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국민은 뜨겁게 환영했는데, 교황의 한국 평가는 공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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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자 주]
    
    교황의 방한에 대해 거의 모든 언론이 찬사-찬양 일색의 보도를 쏟아냈다.
    교황의 발언에 대한 비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과연 그런가 하는 의문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가장 큰 쟁점은 교황이 한국사회를 인지하는 사고의 틀 문제다.
    이 점을 분석-비판하는 글들을 모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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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님, 질문 있습니다

     

  • ▲ 류근일 고문
    ▲ 류근일 고문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을 거부하기를 빈다
    .”

    생명이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을 경시하고,
    모든 남성과 여성과 어린이의 존엄성을 모독하는
    죽음의 문화를 배척하기를 빈다


    한국방문 당시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상의 강론에서 누가
    그런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죽음의 문화]를 추구하고 있다고 뜻한 것인가?
    한국의 경제모델과 문화패턴도 거기 포함되는가? 

    지나친 양극화는 탓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 80달러에서 3만 달러 직전까지 온
    그간의 한국의 고심참담했던 선택이
    [오로지 비난]만 받을 경우엔 그건 불공정하다. 
    그가 일반론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한국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말이다.   

    그의 강론을 듣자면,
    언뜻 왕년의 중남미 종속이론 강의를 듣고 있는 것 같다
    .
    1970~1980
    년대 종속이론은
    중남미 등 제
    3세계 민중이
    거대 다국적 자본과 토착 과두
    (寡頭) 지배층의 착취로 인해
    빈익빈
    (貧益貧)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가 만약 그런 중남미적 패턴을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도 똑같이 대입하려 했다면,
    그는 치명적인 인식의 오류를 범하는 게 될 것이다
    .
    한국의 산업화는,
    카르도수
    (cardoso) ()의 중남미 종속이론가들의 이론이 전혀 해당하지 않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공사례였기 때문이다
    .

     따라서 한국은 아무리 인색한 평자(評者)에게서라도
    적어도 이런 평가는 받아야 공정하다
    .

    한국은 지난 66년 동안 빛나는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성공 뒤에는 그늘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의 한국 젊은이들은,
    그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을 위해

    희망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
    .
    특히 그늘 중 그늘에 묻혀있는
    북한주민들의 천부인권과 행복추구권에 동참해야 한다
    .”


    한국 정부와 국민은,
    가톨릭 신자가 아닌 경우라도
    이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뜨겁게 환영했다
    .
    그러나 그런 한국-한국인
    의 역사적 보람이 
    교황에게서 
    페어(fair)한 가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결론은 이것이다.

    한국 현대사와 미래비전을
    종속이론적 기준에서 바라보면 잘못이
    다."


    신자유주의의 한계에도 물론 유의(留意)해야 하겠지만.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 ▲ 류근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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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경웅 칼럼] 마피아는 파문하면서 그보다 더한 북한정권엔 침묵

    교황의 위선! 역겹다

    북한동포는 평화-용서-구원의 대상도 아닌 듯




  • ▲ 류근일 고문
    ▲ 방한 중 아이를 만나 안아 올린 프란치스코 교황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

이 말씀은 예수님 메시지의 깊은 핵심을 드러낸다.


지난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떠나기 전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미사를 집전하며,
한반도에 전한 메시지 가운데 일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느님께 평화와 화해의 은총을 간구한다.
이 기도는 한반도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공명(共鳴)을 불러 일으킨다”
[용서]하라고 한 말이다.

그런데 누구를 용서하라는 말일까?

어뢰 기습공격으로 천안함 46명의 안타까운 목숨을 앗아간,
테러집단 김씨 왕조를?
민간인 거주 연평도에 포격 퍼부은 뒤 “남조선 괴뢰 잘못”이라고 떠들어 대던,
후안무치 김씨 왕조를?
300만 명을 아사(餓死)케 하고 사람을 기관총으로 쏴죽이며 호화사치 일삼는,
패륜 악마집단 김씨 왕조를?
세계 각지서 수천여 명을 북으로 납치하고도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 떼는,
범죄집단 김씨 왕조를?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내세우고 폭력을 일삼는 하마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불법무기 판매상 김씨 왕조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일정을 마치고 떠나기 전까지,
그에게 일말의 기대를 했었다.
인간의 권리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짓밟는,
세계 평화를 해치는 데 혈안이 된,
김씨 왕조를 향해 한 마디의 문제제기라도 있기를.

하지만 프란시스코 교황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결코 형제가 아닌 범죄집단을 향해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라”
고 했다. 


교황 “남북 관계는 형제”…남북 주민들은 형제, 김씨 왕조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태복음 18장 21절을 인용하면서,
남북 관계를 형제로 비교했다.
그러면서 “만약 우리가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무런 남김없이 용서하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께서는 전적으로 근원적인 무언가를 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용서야말로 화해에 이르는 문”이라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격언으로 들으면 정말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종교적 수사] 이상은 아닌 것 같다.

현실에서 그의 말처럼 했다가는,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
로 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김정은을 [형제]로 보고 [용서]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 ▲ 류근일 고문
    ▲ 김씨 왕조의 3대 두목 김정은. 그를 '형제'로 여길 대한민국 국민이 얼마나 될까? [자료사진]

  • 6.25전쟁 이후 지금까지,
    수백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들,
    수천 명이 넘는 납북자 가족들,
    남파간첩과 북한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유족 등
    다수의 우리 국민들은 김씨 왕조와 북한 주민들을 전혀 별개로 보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과거 15년 동안 [자칭 민주화 정권]들이 김씨 왕조에게 수 조 원을 퍼다 주고
    형제애를 발휘해 [끝없이 용서]를 했음에도,
    우리 국민이 그들로부터 돌려받은 것은
    어뢰 기습공격-무차별 포격-각종 비난과 비방-핵무기 개발 및 대남 협박과 위협이었고,
    이산가족과 납북자 가족의 애끊는 심정은 외면한 채
    그들을 [인질]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김씨 왕조를,
    왜 우리가 “아무런 조건 없이,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묻고 싶다.

    교황은 지난 6월,
    이탈리아 마피아를 [파문]하기 전에 그들에게 뭐라고 했었는가?

  • ▲ 류근일 고문
    ▲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에서 불법과 폭력, 악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다는 뜻을 계속 밝혀왔다. [사진: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방영화면 캡쳐]

  • “당신들이 갖고 있는 돈과 권력은 더러운 범죄로부터 나온 것이며
    이런 피에 젖은 돈을 내세(來世)로 가져갈 수는 없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회개하라.
    당신의 부모를 생각해서라도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라”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월 22일 이탈리아 남부의 마피아의 본거지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했던 말도 기억한다.

    마피아는 악의 숭배자이며 공동 善을 모욕하고 있다.
    모든 마피아 단원은 신과 교감하고 있지 않으며 ,그
    들은 파문됐다.


    그런데 왜 마피아보다 더한 악행을 저지른
    -300만 명을 굶겨 죽이고 수십만 명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박해하는-
    북한의 김씨 왕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건가?
    혹시 누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조언]했나?

    마피아를 향해 한 말을 그대로 김정은 일당에게도 해야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이다.

    북한정권 수뇌부(마피아)는 악의 숭배자이며 공동 善을 모욕하고 있다.
    모든북한정권 수뇌부(마피아 단원)는 신과 교감하고 있지 않으며,
    그들은 파문됐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교황’, 좌파에 우호적이라면…?


    무슬림과 무신론자에게까지 친절을 베풀고,
    권위와 체면 대신 빈자(貧者)와 [빼앗긴 자]들의 옆에 서면서
    큰 인기를 얻은 프란치스코 교황.

    카톨릭 신자가 아닌 한국인 대부분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렇게만 본다.

    하지만 바티칸 내부의 권력투쟁 구도에서 보면 어떨까.

  • ▲ 류근일 고문
    ▲ 한 해외언론이 설명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이야기. [사진: 벨레비젼 보도화면 캡쳐]

  • 프란치스코 교황은 <예수회> 출신이다.

    <예수회>는,
    16세기 군인 출신이었던 성직자 이그나시우스 로욜라가
    스페인에서 설립한 카톨릭 단체다.
    바티칸은 1546년 로욜라의 <예수회>를 인가했다.

    초창기 <예수회>는 [청빈](淸貧)을 내세우는 준군사조직에 가까웠다.
    이들은 카톨릭 선교를 위해 제국들의 식민지 침략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유명한 영화 <미션>에 나오는 신부들이 바로 <예수회> 소속이다.

    이와 함께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급속한 확산을 막기 위해
    종교재판-이교도 고문과 같은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20세기 중반부터 <예수회>는
    남미 지역에서 유행한 해방신학을 발전시키고 전파하는 주역이 됐다.

    80년대 엘살바도르 군부에게 암살당한 피터 마이어 신부,
    군부 정권에 맞섰던 로메로 대주교 등이
    <예수회> 회원이었다.
    이들은 해방신학을 신봉했던 카톨릭 성직자로 알려져 있다.

    [청빈](淸貧)을 내세우는 단체답게 [무산(無産)계급]을 도우려 했다고 설명하지만,
    냉전의 세계질서와 연결돼 결국 [반공주의]와 대척점에 서게 됐다.

    이들에 반대하는 단체가 바로 <오푸스 데이>였다.
    1984년 우리나라를 찾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트 16세 등이
    <오푸스 데이> 출신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8년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 신부가 설립한 <오푸스 데이>는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와의 전쟁을 위해 [반공주의]를 신봉했다.

    <오푸스 데이>는,
    폴란드 태생의 반공주의자 요한 바오로 2세의 도움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푸스 데이>는,
    나중에 비밀주의와 엘리트주의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지향점이 정반대인 <예수회>와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30년 동안 바티칸에서 [온갖 권세]를 누리던 <오푸스 데이>를 제치고 등장한
    [예수회 대리인]이라는 게 카톨릭 내부의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지난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가 설립한 서강대를 깜짝 방문해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예수회> 소속 신부들에게 했던 발언을 보면 이해가 쉽다.

    여러분은 지금 최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마지막 모험까지 다 채운 사람들이다.


    제주해군기지 반대에 적극 나서고 있는
    문규현 신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도 있다.

    “15일 밤에 한국 예수회 형제들을 찾아주신 교종.
    특히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다 구속-연행-부상-재판 등을 당해온
    강정 예수회 공동체 신부님들과 수사님을 격려하셨답니다.”


    프란시스코 교황의 방한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지금까지 <정의구현사제단>에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카톨릭 신부들이
    대부분 <예수회> 소속임을 보면,
    그들이 왜 북한 인권과 김씨 왕조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무신론자에게 “양심을 따르라”던 프란치스코 교황, 그의 양심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에 나라 전체가 떠들썩한 모습에 반감을 가진
    일부 개신교도들은,
    “2차 대전 때 나치에 협력하고,
    대량학살당한 유대인의 재산을
    몰래 스위스 은행으로 빼돌린 게
    카톨릭 교회”
    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나치의 만행과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에 침묵한
    바티칸의 [불편한 진실]을 꼬집은 것이다.

  • ▲ 류근일 고문
    ▲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이탈리아의 무신론자 언론인과의 대화에서 "신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 양심을 믿으라"고 말해 큰 호응을 얻었다. [사진: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 방영화면 캡쳐]

  •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정말 실망스러운 것은
    그가 다른 나라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관용과 연민]이
    한반도 북쪽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3년 이탈리아 언론인 에우제니오 스칼파리노가
    신문 지면을 통해
    “신은 자신을 믿지 않는 이들도 용서하는가”라는 공개 질문을 던지자,
    “신의 자비에는 한계가 없다.
    신앙이 없으면 양심을 따르면 된다”

    답했던게 교황이다.

    2013년 5월에는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매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데도

    고상하게 신학만 논하는 신자가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
    라고
    일갈했던게 교황이다.

    그런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에 왔다면,
    “수백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북녁땅에서 매일 인권탄압으로 고통받는데도

    고상하게 신학만 논하는 신자가 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
    라고
    일갈해야 하는 것 아닌가?

    휴전선에서 불과 50km 떨어진 서울까지 와서
    철조망 뒤에서 굶주림과 독재의 공포에 시달리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 문제에 대해
    그는 왜 단 한마디로 안하고 돌아갔을까?

    그렇게 침튀겨가며 역설한 [평화]와 [구원]과 [사랑]의 대상에서
    북녁땅 우리 동포는 열외라면,
    할 말 없을 뿐이다.

    그 위선에 속이 뒤틀려 역겹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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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은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도 없는 식민지 근성의 집단이다

    프란치스코 敎宗의 선전매체로 전락한 언론이 묵살한 사실들 


    사사건건 정부를 비판하다가
    프란치스코 敎宗의 선전매체로 전락한 언론이 묵살한 사실들

    정부는, 순교자를 기리는 행사를 조선조의 심장 앞에서 하도록 함으로써
    조상과 역사 앞에서 부끄러운 점은 없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은 언론은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도 없는 식민지 근성의 집단이다.

    趙甲濟   
  • ▲ 류근일 고문



  • 1. 한국 정부와 언론은 프란치스코 敎宗(교황)을 한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全知全能(지전능)하고 결점 없는 神처럼 대우하였다.
    사사건건 국가와 국군을 물어뜯던 언론은 교황의 訪韓(방한)에 즈음하여서는
    바티칸의 기관지처럼 선전에 충실하였다.
    反국가적 선동언론이 親교종 선전언론으로 변신하였다. 
      
      2. 거의 우상숭배 수준의 보도를 한 언론은,
     90%를 차지하는 非가톨릭 국민들까지 교종 추종자로 취급했다.
    오늘 동아일보의 1면 제목은 ‘큰 가르침, 잊지 않을게요’였다.
    이런 제목을 읽은 불교도, 개신교도, 無敎者(무교자)들의 마음은 어떨까?
      
      3. 박근혜 대통령도 교종을 대한민국 국가 원수보다 더 높은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 자세를 낮추었다. 공항으로 영접을 나가고 명동 미사에 참여한 뒤 환송하고, 국무총리까지 공항으로 보내 배웅하게 하였다. 천주교가 대한민국의 國敎(국교)인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過恭非禮(과공비례)의 극치였다. 
       
      4. 교종이 만나 격려한 사람들 중엔 국가의 정당한 정책 집행을 불법적으로 반대하고
    공권력을 부정하는 행동을 한 이들도 많았다. 언론은 이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국가가 교종의 방한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는데 교종은 國法질서에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5. 교종은 북한정권에 대한 비판, 北核(북핵)에 대한 우려, 북한동포들의 고통에 대한 동정은
    한 마디도 표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정권의 도발과 위협까지도 무한대로 용서하고
    인도적 명분의 對北(정권) 지원을 강화하라는 뜻으로 해석될 만한 발언을 했다.
    언론은 이를 비판하지 않았다. 
      
      6. 정부가 諡福式(시복식) 행사에 광화문 광장을 내어준 것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는, 종교 집회를 금지하였던 관례를 깬 것이다.
    둘째는, 경복궁과 광화문은 조선조의 상징 건물이란 점이다.
    경복궁은 천주교를 처단한 대원군이 지었다. 그 앞에서 순교자를 기리는 행사를 허용한 것이다. 교종 프란치스코는 시복식을 통하여 조선조를 벌 준 것인가, 과거를 용서한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조가 천주교를 학살하였다고 사과한 것인가?

       이른바 천주교 탄압의 원인엔 체제 문제가 있다.
    조상숭배를 제1 가치로 여기는 조선조가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反체제 세력을 억압한 것이다.
    일부 천주교 신도가, 淸(청)의 힘을 빌어 천주교도들을 보호하도록 해달라는 취지의 문서를 중국으로 보내려다가 발각된 것도 한 원인이었다(황사영 백서 사건).

    정부는, 순교자를 기리는 행사를 조선조의 심장 앞에서 하도록 함으로써
    조상과 역사 앞에서 부끄러운 점은 없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은 언론은 최소한의 민족적 자존심도 없는 식민지 근성의 집단이다. 
      
      7. 교종과 정부와 언론은 경쟁적으로 政敎(정교)분리의 원칙을 허물었다.
    교종이 세월호 유족들을 유달리 대우한 것은, 반사적으로 마치 정부가 그들을 핍박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해군기지 건설을 방해하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교종의 태도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형식을 빌어 內政(내정)에 간섭한 것이다.
    그러면서 거짓과 선동으로 국가와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자칭 정의구현사제단의 反종교적 행위에 대하여는 한 마디 경고나 사과도 하지 않았다.
    북한정권의 핵개발과 인권탄압에 대한 교종의 의도적 침묵은 한국의 천주교뿐 아니라
     교종 자신에게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생지옥의 문턱에서 그는 약한 자, 소외된 자, 억압받는 자를 외면하였다. 
      
      8.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천주교는 역사적으로 주권 국가의 독립성과 자주성과 항상 충돌하는 관계였다.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국민국가의 발전은, 바티칸의 부당한 간섭과 그 대리자 역할을 하는 국내 천주교 세력을, 국가 권력이 약화시켜가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한국 천주교는 日帝(일제) 시대엔 권력에 순응하면서 독립운동을 외면하고 神社(신사)참배에
    동참하였다. 대한민국이 서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니 천주교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
    교세를 넓히는 데 성공하였다.
    천주교는 그러나 한국 민주화의 핵심인 북한 인권 문제에는 소극적이고 거짓과 선동으로 反국가적인 행태를 보이는 일단의 사제들을 방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 온 교종은 천주교의
    문제들을 묵인하고 방조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9.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으로서 교황방한위원장을 맡았던 강우일 주교는 2009년 5월 16일,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한 호소’라는 제목의 글을 25개 성당에 배포하였던 이다.
    그는 “해군기지 건설을 중단할 것을 호소한다. 이는 제주도민을 위해서나 국민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주장했었다. 
       강 주교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라는 논평에서 <(교종께서는)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를 간절히 소망하시며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라고 못 박아 주셨습니다>라고 했다.
    교종이 말한 正義(정의)는 무엇인가? 북한정권의 만행은 무조건 용서하고, 핵미사일 위협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북한주민들의 고통엔 눈을 감고, 오로지 한국 안에서 부자들과 정부만 반성하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게 정의이고 평화이고 화해인가?
      
      10. 강우일 주교는 “교황이 직접적으로 비판을 하시지 않았지만 (그) 행간에 드러나 있는 우리나라 현실을 직시하고 지적하고자 한 것을 우리 국민들이, 우리 국가를 운영하는 분들이 깨닫고 좀더 국가와 사회에 화합을 창출해 나갈 수 있는 좋은 가르침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21세기 한국을 中世(중세) 유럽으로 착각하는 듯하다.

    한반도의 엄중한 현실을 잘 모르는 교종의 너무나 순진하고 오만한 처방을 국가 운영자들이
    따랐으면 좋겠다고? 종교가 정치를 지도한다?
    대한민국 헌법과 자유민주주의의 대원칙인 政敎(정교)분리를 어긴 발언이자,
    제주해군기지 반대자의 가당찮은 훈수이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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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 한국 천주교가 실천한다면, 대한민국 해체될 것

    신도는 순교해도, 민족과 국가는 순교할 수 없다!




    듣기 거북한, 교황의 너무 '순진한'(또는 오만한) 참견.
    악마에 대해서는 한 마디 비판도 하지 않고
    그 악마로부터 당하기만 하는 착한 사람들에겐
    "무조건 더 참으면서 용서하라"는 이 말을
    한국의 천주교가 실천한다면,
    대한민국은 해체될 것이다.


    趙甲濟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치보다 더 흉악한 북한정권과 유대인보다 더한 핍박을 받는 북한동포를 외면함으로써
    나치와 협력하였다는 비판을 받는 비오 12세보다 더한 과오를 저질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4박 5일간의 訪韓을 마무리하며 가진 오늘 오전 명동성당 미사에서
    [화해]와 [용서]를 강조했다.
    교황은,
    “오늘의 미사는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한 가정을 이루는이 한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
    라고 말했다.
     
    교황은 마태복음서를 인용,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도 했다.
     
    북한정권을 무조건 용서하고,
    對北(대북) 퍼주기를 계속하라는 권유로 들린다.

    그는,
    북한정권이 자행하고 있는 학살-핵무기 개발-강제수용소 운영-종교탄압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북이 같은 언어를 쓰니 형제로서 무조건 화해하라는 식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 ▲ 류근일 고문

    대한민국이란 공동체에 거짓과 미움을 퍼뜨리는
    자칭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경고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충고는,
    종교적 메시지임을 감안하더라도 공정하지 못하고 현실성도 없다.
     
    악마에 대해서는 한 마디 비판도 하지 않고
    그 악마로부터 당하기만 하는 착한 사람들에겐
    "무조건 더 참으면서 용서하라"는 이 말을
    한국의 천주교가 실천한다면,
    대한민국은 해체될 것이다.
    한반도의 엄중한 정세에 대하여 잘 모르는
    한 외국 종교인의 너무 순진한 충고라고 무시하면 좋겠는데,
    속은 불편하다.
     
    논리도 맞지 않다.
    개인 간엔 무조건적 용서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남북 간이나 국가 사이엔 불가능하다.
    베드로가 살던 2000년 전의 이스라엘과
    악당이 핵무기를 가지고 위협하는 한반도는 다르다.
    개인은 순교할 수 있지만,
    민족이나 국가가 순교할 순 없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
    아무데나 적용하면 안 된다.
     
    국내 문제의 해결을
    외국의 종교인에게 부탁하여 유리하게 해보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형적인 사대주의이다.
    이런 일에 종교가 앞장서면,
    국가와 不和하게 된다.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교황청의 부당한 간섭과 천주교의 대리 역할을,
    국가 권력이 배제해 가는 과정에서 발전하였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나치보다 더 흉악한 북한정권과
    유대인보다 더한 핍박을 받는 북한동포를 외면함으로써,
    나치와 협력하였다는 비판을 받는 비오 12세보다 더한 과오를 저질렀다.
    한반도의 현실을 誤判(오판)하도록
    그의 눈과 귀를 가린 사람들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여,
    반성 없는 이석기 일당을 선처해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낸 것도,
    이런 교황의 意中(의중)을 반영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생긴다.
    교황은 평화와 화해를 이야기했지만,
    진실과 正義(정의)가 결여된 평화와 화해는,
    분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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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프란치스코 교황 미사 全文.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저의 한국 방문이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저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나라에, 그리고 특별한 방식으로 한국 교회에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한 은혜들 가운데에서, 특히 지난 며칠 동안 아시아 전역에서 그토록 많은 젊은 순례자들이 이곳으로 와서 우리와 함께 한 체험을 제 마음에 간직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보여 준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 나라의 전파를 위한 열정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영감(靈感)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방문은 바로 이 미사 집전을 통해 마지막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 미사에서 하느님께 평화와 화해의 은총을 간구합니다. 이러한 기도는 한반도 안에서 하나의 특별한 공명(共鳴)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오늘의 미사는 첫째로, 또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한 가정을 이루는 이 한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 가운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청할 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지니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마태 18,19-20 참조). 그렇다면 온 민족이 함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청을 하늘로 올려 드릴 때, 그 기도는 얼마나 더 큰 힘을 지니겠습니까!
     
      오늘의 제1독서는 재난과 분열로 흩어졌던 백성을 일치와 번영 속에 다시 모아들이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은 희망으로 가득 찬 하나의 약속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바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고 계시는 미래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하나의 명령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께 돌아와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신명 30,2-3 참조). 화해, 일치, 평화라는 하느님의 은혜들은 이러한 회심의 은총과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심이란, 한 개인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의 삶과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마음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미사에서, 우리는 당연히 하느님의 이러한 약속을 한민족이 체험한 역사적 맥락에서 알아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분열과 갈등의 체험입니다. 하지만 회심을 촉구하는 하느님의 긴박한 부르심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도 하나의 도전을 제시합니다. 그 도전은, 참으로 정의롭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는 데에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얼마나 질적으로 기여했는가를 점검해보라는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여러분 각자가, 개인으로서 또한 공동체 차원에서, 불운한 이들, 소외된 이들, 일자리를 얻지 못한 이들, 많은 이가 누리는 번영에서 배제된 이들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복음적 관심을 증언하는가에 대하여 반성하도록 도전해 옵니다. 또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또 한국인으로서, 이제 의심과 대립과 경쟁의 사고방식을 확고히 거부하고, 그 대신에 복음의 가르침과 한민족의 고귀한 전통 가치에 입각한 문화를 형성해 나가도록 요청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이 말씀은 화해와 평화에 관한 예수님 메시지의 깊은 핵심을 드러냅니다. 그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날마다 기도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정직한 기도를 바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용서야말로 화해로 이르게 하는 문임을 믿으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형제들을 아무런 남김없이 용서하라는 명령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전적으로 근원적인 무언가를 하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은총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불가능하고 비실용적이며 심지어 때로는 거부감을 주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당신 십자가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고 또한 그것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분열의 간격을 메우고, 모든 상처를 치유하며, 형제적 사랑을 이루는 본래적 유대를 재건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한국 방문을 마치며 여러분에게 남기는 메시지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힘을 믿으십시오! 그 화해시키는 은총을 여러분의 마음에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은총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여러분의 집에서, 여러분의 공동체들 안에서, 그리고 국민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힘차게 증언하기를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또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함께, 그리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선의의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 이루는 우정과 협력의 정신 안에서, 여러분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누룩이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기도가 이제 더욱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려져, 그분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로 마침내 우리 모두가 열망하는 고귀한 선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대화하고, 만나고, 차이점들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기회들이 샘솟듯 생겨나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또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 관대함이 지속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한국인이 같은 형제자매이고 한 가정의 구성원들이며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널리 확산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저는 이제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대통령님과 정부 당국자들과 교회 관계자들에게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방문이 이루어지도록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움을 주신 모든 분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특별히 복음에 봉사하기 위하여, 또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건설하기 위하여 날마다 일하고 있는 한국의 사제들에게 직접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사절로서, 또 그분의 화해시키는 사랑의 직분을 맡은 사람으로서(2코린 5,18-20 참조), 존경하고 신뢰하며 조화롭게 협력하는 유대를 여러분의 본당 안에서, 여러분 사제들 사이에서, 그리고 여러분의 주교들과 함께 계속 이루어 나가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한 여러분의 남김 없는 사랑의 모범, 여러분 직무에 대한 충실성과 헌신,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애덕 가득한 관심으로, 이 나라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한 노력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돌아오라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큰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땅 위에 우리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부디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화합과 평화를 이루는 가장 풍요로운 하느님의 강복 속에서 참으로 기뻐하는 그 날이 오기까지, 한국에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 그 새로운 날의 새벽을 준비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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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訪韓 교황, 아직 북한 인권 문제 언급 안해
     
      교황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이어 북한 人權 탄압 문제에도 '침묵의 죄'를 지을 것인가? 지옥의 문턱인 한국 땅에 와서도 北韓人權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趙甲濟
      
       프란치스코 교황은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한국이 현재 여러 갈등을 겪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朴槿惠(박근혜) 대통령과 공동연설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더 나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 정의롭고 번영한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교황은 그 뒤 여러 행사에서도 평화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세월호 사고 유족들을 위로했지만, 유독 북한 人權(인권) 탄압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2차 대전을 前後(전후)하여 在位(재위)하였던 교황 비오 12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침묵하였다고 해서 지금껏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겉으론 나치와 협력하는 척했으나 뒤로는 유대인을 많이 구출했다는 주장도 강하다.
      
       한국의 천주교나 로마 교황청이 나치보다 더한 북한정권에 대하여, 특히 그자들의 북한동포 대학살에 대하여 의미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했다는 기억이 없다. 나치에 대한 침묵보다 더한 過誤(과오)로서 두고두고 큰 汚點(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 천주교의 일부 세력은 한국의 보수정권이나 공권력의 정당한 법집행에 대하여 극렬한 비판을 쏟아놓는다. 추기경은 천주교의 대표 자격으로 북한정권 추종 범법자들을 선처해달라고 법원에 탄원서까지 냈다. 한국 천주교가 최소한의 균형 감각이 있다면 북한정권의 인간도살, 탈북자 문제, 강제수용소에 대하여 같은 수준의 비판을 했어야 하는데, 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치에 대한 침묵보다 더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나치즘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였던 교황 비오 11세는 이들에게 굴종하는 자세를 '침묵의 음모'("conspiracy of silence")라고 표현했다. 그가 살아 있다면 오늘의 천주교에 대하여 같은 한탄을 하지 않을까?
      
       북한정권의 人權탄압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당시엔 비밀이었던 것과는 달리 유엔 등의 조사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안이다. 몰랐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황이 지옥의 문턱인 한국 땅에 와서도 北韓人權 문제에 대하여 침묵한다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천주교 역사에서 '방관의 죄'(힘 있는 사람의 방관은 동조이다)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교황의 訪韓(방한)은 기회이자 위기이다. <잔인한 자를 동정하는 자는 동정 받아야 할 사람에게 잔인하다>는 탈무드의 말이 하나의 경고이다.
      
       나치, 북한정권, 스탈린 같은 흉악하고 명백한 惡(악)에 대하여 교황과 천주교는 애매모호한 언어가 아닌 명백하고 단호한 語彙(어휘)를 구사, 경고할 의무가 있다. 북한인권탄압에 대한 교황의 엄중한 경고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한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천주교의 首長(수장)으로서, 그리고 수용소 群島(군도) 북한으로부터의 비명과 신음을 들을 수 있는 서울에서 절대로 침묵할 수 없는 사안이다. 全知全能(전지전능)한 하느님의 힘을 동원할 수 있다는 교황의 관심은 수많은 사람들을 구출할 수 있기 때문에 북한인권탄압에 대한 그의 경고는 선택이 아닌 의무이다. 만약 교황이 이런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둘러싼 '人의 장막'을 의심할 권리를 갖게 될 것이다.
      
       다음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오늘 청와대 연설 全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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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님, 존경하는 정부 공직자들과 외교관 여러분, 친애하는 벗들이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 오게 돼 매우 기쁩니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게 돼서, 또 한국의 국민과 그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의 아름다움을 접하게 돼서 기쁩니다.
      
       이 민족의 유산은 오랜 세월 폭력과 박해와 전쟁의 시련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대낮의 열기와 한밤의 어둠은, 정의와 평화의 일치를 향한 불멸의 희망을 품고 있는 아침의 고요함에 언제나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희망은 얼마나 위대한 선물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이 목표들을, 한국 국민만이 아니라 모든 지역과 세계를 위해, 결코 좌절하지 말고 추구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를 드립니다. 대통령님과 정부 요인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외교관 여러분에게, 국가 공직자들과 군 관계자들에게 그리고 저의 방한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금방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저의 한국 방문은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를 계기로 해 이뤄졌습니다. 이 대회는 이 광대한 아시아 대륙에서 모인 가톨릭 청년들이 그들의 공통 신앙을 경축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또한 이번 방한 중에 그리스도 신앙을 위하여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품에 올릴 것입니다.
      
       한국의 문화는 연장자들의 고유한 품위와 지혜를 잘 이해하며, 사회 안에서 그분들을 존경합니다. 우리 가톨릭 교우들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선조들을 공경합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른 진리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온전히 하느님과 이웃의 선익을 위하여 사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지혜롭고 위대한 민족은 선조들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젊은이들을 귀하게 여깁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전통과 유산을 물려받아 현재의 도전들에 적용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청년 대회와 같이 젊은이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는, 우리 모두가 그들의 희망과 관심사를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들을 다음 세대에 얼마나 잘 전해 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떠한 세상과 사회를 그들에게 물려주려고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라는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평화라는 선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게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부재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온 이 땅 한국에서는, 이러한 호소가 더욱 절실하게 들릴 것입니다.
      
       저는 한반도의 화해와 안정을 위하여 기울여 온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할 뿐입니다. 그러한 노력만이 지속적인 평화로 가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평화 추구는 이 지역 전체와 전쟁에 지친 전 세계의 안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우리 마음에 절실한 대의입니다.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특별히 여러분 중에서 인내를 요구하는 외교 활동에 종사하여 인류 가족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더 큰 도전입니다. 이는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입니다.
      
       외교는 가능성의 예술이며, 평화란 상호 비방과 무익한 비판이나 무력시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로 이뤄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 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하나의 덕목으로서 자제와 관용의 수양을 요구합니다.
      
       정의는 우리가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으로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합니다. 정의는 상호 존중과 이해와 화해의 토대를 건설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유익한 목표를 세우고 이루어 가겠다는 의지를 요구합니다.
      
       우리 모두 평화 건설에 헌신하며,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평화를 이루려는 우리의 결의를 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벗들이여, 여러분은 국가와 정치의 지도자로서 궁극적으로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더 나은 세상, 더 평화로운 세상, 정의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경험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점점 더 세계화되는 세상 안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선진국처럼 한국도 중요한 사회 문제들이 있고, 정치적 분열, 경제적 불평등, 자연 환경의 책임 있는 관리에 대한 관심사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과 대화와 협력을 증진시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 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그들의 절박한 요구를 해결해 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간적, 문화적으로 향상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계속 강화되기를 희망하며, 오늘날 절실히 필요한 '연대의 세계화'에서도 이 나라가 앞장서 주기를 바랍니다. 연대의 세계화는 모든 인류 가족의 全人的인 발전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25년 전에 한국을 두 번째로 방문하시면서, "한국의 미래는 이 국민들 가운데 현명하고 덕망 있고 영적으로 깊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함께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오늘 저는 한국 가톨릭 공동체가 이 나라의 삶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계속 열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이바지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려는 정신이 자라나게 해, 새로운 세대의 국민을 양성하는 일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이들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고 자신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전망으로 국가가 당면한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기꺼이 이바지할 준비를 갖출 것입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의 환영과 환대에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한국인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특별히,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의 위대한 보화인 연장자들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우리 미래의 희망인 젊은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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