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쓸모 있는 바보' 카터의 위선을 비판한 朴正熙

    그의 시건방진 훈수는, 미국에도 레닌이 말한 '쓸모 있는 바보'가 많고
    그 필두가 카터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反美로 먹고 사는 이석기 일당이
     自主를 내세우나 내면적으론 사대주의자임을 증명한다.


    趙甲濟   

     <맹자의 고사에 나오는 피음사둔(詖淫邪遁)이라는 말이 있다.
    “번드르한 말 속에서 본질을 간파한다.”라는 뜻이다.
    말과 글, 주장과 주의 속에서 도처에 숨겨진 함정과 
    그물에
    방심하면 자칫 당하기 쉬운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피청구인 주도세력과 북한의 각종 전술을 간파할 수 있는 능력 없이
    그들의 글을 읽고 주장을 이해한다는 것
    은 그들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위험한 일이다. 
    그들의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고 오도하는 광장의 중우(衆愚),
    기회주의 지식인·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영합 정치인 등과 같은,
    레닌이 말하는 '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하여야 한다.
    스스로를 방어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 결정문 중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의 보충의견)

     지난 18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설립한 카터 센터는,
    내란 선동  등 혐의로  기소되어 1, 2심에서 중형을 선고 받고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기다리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을 위해 대한민국 대법원에 성명서를 발송했다.
     카터센터는 '현재 상고심이 진행 중인 이 소송에서 제시된 사실들의 진위에 관해 언급하지 않겠다'며 '어떤 방식으로든 대한민국 내정에 간섭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전제했다.

    眞僞에 관해 모르겠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말은 무효가 된다.

     '이 의원에 대한 유죄 판결이 1987년 이전의 군사 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매우 억압적인 국가보안법에 의해 선고됐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보안법이 1987년 이후 개정되어 문제점이 해소된 사실을 모르는 지적이다.
     카터센터는 카터 전 대통령이 '한국이 아시아와 세계 정세에서 인권 지도자로서 필수적 역할을
    확대하려면, 국보법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인권에 관해 모든 한국 시민들이 온전히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논의할 수 있도록 기회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참으로 오만한, 그리고 無知한 훈시이다. 대한민국에서 국보법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이들은
    북한 공작원과 간첩, 그리고 종북반역자들뿐이다. 
  • 친북관계 카터와 사대주의자 이석기.
    ▲ 친북관계 카터와 사대주의자 이석기.
     이 성명서는 그러나 유용한 정보이다.
    미국에도 레닌이 말한 '쓸모 있는 바보'가 많고 그 필두가 카터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反美로 먹고 사는 이석기 일당이 自主를 내세우나 내면적으론 사대주의자임을 증명한다.
    강대국 인사에 구원을 요청하여 죄를 면해보자는 자들의 위선에 대법원도 웃을 것이다.  

     카터는 몇년 전 북한을 방문, 억류됐던 미국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를 데리고 왔으나
    김정일은 만나지 못하였다.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9년 9월17일 밤(현지시간)
    미국의 케이블 방송 `코미디 센트럴'의 정치풍자 코미디 프로그램인 `데일리 쇼'에 출연하여
    訪北 秘話를 털어놓았다. 
     '나는 웃지도, 찌푸리지도 않으려고 했다. 텅 비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려 했다.
    배우 피어스 브로스넌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007 어나더데이'에서 북한인이
    두 차례 成形(성형)수술을 받고 영국 왕처럼 나왔는데, (내가) 후속 작품의 오디션을 본 셈이다.
    나는 북한이 나의 방문을 받고 싶다고 말한 뒤 여기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인도주의적인 방문을 했다. 북한에 모욕은 주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젊은 여성들이 단지 강을 건넜다는 이유로
    12년刑을 선고받은 것이 괜찮다고 보여지지는 않도록 위엄있는 방법으로 일을 하려고 한 것이
     나의 행동 요령이었다.'
  •  클린턴 전 대통령은 在任시절 전 대통령 카터가 북한을 방문, 김일성과 개념없이 어울리는 데
    대하여 분노하였다고 한다.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카터와 반대로 행동하였다는 것이
    측근들의 증언이었다. 

     김대중,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김정일을 만났을 때 보여준 행동은 카터에 가깝다.
    韓民族에게 씻을 수 없는 민족반역적 범죄를 저지른 집단의 수괴와 만난다는 역사적 의미를 망각하고 희대의 학살자와 어울리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反共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국민교육은 그 순간 무너졌던 것이다.

     카터는 1994년 김일성을 만나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을 주선함으로써(김일성 사망으로 成事되지 않았다) 對北봉쇄망에 구멍을 냈다. 그는 1977년 취임하자 말자 朴正熙의 人權탄압을 비판하면서 징벌적 차원에서 駐韓미군 철수를 추진하다가 안팎의 반대로 포기한 적이 있다.
    그가 한반도와 관련된 역할을 할 때마다 한국에 손해를 끼쳤다.
    한국인 입장에선 좀 심하게 말하면 '재수 없는 인간'이다.
    人權을 좋아한다는 그는, 그리하여 노벨 평화상도 받은 그는 북한人權 탄압 문제에 대하여
    의미 있는 발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 또한 이런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받아야 할 이들에게 잔인하다.>(탈무드) 
  • 1977년 5월22일, 朴 대통령은 비서진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駐韓미군을 철수하겠다는
     카터를 비판하였다.

     “한국에 어떤 인권 문제가 있는가, 하고 미국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물으면
    그들도 대답을 못 합니다. 인권 침해란 법에 의하지 않고 재판도 하지 않고
    탄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헌법에 따라 3심을 거치고 그것도 공개리에
    외국 기자들한테까지 방청을 시키면서 法으로 확정해서 처벌하는 것을
    어떻게 人權 침해라고 할 수 있는가 말이오.

     지난번 울프 의원도, 스나이더 대사도 ‘카터가 한 얘기이니까 미국의 체면을 봐서
    제스처라도 해달라’고 내게 말했는데, 내가 제스처를 할 것이 있어야지.
    지금 잠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전에 민청학련 사건과 같이 개과천선하면
    사면될 수도 있는 것이오.

     反체제 사람들이 콧대를 높이는 것은 바로 미국 사람들 때문이야.
    미국이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낄 때라야 들어가 있는 사람들도 생각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놓아 줄 수 있지. 이 기회에 그 사람들의 사대근성을 뿌리 뽑아야 됩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근성을 버리지 않고는 진정한 자주독립 국민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동안 미국에서 反정부 운동하던 사람들, 李龍雲 前 해군참모총장이나 文明子 씨 등이 한
     근거 없는 말들을 미국은 그대로 언론에다 실었단 말이야. 駐韓미군이 東北亞(동북아) 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직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평화가 정착되거나 적어도 북괴를 확실히 능가할 힘이 생길 때까지
    駐韓미군이 있는 것이 좋지. 그러나 그들이 일방적으로 간다고 했소.
    한반도의 안보는 한국만의 책임인가? 韓美 양국의 공동 책임입니다.
    그들이 떠나가더라도 장비를 넘겨주고 공군력만 증강한다면,
    유사시에 우리 힘으로도 능히 敵을 막을 수 있어요.

     나는 월남사태 때 이미 駐韓미군 철수를 예상했어요.
    모든 정세로 보아 북괴가 남침해도 중국·소련이 병력 지원을 안 할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힘이 강해지면 오히려 중국·소련이 북괴의 남침을 견제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의 전술이지. 내년에 프랑스에서 장갑차 150대를 도입하고,
    가을에는 서해에서 미사일 시험 발사도 할 것입니다.
    이번에 하비브 美 국무차관이 오면 核을 가져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텐데,
    가져가겠다면 가져가라지. 그들이 철수하고 나면 우리는 核을 개발할 생각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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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에 無知했던 카터의 못난 짓들 

국제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자유진영이 승리하는 데 기초를 놓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과
마무리를 한 레이건 대통령은 공산주의를 惡으로 본 이념형 지도자였다. 

동맹국의 인권문제를 공격하면서 그보다 더한 독재체제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카터는 이념의 중요성을 모르는 위선자였다. 카터 대통령은 학살자 김일성에 대해서는 호감을 표시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유감이 많았다. 그는 朴 대통령의 인권탄압에 항의한다면서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강행하다가 군부와 행정부내의 반발을 불러 중단했다.

 박정희에 대한 그의 압박이 10.26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 

  • 그는 호메이니의 전체주의적 억압에 비교하면 온건했던 이란의 팔레비 왕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팔레비를 계속 압박하여 무너지는 데 한 몫을 했다. 동맹국의 지도자를 외면한 그는 호메이니로부터 감사의 표시는커녕 52명의 대사관 직원이 이란에 인질로 붙들리는 사태를 만났다. 이들을 구조하겠다고 나선 미국 특공대는 작전도 못해보고 주저 앉았다.
    이것이 1980년 선거에서 그를 낙선시켰다. 동맹국을 배신한 업보였다.
     카터의 못난 짓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의 동맹국 압박정책은, 김정일과 1, 2위를 다투는 짐바브웨의 독재자 무가베가 집권하는 길을 열었고,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트 공산정권이 집권하는 길을 또한 열었다. 

    그의 못난 짓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94년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중인 북한정권에 대한 봉쇄를 준비하고 있을 때 카터가 갑자기 방북하여 김일성과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더니 김영삼-김일성 회담 카드를 만들어 코너로 몰린 북한정권을 살려주었다. 이 회담 국면은 1994년 제네바 합의로 연결되었는데, 북한정권은 이 합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제2차 核위기를 일으켰다.

    카터는 한국인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 주한미군 철수계획, 김일성 편들기로 두 차례나
    우리를 괴롭혔다. 

    일부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이런 카터를 높게 평가한다.
    지도자가 이념, 즉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대한 自覺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國益을 망치고
    자신을 망치며 얼마나 우스꽝스런 짓을 하게 되는지 카터가 잘 보여주고 있다. 

    [ 2008-03-02, 2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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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핵실패 장본인 카터, 또 방북 의사 밝혀 
    홍관희 안보전략연구소장 '북한의 시간벌기에 끌려 다닐 것' 
    프리존뉴스 

    대북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핵 실패의 장본인으로 지목되어온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부시 행정부가 원하면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을 중재하기 위해 재방북할 용의가 있다고 밝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7일 ‘미국의 소리’(VOA)방송과 인터뷰에서 최근 북한으로부터 재방문 초청을 받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백악관이 동의한다면 북한을 방문 하겠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 측 관계자들로부터 북한이 이웃국가인 한국 등을 공격하지 않는다면 미국도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선언하고,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북측 관계자들은 미국이 경제재재를 해제하고, 북한이 국제사회에 흡수될 수 있도록 한다면 북한은 핵무기 제조를 다시 한번 중단하고 국제 사찰관들의 입국을 허용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언급했다. 

    그는 자신이 만난 북한 측 관계자들이 이 같은 약속을 하거나 또는 조건이 충족될 경우 이를 실행에 옮길 충분한 권한이 있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발언은 개인적 의견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시 대통령은 지난 2002년 북한을 ‘악의 축’을 이루는 나라로 지칭하고 직접대화를 중단했고, 이에 대해 북한은 핵시설에서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관들을 다시 추방하고 비밀리에 무기급 플루토늄을 개발하는 것으로 응답했다”며 현 미 행정부를 비난한 뒤, “이 때문에 북한은 이제 7~8개의 핵무기를 보유할 능력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 같은 주장에 대해 VOA는 “부시 행정부가 6자회담을 통한 다자간 협의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카터 전 대통령의 요구가 받아들여질지는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대북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난 94년 발생한 1차 북핵위기 당시의 김일성 카터 회동을 두고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전략에 말려든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당시 대북특사를 자임했던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과 담판을 통해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전면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와 중유를 제공하고 양측간 관계정상화를 추진하는 내용의 기본합의서 체결을 이끌어냈다.

    돈 오버도퍼 미 존스홉킨스대 국제학대학원(SAIS) 소장은 자신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94년 방북당시 카터가 전달해 온 북한의 핵동결 의사는 미국 내 친북한 학자들을 통해 미 정부에 이미 전달된 내용이었다”면서 “핵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먼 제안이었다”고 밝혔다.

    오버도퍼 소장은 이어 “IAEA 사찰관의 잔류 허용만이 새로운 내용이었으나 그것은 핵동결을 하자면 당연히 수반돼야 할 조치에 불과했다. 결국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달라진 것은 카터가 이를 생방송으로 발표한다는 사실뿐 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와 함께 소련의 압제에 항거하다 이스라엘로 풀려나 ‘The Case for Democracy’라는 책을 쓴 샤란스키(Natan Sharansky)는 '공산독재에 대한 자유세계의 투쟁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한 도덕적 인식'(Moral Clarity)'이라면서 카터 전 대통령의 나약함과 순진함을 비판한바 있다. 

    샤란스키는 “카터 전 대통령은 그 성실한 인권 지향 태도에도 불구하고, ‘평화’나 ‘안정’ 같은 명목 아래 악(惡)을 자행하는 독재자들의 허위와 위선을 간파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홍관희(전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원) 안보전략연구소장은 7일 <프리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카터의 방북은 미국과의 회담 중재를 핑계로 김정일 정권의 시간벌기에 끌려 다닐 수도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홍 소장은 이어 “국제사회의 일치된 단호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서 그의 방북은 6자회담에 대한 집중력만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핵 포기 의사가 없다. 그의 방북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김필재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기사출처: 프리존뉴스)

    [ 2006-12-07, 1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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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正熙를 미워하다가 존경으로 바뀐 카터 참모의 고백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趙甲濟 

    윌리엄 H. 오버폴트가 쓴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著者가 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터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戰略의 정당성에 설득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文化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文化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 신봉자들이 講壇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터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圖式的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人權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人權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으로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人權문제와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先行)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後進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西歐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正門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有化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넷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敵對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外資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朴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過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同時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國家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美軍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高位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키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오버홀터씨의 이 책은 중국에 관한 주요 저서로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朴正熙를 보는 시각의 교정을 통해서 이 세계를 보는 눈이 맑아져간 그의 과정은 감동적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