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서 첫 시작 국채보상운동‥"일제 강제 차관 갚자"
  • ▲ 이날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대구지방보훈청
    ▲ 이날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대구지방보훈청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일제로부터 국권을 회복하고 경제적 독립을 지키기 위해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을 기념하는 '제108주년 국채보상운동 기념식'이 23일 개최됐다.

    이날 오전 11시 대구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상임대표 신동학) 주관으로 개최됐다.

    기념식은 오진영 대구지방보훈청장을 비롯해 권영진 대구광역시장, 주낙영 경상북도 행정부지사, 우동기 대구시교육감, 기념사업회원, 시민, 학생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채보상운동 취지문 낭독, 기념사, 축사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국채보상운동은 1904년 일제의 고문정치가 시작되면서 도입한 차관으로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이 중심이 되어 의연금을 모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 ▲ 국채보상운동당시 재현모습.ⓒ대구시 중구청
    ▲ 국채보상운동당시 재현모습.ⓒ대구시 중구청

    대한매일신보에 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해 2천만 동포가 금연을 통해 모은 돈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문이 발표되자, 전국의 남녀노소, 빈부귀천, 종교를 뛰어 넘어 일본, 미국, 러시아의 동포들까지 참여한 모금운동으로 확대되어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1907년 말부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탄압과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 추방 공작이 전개되고,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 총무인 양기탁에게 국채보상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씌워 구속하는 등 일제의 탄압이 가속되자 국채보상운동이 크게 위축되어 좌절되고 말았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3개월이라는 단기간 동안 전개되고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민족 자주독립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적인 운동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