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코 고국으로 돌아가려고만 합니다. 항상 그 생각뿐입니다.’
  • <세계일보>가 1960년 4·19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심경을 보여주는 편지 12통을 12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군사학교 마셜도서관에서 찾아냈다고 14일 보도했다.

    6·25전쟁 당시 세번째 미 8군사령관을 지낸 '6·25전쟁 영웅'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에게 보낸 편지들이라고 이 매체는 설명했다.

     

  • ▲ ⓒ 세계일보 화면캡쳐
    ▲ ⓒ 세계일보 화면캡쳐

    ☞ 기사 원문: http://www.segye.com/content/html/2014/04/13/20140413002656.html?OutUrl=naver

    <세계일보>에 따르면 1960년 5월11일 편지에서는 4·19혁명으로 하야(4월26일)한 이 대통령이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긴급사태 속에서 저를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장군의 호의가 담긴 편지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언젠가 내 행동이 진실하고 정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며칠 참담함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시민으로서 어렵게 얻어낸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는 일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이 대통령 부부는 이 편지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월29일 교민 최백렬씨 주선으로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하와이에 도착할 때 이 대통령 부부의 짐은 4개뿐이었다. 옷가방 2개에 이번 편지들을 쓰는 데 썼을 타자기, 마실 것, 약품 상자 등이 전부였다.

    잠시 머물 생각에 집조차 구하지 못해 지인 집에 얹혀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전직 대통령 연금법이 없던 시절이라 교민들이 모아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밴플리트 장군은 이 대통령 부부에게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북쪽 호브사운드의 별장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8월1일 편지에서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6월24일 보내주신 따뜻한 편지에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패니(프란체스카 여사의 애칭)와 저는 장군께서 호브사운드 집에 머물도록 마음 써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하와이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제 건강이 매일 호전되고 있지만 의사는 가능한 한 최대한 안정을 취하라고 한답니다. 혈압을 낮추는 약이 있으나 회복에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약이 제법 효과적이기는 한데 저는 약에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


    이후 거의 모든 소식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전했다.

    거의 1년 만인 1961년 7월25일 프란체스카 여사는 줄곧 염원했던 귀국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절망적인 마음을 편지에 담았다.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대통령 내외를 위로하고 돌아간 직후였다.

    '우리 부부는 장군을 뵈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가슴에 쌓아온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사님(Dr. Rhee)은 지난 몇 주, 특히 지난주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군가한테 절망적인 국내 상황을 전해들었다고 장군께 말씀드렸듯 박사님은 그 일로 며칠간 근심하면서 흥분했습니다. 안타깝게 저도 요새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최상이 아닙니다. …'


    밴플리트 장군은 이 편지에 붉은색 펜으로 이 대통령 내외의 주소인 '하와이 호놀룰루 마키키가 2033'을 적어 놓았다.

    이 대통령은 1961년 12월13일 이인수씨를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이에 관한 내용도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11월16일 편지에 언급돼 있다.

    "… 몇 주 전에 이 박사님이 아들 인수에 관해 장군께 편지를 썼을 겁니다. 조상 묘를 돌보도록 아들을 곁에 두는 게 한국 가정의 전통입니다. 이 박사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도록 인수가 잠시 여기를 방문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박사님을 설득해 귀국을 포기하게 된다면 인수가 여기에서 학업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박사님은 걷는 것이 불편해 항상 누군가 곁을 지켜줘야 합니다. …"


    이 대통령은 끝까지 귀국을 열망했다. 그는 1961년 11월2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 일정을 따라 하와이에 온 한국 기자 3명에게 “제발 한국에 데려가 주시오. 호랑이도 제집에서 죽고 싶어한다”고 눈물로써 호소했다. 박 의장은 문병하지 않고 꽃다발만 보내는 것으로 전직 대통령을 예우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2년 2월5일 편지에서 “장군께서 정부 입장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환자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호소합니다. 상황이 매우 긴급합니다.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절망적인 상황(desperate situation)입니다”라고 말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절망적인 상황'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후에도 2월15일과 3월1일 잇달아 편지를 써 도움을 부탁했다. 여사와 측근들은 1962년 3월16일 귀국을 위한 이 대통령의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3월17일 날짜로 비행기표까지 끊어놓았다. 그러나 3월17일 박정희 의장은 입국을 거부했다. 귀국 좌절 이후 이 대통령 병세는 급속히 나빠졌다.

    1962년 6월19일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쓴 편지에서는 체념한 채 간병에 힘을 쏟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2주 전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관절염이 도져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라앉히느라 한참 걸렸습니다. … 이 박사님은 여전히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고 그대로입니다. …"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4년 3월30일에야 다시 펜을 들었다.

    "전보로 제 남편 생일(3월26일)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박사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임을 알기에 장군의 친절한 소식을 그분께 전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남편은 생일날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습니다. 대체로 식욕이나 안정은 괜찮습니다. 낮에 함께 지내면서 '위대한 분'(great man)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어 행운입니다."


    여사는 그해 8월16일 편지에서는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

    "이 박사님은 주변 상황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다는 걸 말씀드려야하겠군요. … 내내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유아식을 꽤 잘 넘기시고 대부분 주무십니다. 낮에 함께 지낼 수 있는 혜택을 받았습니다. 식사를 떠 드리고 미력하나마 할 수 있는 걸 다하고 있습니다."


    의식을 잃은 지 1년이 넘은 1965년 7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은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큰 숨을 한번 몰아쉰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 대통령의 시신은 7월23일 미 의장대 특별기편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도착했다. 평생 우정을 나눈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미군 장병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다음은 이승만 대통령 양자 이인수 교수의 '나의 아버지 우남 이승만 박사' 글(2009.08.13) 전문이다.


    1961년 하와이에서  큰 절 올려
    금년은 아버님 이승만박사께서 돌아가신지 어언 44주기가 되는 해이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시간 영시35분 마우날라니 요양원 202호실에서 운명하신 아버님 곁에는 프란체스카 어머님과 나 그리고 아버님의 제자 최백렬(崔栢烈)씨와 간호원 한 명이 지켜봤었다.

    영구(靈柩)를 뫼시고 23일 서울에 돌아와 27일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 후 이렇게 빨리도 세월이 흘렀다.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들어 요즈음 일모도원(日暮道遠)이라는 말이 생각나는데 '뉴데일리' 인보길(印輔吉)사장의 권유로 생각나는 몇 가지를 적어보기로 하였다.

    내가 입양(入養)하여 하와이에 가서 휴양 중에 계신 아버님 우남어른과  프란체스카 어머님을 뵙고 당시 윌버트·최씨가 소유한 매키키 2033번지의 집에서 정성(定省)을 하게 된 것은 1961년 12월부터 이었다.


    "너는 그 잘 돼간다는 말 믿지 말라"
    나의 도착 후 아버님께 큰절을 드리고 인사를 올리니 나의 어깨를 두드리시며 잘 왔다고 웃으시는 모습이 너무나 자애로우셨다. 그리고 국내형편을 물으시는 말씀에 젊은이들이 반공을 하겠다고 하니 잘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여쭈니 정색을 하시며 너는 그 잘 돼간다는 말을 믿지 말라고 하시며 내가 그런 말 믿다가 이렇게 결딴나지 않았느냐고 말씀을 하시었다. 하야하신 후 너무나 실정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인해 국사를 그르치게 된 것을 아시고 이를 한탄하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4.19때 다친 학생들을 우리 애들이라 하시며 염려하고  계셨다.


    근검 절약, 기도, 독립운동때의 습관
    아버님을 뫼시고 우리 세 식구는 살림이 어려웠지만 참으로 단란한 생활을 하였다. 62세의 어머님은 정말 부지런하고 알뜰한 살림꾼이셨다. 경무대에서 그 많은 이들을 거느리시던 분이 이제는 혼자서 남편을 시중하며 집안 살림을 말끔히 처리해 나가시는데 나는 참으로 놀랐다. 그것은 시계와 같이 시간을 쪼개서 일을 할당하여 그것을 실천해 나가는 일과와 주간 그리고 장기적 계획까지를 망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정은 정말 합리적이어서 무리 없이 실천되었고 재미와 여유마저 있었다. 그 소박하고 근검·절약하며 조국을 위해 기도하는 생활은 독립운동 시절부터 이어온 것이라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한국민족 앞날에 축복과 은총을" 식사때마다 같은 기도
    아버님은 식사 때마다 기도를 하시는데 내가온 다음에는 영어보다 한국말로 많이 하셨다. 대개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말씀에 이어 내가 크게 감동을 받은 것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에 심신이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데 한국민족의 앞날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함께 하시옵소서 ---” 하시는 부분이었다. 매우 천천히 말씀을 이어가시는 이 기도에 나는 눈물을 먹으며 귀를 기울이었다. 잃었던 조국의 독립을 회생시켜 새 나라 대한민국을 창업하시고 자유를 수호하여 국가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신 우남의 위대한 공적이 기독교라는 신앙에 기초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미완성의 사명을 의식하여 민족에 대한 축복기도를 되풀이 하시는 것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려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 없이  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국산 신발에 "우리 한인 재주가 정말 좋아" 
     아침식사가 끝나면 밖의 베란다에 뫼시고 나가 시원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의자에 앉아 말씀을 나누었다. 아버님은 많은 것을 물으셨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신발 그리고 책과 문구류와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어느 나라에서 만든 것이냐를 물으시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모두가 국산품들이었다. 나의 대답을 들으시고 아버님은 흡족하신 듯, 신고 계신 신발을 가리키시며 “이것도 국산이야 --- 우리한인들의 재주가 정말 좋아 ---잘 만들었어--- 해방 후 어떤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누도 만들 줄 모른다고 타박을 한일이 있었지만 전쟁을 치러 잿더미가 되어서도 참으로 많은 발전을 했어 ---”하고 대견해 하셨다. 이렇게 아버님은 조국의 산업화를 위해 큰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나는 이때 아버님과 국가정책을 이야기하는 중에 우남께서 이룩하신 교육입국의 실현으로 인재가 양성되어 있고 기간산업이 육성되었으며 자유민주제도와 시장경제 그리고 개방사회의 장점, 그리고 국가안보를 위한 국군의 증강과 1953년에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이 국가와 정치안정의 기반이 되어 앞으로 우리나라가 경제와 국가를 크게 발전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아버님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렇게 우남께서는 우리국민의 자질을 믿고 그 발전의 성과를 약 20년 후로 예견하는 대단히 긍정적 생각을 하고 계셨다.


    "좋은 것은 모두 한국에 가져가겠다" 
    아버님은 자연을 몹시도 사랑하셨다. 오후에는 뒤뜰에 나가셔서 화초에 물을 주시고 가꾸시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그 가꾸시는 솜씨가 전문가 이상으로 능숙하시고 마치 사랑하는 자식을  다루는 듯한 모습이었다. ‘며칠 돌보지 않았더니 시든 잎이 생겼어’ 하시며 몇 개의 화초를 가리키시고 ‘이것들은 우리나라에 없는 화초야. 우리가 갈 때 가져가야지’ 하시는 것이었다.
     일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과 같이 나는 어른께서 타고 나신 재주가 범상치 않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때는 아버님을 뫼시고  한국에 돌아갈 계획으로 우리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어서 저녁때 나는 어머님께 저 화초들을 정말 가져갈 수 있는지를 여쭈어보았다. 그러니까  어머님은 ‘아버님은 좋은 것은 다 한국에 가져간다고 하시는 어른이야’ 하고 웃어넘기셨다. 그리고 아버님은 ‘게으른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씀에 깨달은바 있어 정원의 낙엽과 쓰레기를 치우기는 일 등 내가 할 수 있는 집안의 일들을 열심히 찾아서 하였다.


    "통일은 남이 시켜주는 일이 아니야"
    아버님을 뫼시고 있으면 언제나 물으시는 말씀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통일이 문제인데 --- 지금 우리나라에서 누가 통일을 위해 일하고 있는가 ? ’ 이 물으심에 나는 다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집권한 군사정권이 권력장악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는 때에 통일문제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국민 모두가 통일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 구체적 노력은 볼 수가 없습니다 고 말씀을 드리니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 그 생각만 해서는 뭣하나. 내가 통일을 위해 한바탕 일했으면 그 뒤를 이어 일하는 이가 나와야 하지 않겠나. 통일은 남이 시켜주는 일이 아니야 ’ 하시며 흥분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리고 통일이란 말이 아니라 힘을 기르는 일이며 그 노력은 모든 분야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정치와 북한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 하셨다. ‘우리가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국가안전을 도모 하는데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이 많이 있지만, 일단 일본문제가 되면 우리나라가 가지는 그 독특한 한일관계의 역사를 교훈으로 우리의 독자적인 대책이 있어야 하고 국제사회에서 외교력이 발휘되어야하며 불행하였던 민족의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은 갈라디어서 5장 1절’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이렇게 부자간의 열띤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아신 어머님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날무우를 벗겨가지고 오셔서 맛이 있으니 먹어보라고 권하시어 아버님과 나는 그 싱싱한 맛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님은 나에게 ‘지금도 아버님은 나라 걱정이 많으시단다’고 웃으신다.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시려는 듯 어머님은 고달픈 하와이 생활에서 아리랑의 노래를 곧잘 부르셨다. 아리랑을 부르고 한국을 생각하시는 것을 생각하니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한국민요는 물론 평소에 아버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지만 아버님은 그 가사도 어머님을 위해 다음 같은 문구를 넣어서 재미도 있었지만 두 분의 기구한 만남의 생애를 새삼스럽게 생각하였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오다 가다가 만난님 이지만 살아서나 죽어서나 못 잊겠네 ’

    TV가 없던 매키키 집에는 어머님의 아라랑 노래와 간혹 아버님의 한시낭송과 만가(輓歌)의 곡조를 듣는 일이 있었는데, 어머님은 이것을 아버님의 멜로디(melody)라고 하셨다. 매우 조용하게 읊으시는 한시에는 의미심장한 강개가 잠겨 젊은 날의 의기를 상기하시는 듯 하였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들어 아시는지 부르시는 만가의 곡조에는 영원을 향한 인생의 애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어 나를 슬프게 하였다.

    이밖에 우리 가족은 함께 앉아 찬송가를 즐겨 불렀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비롯하여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찬송가를 골라서 어머님과 함께 불렀다. 특히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를 부를 때면 함께 합창하시며 ‘매우 씩씩해서 좋다’고 기뻐하셨다. 이렇게 찬송가를 부르고 나면 우리 모두 마음이 한결 후련하고 즐거웠다. 


    독립운동중에 부모 돌아가셔도 못 가본 고국...."懷鄕病"에 눈물
    그리고 어머님은 혼자서 바쁘신 살림 중에도 아버님의 기분전환을 위해 외출의 기회를 만들어 집 근처의 탄탈루스 산길이나 좀 먼 곳에 있는 가내오에 해변을 드라이브하셨다. 모두가 평상시에 자연을 사랑하고 즐기시는 아버님의 성품을 아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은 아버님이 이렇게 외출을 하셔도 전과 같이 즐거워 하시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것이 아버님의 회향병(懷鄕病)이라 설명을 하셨다.

    나는 어머님의 말씀에 동의를 하면서 아버님이 1935년 독립운동당시 조국의 강산을 그리워하며 쓰신 한시 ‘태평양 주중작(太平洋 舟中作)’을 생각하였다. 우남께서는 천부의 시인이었으며 예술의 향기를 지닌 어른이셨다. 그러나 풍운의 시대가 이 어른을 시인이나 예술가로 머물게 하지를 않았다. 우남의 나라 사랑은 조국강산과 직결된 것이었고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 어른은 평생토록 가슴에 안고 사신 것이었다. 세계 어디를 가나 조국강산에 비할 사랑할 곳은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다.

    하루는 우리 세 식구가 앉은 자리에서 아버님은 1896년에 돌아가신 어머님 말씀하시며 눈물을 지으셨다. 구국운동으로 집을 비었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시 아버님의 별세를 알았으나 돌아갈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이렇게 아버님은 부모님께 해야 할 일을 못했다는 말씀이었고 이제는 조국 땅에 돌아가 죽는 것이 오직 하나의 소망이라고 하셨다.


    1962년 3월 17일...출발 직전 '귀국 중지' 통보
    아버님의 이같이 간절한 귀국의 소망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어머님과 나는 여러 가지로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1962년 3월 17일자 한국행 비행기표를 마련하여 준비가 완료되었지만 이날아침 박정희정부에 의해 귀국이 저지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결심으로 나만이 혈혈단신 귀국하여 정세를 살피기로 하고 곧 아버님은 모날라니 요양원의 호의로 그곳에 입원을 하셨으며 어머님은 요양원의 종업원별실에 기거하시어 간호원 보조로 아버님을 보살피며 사시게 된 것이었다.

     입원 후에도 아버님은 귀국의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자기 생명과 같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기에 몽매에도 그 마음은 한결같으셨다. 아버님은 자기 뼈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하셨고 어머님과 나는 정부에 진정서를 내서 국립묘지 안장을 탄원하였다.

    태평양의 장엄한 낙조(落照)와 같이 한국의 현대사, 대한민국을 만든 우남의 마지막 길, 장례의 행렬은 모든 예장(禮葬)을 사양한 순수한 국민정성의 표징이었으며 우남이 사랑하였고 우남을 사랑한 국민들과의 만남이었다.  아아 --- 한국민족을 광명의 길로 인도한 영도자 우남 어른이시어 ! 국민이 태산같이 의지한 고결한 어른이시어 ! 그 인자하신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이제 우남을 그리워하는 그 착하고 어진 국민들의 마음은 국립묘지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 다음같이 새겨져있다.

      배달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있는 백성되게 하시고  
      겨레의 자유와 평등을 지켜 안녕과 번영의 터전을 마련해 주신
      거룩한 나라사랑 불멸의 한국인 우리의 대통령 우남 이승만박사
      금수강산 흘러오는 한강의 물결 남산을 바라보는 동작의 터에
      일월성신과 함께 이 나라 지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