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언론이 외면하는 세계의 톱 뉴스:
     우크라이나에서 反러시아 국민혁명, 親러시아 대통령 피신
    소치에 몰입하던 푸틴, 허를 찔리다!
趙甲濟  

100명 이상이 죽는 流血(유혈)사태가 계속되던 우크라이나에서
反러시아-親(친)서방 혁명이 일어났다.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다.
親러시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수도 키에프를 떠났고,
의회는 대통령 파면을 결의하고 새로운 선거를 5월에 한다고 발표했다. 反러시아파로서 감옥살이를 하던 전 수상 율리아 티모센코는 석방되었다. 그녀는 독립광장에서 "우크라이나는 악독한 독재자 야누코비치를 끝장냈다"고 선언하였다.
 러시아계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부지방으로 피신한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티모센코는 죽은 시위자들을 위한 정의 구현을 역설하였다. 우크라이나 시위는 親러시아 정부가 EU(유럽연합)와 하던 경제 협상을, 러시아의 압력으로 취소한 데서 발단이 되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다. 야뉴코비치 대통령과는 숙명의 라이벌인 티모센코는 석방된 직후 "모두가 독립된 유럽 국가를 건설하는 데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연설했다.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를 점거하였다. 시위대가 공개한 이 관저는 동물원, 골프장, 식당용 선박까지 갖춘 호화판으로서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패를 증언하였다. 
  
  야뉴코비치 대통령은 부하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해외 도피하려다가 보안군이 탑승을 거절하자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곳으로 피신, 텔레비전 회견에서 "나는 범죄적 쿠데타에 의하여 밀려났다"면서 투쟁을 계속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유혈 진압에 책임이 있는 내무장관도 탈출용 비행기를 타려다가 저지당했다고 전한다. 
  
  이틀 전 EU의 중재로 정부와 반대 세력이 타협안에 합의하였지만 시위대에 경찰이 가담하는 등 민중혁명의 양상으로 급변한 것이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치 동계 올림픽에 몰입한 사이 우크라이나의 親러시아 정권을 잃어버린 셈이다. 한국 언론도 소치에만 집중하면서 이 역사적 사건의 보도를 소홀히 한다. 언론사 인터넷 판엔 이 세계적인 기사가 초기 화면에 올라 있지도 않거나 아주 작은 기사로 다뤘는데 내용도 부실하다. 
  
  어느 나라이든 언론이 좌경화되면 국제 문제를 작게 다룬다. 좌파는 본질적으로 폐쇄파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모르게 해야 좌파 선동이 먹힌다. 국민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게 좌익의 공통점이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해체 후 독립국가가 되었다. 러시아는, 스웨덴에 살던 바이킹에 의하여 키에프 公國(공국)으로 출발하였으므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모태인 셈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그 뿌리가 깊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를 갖고 있어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들의 쟁탈장이 되어 왔다. 러시아 혁명 후 소련 공산 독재 체제에 편입된 우크라이나는 대기근과 탄압의 살륙장이 되었다. 1930년대 스탈린이 일으킨 대기근 때는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치자 일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독일군을 환영하기도 했으나 히틀러가 이들을 탄압, 反獨(반독)으로 돌렸다. 20세기에 가장 피를 많이 흘린 민족은 아마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사람들일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와 EU의 경쟁에서 푸틴은 큰 타격을 입었는데 그는 반드시 반격에 나설 것이다. 최악의 경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서방세계의 대결장이 되어 시리아 식의 內戰(내전) 상태로 빠지게 될지 모른다. 우크라이나 인구 중 약 17%가 러시아人이다. 
  
  동부로 피신한 야뉴코비치 대통령이 사임을 거부, 이 나라의 동부와 남부에 사는 러시아 계 사람들을 동원하고, 러시아의 푸틴이 이에 가세하면, 서부 중심의 親서방 우크라이나 세력은 군대를 동원, 분리 운동을 막으려 할 것이고, 유고슬라비아 식의 內戰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인구가 5000만 명을 육박하는 우크라이나 內戰은 핵무장한 러시아를 끌어들이므로 유럽에 戰運을 드리울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올해는 1차 세계 대전 100주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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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우크라이나 
      
   金石圭 月刊朝鮮 이사〈steink@chosun.com〉
   
   우크라이나가 대통령 선거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고난의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이처럼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적은 없었다. 오는 12월26일 재선거 결과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민주화로 가는 여부를 가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역사와 인물, 그리고 국제정치의 세력 판도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다.
   
   우크라이나는 17ㆍ18세기 때 東은 러시아, 西는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는 러시아와 합스부르그 왕국, 1ㆍ2차 세계대전 때는 러시아, 폴란드, 체코, 루마니아에 분리 지배를 받았다. 1991년 舊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우크라이나는 독립 국가로서 지위를 누려본 적이 없었다. 
   
   등장하는 인물은 두명이다. 지난 10월31일 21명의 후보가 격돌한 1차 대통령 선거에 이어 상위 2명이 11월21일 결선 투표에 나섰다. 이들은 야당 후보인 빅터 유센코(50)와 여당측 후보 빅터 야누코비치(54) 총리. 이들은 「승리자」를 뜻하는 빅터(Victor)라는 같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걸어온 길은 완전히 다르다.
   
   회계사 출신인 유센코는 중앙은행 총재로 인플레이션을 막아 냈고 1998년에는 레오니드 쿠츠마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정치개혁에 나서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에 맞서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 후 처음으로 2000년부터 GDP가 플러스 성장을 기록케 하는 등 국민들의 호감을 산 것이 경질의 계기가 된다. 부정부패의 상징인 쿠츠마가 그를 2001년 해임하고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쿠츠마의 인기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유센코가 국민의 여망을 안고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EU와 NATO 가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親서방파이다. 
   
   한편 러시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쿠츠마 대통령은 임기 후를 위해 야누코비치를 후보로 밀었다. 야누코비치도 역시 러시아의 영향을 받고 있는 도네츠크 지역 출신의 기술자로, 주지사를 거쳤다. 그 역시 쿠츠마와 같이 부정부패, 정경유착의 중심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선거도 흥미롭게 진행됐다. 첫번 승리자는 유센코였다. 선거 당일인 11월21일 출구조사에서 유센코는 5% 이상이나 리드해, 대통령이 되는 듯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수 많은 키에프 市民들이 몰려 나와 유센코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틀 뒤인 23일 중앙선관위의 발표는 2.85%의 근소한 차이로 야누코비치에게 손을 들어 주었다. 이미 하루 전인 22일부터 야누코비치의 승리라는 루머가 돌면서 시민들은 하나 둘씩 키에프 시내의 영웅광장에 모이기 시작했고 선관위의 발표로 시민들의 선거 불복 시위가 본격화됐다.
   
   「자기들만의 리그」로 끝날 것 같았던(야누코비치 측의 착각) 우크라이나의 선거는 부정선거가 곳곳에서 보고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폴란드 크바니니에프스키 대통령이 유센코를 지지하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끼어 들어 야누코비치를 지원했고, EU에 이어 미국 부시 대통령이 유센코를 지지하면서 우크라이나는 일거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됐다. 
   
   유센코 지지를 뜻하는 주황색 깃발을 든 시위대에는 키에프 시민은 물론 지방 곳곳에서 올라온 주민들로 한때 50만 명에 이르러 언론은 이를 「오렌지 革命(Orange Revolution)」이라 불렀다. 이미 우크라이나는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의 前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국회는 11월27일 구속력은 없지만 대선 無効 선언했고 대법원은 마침내 12월3일 대선 무효를 판결했다. 다음 날 중앙선관위는 12월26일 재선거 날짜를 공표했다. 눈이 팽팽 돌아갈 정도의 변화였고 물꼬는 유센코비치 측이 가고자 하는 길로 트였다. 이로써 러시아 말로 변경(우 크라야)에 불과했던 우크라이나는 수백년 만에 세계의 중심에 도약했다. 우크라이나 국민이 세계인이 주목 속에 민주화는 이제 되돌아 갈 수 없는 「이정표」가 됐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1991년 독립 이후 지금까지 러시아의 입김을 피할 수 없었던 과거와의 단절도 의미한다.
   
   시위대는 12월8일 해산했지만 키에프 시내 최중심가인 8차선의 그레샤틱街는 유센코 지지자들의 텐트촌으로 바뀌었다. 무려 18일간의 시위에서 단 한 건의 폭력 사태와 경찰의 연행ㆍ구속이 없었던 점에 세계 언론들은 호평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을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따뜻한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기자는 21일 키에프에 도착했다. 계속 구름이 덮여 해를 볼 수 없지만 기온은 영하 4~5도를 오르내리는 등 어느 때 보다 온화하다. 가끔 눈도 내렸다. 밤도 길어 오후 4시면 어둠이 내리고 다음날 오전 7시30분이 지나야 밝아진다. 23일 아침에는 하늘이 개이면서 잠시 태양도 나타났다. 冬至가 지났으니 밤도 차츰 짧아 진다고 한다.
   
   키에프 시내는 크레샤틱街가 막혀 교통 혼잡이 심했다. 간혹 오렌지 깃발을 달고 거리를 달리는 트럭도 보였다. 거리 곳곳에는 유센코의 사진과 함께 「TAK(에스라는 뜻)!」이라는 구호로 지지를 호소하는 소형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23일부터는 유센코 지지를 나타내는 주황색 천이나 끈을 단 차량들이 부쩍 많아졌다. 기자가 묶고 있는 투리스트 호텔에는 캐나다에서 온 500명의 선거감시단 중 일부가 22일 저녁 투숙했다. 캐나다 팀은 존 터너 前 총리가 이끌고 있다. 이번 재선에는 8000명 이상의 외국 감시단이 참가한다. 
   
   전반적인 우크라이나 여론은 물론 외국의 유력 언론들은 이미 유센코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그의 망가진 얼굴이 정보기관에 의한 다이옥신 독극물 감염 때문이라는 보도도 국민들의 여론을 기울게 하고 있다. 지난 12월14일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루마니아의 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도 고무적이다. 미국과 EU가 유센코를 지지하고 있고 외국 선거 감시단도 3000여 명이나 늘어 1차 때와 같은 부정선거는 어렵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26일 선거가 끝나고 하루나 이틀 뒤면 세계인들은 유센코의 승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유센코의 승리는 2004년 국제 정치의 최대 변화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전세계인에게 훌륭한 세모 선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렌지 혁명」은 일단 완결된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