쪽이 모두 똑 같은 숫자의 戰略무기를 남길 수 있도록 감축한다(그 전에는 현재 보유비율에 따른 감축을 주장했다. 그렇게 하면 소련이 더 많은 숫자를 보유하게 되어 있었다)는 데 동의한다고 했다.
       레이건도 5년안에 전략핵무기-대륙간 탄도미사일, 폭격기, 장거리 크루즈 미사일을 반으로 감축하고 10년 뒤에는 대륙간 미사일을 전부 폐기하자는 제안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한술 더 떠 10년 뒤에는 모든 戰略무기를 폐기하자고 했다.
       레이건은 10년내에는 ABM(장거리미사일요격망 건설 금지)조약에서 탈퇴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 조약과 위반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SDI 실험은 계속하겠다고 했다.
       이때 고르바초프가 그동안의 양보를 일거에 만회할 수 있는 함정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소련이 제안한 양보는 조건부이다. 즉, 미국이 SDI 개발계획을 실험실에서만 추진한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고르바초프는 SDI를 단념시키기 위해서 그동안의 파격적 군비감축안들을 제안했던 것이다. 레이건은 주저 없이 고르바초프의 이 제안을 거부했고 頂上회담은 결렬되었다. 세계의 언론은 레이건을 공격했다. 세계 평화에 巨步를 내디딜 수 있는 기회를 차버렸다면서. 재미 있는 것은 고르바초프가 레이건의 양보를 얻기 위해서 제안했던 군비감축안들을 거두어들일 수가 없게 된 점이다. 소련은 그 뒤 미국과의 협상에서 이들 제안을 토대로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미끼만 떼인 결과를 낳았다.
       고르바초프 회고록에 이 레이캐빅 회담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그는 레이건과의 마지막 담판은 '세익스피어의 드라마' 같았다고 했다.
       '우리는 대화를 중단했다가 다시 만나 이야기하다가 다시 헤어지곤 했다. 회담의 성공은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SDI는 넘을 수 없는 걸림돌이었다. 대화는 돈좌하더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레이건은 말했다. '조금만 더 양보하여 내 안을 받으세요, 그러면 미국은 소련과 협조할 것이고 그것이 얼마나 득이 되는지 나중에 알게 될 거요'. 나는 거의 절망적으로 그를 설득하려고 다가갔지만 그는 한 걸음 뒤로 빠지고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는 평화를 만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텐데.'
       회담이 결렬되어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는 어두워지고 있었다. 레이건은 고르바초프를 향해 불평했다.
       '귀하가 이렇게 계획해서 나를 이 지경에 빠뜨렸습니다.'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 지금 당장 회담장으로 돌아가서 사인합시다. 귀하가 우주를 군사화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한다면 말입니다.'
       '정말 미안하군요.'
       두 사람은 헤어졌다.
       레이건은 SDI를 추진할 때부터 대처 수상에게 '나는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배우시절 좌익과 대결하면서 공산주의의 속성을 체험했던 레이건의 이 무서운 일관성이 소련군사제국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개혁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게 했으며 그 길은 공산권 해체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4. 美蘇 대결을 善惡 대결로 본 레이건

       '이 세상에는 죄와 악이 있다. 예수님과 성서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는 全力을 다해 이에 대항해야 할 의무가 있다'
      
       1983년 3월8일 플로리다州 올랜도에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협회의 전국 대회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서 소련을 ‘악의 제국’(The Evil Empire)이라고 불렀다. 이 단어 때문에 이 연설은 역사적인 연설이 되었다. 이 연설이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을 무너뜨린 한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연설문 작성자 안토니 돌란이 기초한 연설문 초안을 검토한 국무부와 백악관 안전보장회의 등은 이 자극적인 용어를 삭제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다시 써 넣었다는 것이다.
       레이건은 이 연설에서 레닌의 말을 인용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도덕성이란 것은 계급의 이익에 종속되는 것이며, 舊사회체제를 말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공산주의자들은 현 세계에서 악의 중심이다”고 못박았다. 그는 “악의 제국이 가진 공격적 본능을 애써 무시하고서 美蘇 양국을 똑같이 비판해야 자신이 우쭐해지는 위선에서 벗어나 옳은 것과 그른 것, 善과 惡을 직시하자”고 강조했다.
       레이건은 소련을 惡의 제국이라고 부름으로써 도덕적으로, 또 선전전에서 우위에 서려고 했다. 기자들은 소련 지도자들에게 묻게 되었다.
       ―소련이 악의 제국이란 말이 사실입니까.
       소련 지도자들은 물론 부인한다. 그러면 다음 질문이 나온다.
       ―그렇다면 스탈린의 대숙청은 惡이 아닙니까.
       ―1930년대의 재판극(show trial)은 악이 아닙니까.
       ―인위적인 우크라이나 大饑饉(대기근)은 악이 아닙니까.
       소련 지도자들이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레이건이 판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소련의 실력자들이 “스탈린의 대숙청은 과오였지만 지금 소련은 인권을 존중한다”고 대답한 이후에는 실제로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몇 년 뒤 미국과 러시아 군축회담에 참석했던 한 러시아 장군이 술을 마신 뒤 갑자기 흥분상태에 빠져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면서 미국 측 대표들을 향해서 말했다고 한다.
       “당신들은 소련이 왜 망했는지 아십니까?”
       “···.”
       “그 망할 놈의 「악의 제국」 연설 때문이랍니다. 소련은 정말 악의 제국이었단 말입니다!”
       1983년 9월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요격기에 의해 격추되어 수십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269명의 승객이 사망하자 레이건은 소련에 대한 비난을 강화했다. 그는 대한항공기 격추를 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이 폴란드 장교 1만5000명을 학살한 사건과 비교하여 공격했다.
      
       5. 비로드로 감싼 쇠주먹 

       -웃으면서 소련을 코너로 몬 레이건의 大戰略이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을 낳았다.
      
       1981~5년 사이 줄기차게 진행된 레이건 대통령의 對蘇강경정책은 소련 지도부를 고민에 빠뜨렸다. 소련 지도부는 레이건과 상대할 인물로서 54세의 새로운 型의 지도자 고르바초프를 공산당 서기장으로 뽑았다.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의 작품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체제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동시에 레이건이 시작한 군비경쟁을 끝내어 소련경제의 내출혈을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대화가 시작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월남전으로 변한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싶어했다.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은 인간적으로 친밀해졌다. 레이건은 소련을 붕괴로 몰아가면서도 항상 웃는 얼굴로 소련 지도자들을 대하여 그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정책에 대해서는 정치적, 외교적 응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물질적 지원은 일체 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데탕트가 소련을 현상유지시켜 준 것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다. 레이건은 소련과 대화하면서도 소련의 지배체제를 강화시켜주는 협력과 교류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레이건은 비로드로 감싼 쇠주먹으로 소련을 친 것이다. 웃으면서 소련을 죽여간 것이 레이건이었다. 여기에 이 대전략가의 위대성이 있다. 레이건은 어릴 때부터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온 사람이다. 그는 특히 “죄를 미워하라. 그러나 죄인은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소련 지도부에 대해서도 적용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레이건의 對蘇정책이 스탈린類의 강경파를 지도자로 등장시킬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오히려 개혁파인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스스로 체제를 붕괴시켜나갔던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설득이 아니라 힘이다. 


  •    6. 기름값 暴落작전
       -사우디의 협조로 석유값 떨어뜨려 소련 경제 압박
      
       1985년 가을에 배럴 당 30달러 하던 기름값이 1986년 4월에 가면 10달러로 떨어진다. 세계최대 석유매장국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석유를 갑자기 增産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석유값 폭락으로 경제에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나라가 소련이었다. 소련은 당시 세계 최대의 産油國이었다.
       높은 석유 값으로 1970년대엔 무역흑자를 기록하던 소련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 석유 값 폭락으로 큰 타격을 받은 데다가 레이건에 의해서 시작된 군비경쟁으로 경제가 더욱 멍든다.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뒤 밝혀진 사실은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사우디 아라비아와 손잡고 석유增産을 통해서 소련에 압력을 넣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CIA 부장 윌리엄 케이시가 이런 공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석유 값이 배럴 당 1달러 떨어지면 소련은 연간 10억 달러의 손해를 보았다. 미국의 냉전승리는 경제력을 무기화했기 때문이다.
      
       7. 역사를 바꾼 스팅어 미사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의 공격용 헬기를 백발백중 격추시켜 철군을 유도하다.
      
       1986년 9월26일 아프가니스탄의 잘라라바드 공항 상공에서 소련의 공격용 헬기 석 대가 反共게릴라가 발사한 세 발의 스팅어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었다. 이 스팅어 미사일을, 파키스탄을 통해서 아프가니스탄 게릴라들에게 공급하도록 명령한 것은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레이건은 1981년에 취임하자말자 스팅어 미사일을 제공하려고 애썼으나 武器관련 기밀누출 등을 두려워한 관료들과 의회가 반대하여 시간이 많이 걸렸다. 무게가 15kg에 불과한 스팅어 미사일은 어깨에 메고 쏠 수 있고, 약5km의 사정거리에 音速이었다. 게릴라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중 340개의 스팅어를 쏘아 269대의 소련 전투기(대부분이 헬기)를 격추시켰다. 스팅어 미사일은 표적과 불꽃을 분간할 줄 알았고 발사한 사람은 미사일이 목표물을 적중시킬 때까지 앉아서 관찰하면서 조종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쏘고는 피해버릴 수가 있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선 陸上은 게릴라들이, 制空權은 소련의 공격용헬기가 장악한 상태로 교착상태였다. 미국이 간편한 스팅어 미사일을 게릴라들에게 공급하자 이 균형이 깨졌다. 2년 뒤 고르바초프는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12만의 소련군대를 철수함으로써 소련 붕괴의 한 단초를 연다.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선에서 1만6000명이 戰死, 3만 명이 부상했다. 
  •    8. 레이건의 도전장, '고르비여, 장벽의 문을 열라'
       “귀하가 자유화를 원한다면, 여기 저 문 앞으로 오세요. 고르바초프씨, 그 문을 여세요. 고르바초프씨, 그 벽을 무너뜨리세요'
      
       레이건의 對蘇 전략의 본질은 미국의 강점으로 소련의 약점을 치는 것이었다. 즉 미국의 경제력으로 소련의 경제를 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연간 20% 이상씩 늘리고 '별들의 전쟁' 프로그램으로 소련과의 軍備경쟁을 가속화하는 한편 석유값을 떨어뜨려 소련의 외화 가득원을 목졸랐다. 소련은 이런 미국에 대항하여 장거리 미사일 등 군비강화에 돈을 쏟아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국가재정은 바닥나고 인민들의 생활은 어렵게 되었다. 1985~86년 사이 소련은 年間 150~200억 달러의 추가 예산을 軍備경쟁에 퍼부어야 했다. 이 시기 소련이 만든 기계류의 약63%가 군사용이었다고 한다.
       大勢가 기울고 있던 1987년 6월12일 레이건은 西베를린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연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귀하가 진실로 평화를 바란다면, 귀하가 소련과 동구권의 번영을 바란다면, 귀하가 자유화를 원한다면, 여기 저 문 앞으로 오세요. 고르바초프씨, 그 문을 여세요. 고르바초프씨 그 벽을 무너뜨리세요'
       레이건은 베를린 장벽의 낙서, '이 벽은 무너질 것이다'라고 쓴 것을 보고는 즉석에서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유럽을 가로지르는 벽들이 무너질 것입니다'
       레이건의 이 역사적 연설이 있은 지 2년 반이 흘러 베를린 장벽은 진짜로 무너졌다.
       레이건은 대통령의 말이 敵國의 심장부를 겨누는 匕首(비수)와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이다. 그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예컨대 1988년 5월 모스크바에서 고르바초프와 회담하는 자리에서도 레이건은 “베를린 장벽을 철거하는 것이 소련이 국제사회에 참여하고싶어한다는 가장 좋은 상징적 사건이 될 것이다”고 권유했다.
       1989년 6월 폴란드의 공산정권은 下院의석의 35%, 새로 만든 上院의석 100석 전부를 선거에 붙였다. 下院의석의 35% 전부와 上院의 99석을 자유노조 후보가 차지했다. 공산당 후보는 한 사람도 당선되지 않았다. 자유노조 운동 지도자 바웬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바웬사는 공산당 세력과 손 잡고 정부를 구성하기를 거부했다. 공산당이 배제된 자유노조 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선거에 의해서 최초로 공산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선거 직전 폴란드 공산당 당수와 전화하면서 “선거 결과를 존중하겠다”고 말했다. 역사가들은 소련이 東歐의 자유화 大勢에 대한 武力저지를 포기할 것임을 선언한 이 전화가 “사실상 東西 냉전을 끝낸 것이다”고 말한다. 그 뒤 반년 사이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의 공산당정권이 붕괴되고 11월엔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0년 9월 레이건은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 자유노조 운동의 産室인 폴란드의 그단스크 조선소를 방문했다. 바웬사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는 레이건에게 칼을 선물로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공산주의의 머리를 베는 데 귀하께서 도와준 것을 기념하여 이 칼을 드립니다” 


  •    9. 소련측에서 본 레이건
       -미국에서조차 엉뚱하다고 생각했던 레이건의 중거리미사일폐기 제안은 결국 소련의 태도를 바꿔놓았다.
      
       근 30년간 워싱턴에 주재하면서 미국의 여섯 대통령을 상대한 소련 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In Confidence'(‘비밀리에’: Times Books)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美蘇 냉전 시대에 소련의 입장에서 본 현대사의 內幕 이야기이다. 흥미진진한 秘史가 많고 소련 대사의 눈에 비친 歷代 미국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가 특히 재미 있다.
       도브리닌은 소련측이 상대하기 가장 어려웠던 대통령으로 로널드 레이건을 꼽았다. 소련 지도부의 눈에 비친 레이건은 예측이 불가능한 인물이고 모순덩어리이며 한편으로는 아주 마음씨 좋은 매력적 인물이었다. 소련측이 인식의 혼란을 겪은 것은 레이건의 二重性 때문이었다. 레이건은 폴란드의 자유노조 지원, 군비확충,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지원, S D I(Strategic Defense Initiative. 이른바 별들의 전쟁 계획. 미사일 방어망 구축계획) 등 對蘇강경정책을 추진하고 공개적으로 소련을 ‘惡의 제국’이라고 비판했다. 그런 한편에선 도브리닌을 만나면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줄 수가 없고, 친필로 소련의 서기장 앞으로 다정한 편지를 써 美蘇 관계 개선을 희망하곤 했다. 도브리닌이 더욱 당혹한 것은 레이건 자신은 이런 모순적 행동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다는 점이다.
       레이건에 대해서 그의 적과 동지들은 모두 과소평가했다고 도브리닌은 지적했다. 레이건은 겉보기보다 속이 깊은 사람이었고, 천성적인 낙관론과 솔직하고 자연스런 제스처, 그리고 인간적 매력으로 해서 미국인들은 잘못된 점이 있어도 그냥 넘겨버리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 상상력이 뛰어났고 특히 S D I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우직하게 밀고나가는 배짱이 있었다. 예컨대 레이건은 취임 직후 ‘제로 옵션’이란 파격적인 戰略무기감축안을 제시했다.
       당시 소련은 東歐 공산국가 안에 중거리핵탄두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었다. 레이건은 미국도 서유럽국가에 중거리핵탄두미사일 퍼싱2型을 배치하도록 NATO에 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소련이 東歐의 중거리미사일을 철거하면 미국도 배치하지 않겠다고 제안했다. 이 대담한 제안에 대해서 소련은 물론 거부했고 미국내 진보파도 反核을 부르짖으면서 미국 미사일의 서구 배치에 반대하고 나섰다.
       소련은 西歐의 언론과 여론을 선동하여 퍼싱 미사일 배치 반대운동을 벌이도록 했다. 레이건은 끄떡도 하지 않고 밀고나갔다. 미국은 독일의 콜 수상과 영국의 대처 수상을 설득하여 1984년에 퍼싱 미사일을 西유럽에 배치하였다. ‘제로 옵션’을 반대해오던 소련은 서서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특히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으로 취임한 1985년 이후 소련은 ‘제로 옵션’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선회하다가 1987년엔 모든 중거리핵탄두 미사일을 全세계적으로 폐기하자는 제안을 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였다. 엉뚱한 것 같았던 제안을 레이건이 우직하게 밀고나가니 소련의 생각이 변하고 사상최초로, 전략무기를 제한하는 데 머문 것이 아니라 감축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도브리닌은 소련이 서둘러 중거리 미사일을 東歐에 배치했다가 폐기하는 과정에서 수십억 루블이 낭비되었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제로 옵션식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런 선언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북한정권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이미 만들어놓은 핵폭탄을 폐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정당방위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1. 미국에 대하여 한국에 전술 핵무기를 다시 배치해줄 것을 요구한다.
       2. 미국이 불응하면 대한민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합법적으로 탈퇴한 뒤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다.
       3. 대한민국은 핵무기로 공격당하지 않는 한 핵무기를 먼저 쓰지는 않는다.'
       이런 발표가 있으면 유엔안보리를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개발이 결국은 한국과 일본, 대만의 핵무장으로 이어질 것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대만과 일본도 핵무기 개발을 검토하겠다고 나올 것이다. 미국은 겉으로는 이런 흐름에 우려를 표시하지만 속으로는 반길 것이다. 중국이 다급해질 것이다. 핵무장한 일본과 대만과 한국이 중국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은 견딜 수 없다. 중국이 앞장서서 김정일 제거와 핵무기 해체에 나설 것이다. 모든 압력이 중국과 북한에 가해질 것이다. 한국은 상황을 보아가면서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총알 한 발 쏘지 않고도 상황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차기 대통령 후보중 이런 공약을 할 사람은 없는가? 대한민국이 식민지가 아니고 국민들이 노예가 아니라면 이 정도의 公論은 이미 이뤄졌어야 했다. 한국인들은 가끔 스스로 '나는 이 정도 이상은 이야기하지 못해'라고 선을 긋는다. 자신의 자유의 한계를 스스로 좁혀버리려는 생각이 바로 노예근성이다.
      
       10. 樂觀과 유머의 힘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이고 非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잘 아는 사람이다”
      
       레이건은 소련과의 대결에서 밀려 바닥까지 내려간 미국의 위상을 挽回(만회)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逆轉勝 전략을 밀어붙여 아예 소련제국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린 인물이다. 이런 大역전극을 벌인 그는 비장한 표정이 아니라 시종 유쾌한 자세로써 그런 일을 해냈다. 레이건이 가진 樂觀的 정신과 유머감각이 미국사람들에게도 전염되어 국가분위기를 日新(일신)했던 것이다. 그는 1980년 대통령 선거유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경기란 여러분 옆집에 실직자가 있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不況이란 여러분의 일자리가 위태로운 상황을 의미합니다.
       경기회복이란 지미 카터가 실직자가 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1996년에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클린턴에게 패했던 봅 돌 전 상원의원은 유어 감각이 아주 뛰어난 이였다. 그가 쓴 '위대한 대통령 우스개'(Great Presidential Wit)라는 책이 있다. 역대 대통령의 유머를 소개한 책이다. 이 책에서 돌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유머 감각에 따라 순위를 붙였다. 1등은 링컨, 2위는 레이건, 3위는 플랭클린 루스벨트, 4위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잘 웃기는 대통령이 대체로 위대한 대통령이고 유모어 감각이 꼴찌권인 대통령들은 國政수행면에서도 형편이 없었다.
       유머 부문 랭킹 2위인 레이건은 암살기도범의 총을 가슴에 맞고도 아내에게 '덕킹하는 것을 그만 잊었어'라고 말했던 이다. 그는 또 수술대에 누워 있다가 수술을 하러 들어온 의사들에게 '당신들은 모두 공화당원이겠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공산당의 생리에 대한 많은 우스개를 남겼다.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이고 非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代入해보아도 될 것 같다.
       '좌익은 김일성 김정일을 읽은 사람이고 우익은 김일성 김정일을 잘 아는 사람이다'
       북한을 문헌으로써, 그것도 북한에서 생산된 문헌으로써 이해한 사람은 거의가 김정일을 좋게 보고 북한을 誤判한다. 관념으로서의 북한론은 체험으로서의 북한론과 너무나 다르다. 노무현 대통령이야말로 實在하지 않는 관념으로서의 북한과 김정일像을 머리에 넣고 다니니 하는 말마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
       레이건 대통령은 이런 농담도 했다.
       '소련 농업에서 잘못 된 점 네 개는 무엇인가?'
       '봄, 여름, 겨울, 그리고 가을'
          

  •    11. 말의 힘
      
       레이건은 독서를 많이 한 사람이다. 原典(원전)을 읽기보다는 리더스 다이제스트式으로 요약된 글을 많이 읽었다. 그는 한 문장으로 상대를 끝장내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중요한 연설문은 직접 기초했다. 1981년 취임연설을 준비할 때의 逸話가 있다. 레이건은 선거운동 때 연설문을 써주었던 켄 카치지안에게 초안을 부탁했다. 그 자신도 따로 연설문을 쓰기 시작했다. 워싱턴에서 캘리포니아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친구가 소개해준 名문장을 메모했다. 마틴 트렙타우라는 병사가 1차세계 대전 때 프랑스에서 전사했는데 그가 남긴 日記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나의 맹세: 미국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그래야 나는 일하고, 저축하고, 희생하고, 견디고, 즐겁게 최선을 다해서 싸울 수 있다. 마치 이 싸움의 전부가 나 혼자에게 달려 있다는 듯이>
       레이건은 이 대목을 연설에 반영하려고 했다. 레이건은 카치지안에게 이 인용문을 읽어주고는 “어떠냐?”고 했다. 카치지안은 “그 문장의 소스가 어디입니까”라고 캐물었다. 레이건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카치지안은 설득했다.
       취임연설문이 나오자 말자 기자들은 그 名文의 출처를 확인하려 들 것이다. 허구로 밝혀지면 안 되니 확인을 해야 한다. 카치지안은 트렙타우라는 병사의 前歷을 추적했다. 레이건이 인용한 그런 일기를 쓴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레이건은 연설에서 이 병사가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것처럼 묘사하려 했는데 그는 고향인 위스콘신의 브루머라는 곳에 묻혀 있었다. 카치지안은 이 사실을 레이건에게 보고하고 연설문을 수정해야겠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이를 거부했다. 그 병사가 알링턴에 묻혀 있다는 전제하에서 근사한 표현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 대목을 고치려 하지 않으려 했다. 표현을 위해 사실을 희생시키는 수는 가끔 있는 일이지만 대통령 취임연설은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다.
       레이건이 아주 감동적인 취임연설을 한 직후 기자들이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서 트렙타우를 확인하니 위스콘신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비판적 기사를 썼다. 카치지안은 자신의 착오였다고 기자들에게 사과해야 했다. 레이건은 부하들이 써준 원고를 읽는 앵무새가 아니었다. 자신이 쓰든지 아래 사람들이 써 올린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연설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의 대통령이 소신을 담아 하는 연설은 역사를 움직인다. 



  •    12. 대처의 레이건 옹호
       '소련에 강온파가 있다는 주장, 강경정책이 강경정책을 부를 것이란 주장은 誤判이었다'
      
       소련과 동구공산권은 붕괴된 것이 아니라 西歐가 붕괴시킨 것이다. 이 작전의 助演인 마가렛 대처 영국 전 수상은 퇴임후에 회고록과 ‘국가운영술’(Statecraft)이라는 책을 썼다. ‘국가운영술’에서 대처는 對北정책에도 참고가 될 만한 충고를 많이 하고 있다. 그는 소련전문가들이 소련의 지도부를 강온파로 분류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지적했다. 전체주의 체제안에서는 의미 있는 정책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한때 한국의 전문가들도 북한 권력층 내부를 강온파로 나누고 김정일을 개혁온건파, 군부를 反개혁강경파라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黃長燁 선생은 “북한에서는 김정일만 결정권을 갖고 있는데 무슨 강경, 온건이냐”고 비웃었던 적이 있다. 전체주의의 속성을 실감하지 못한 자유세계의 지식인들이 흔히 범하는 자기식 분석법이다.
       대처 여사는 또 對蘇강경정책이 소련의 강경한 대응을 부를 것이라는 서구사회의 비판도 틀렸음이 확인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해선 안 된다, 안전을 원하면 위협을 해선 안 된다, 협력을 원하면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접근법은 완전히 틀렸다. 닉슨, 포드, 카터가 이끌던 미국이 데탕트 정책으로써 소련을 상대로 타협적으로 나왔을 때 소련은 군비를 증강하고 침략정책을 추구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여 군사적 優位, 체제경쟁, 그리고 소련의 침략에 대한 반격작전을 펴자 소련은 협조적으로 나왔고, 무장해제했으며, 마침내 무너졌다>
       대처는 이 책에서 소련을 誤判한 지식인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갈브레이스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경쟁을 하다가 보면 ‘수렴’(convergence) 현상을 일으켜 사회민주주의 체제로 변할 것이라고 터무니 없는 예언을 했다. 그는 1984년 소련의 경제가 도저히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는데도 소련방문기에서 “소련 시스템이 거대한 물질적 진보를 이룩한 것을 알 수 있었다”고 썼다.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는 소련이 大饑饉을 겪고 있던 1932년에 소련을 방문하고 “소련 사람들의 건강상태와 육체적 조건은 영국인보다 높다”고 말했다. 영국 문학가 조지 버나드 쇼는 “스탈린은 10년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물건들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영국 정치학자 해롤드 라스키는 “소련의 감옥은 수감자들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있을 정도로 좋다”고 썼다.
       대처는 이런 위선적인 지식인들이 공산주의가 붕괴된 뒤에도 그 공을 레이건에 돌리지 않는 것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행위”라고 비판했다. 대처는 “이들은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盲人이나 다름 없다. 이들은 국가개입이 진보를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란 사회주의의 환상에 중독되어 있었다”고 사정 없이 卑下했다.
      
       대한민국 헌법을 신념화해야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동서양의 지식인들은 대체로 공산주의를 비호하고 레이건, 李承晩 같은 자유투사들을 과소평가했다. ‘下人에게는 영웅이 없다’는 말이 있다. 영웅이 없다는 뜻이 아니고 영웅을 알아주지 못하는 下人의 안목을 경멸한 말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다.

    학살자 김정일을 편드는 한국의 지식인들은 통일 후에도 또 허황한 논리를 개발하여 자신들의 어리석은 誤判을 변명하려 들 것이다. 지식인들은 비판으로써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나 역사는 항상 참여자와 건설자의 몫이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전략은 理念이다. 理念은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自覺이다.
    즉 敵과 同志를 구분하게 해주는 가치관이다. 대한민국의 敵은 김정은이고 同志는 김정일에 반대하는 모든 한국인들, 그리고 미국과 일본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한국 국적자는 김정은을 公敵으로 보도록 강제하고 있다. 가장 큰 對北전략은 대한민국 헌법이다. 이 헌법 속엔 레이건 이상으로 공산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했던 李承晩 대통령의 자유민주적 신념이 들어 있다.

    한국인들이 헌법을 신념화하면 자유통일을 넘어서 일류국가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
    한국인들이 이념무장하면 경제력에서 한국의 44분의 1밖에 안되는 북한과 김정일을 갖고 놀 수 있다. 레이건이 소련을 그러했던것처럼.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