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쫓는 정무적 판단 결여, 대통령 의중 못읽고 호위만 열중
  • 예민하다. 그런듯 아닌듯, 알듯말듯한 기색만 비친다.
    7.30 재보선 이후 여당과 청와대의 표정이 꼭 그렇다.

    비박계 주자로 당권을 움켜진 김무성 대표.
    선거 비관론을 내팽개치고 재보선을 승리로 가져갔다.
    또 여세를 몰아 그동안 상하관계에 가까웠던 당청간 관계를 수평적으로 바꿀 것을 선언했다.

    반대로 세월호 이후 인사 참사를 거치며 흔들리던 박근혜 정부와 청와대.
    재보선 여당 승리 이후 가까스로 숨을 돌리며 국정동력을 회복하려 한다.

    2기 내각 최대 국정과제로 경제활성화를 내세운 청와대 입장에서는 '수평', '평등'을 앞세운 여당의 입김이 탐탁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여당에 각을 세워 '엇박자'를 내는 건 더 조심스럽다.

    여당의 선거 승리가 야당의 자충수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평가 때문이라도 당청간의 갈등은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이다.

  • ▲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 뉴데일리
    ▲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는 박근혜 대통령 ⓒ 뉴데일리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서로가 너무 조심스러워하는 나머지,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서로간의 경계심만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가 그렇다.

    윤 일병 사고로 시끄러웠던 지난 3일.

    김무성 대표는 긴급 당 최고위원회 간담회에 한민구 국방장관을 불러 사태 파악이 늦고 조치가 부족했던 점을 매섭게 비판했다.

    커다란 덩치의 김 대표는 국방장관 앞에서 책상을 내리치며 "천인공노할 일"이라며 분노를 쏟아냈고, 한 장관은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주요 언론은 이 사건을 다음날 헤드라인으로 다뤘다.
    국민들은 정치권이 윤 일병 사건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청와대는 김 대표의 과격한 행동에 발끈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4일 오전 브리핑에서 "윤 일병 사건과 관련해 육군 고위직 인사까지 문책을 하겠다는 기사가 보이는데 진상규명이 우선돼야 하고 재발하지 않도록 부모가 군대를 안심하고 보낼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이런 '선(先) 진상조사, 후(後) 문책' 입장은 당장 논란을 일으켰다.

    이미 사망 사건 전말이 드러났고 '천인공노할 짓'이라는 여당의 호통이 나온 상황에서 청와대가 '더 자세한' 진상조사를 언급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일부에서는 고압적인 김무성 대표의 태도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인 장관 인사권(문책)까지 여의도(국회)에서 건드리려 한다는 반감이 작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윤일병 사고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에 대한 비호 본능이라는 얘기도 나돌았다.

     

  • ▲ 김무성 새누리당 당대표 ⓒ 이종현 기자
    ▲ 김무성 새누리당 당대표 ⓒ 이종현 기자


    하지만 이런 당청간 힘겨루기 양상은 다음날인 5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으로 구도 자체가 깨져버렸다.

    "있어서는 안 될 사고로 귀한 자녀를 잃으신 부모님과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마음이 참담하다. 수십 년 동안 군에서 계속 이런 사고가 발생해 왔고, 그때마다 바로잡겠다고 했지만 또 반복되고 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어떤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차원에서도 일벌백계로 책임을 물어 또 다시 이런 사고가 일어날 여지를 완전히 뿌리 뽑기 바란다."

    박 대통령의 발언은 상당히 무거웠고, 철저한 책임자 처벌을 주문했다.
    국무회의에 참석한 한민구 국방장관은 "송구하다"며 재발방지 대책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날 박 대통령의 책임자 문책 방침이 있는지 불과 7시여만에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이 사의를 표명하는 등 군수뇌부 문책론은 현실화됐다.


    박 대통령의 의중 역시 김무성 대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청와대 홍보수석실과 대변인은 오히려 지레 짐작으로 여당 대표와 각을 세우는 청와대 입장을 내세운 셈이다.

    여당 역시 전날 청와대 선 진상조사 입장이 오히려 여론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이 될 것을 우려했다.

    여권 관계자는 "국민이 공분하는 이번 사건에 김무성 대표가 다소 수위가 높은 호통을 치면서 분위기를 이끈 측면이 있는데 이를 청와대가 매우 냉랭하게 논평하면서 분위기가 나빠질 수 있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청와대의 안이한 인식은 긍정적으로 돌아서려는 여론을 자칫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 ▲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 연합뉴스
    ▲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 연합뉴스


    청와대의 이런 헛발질은 지나치게 대통령을 보호하고 옹호하려는 과잉충성 태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지적이 많다.

    발생한 사건의 문제성과 여론을 고려하는 정무적 판단이 아닌 대통령에게 피해가 되는 일을 1차적으로 차단하는 호위적 대응이 원인이라는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사건을 결코 가볍게 보는 분위기는 아니다"라면서도 "다소 예민한 시기고 대통령의 국정수행 동력을 우선시하다보면 생길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이에 대해 "문책보다 진상조사가 먼저라는 입장은 4일 오후 한민구 국방장관이 재조사에 따라서 처벌하겠다는 대국민 사과 이후 그 기조로 가는 것"이라며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도 그 같은 선상"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