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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실리콘밸리에 '카이스트 分校' 만들어야"

입력 2014-06-02 09:36 | 수정 2014-06-03 02:06

김정주 회장이 세계3대 게임회사 넥슨을 창업한 계기는



▲ ▲ 5월 31일 넥슨 사옥에서 열린 홈커밍데이 ⓒ뉴데일리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分校 만들어야


카이스트 이광형 교수 연구실 졸업생들은 매년 한 번씩 홈커밍데이 행사를 연다.
창업한 졸업생 중 돌아가면서 자기 회사로 초청해서 모임을 갖는다.

올해 홈커밍데이는 세계 3대 인터넷게임 회사로 성장한 넥슨(NEXON)에서 5월 31일 열렸다.
올 홈커밍데이는 특히 이광형 교수가 환갑을 맞는 해이다 보니, 평소보다 규모가 커졌고, 외부 인사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판교에 자리잡은 넥슨 사옥은 1층은 주변 사람들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해놓았다. 사옥 안에 있는 어린이집은 “한국에서 아마 가장 좋을 것”이라고 안내를 맡은 넥슨의 한 사원은 말했다. 

넥슨 사옥에서 그래도 주의해서 봐야 할 장소는 1층에 자리잡은 강당일 것 같다. 강당 이름을 1994 Hall로 지었다. 1994년은 이광형 교수 제자인 김정주 학생이 넥슨을 창업한 해이다.

김정주 회장은 이광형 교수 연구실에서 가장 중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첫 번째 들어간 연구실에서 적응을 못하던 김정주 학생은 이광형 교수 연구실로 옮기면서 하고 싶었던 게임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을 뿐 아니라, 게임회사도 차렸다. 이광형 교수 제자 시절 시작한 넥슨이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이광형 교수가 전산학과 시절 유난히 그의 연구실을 거쳐간 학생들 사이에 벤처기업을 창업한 학생들이 많았다. 이들 기업들은 지금 약 2조5,000억원의 연매출을 내고 약 7,000명을 고용하는 열매를 거뒀다.

학생 창업 이야기를 하면서 이광형 교수는 “실리콘밸리에 카이스트 분교 만들어서 학생들을 미국회사에 인턴사원으로 보내 훈련시켜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산학과 시절 자기 제자 중 유난히 창업한 학생이 많은 것은 재학 중 이들에게 실리콘밸리로 연수시킨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이 교수는 “20년전부터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캠퍼스를 조성하려 했으나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 창업하는 제자들을 길러냈을까?
지도교수가 자상하고 상세하게 잘 이끌어서 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아니면 이 교수 만의 어떤 비밀스러운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궁금할 것이다.

“비교적 제 연구실은 학생들을 자유방임형으로 다뤘어요. 사실 제가 잘 모르니까 잔소리도 안 했죠. 어떻게 내가 학생보다 잘 안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어떤 연구실은 학생 생활까지 세심하게 깐깐하게 지도하는데, 우리는 학생 생활관리 이런 것도 안 했죠.”

이 교수는 다른 연구실은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거의 모든 연구실이 비슷할 줄 알았다.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잔소리 안하고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북돋워준다는 소문이 퍼졌나 보다. 대학에서 연구실이란 한 교수기 이끌고 있는 연구팀을 말한다.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아있던 박사과정 1학년이던 김영달 학생이 물었다.

“어느 교수님 연구실에 있는 2명이 하도 연구가 잘 안 되고 야단 많이 맞아서
나오려고 하는데 우리 연구실로 오라고 하면 어떨까요?”

“누군데?”

김정주 김병학이라는 학생이에요.
잘 하긴 하는데 자유스러운 것을 좋아하니 우리 랩(연구실)에 왔으면 해요.”

“그래? 그럼 오라고 그래.”

일반적으로 대학원에서 학생이 연구실을 바꾸는 것은 매우 민감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지도교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항상 지도교수의 눈치를 봐야 하는 학생의 입장에서는 떠나겠다는 말을 꺼내기 어렵다. 또한 새로 맞이하는 지도교수는 학생을 빼오는 듯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어느 누가 먼저 말을 꺼내기 어려운 사안이다.

더욱 어려운 것은 지도교수를 바꾸려면, 현 지도교수와 새 지도교수가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한다. 이러한 서류 작업은 학생을 구속하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현 지도교수가 싫어서 떠나는데, 현 지도교수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리고 허락하지 않으면 떠날 수 없다는 모순도 있다. (카이스트에서는 최근에 현 지도교수의 사인을 생략할 수 있게 바뀌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일반적으로 학과장이 개입하여 중재하게 된다. 관련자들을 면담하여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학과장이 중재하고 허가한다. 자기 연구실에서 학생이 나가는 것을 좋아할 교수는 없다. 이때도 학과장이 ‘학생을 왜 두 명씩이나 빼가느냐’는 식으로 물었다. 그게 아니고 학생들이 희망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서 두 학생이 연구실을 옮겼다.


제멋대로인 학생 불러 품었더니


어느 사이에 이광형 교수 연구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방임형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생물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박종만 군이 이광형 교수를 찾아왔다. 생물과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의 컴퓨터인 바이오 컴퓨터에 도전해 보겠다고 말했다. 즉 단백질로 구성되어 단백질에 의하여 작동되는 컴퓨터를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연구원을 있게 해달라고 했다. 박종만 군도 아마 자유방임형 연구실을 찾아 왔을 것이다.

박종만 군은 약 1년간 이것 저것 만지작거리더니, 아담소프트라는 회사를 만들고, 사이버 가수를 탄생시켰다. 단백질 컴퓨터 대신에 사이버 가수 아담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사이버 가수였고 한때 많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몇 년 뒤1998년경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래시계의 작가 송지나 선생이 찾아왔다. 과학을 소재로 드라마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새끼 작가 4명을 데리고 왔다. 견습하는 문하생 작가를 새끼 작가라 불렀다. 카이스트에 와서 여러 학생들을 만나서 말을 들어봤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를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 하던 중에 학생들이 이광형 교수를 만나보라고 하여서 왔다고 했다. 이때도 학교 내에서 이광형 교수는 약간 돌발적인 교수로 소문이 나 있었던 것 같다.

연구실에서 한참 이야기 하다가 점심 먹으러 갔다. 갈비탕을 먹으며 송지나 작가가 말했다. 이제 드라마를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주인공 교수의 모델을 찾았으니, 이제 스토리가 만들어 질 수 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드라마 카이스트>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광형 교수는 작가들과 대화하며 소재를 제공하고, 거의 매주 드라마 대본을 받아 보고 감수하였다.

6개월만 하려던 드라마는 1년을 넘기면서 지쳐가고 있었다. 시청율 30%를 육박하며 인기가 높자 방송국에서는 계속하기를 원했으나, 송지나 작가가 지쳐서 도저히 계속할 수 없었다. 촬영 한 시간 전까지 원고를 붙잡고 씨름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작업이었다.

매주 첫 부분에 설정한 복선을 따라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반전이 나와 스토리를 뒤집어야 하는데, 그 반전 부분에서 매주 작가는 머리털을 쥐어 뜯었다. 그 일을 매주 하다 보니 체력을 감당하지 못하기 어려웠다. 많은 시청자들의 아쉬움 속에 1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드라마 카이스트>는 매주 스토리가 끝나는 단막극 형태였다. 그러기 때문에 매 회가 스토리로서 완벽성을 가져야 했다. 매 회에서 스토리가 시작되고 감동을 주는 마무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드라마와 달랐다.

연구실을 바꾸어 이광형 교수실에 들어온 김정주 군은 평범하지 않았다. 수업도 잘 안 들어왔다. 세미나에도 늦게 들어오고 일찍 나가고 잘 안 들어왔다. 특별히 간섭하지 않고 놔 두었다. 문득 문득 보면 머리가 노랗게 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머리가 붉은 빛을 띄기도 했다. 다만 김정주는 지도교수에게 게임을 연구한다고, 그런 이야기를 던지곤 했다. 이 교수는 연구를 하든, 사업하는 든, 좋다는 태도였다.

김정주군은 인터넷 게임회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시장을 상상하며, 인터넷게임을 만들었다. 이렇게 미리 준비해 놓으니까, 정작 인터넷이 깔리게 되었을 때는 당연히 선두주자가 되어 있었다.

첫 작품 '바람의 나라' 이후에 계속하여 히트를 치면서, 계속 선두를 지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2012년에는 NCsoft의 지분을 인수하여, 대주주가 되었다. 결국 한국의 인터넷 게임의 양대 산맥인 넥슨과 NCsoft가 통합되게 된 것이다.

넥슨만 따지면 연간 매출액이 1조6,386억원이 되고, 순이익이 5,349억원이다. 그리고 일자리를 약 3,000개 만들었다. NCsoft 까지 합하면 연간 매출액은 2조6,000억원이 넘고, 일자리도 전세계에서 7,000개를 만들었다. 세계 3대 게임업체가 된 것이다.

함께 건너온 김병학 학생은 김정주 보다는 조금 더 착실한데 이 학생도 평범하지 않았다. 김창범 학생과 함께 인젠, 해커스랩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었다.

김창범 학생은 대학교 때부터 이 교수가 지도교수를 맡았다. 학사 석사 박사 모두 이광형 교수의 지도를 받았는데, 차근차근 공부를 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내일이 시험이라도 안 했다.

학점이 잘 안 나왔지만, 그래도 성적 관리를 하지 않는 편이었다. 학점관리라는 제도를 무시한다고 할까, 그럼에도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도 좋았다. 학사경고도 여러 번 받았다. 심지어는 제적될 위기에 처한 적도 있는데, 동료와 후배 학생들이 탄원서를 내서 구제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김창범군은 자기가 좋아서 맡은 일에는 열정을 쏟았다. LG 산전과 함께 퍼지엘리베이터를 개발하여 좋은 성과를 내었다. 원래 컴퓨터 해킹의 도사급이었는데, 하드웨어에서도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인젠과 해커스랩을 창업하더니, 또 IDP를 또 창업했다.

그 외에서 다른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 학생들은 전형적으로 착실하게 공부하는 모범생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모두 교수가 되어 있다. 그 중에 이도헌 교수는 1년에 연구비가 100억원이 넘는 엄청난 연구 사업을 펼치고 있다.


넥슨, 아이디스, 해커스 랩 등 창업


김영달 학생은 모범생 스타일이었는데, 사업가로 변신을 했다. 연구주제가 퍼지컴퓨터이었는데, 하드웨어가 필요하게 되니까. 전자과에서 배워왔다. 김영달 군은 학교 시절에 대학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 같다. 어떻게 뚫었는지 전북대학교에 강의도 하러 나갔다.

김영달은 전자통신연구소에 가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교에서 월급 받는 조교도 했다. 조교하면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유닉스 책도 썼다. 이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지도교수의 간섭 없이 스스로 주도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런 학생들이 있던 199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 경제 상황도 좋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것으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전산학과 석사학위 과정에 50명 정도가 들어왔는데, 다른 연구실에 들어간 학생들은 성실하고 착실하게 모범생이었고, 이광형 교수 연구실에만 그렇게 제멋대로인 학생이 들어왔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성향이 모이기도 했겠지만, 놓아 먹이니까 학생들이 그런 쪽으로 개성을 발휘했을 것이다.

이광형 교수가 1995~1996년 미국 스탠포드 연구소에 1년간 가 있었는데 그때 일이 많이 벌어졌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실리콘밸리에 가 보니까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져 있었다.  우리는 듣도 보도 못한 벤처기업이 생기면서 백만장자가 나타났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회사를 차리느냐 했는데, 차리는 방법이 매우 다양하게 많았다.

이 교수는 그들이 회사 만드는 방법을 보면서, ‘아 회사를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느꼈다. 그 전에는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돈 있는 사람이 자기 돈으로 한다고 여겼을 뿐이다. 실리콘밸리에서는 돈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벤처기업 이었다. 이런 거 보여주고 싶어서 학생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을 부를 비용도 스스로 만들었다. 미국 회사에게 “뭐 하나 만들어줄 테니 비용을 내라” 해서 그 돈 가지고 학생을 불러서 일을 시켰다. 다만 한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두 회사(AIO, PSI)에서 프로젝트를 제안해서 당시 금액으로 2,000 ~ 3,000만원 정도를 받아냈다. 그 돈으로 학생들을 불러오는데 조건을 내걸었다. 학생을 6개월 마다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회사들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되도록 여러 학생들을 연수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 ▲ 1996년 미국 체류시절 학생들과 함께 한 이광형 교수 ⓒ뉴데일리


이 교수가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실리콘밸리 연수는 2년이 더 계속됐다. 이 학생들이 현장 경험을 얻고 미국생활도 하면서 국제감각도 생기면서, 학생들은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열심히 연구하고 좋은 논문 써서 교수가 되든지, 연구소에 가서 연구원 되든지, 기업체 연구소에 가는 것이 진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 가 보니까, 다른 세상이 있는 것이다. 돈 한 푼 없이 기술로 백만장자도 되는 그런 세상을 봤다.

실리콘밸리 연수가 너무 좋아서, 이광형 교수는 귀국한 다음에는 심지어 결혼한 제자들에게도 신혼여행을 그곳으로 보냈다. “신혼여행 뭐 하러 가냐. 실리콘밸리 가서 구경해라.” 이런 말을 듣고 그곳에서 살림한 학생도 두 명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다 보니 귀국해서 세미나 하는데, 논문 쓰는 세미나 외에도 창업준비 세미나를 간간히 했다. 사업화 하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토론을 했다.

미국에 학생들을 보내는 일을 해 보고, 학생들의 변화를 보니까, 이런 일은 혼자만 할 일이 아니라 규모를 키워 학교 전체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스트가 실리콘밸리 캠퍼스를 만들면 어떨까?’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분교를 만들면, 그 분교에서는 미국 회사에 인턴을 소개해서 연결해주면 될 일이었다. 강의실이 많을 필요도 없다. 카이스트 학생들이 일을 잘 하니까, 미국 회사들이 좋아하고 대 만족이었다. 실리콘밸리 캠퍼스 만들어서 학생들을 인턴으로 연결해주면 좋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이메일이 잘 이용되지 않는 시절이었고, 먼 나라와 전화를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이광형 교수는 당시 카이스트 총장에게 이런 아이디어를 담은 편지를 보냈다. 회답이 없었다.

그때 실리콘밸리에 있는 한국인 부자인 A회장에게 이 구상을 전달하고 싶어졌다.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캠퍼스에서 대규모 강의를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인턴교육을 시키자는 구상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한국인 부자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한국인에게 수소문했다. 그 분은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에 1,600만달러 기증했고, 박물관은 그 돈으로 박물관 리모델링을 하고, 그 건물에 기증자 이름을 붙였다. 미국 사회에 한국인의 자부심을 세워준 분으로 이름이 높았다.

박물관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개관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인 몇 사람과 함께 가 보니 디너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박물관의 전시물이 있는 홀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었으니 아주 운치가 나고 멋이 있었다. 저녁식사비용 1인당 100달러는 기부금으로 쓰인다.

이광형 교수 부부는 기부금을 내고 식사를 하면서 A회장과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눴다. 1996년 초였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아직 카이스트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 A 회장에게 카이스트를 소개했다.그리고 개인적으로 한번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 다음 미팅에서 실리콘밸리 캠퍼스 구상을 간단히 설명했다.

미국에 체류 중에 잠깐 한국에 올 일이 있어서 총장실에 면담을 요청했다. 실리콘밸리 캠퍼스 아이디어를 말하고, 이러저러한 꿈을 이야기했다. 재학생들을 실리콘밸리 연수를 시키니까 아주 좋더라, 확대해보자고 했다. 그랬더니 반응이 의외였다. 야단맞았다. 그런 일이라면 실무부서에게 이야기 해야지, 총장에게 이런 편지 보내느냐, 총장이 이런 편지 분류 처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느냐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너무나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직접 와서 공손하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낸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했을까?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그때만 해도 40대 초반이던 이광형 교수는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이런 거 하면 안 되는 거구나 생각했다.

그 후 다음날 총장실에서 전화가 와서, 총장이 "어제는 미안했다"고 말했다. 약간 마음이 풀리긴 했지만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1996년 후반 귀국해서 교무처장을 하던 장호남 교수에게 이 구상을 이야기했더니 “좋다. 해보자”고 동의해줬다. 그래서 1997년에 미국에 가서 A 회장을 만났다. 그때 만든 실리콘밸리 캠퍼스 구축안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구상안을 가지고 몇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반응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A 회장이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 카이스트 방문을 주선했다. 총장과 식사자리에서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게 전개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 총장의 임무 중에 큰 것이 기금유치라는 개념이 별로 없던 시절이었다. 총장은 손님에게 잘하고 있다는 말만했다. 기부 가능성이 있는 분에 대한 처신과는 달랐다.

이렇게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캠퍼스 계획안은 물 건너 갔지만, 다행히도 A 회장과 이광형 교수 사이의 인연은 계속됐다. 최근까지도 무엇인가 같이 일을 해보자는 논의를 하곤 했다. 당장 앞에서 일이 진척이 안 된다고 해도, 그 일을 성실하고 원칙대로 처리하면, 좋은 관계는 유지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중국인들이 실리콘밸리에 학교를 만들었다. 아주 작은 규모이지만 그곳에서 장학금을 주고 중국인들을 가르쳤다. 저렇게 작게 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1998년이 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이해찬 교육부장관 시절이었다. 카이스트의 B 교수가 이해찬 장관과 아주 친했다. B 교수를 통해 이해찬 장관에게 카이스트 실리콘밸리 캠퍼스 구상을 전달했다.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이해찬 장관 덕분에 미국 방문단이 구성됐다.


실리콘밸리 분교 구상 20년째 표류


이해찬 장관, B 교수, 방통대 K 교수, 경영대학의 C 교수 등 4명이 같이 갔다. 4명이 가서 A 회장도 만나고 중국인 대학도 찾아가서 설명을 들었다. A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개방적이어서 외국인이 공부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산업기술이 빠져나간다고 하면 단호하다. 조심해야 한다.”

그 후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아무도 이광형 교수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결론은 추진하지 않는 것으로 났다. 흐지부지되는가 싶었지만, 이해찬 장관이 국무총리가 됐을 때 다시 이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해찬 총리는 다시 다른 교수를 불러 일을 맡겼지만, 결국은 진행되지 않았다. 이때는 국무총리가 예산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비전이 없이 수동적으로 하는 사람은 강력하게 추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실리콘밸리 캠퍼스 구상은 아직도 살아 있다. 지금도 그런 구상이 빛을 본다면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처음 구상했을 때처럼 1년에 50명씩만 데려다가 실리콘밸리의 수 천 개 되는 회사에 한국학생을 연수시킨다면, 큰 효과가 났을 것이다.

연수생을 받는 회사에 체재비와 비행기 티켓만 부담하면 된다. 즉, 학생에겐 한 달에 1,000불 정도만 지급 주면 된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우수하기 때문에, 회사들도 좋아할 것이다. 그렇게만 해서 당시에 매년 50명을 보냈으면, 지금은 500명 이상이 연수를 했을 것이다.

교육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것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될 중요한 구상이다. 인도의 유명한 IIT대학은 인도를 이끌어가는 대학이다. 이 학교는 졸업하려면 해외연수를 몇 달 씩 해야 한다. 이 학교 학생들은 카이스트의 여러 교수에게 이 메일을 보내서 연수하고 싶으니 받아달라는 요구를 한다. 처음에는 체재비만 달라고 하다가, 비행기 값도 대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외 연수하는 의무사항을 만들어놓으니까, 자기가 알아서 다 추진한다.

학생 스스로 연수할 곳을 찾는 과정이 사람을 성장시킨다. 혼자 가서 생활하고 돌아오는 그런 교육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우리대학에도 많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학생들의 해외 연수를 의무화 하지고 해도 대학에서 통과가 잘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학교에서 연수 회사를 마련해 줘야지 어떻게 사지로 내 몰아서 고생시키냐고 할 것이다. 교무처장 할 때 이 구상을 펼쳐보려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안았다. 해외 연수는 고사하고 국내연수라도 의무화해보고 싶었지만,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총장에게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한국 학생들은 너무 좁게 배운다. 학교에서만 머무르고 세상을 배울 기회가 너무 적다. 외국처럼 학생들을 주도적으로 개척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서남표 총장이 한국 학생들이 너무 학교에만 있으니 외부 경험을 쌓게 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방학 제도가 장애물이었다. 한국의 여름 방학은 두 달이어서 너무 짧다. 두 달 동안에 회사를 위하여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그러니 회사들은 학생 인턴이 오는 것을 귀찮아 한다.

미국과 서양은 여름방학이 석 달로 길어서, 학생들이 회사에서 인턴을 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 된다. 회사 입장에서도 인턴이 와서 배우고, 나중에 어느 정도 성과를 낼 만한 시간이 된다.

한국은 방학이 여름 두 달, 겨울 두 달로 쪼개져 있어서 회사에서 일하기는 어중간하다. 그러니 우리나라 대학도 여름방학은 길게 하고, 겨울방학은 짧게 해서, 학생들을 여름 방학에 내보내자는 방안이 나왔다. 그래서 겨울방학을 줄여 한 달 앞서 2월 개강하고, 대신 여름방학을 한 달 앞당기기 위해 5월말 종강해서 6, 7, 8월 3개월을 쉬도록 제도를 변경 시행했다.

그 후에 서남표 총장이 물러나니까, 이 것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해 보니까 방학 중에 회사에 나가는 학생이 별로 없더라는 것이었다. 불과 4년의 시행 결과를 말한 것이었다. 다른 여러 가지는 미국 것을 따라 하기 좋아하면서, 이런 것은 싫어하니까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 ▲ 넥슨 사옥 강당은 '1994 홀'이란 이름을 가졌다. ⓒ뉴데일리

이 교수는 ‘실리콘 밸리 캠퍼스’를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다.

이광형 연구실의 김창범 학생은 해킹의 대가이고, 김병학 학생도 해킹의 선구자였다. 해킹은 대학때 재미로 배웠는데 공부는 안 하고 해킹에 빠져 있었다. 해킹의 원조이며 그 당시 최고 고수였다. 두 학생은 해킹 기술을 바탕으로 해킹 방어기술을 다루는 ‘인젠’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인터넷으로 누가 침입하면 막아주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그걸 컴퓨터에 설치하면 딱 막아주는 자물쇠이다.

회사가 이름도 나고 잘 되는 듯 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김창범 김병학 둘 다 병역특례 기간 중이었다. 그 기간 중에는 회사 창업을 하면 안 되는 규정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남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은 괜찮아도, 회사 사장을 하면 안 되는 규정이다. 두 사람은 그래서 사장을 다른 외부사람에게 시켰다. 그 사장은 욕심을 냈다. 이광형 교수가 외국에 가 있는 동안 연락이 왔다. 회사에 분란이 생겼다고. 

회사 지분은 이광형 교수도 있고 해서 경영권 방어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 사람은 고발하겠다고 위협을 해 왔다. 당시만 해도 회사 세울 때 5,000만원의 자본금이 있어야 했고, 많은 경우에 편법으로 5,000만원을 열흘 정도 빌려서 통장에 넣었다가 잔고 확인만 한 다음에는 높은 금리로 돌려주는 방법을 많이 썼다. 회사 설립했을 때 사용했던 이 편법이 불법이므로 고발하겠다고 위협을 해 왔다.

회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서 열심히 해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 교수와 제자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 이거 버리고 잊어버리자고. 인젠은 그런 대로 5년은 잘 나가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인젠을 주고 나온 김창범김병학이 새로 세운 회사가 해커스 랩이다.

김영달 학생은 모범생 타입이었고 공부도 열심히 잘 했다. 물론 박사학위도 받고 자동차 면허 시험도 한 번 만에 딱 붙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너 번 씩 면허시험을 봐야 합격하곤 했다. 그리고 회사의 프로젝트도 잘 수행했다. 김영달이 박사학위를 받고 세운 회사가 보안감시 카메라 제조회사인 아이디스 이다.

김영달은 감시카메라 영상을 녹화하는 DVR(Digital Video Recording) 전문회사를 만들었다. 이것은 감시카메라를 만드는 핵심 장비다. 핵심기술은 우리 연구실에서 제공할 수 없어서 다른 연구실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이 회사는 관련 회사를 인수하여 감시카메라 분야 전문그룹으로 발전하여, 세계 3대 회사가 되었다. 지금 연간 매출액 5,000억원, 일자리 1,000개를 만들었다.

신승우 학생은 친구들하고 포털을 만들려고 휴학을 했다. 몸이 커서 항상 땀을 흘리던 신승우 군이 만든 것이 네오위즈이다. 포털에서 변신해 게임쪽으로 돌았지만 이 회사 역시 지금도 건재하다. 네오위즈에서 나온 신승우 군은 지금 또 다시 게임관련 회사를 창업하여서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

김준환 학생도 아주 독창성이 강한 학생이었다. 수영 동아리 멤버로 매일 수영연습을 하고, 보디빌딩을 열심히 했다. 처음에 연구실에 들어와서 운동을 하도 열심히 하여, 공부는 언제 하나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석사를 조기 졸업했다. 졸업 후에 친구들과 함께 영상처리를 하는 올라웍스 회사를 창업하여 경영하다가, 회사를 인텔에 팔았다. 미국식 M&A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김 군은 지금 또 다른 벤처를 시작했다. 창업이 전공이 되고 있다.

모든 학생들이 다 길을 잘 찾아간 것은 아니었다. 1999년 쯤에 D 학생이 들어왔는데 자기도 창업해야겠다 면서 6개월 휴학하겠다고 했다. 잘 하겠지 하고 휴학을 허락했고, 한 학기 후 복학했을 때에 어떤 회사를 만들었는지 발표하라고 세미나 시간을 할애했다. 물론 사전에 나와 어떤 아이템인지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발표하는 내용을 보니 Freedom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게시판을 만들었다. 익명을 완전히 보장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준다는 뜻으로 Freedom 을 강조했다. 

이광형 교수는 그 이야기를 다 듣지 않고 화를 냈다. 그 동안 뭐했느냐고, 그런 거 하라고 했느냐? 지금 익명으로 하면 인신공격 문제가 낳을 수 있는데, 완전한 익명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를 보장하는 회사를 만들려고 하느냐고, 크게 야단을 쳤다. 그리고 엄하게 경고했다. 그런 것 만들면 연구실에서 추방하겠다고. 그 후에 이 학생은 모범생으로 변했다.


독립운동 하듯 쉬쉬하며 창업


학생들과 이런 회사들을 만들 때 비밀로 했다. 학교와 학과와 다른 교수에게 알릴 수 없었다. 90년대만 해도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창업하면 큰일나는 일이었다. 만약 이같이 연구실을 운영하는 것을 들켰으면 크게 야단을 맞았을 것이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논문 써야지 라고 나왔을 것이다.

1년에 50명이 학과의 석사과정에 들어오는데, 이들에게 가능한 일은 열심히 연구해서 논문 쓰고 졸업하는 것이었다. 똑같이 연구하고 똑같이 논문 쓰고 그런 판에 박힌 것인데, 이 교수 연구실만 이상한 짓 하니까 드러났을 경우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교수들은 이 학생들이 학교 졸업하고 회사 운영할 때가 돼서야 “학교 때 부터 했네”하고 알았을 정도였다.

회사를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이다. 기술에서 출발하는 아이템은 “내가 이런 기술이 있으니까 이것을 응용한 제품을 만들면 좋겠다. 어디다 팔까?” 이렇게 생각한다. 이것이 기술출발 제품이다. 또 하나는 시장출발 제품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원하니까 만들어야겠다”고 해서 만든다.

게임을 만들고 해킹방지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은 시장출발 제품의 범주에 들어간다. 앞으로 사람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장 출발 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술을 분석하면,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기술이 많은 경우가 있다. 그러면 필요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광형 교수 연구실에서 나온 제품들은 시장 출발 제품이었기에, 다른 연구실에 있는 기술도 필요로 했다. 그래서 학생들은 다른 연구실 학생들을 끌어 들였다. 자연히 몰래 비밀로 뭉쳤다.

학생들은 필요한 기술을 누가 잘한다 하면 찾아가서 “이런 거 하려는데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 학생은 “교수님이 알 면 안 되니까 비밀보장이다”하면서 무슨 독립운동하는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졸업할 때까지 뭉쳤다. 보안카메라 기술의 경우 핵심기술은 영상압축기술이지만, 인공지능 기술을 하는 이광형 교수 연구실에는 없었다. 다른 연구실의 학생들을 포섭하였다. 이 같은 비밀조직의 존재를 나중에 자기 학생이 졸업한 다음에야 지도교수가 안 것이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렇다면 지도교수인 이광형 교수는 무슨 역할을 했느냐 말이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격려해주고, 보너스 받으면 학생들이 만든 회사에 돈을 투자한 역할이 중요했다.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지도교수님이 돈까지 주면서 격려한다” 생각하니까 엄청 신이 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이 교수를 한국의 터만 교수라고 부른 적이 있다. 스탠포드 대학의 터만 교수는 제자들에게 돈을 주면 창업을 하게 격려하여, 나중에 HP라는 회사가 탄생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첫 벤처 회사가 되었다.

요새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서 학교 연구실에서 이 같은 일을 하면 걸리는 풍조가 자리잡았다. 교수와 학생이 공과 사를 혼동하여 일을 하면 안되다고 말한다. 교수가 회사를 세우면, 학교 일 보다 자기 회사 일을 더 하고, 학생들을 사적으로 시켜서 이해관계의 충돌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걸 너무 따지니까 아무래도 교수나 학생이나 창업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다. 너무 철저하게 따지고 논문 숫자 세고 그러면, 학생이나 교수가 그런 방향에 맞추려고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그렇게 하면 좋은 성과가 많이 나올까? 중요한 사실은 돈은 아주 잘 썼지만, 남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영수증도 잘 처리됐고, 아무 흠도 결함도 규정위반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쓸만한 열매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2008년에 전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벌어져, 경기 진작을 위하여 추가경정 예산을 만들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경기를 살리자고 추경예산 편성할 때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연구개발을 위하여 1조를 달라고 요청했다. 핵심적인 연구개발에 사용하면 쓸만한 물건이 나올 수 있다고 설득했다. 대통령은 좋다고, 해보자고 했다.

나중에 실무부서에 가 보니 1조 대신 3,000억원 으로 줄어들었다. 카이스트는 전기자동차를 만들고, 모바일 하버(이동식 부두)를 개발하겠다고 제안서를 내서 그 중 500억을 받아냈다.

나머지 2,500억원은 여러 기관에 골고루 잘 나눠줬다. 지금 이렇게 골고루 잘 나눠준 2,500억이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카이스트에서 타 간 500억은 무척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 타 기관에 비하여 너무 많은 돈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2,500원은 온데 간데 없지만, 500억 투자한 전기자동차는 성공하여 실용화되었다. 현재 구미시에서 상업 운행중인 전기자동차가 바로 그 것이다.

국가 연구개발비를 골고루 잘 쓴다는 것이 이런 식이다. 골고루 나누어서 여러 사람이 사용하면서 영수증 잘 챙기면 아무 탈이 생기지 않는다. 연구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왔는가는 덜 중요하다. 현재 대부분의 국가 연구과제는 마지막에 결과 보고서와 영수증을 잘 제출하면 성공한다.

만약 새롭고 창의적인 연구였다면 성공 대신 실패가 나오는 것이 더 잦았을 것이다. 
일본에서도 그런 폐단은 있는 것 같다. 일본 교수들도 하는 말이 “정부예산 가지고 연구한다”고 하면 “성공하겠구나”라고 답변을 한다. 일본에서도 연구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있는 모양이다.

우리 민족의 앞날에 희망의 불씨를 당기기 위해서는 창조경제에 불을 붙여야 한다.
만약 이 시점에 우리나라에 또다시 도산 안창호 같은 선각자가 나타나면 무슨 일을 할까? 도산 안창호 선생이 다시 나타나면 창업을 강조할 것 같다. 삼성 현대 LG가 우리나라 GDP 50% 차지하는 산업구조를 고치지 않으면 국가에 큰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안창호 선생은 국민계몽 사업을 하고 창업스쿨 만들 것 같다. 대학교도 창업중심으로 바꾸어서, 대학이 교육과 연구 두 가지 중심에서 교육-창업-연구 3가지가 3위일체가 되는 일에 발 벗고 나설 것이다. 왜냐하면 민족의 앞 길이 거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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