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일가족 10명과 목숨을 건 탈북.."돈보다 자유가 소중해"'반야월가요제'서 동상..알고보니 9살때 4만 관중 앞 노래부른 신동
  • 기내에 들어가니 승객들이 전부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저 때문에 한 시간 가까이 비행기가 지연됐기 때문이죠.

    자리에 앉자마자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비행기가 이륙을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쳤어요.

    "전 북한에서 온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제가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승객들도 일제히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어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죠.


    가수 백미경은 "지난 2006년 중국 해남도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당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벅찬 감격을 느꼈다"면서 "그때의 한 시간은 저에게 10년보다 더 길었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공항에 도착을 했는데, 정말 대한민국은 공기부터 다르더라고요. '이제 난 살았다'하는 생각이 들면서, 너무 감격스러웠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백미경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 2006년 일가족 10명과 함께 남한으로 건너온 탈북자다. 어머니는 피바다가극단 출신 가수, 오빠는 비행기 조종사로 복무를 한 상류층 집안 출신이다. 북한에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던 그는 97년 돌연 중국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그곳에서 8년간 조선족 윤씨로 지내던 백미경은 주위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유 대한의 품에 안겼다.

    북한에서도 손꼽히는 상류층 자제였던 그가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자유' 때문이었다. 누구보다도 자유로움을 꿈꾸던 백미경은 사방이 가로막힌 사회에서 벗어나, 보다 멀리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대륙으로 눈을 돌렸다.



  • ◆ "9살 때 4만여명 모이는 대극장서 독창"

    9살 때 평양에서 제일 큰 무대에 올라 독창을 했어요. 김일성이 태어난 4월 15일, 4만여명이 모이는 대극장에서 '청년축전'이라는 공연이 열리는데 거기에서 노래를 부른 거죠. 어머니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불렀고, 제 유일한 꿈은 나중에 커서 평양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것이었죠.


    어머니가 당대 최고의 가수였고 큰아버지가 북한 '최고 인민 대의원'인 백미경에게 거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출신성분'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최고 엘리트인 어머니와는 달리 아버지가 중국에서 태어난 까닭에 백미경은 중학교 시절 평양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됐다.

    소시적부터 유달리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노래도 공부도 제가 꼭 1등을 해야 직성이 풀렸어요. 그런데 평양에 가서 최고의 가수가 되겠다는 제 꿈은 15살 때 처참히 무너져내렸어요.

    평양에서 고위 간부가 내려와 외모부터 출신 성분까지 모든 걸 갖춘 학생들을 남녀 1명씩 선발했는데, 저는 최종 후보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어요. 아버지가 '중국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었죠.


    백미경은 "여기에선 '껌 좀 씹었냐'고 하던데 북한에선 이런 부류(비행청소년)를 '놀새'라고 부른다"며 "모든 게 무너져내린 상황에서 전 대책 없는 '놀새족'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정말 막 나갔어요. 제 정신이 아니었죠. 누가 뭐라해도 듣질 않았어요. 심지어 교장 선생님이 타일러도 '당신이 뭔데? 당신이 나를 책임질 것도 아닌데 왜 학교를 오라가라 하느냐? 졸업하면 나에게 뭘 줄 수 있느냐?'고 막 대들었어요.


    백미경은 "모든 게 좌절된 상태라, 혼나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며 "그때엔 겁나는 게 전혀 없는 '완전 통제불능'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어머니조차 자신이 다른 길로 빗나갈까봐 제대로 큰 소리도 못치는 상황이었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겐 다가가기 힘든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제발 졸업만 무사히 해다오. 졸업장만 가져오라'는 게 어머니 소원이었어요.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기였죠. 그때엔 아버지가 그렇게 밉더라고요. 제 꿈이 산산조각 난 게 다 아버지 탓이라고 여긴 거죠.

  • ◆ '고난의 행군'때 금-달러 암거래..한순간 쫓기는 신세 전락

    그토록 원했던 '평양 입성'에 실패한 백미경은 졸업 후 당에서 배정하는대로 '예술선전대'에 들어가게 됐다. 공연 차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던 중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그때부터 백미경의 인생은 180도로 바뀌었다.

    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로 북한의 모든 게 올스톱 됐어요. 생산품이 하나도 없고 배급이 두절 됐어요. 그러다보니 전 '달러 장사'에 눈을 돌리게 됐죠. 중국에서 온 달러를 원산이나 평양에 내다팔면, 300달러가 350달러로 되고, 700달러가 800달러로 되는 이문을 챙길 수 있거든요. 얼마나 신선한 장사입니까.


    상류층이었던 백미경의 집안도 '고난의 행군' 만큼은 피해갈 수 없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계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게 당시 북한의 현실이었다.

    저희 집안 사정도 대단히 안좋아졌지만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운좋게 달러 장사를 하게 됐고, 나중엔 간덩이가 부어서 금장사까지 했어요.

    북한은 검덕광산(檢德鑛山)이라는 곳에서 금이 나와요. 달러를 사서 금과 교환을 한 뒤 중국 사람에게 금을 되팔면 엄청나게 많이 남거든요. 그런데 금장사는 나라에서 금지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걸리면 감옥에 가는 정도가 아니고 총살감이에요.

    그때만 해도 총살 당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두려웠죠. 그런데 돈이 짭짤하니 그 유혹을 뿌리칠수가 없었어요. 한 발 들어갔다가 두 발이 되고 더 깊이 들어가게 된거죠. 물론 위험하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죠.


    당시 달러 장사에 금장사까지 손을 댔던 백미경은 상당량의 돈을 모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조심성이 없었던 백미경은 비싼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고급 장신구와 옷을 사입는 등 주위의 이목을 끄는 행동을 서슴없이 했다. 이같은 철없는 행동은 결국 엄청난 화를 불러왔다.

    어느날 엄마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저를 찾아왔어요. 보위부에서 내사가 붙었으니 빨리 피하라는 말씀이었죠. 그날밤으로 줄행랑을 친 게 두만강을 건너버린 거예요. 두만강은 초겨울이라 살얼음이 얼어 있었어요. 하지만 살얼음이고 뭐고 상관이 없었어요. 그냥 살얼음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죠.


    어렵게 국경 부근으로 다가가니 초소에 있는 경비병이 보였다. 백미경이 한 발 한 발 다가가자 경비병이 손전등을 얼굴에 비추기 시작했다. 눈이 부신 그는 경비병에게 불을 좀 줄여달라고 간청을 했다. 그런데 백미경은 군인을 보고 당황하기는 커녕,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인데, 앞이 보이지 않으니 손전등을 꺼달라"는 당돌한 부탁을 했다고.

    점점 다가가니까 한 사람인 거예요. 그래서 이건 되겠다 생각을 하고 이 얘기 저 얘기를 주고 받았어요. 저는 1백달러를 건네 주면서 "잠시 건너갔다가 3일 만에 돌아올건데 언제 몇시에 와야 당신을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저보고 빨리 오라는 거예요. 그리고 초소에서 비닐주머니 2개를 가져다 줬어요. 저에게 탈출하는 방법을 알려준거죠.


    북한 근로자의 평균 월급(약 3,000원)을 감안하면 1백달러는 꽤 큰 돈이다. 총을 겨누는 대신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경비병의 도움으로 백미경은 무사히 첫 관문을 통과했다.



  • ◆ 1백달러로 경비병 매수..무사히 국경 통과

    비닐주머니에 넣은 겉옷을 팔목에 두르고 내복 차림으로 국경을 통과한 그는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겉옷만 비닐주머니에 꽁꽁 싸서 넣고 나머지 비닐주머니까지 팔목에 감으라는 거예요. "속옷과 내복만 입은 채로 이 길로 직진하면 물이 허벅지까지 차 올라올 것이다. 3일 뒤에 초저녁 7시쯤에 다시 오라"고 하더군요. 솔직히 다시 올 길은 아니었죠. 무작정 건너가니 저 멀리 콩알만한 불빛이 보였어요.


    돌과 나무뿌리에 걸려 수차례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을 반복하면서 온몸은 금세 상처투성이가 됐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 한 시간 가까이 앞만 보고 내달리던 백미경의 눈에 자그마한 한옥집이 보였다. 국경 근처에서 봤던 바로 그 불빛이었다.

    한 40분 이상 가지 않았나 싶어요. 돌부리나 나무뿌리, 마른 갈대들을 헤치고 갔죠. 저기만 가면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계속 걸어갔어요. 도착하니 한 한옥집이 눈에 보였어요.

    제가 "저기요" 하니까 벌써 할머니께서 준비를 하고 나올 모습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워낙 탈북자들이 많이 오다보니 무슨 소리만 나면 준비를 하고 계신 거였어요. 불빛에 할머니가 오라고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백미경이 찾아간 한옥집은 운좋게도 탈북자들에게 호의적인 노파가 살고 있었다. 이 노파는 백미경의 발소리만 듣고도 그가 탈북자인 것을 직감했다. 손짓으로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 노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아랫목이 따뜻한 방안으로 안내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보니 팔목에는 빠져 나올 때 입으려고 묶어놨던 겉옷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내복은 칼날처럼 찢겨서 피부가 다 쓸리고 군데군데 깊은 상처가 났다.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안내를 받아 방안 아랫못에 앉아보니 팔목에 묶어 놨던 겉옷이 그냥 덜렁덜렁 달려 있었어요. 이걸 꺼내 입어야겠다는 생각도 미처 못했던 거예요. 겨울이다보니 속옷이 칼날처럼 찢겨서 피부가 다 쓸리고 상처가 났어요.

    피가 흘러내려 신발 안에는 피 반, 모래 반이었죠. 할머니가 건네 준 몸빼바지를 입고 아랫목에서 안정을 찾고 보니 저 한켠에 전화기가 보였어요. 그래서 할머니의 허락을 받고 중국에 있는 친척 분에게 전화를 걸었죠.


    백미경은 "마침 아버지의 형제들이 중국에 살고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안착할 수 있었다"며 "남은 과제는 보위부가 처벌하기 전에, 하루 빨리 남은 가족을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날이 밝기도 전에 사촌들이 저를 찾아왔어요. 아버지가 7남매이신데, 형제들이 다 중국에 살고 있었어요. 이렇게 저는 무사히 중국땅을 밟게 됐죠. 일단 제가 탈출했다는 게 북한에 알려지기 전에 우리 식구들이 다 탈출을 해야 했어요.

    보위부에서 내사 중이던 제가 탈출을 했으니 식구들을 가만히 두겠어요? 제가 탈출할 때(97년)에는 '탈북 러시'가 일어나기 전인 초창기였기 때문에 식구들이 잘못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사히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사실만 알린 뒤 가족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죠. 갖은 고생 끝에 가족 별로 서로 다른 루트를 통해 연변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처음엔 가족들을 연변으로 모으게 했으나 주위의 이목을 피해 하북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중국에서 가장 두려운 건 바로 조선족들의 밀고(密告)였다. 탈북자 신분이 노출돼 중국 공안에 붙들리면 십중팔구 북송자(北送者)가 됐다. 이에 백미경은 가급적 조선족들이 적은 지역으로 가족들을 이동시켰다.

    말이니까 이렇게 편하게 얘기를 하지. 들어올 때 겪었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연변에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3~4살짜리 조카들도 함께 왔는데요. 좀 불안하더라고요.

    중국에선 사탕을 '탕'이라고 하고 해바라기를 '꽈절'이라고 부르는데요. 우리는 북한말로 얘기를 하니 자연히 소문이 날 거 아니겠어요? 얘네들 어디에서 왔어? 이런 소문이라도 나면…. 그래서 다시 사람을 알선해서 보다 안전한 하북성으로 온 가족이 이주를 했어요.

  • ◆ "'양탕'이 죽어가던 아버지 살려"

    부단한 노력으로 3~4살짜리 조카들까지 무사히 국경을 빠져나왔지만 아버지의 소식 만큼은 통 들을 수 없었다. 생사 확인이 안돼 애를 태우던 중, 한 소식통으로부터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이후 백미경은 아버지를 중국으로 모셔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구출을 부탁한 사람에게는 "숨만 붙어 있으면 업어서라도 데려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아버지를 아직까지 못 모셔온 게 너무나 마음에 걸렸어요. 저는 연변쪽으로 다시 돌아가서 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하기 시작했죠.

    4번에 걸쳐 (북한으로)사람을 보냈는데 마지막 사람이 "아버지를 봤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만일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업어서라도 모시고 오라고 부탁을 했어요.

    겨우 사람을 구해 아버지를 모시고 나왔죠. 그때 아버지가 저를 보시고 한 첫 마디가 "너 고생 바가지 열렸다"고 저를 걱정하시더군요.

    이때 아버지는 한 30kg도 안 될 정도로 엄청 말라 있었어요. 사람이 굶어서 말라 죽는 게 이런 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땐 눈도 안뜨셨어요.


    어렵게 모셔온 아버지였지만, 당시 병색이 짙었던 그는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 상태였다. 일단 한의원이 있는 4층으로 모신 뒤 밤낮으로 극진한 간호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차도가 보이지 않았지만 두 달 정도 지나자 얼굴에 살이 붙고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일단 본인은 삶을 포기를 하셨던 거 같아요. 그냥 누워있는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으신 거 같더라고요. 저는 한의원이 있는 4층으로 이사를 했어요. 이사를 하고 나서 원장님한테 매일 한 번이라도 좋으니 아버지를 돌봐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저는 아침마다 일어나서 아버지가 살아계신지 확인을 하고 귀를 기울여 맥이 뛰는 걸 확인하곤 했죠. 전 "아버지 살아나셔야해요. 지금 돌아가시면 묻힐 데도 없어요. 사셔야해요"라고 혼자서 계속 얘기했어요.

    정말 눈물이 났어요. 그렇게 한 2개월이 지났을 거예요. 그동안 링거를 계속 맞고 있었는데 조금씩 살이 붙더라고요.


    어느날 퇴근을 하고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는 대뜸 '양탕을 먹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탈북 후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 그 길로 백미경은 양탕을 사다 이틀간 떠먹였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싹싹 비운 아버지는 기적같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백미경의 눈물겨운 노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어느날 2시쯤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양탕을 먹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길로 나가서 2시간 넘게 택시를 타고 온 시내를 다녀서 양탕을 구해왔어요. 양탕은 양고기와 양내장이 들어간 일종의 국밥이에요.

    만들어 드렸더니 처음엔 국물한 조금 드시다가 조금 더 달라시는 거예요. 그 전에는 죽만 드려도 바로 토를 했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만류를 했죠. 그런데 자꾸 더 달라고 하셔서 드렸더니 이번에는 안토하시는 거예요.

    속으로 살았구나했죠. 아버지가 드디어 살려고 하시는구나. 이틀간 내리 양탕을 다 드셨어요. 그 양탕이 아버지를 살린 거예요. 이렇게 아버지가 기운을 회복하시자 저는 하북성으로 모시고 돌아갔어요.

  • ◆ 상해서 '조선족 윤씨'로 의류사업 벌여

    온가족이 모이자 백미경에게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늘어난 식구들의 '먹거리'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그는 중국 사촌들에게 '인건비가 비싼 일 자리를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하북성에 1~2년 거주하며 현지 언어를 습득한 백미경은 대도시 상해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캐주얼 의류 공장에 취직했다. 남보다 빨리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성실함으로 2년을 버텼다. 그러자 회사 사장의 사모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뭐든지 원하는 게 있으면 도와주겠다'는 호의를 베푼 것. 백미경이 모처럼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어느 정도 말문이 트자 상해로 들어가 취직을 하게 됐어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캐주얼 의류 회사였죠. 저는 8시에 출근하라고 하면 7시에 출근하고, 퇴근도 30분 이상 늦게 했어요. 항상 제 자리 뿐 아니라 남의 자리까지 정리 정돈하는 모습을 보였죠.

    이렇게 2년 정도가 지나자 회장 사모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그때엔 '조선족 윤씨'라는 가명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살 때인데요.

    "미스 윤, 내가 뭐 도와줄 게 없을까? 원하는 게 있으면 솔직히 얘기해 봐"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저는 이게 기회다 싶어 "회사에서 생산하는 생산품을 저에게 원가로 주세요. 다만 지금은 돈이 없으니 나중에 후불로 드릴게요"라고 부탁을 드렸죠.


    당시 백미경이 다니던 공장의 옷들은 다른 곳에서 파는 게 엄격히 제한된 상품들이었다. 그러나 백미경은 "백화점에 대량으로 납품하는 게 아니라 소규모로 판매할 계획"이라며 사모를 안심시켰다.

    사모의 허락을 받고 품질 좋은 옷을 원가로 사들인 백미경은 이를 자신 만의 브랜드로 되팔았다. 이렇게 3~4년 장사를 하면서 수중에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당시에 구하기 힘든 자가용까지 소유하게 된 백미경은 상해에서도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의류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연변에서 잠깐 안면이 있었던 지인이 백미경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있다간 '조선족 윤씨'의 정체가 탄로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제가 연변에 있을 때 잠시 알고 지냈던 여동생이 상해로 일을 하러 왔는데 저를 알아 본 거예요.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잡아뗐지만 그 친구는 '코에 붙은 점부터 말투까지 언니같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저를 이상한 눈초리로 보더군요. 설마했는데, 결국 그 친구가 저를 고발했던 것 같아요. 같은 북한 사람인데 자기보다 잘 사는 모습을 보니 배가 아플 수도 있었겠죠.


    북한 동포의 고발로 파출소에 붙들린 백미경. 그는 수시간 동안 중국 공안에게 취조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이 된다해도, 말투가 완벽했고 '신분'에도 별 이상이 없었던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중국 공안은 '나중에 다시 조사하겠다'며 백미경을 풀어줬다. 구사일생으로 파출소를 빠져나온 백미경은 중국에서 계속 머물다간 북송 대상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파출소에서 몇시간 동안 저를 취조했지만, 별 다른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죠. 말투도 완벽했고 저는 어릴 때 죽어 '사망신고'를 안한 조선족 신분을 샀기 때문에 발각될 위험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파출소를 나오면서 '더 이상 이 나라에서는 못살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죠. 불길한 생각에, '돈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한국으로 가자'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 ◆ 中공항서 적발 위기..기적적으로 한국행 비행기 탑승

    발등에 불이 떨어진 백미경은 곧장 한국으로 들어갈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마침 한국 여권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백미경은 취득한 인적 정보로 또 다시 신분을 세탁했다.

    그 즉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어요. 여행사를 통해 알아보니 마침 저랑 나이가 비슷한 여자 중에 '여권을 팔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여권을 받아 소위 '얼굴 바꿔치기'를 했어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한국 여권을 갖게 된 거죠.

    당시 브로커는 '급조한 여권을 최소한 48~72시간 정도 서늘한 곳에 두라'고 조언을 해줬어요. 하지만 한 시가 급했던 저는 그날 저녁 베개 밑에 '위조 여권'을 깔고 잔 뒤 다음날 그 여권을 들고 시험삼아 해남도행 비행기를 탔어요.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문제가 없었죠. 자신감이 생긴 저는 한국으로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위조 여권을 갖고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구매한 백미경은 출국 수속을 밟기 위해 창구 앞에 줄을 섰다. 그런데 여권을 살펴보던 해남도 공항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남자 직원이 백미경에게 '줄 밖으로 나오라'고 외쳤다. 백미경은 '왜 그러냐'고 되레 큰 소리를 쳤지만 등에는 식은 땀이 줄줄 흘렀다.

    공항 직원이 제 여권 사진을 유심히 살피다가 갑자기 옆면을 보는 거예요. 옆에서 보니 여권사진이 약간 우글쭈글한 게 보였어요.

    남자 직원이 저보고 줄 밖으로 나오라고 했지만, 저는 중국말을 못 알아 듣는 척을 했죠.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라고 큰 소리를 치면서도 속으로는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등에는 식은 땀이 줄줄 흘렀죠. 온 몸이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얼굴은 태연한 척, 고도의 연기를 했어요.


    공항 공안 요원에게 붙들린 백미경은 한참 뒤에 (한국 측)사무장에게 인계됐다. 또 한 번의 위기를 넘는 순간이었다.

    공안 요원은 "이 사람은 한국 사람이니 한국으로 데려가서 처리를 하되, 여권은 틀림없이 문제가 있으니 자세히 조사를 해보라"고 사무장에게 말했어요.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한국행 기내에 들어가기만해도 사는 거잖아요? '이제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기내에 들어갔더니 사람들이 다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저 때문에 비행기 이륙이 한 시간 가까이 지연됐었거든요.

    자리에 앉았는데 갑자기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어요. 그때엔 닦을 생각조차 안했죠.


    백미경이 자리에 앉자마자 비행기는 이륙했다. 구사일생의 기쁨을 맛본 백미경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쳤다.

    전 북한에서 온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기다려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저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정말로 열심히 인생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비행기 안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모두들 박수와 환호로 백미경의 '무사탈북'을 축하했다. 백미경에게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여권 문제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다.

    '10년보다 더 긴' 한 시간을 중국 공항에서 보낸 백미경은 당당히 인천국제공항을 밟았다. 숨쉬는 공기마저도 한국은 달랐다.

    '자유 대한민국'에 발을 디딘 백미경은 들뜬 마음에 공항 직원을 붙잡고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알렸다. 그때만해도 탈북자가 그렇게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공항을 통해 입국한 탈북자라니…. 백미경의 등장으로 조용하던 공항 내부가 시끄러워졌다.

    '이게 대한민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기 자체가 달랐어요. 사람들이 줄지어 나가는 뒤를 무작정 좇아갔어요. 그런데 무전기를 찬 한 공항 직원이 보이더군요.

    저는 대뜸 북한에서 왔다고 저를 소개했죠. 놀라서 저를 돌아보는 그 분에게 다시 한 번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했어요.

    그랬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무전기로 어디론가 급히 연락을 하니 3~4분 후에 한 남성 분이 걸어오시더라고요.


    이때 백미경을 맞이한 남성은 국정원 직원이었다. 공항을 통해 당당히 입국한 탈북자의 신원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것.  

    그 분을 구석진 자리에서 만났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뭐하러 왔어?" 이러는 거예요. 전 기가막혔죠. 어렵게 탈출을 했는데…. 어찌나 그 말이 서럽게 들리던지.

    그래서 저는 "개처럼 살기 싫어서 왔는데, 뭐 잘못했습니까?" 이렇게 쏘아붙였어요. 그랬더니 그 분께서 "보아하니 북한에서 살만큼 살았던 것 같은데, 왜 내려왔느냐"고 묻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제 옷차림이 범상치 않았던 것 같아요. 보통 탈북자들은 유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옷이 다 헤지거나 몰골이 상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피부도 뽀얗고, 게다가 옷차림도 깔끔한 상태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상하게 보였을 거예요.

  • ◆ 퉁퉁 부은 다리, 대야에 담그고 자다 '물바다'

    백미경은 "하나원에서 3개월간 정착 교육을 받고 배정 받은 집으로 들어갔는데, 처음엔 태평양 한 가운데에 던져진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당시 최우선 과제는 역시나 중국에 머물러 있는 가족의 '귀환'이었다고.

    맨처음 중국으로 혈혈단신 건너왔을 때처럼 백미경은 10명의 식구를 데려오기 위해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과는 또 다른 한국 문화에 적응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는 달리 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당장 어떻게 살까. 누구와 얘기를 할까 걱정거리가 한 둘이 아니었죠. 일단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하나원 동료에게 들은대로 '벼룩시장'을 찾기로 했죠.

    '벼룩시장'을 뒤지면 그 안에 모든 게 다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갔어요. 나중에 '벼룩시장'이 무료 정보신문 이름이라는 걸 알고는 배꼽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나요.


    벼룩시장을 '진짜 시장'으로 오해한 것 외에도 월 4백만~6백만원을 준다는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려다, 나중에 '술집 접대부'를 뽑는 구인 광고라는 걸 알고 돌아선 일까지, 백미경이 소개한 '실수담'은 끝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만원'이라고 뜨는 거예요. 저는 교통카드처럼 만원을 어디에다 긁는 건 줄 알고 바로 내렸죠. 한참 동안 12층까지 걸어다녔어요. 지하철과 버스가 환승되는 것도 모르고 돈 아낀다고 몇개월 동안 걸어다닌 적도 있었죠.


    의류사업을 접고 '빈손'으로 한국에 들어온 백미경은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물정과 문화에 어두운 그에게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동네 주민들이 어리석은 질문에도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큰 낭패는 면할 수 있었죠. 수소문 끝에 불고기 집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선 홀서빙이나 불판닦이 같은 단순 노동을 했어요.

    생등심이 뭔지 갈비가 뭔지 알 턱이 없었던 저는 수일 동안 메뉴 읽는 법부터 배워야 했죠. 메뉴가 눈에 익자 본격적으로 홀서빙을 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손님들이 저를 매우 좋아해 주셨어요. 북한 사투리로 안내를 하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던 모양이에요.


    붙임성이 좋은 백미경은 금세 식당의 마스코트로 부상했다. 언제부턴가 백미경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식당을 찾는 손님들까지 생겨났다.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법. 식당 주인은 백미경이 온 이후로 손님들이 크게 늘어나자 시급을 두 배로 올렸다. 

    우리는 컵을 '고푸'라고 불렀어요. 용어부터 완전히 달랐죠. 그런데 말을 배우고나니 나름 재미가 있더라고요. 제가 신이 나서 일을 하니 주위 분들도 덩달아 북한사투리로 얘기를 하는 게 신기했던 모양이에요.

    나중엔 손님들이 저를 보기 위해 식당을 오기도 했어요. 반응이 좋아지자 사장님께선 시간당 5,300원이었던 제 임금을 1만원으로 올려주셨어요."


    작은 일이지만 최선을 다했다. 열심히 불판을 닦았고 몸이 부서져라 식판을 날랐다. 오전 9시에 출근, 오후 10시에 퇴근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백미경은 다시 새벽 4시까지 다른 곳에서 홀서빙을 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하루는 새벽에 돌아와 대야에 퉁퉁 부은 다리만 담궈놓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방안이 '물바다'가 된 웃지못할 사연도 있었다.

    가족 모두(10명)를 대한민국으로 데려 오는데 꼬박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자유를 향한 백미경 일가(一家)의 여정도 2009년경 마무리됐다. 탈북 이후 줄곧 앞만 보며 달려온 백미경은 비로소 자기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환경이 여유로워지면서 어린 시절 그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던 노래에 대한 열정도 다시 피어났다.



  • ◆ 호기심에 출전한 가요제서 동상 수상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직후 우연찮게 출전한 한 가요제에서 3위로 입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엔 재미삼아 출전을 했지, 제가 정말로 가수 활동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죠. 물론 이듬해 첫 앨범을 내긴 했지만 활동을 금세 접었어요. 남한의 연예 문화가 낯설기도 했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어요.


    백미경의 할아버지는 경상도 마산이 고향이었다. 백미경은 2006년 한국으로 건너온 뒤 아버지의 뿌리를 알고 싶어 마산을 검색하던 중 그곳에서 마산MBC와 마산시 주최로 '제1회 반야월가요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북한에서도 손꼽히는 실력파 가수였던 백미경은 최진희의 '여정'을 노래방에서 몇 번 불러본 뒤 곧장 본선 대회에 출전했다. 변변한 연습도 없이 출전한 대회였으나 당시 백미경은 전체 참가자(150명) 중 3위에 해당하는 동상을 수상했다.

    얼떨결에 가수협회 자격증까지 거머쥔 백미경은 이듬해 1집 '여보세요'를 발매하고 공연과 라디오 방송 위주로 잠시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만해도 '한국 문화'가 낯설었던 그에게 가수 활동은 시기상조였다. 백미경은 모든 활동을 접고 다시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가족들의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수면 아래에 잠자던 백미경의 '열정'을 깨운 이는 바로 어머니였다. 북한에서 '원조 국민 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백미경의 모친은 딸의 재능이 이대로 묻히는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결국 어머니의 권유로 다시 재기의 날개를 편 백미경은 '사천엑스포 행사'를 시발로 본격적인 가수 활동에 돌입했다.

    지난해 신곡 '사랑은 하나야'를 발매한 백미경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노래를 하는 '한국식 공연'의 참맛을 느끼는 중이다. 관객을 통해 무한한 에너지를 얻고 다시 힘을 내 노래를 부르는 과정 자체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고.

    '사랑은 하냐야'라는 곡으로 공연도 하고 행사도 다니고 있는데요. 한국에선 노래만 부르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교감을 하는 게 더욱 중요하더라고요. 3분이라는 시간 동안 저를 어필하고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점들이 많아요.

    제 공연을 보시면서 '북에서 힘들게 넘어온 애도 저렇게 즐겁게 사는구나. 나도 더 힘을 내야지'라는 용기를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 모두, 오늘보다 더 희망찬 내일이 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으로 지금 이 순간을 즐기셨으면 해요.

    앞으로도 가족과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가수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