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CIA는 무기-병력 운용 및 작전수행까지 한다는데, 우리 NIS는 뭐 할까...
  • 美<록히드>사가 개발한
    전략 정찰기 <SR-71 블랙버드>.
    그에게는 [형]이 있다.
    1962년 4월 26일 첫 비행을 한
    <A-12 옥스카트>(Oxcart, 소달구지)다.

    재미 저널리스트 <안치용> 씨는
    최근 비밀해제가 된 美CIA 자료 중에서
    1968년 1월 23일 원산 앞바다에서 일어난
    美해군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피랍된 뒤
    美정부가 벌인 [검은 방패 작전(Operation Black Shield)]
    자료를 입수해 공개했다. 


    美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 1968년 1월 23일 오후 2시 30분 경, 북한 경비정과 미그 전투기에 납치된 美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
    ▲ 1968년 1월 23일 오후 2시 30분 경, 북한 경비정과 미그 전투기에 납치된 美정보수집 보조함 푸에블로호.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4척의 북한 초계정과 미그기 2대에게 나포돼
    원산항으로 끌려간다.

    <푸에블로>호는 이날 오후 2시 32분,
    북한 해안에서 30km 떨어진
    동경 127도 54분 3초, 북위 39도 25분 위치의
    동해 공해상에서
    [엔진이 모두 꺼졌으며 무전도 이것이 마지막이다.
    원산항으로 끌려간다]

    무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푸에블로>호는
    무게 106톤, 길이 54m, 너비 10m의
    소형 화물선을 개조한
    美해군의 [정보수집 보조함]으로
    50구경 기관총 2문을 갖춘 작은 배였다.

    함장(중령) 등 장교 6명과 병사 및 부사관 75명,
    민간인 2명이 타고 있었다.

    문제는 미군 피랍뿐만이 아니라
    <푸에블로>호에 실린 각종 감청장비의 유출이었다.
    <NSA>가 관리하는,
    당시 최신 감청장비가
    북한에 의해 소련에 넘어갈 위기였던 것이다.  

    <푸에블로>호 납치는
    美역사상 106년 만의 해군 함정 나포였다.

    美정부는 이틀 전인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을 떠올렸다.

    북한의 도발 움직임이 [단독]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한
    美정부는 즉각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했다.

  • 1965년 취역한, 세계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 CVN-65 엔터프라이즈호.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당시 동해상으로 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일선에서 퇴역했다.
    ▲ 1965년 취역한, 세계 최초의 핵추진 항공모함 CVN-65 엔터프라이즈호. 푸에블로호 납치 사건 당시 동해상으로 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일선에서 퇴역했다.

    동시에 주일 美5공군에 비상출격 대기를 지시하고,
    갓 취역한 핵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항모 강습단을
    원산항 인근 동해로 출동시켰다. 

    美정부는 [프리덤 드롭]이라는,
    북한 주요지역을 핵공격한다는 작전까지 세웠다.
    세계는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이후 미국과 북한 측은 1년 동안의 협상을 통해
    <푸에블로>호 승무원을 모두 귀환시켰다.
    하지만 배와 전자장비는 돌려받지 못했다.

    지금도 <푸에블로>호는
    대동강 인근에 [승전 기념물]로 전시돼 있다.

    48년이 흐른 지난 1월 24일,
    북한 당국은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미국을 보고
    [푸에블로 호의 교훈을 잊지 말라]
    며 뻐기기도 했다.

    최근 <안치용> 씨가 공개한 [블랙 쉴드 작전]은
    이 <푸에블로> 납치 사건 때 활약한
    美CIA의 전략 정찰기 <A-12 옥스카트>의 작전 내용이다.


    A-12 옥스카트(소달구지)의 첫 무대는 아시아


    <A-12 옥스카트>와 <SR-71 블랙버드> 정찰기는 형제처럼 보인다.
    생김새는 물론 성능, 운용 개념, 활약상 등에서도 그렇다.

    사람들에게 <SR-71 블랙버드>는 잘 알려져 있지만,
    <A-12 옥스카트>는 낯설다.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이 불과 1년 정도 밖에 안 되는 데다
    운용부서도 軍이 아니라 CIA여서다.

    1960년 5월 1일,
    美고고도 유인 정찰기 <U-2>가
    소련 우랄 산맥 상공 2만 2,000m에서 정찰비행하다
    <SA-2> 대공 미사일에 격추됐다.
    <U-2>가 격추되자
    소련은 즉각 비상대응을 준비하고,
    미국에 항의했다.

    미국은 난감해졌다.
    상공 2만m보다 훨씬 높은 고도에서 정찰비행을 하면
    요격기가 쫓아올 수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대공 미사일의 발전 속도는 이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 초창기 U-2 고공정찰기의 모습. 1960년 5월, 1962년 10월, 격추된 바 있다.
    ▲ 초창기 U-2 고공정찰기의 모습. 1960년 5월, 1962년 10월, 격추된 바 있다.

    美정보기관은 대공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전략 정찰기 개발을 시작한다.

    美정보기관의 의뢰로
    최신 전략 정찰기를 개발하던
    <록히드>사의 개발틴 <스컹크 웍스>는
    [에어리어 51]로 잘 알려진
    <그룸레이크> 美공군기지에서 정찰기 개발을 서두른다.

    1960년 1월 26일, <A-12>는 세상에 처음 나온다.
    CIA는 <A-12>를 12대 주문하고,
    <소달구지>(Oxcart)라는 암호명을 붙인다.

    [쿠바 위기]가 한창이던 1962년 10월 27일,
    이번에는 쿠바 상공에서 <U-2> 정찰기가 또 격추됐다.
    안 되겠다 생각한 美정보기관은 신형 전략정찰기 개발을 독려한다.

  • A-12 전략정찰기의 프로토 타입인 A-11. A-11은 11번째 설계도라는 뜻이다.
    ▲ A-12 전략정찰기의 프로토 타입인 A-11. A-11은 11번째 설계도라는 뜻이다.

    CIA의 독촉으로 <A-12> 개발 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그렇게 5년 만에 전무후무한 정찰기가 나온다.

    <A-12>는 시제품을 포함, 모두 13대가 만들어졌다.
    CIA에게 납품한 것은 12대.
    그 중 1대는 2인승의 훈련기로 별명이 [티타늄 거위]였다.

    길이 30.97 m, 전폭 16.95 m, 높이 5.62 m,
    기체 중량 24.8톤, 최대 이륙중량 56.5톤으로
    일반적인 전투기보다 훨씬 컸던 <A-12>는
    <플랫&휘트니>가 만든 <J58-1> 엔진 2기로
    2만 3,000m 상공에서 최고 마하 3.35(3,560 km/h)로 날 수 있었다.

    <A-12 옥스카트>의 첫 무대는 동아시아였다.

    CIA는,
    1967년 5월 22일
    <A-12>를 본토에서 일본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로 보낸다.
    <A-12>의 임무는 북베트남과 중공에 대한 비밀 정찰이었다.

    5월 30일에는 <가데나> 공군기지에 비밀 부대 [블랙 쉴드]가 생긴다.
    260여 명으로 구성된 부대는 기지 내의 비밀 시설에서
    <A-12>를 관리하고 조종했다.
    이들이 곧 [블랙 쉴드 작전]이었다. 

    CIA는 베트남 전쟁에서 <A-12>가 보여준 활약에 상당히 만족했다.

    <A-12>는 1967년 8월 16일부터 12월 31일까지
    26번의 북베트남 정찰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그 동안 북베트남은,
    소련에게 제공받은 대공 미사일 <SA-2>를 여러 차례 날렸으나
    한 번도 요격하지 못했다.

    2만 9,000m의 순항 고도에서 마하 3.3으로 속도로 날아다니면서,
    4,000km 거리를 헤집고 다니는 <A-12>를 잡을 수 있는 대공 미사일은
    북베트남-중공은 물론 세계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 비행 중인 A-12. SR-71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 비행 중인 A-12. SR-71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1968년 1월,
    이렇게 북베트남과 중공 하늘을 헤집고 다니던
    <A-12>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다.
    바로 북한 정찰이었다.

    <푸에블로>호가 납치된 지 사흘 뒤인 1968년 1월 26,
    美정부는 CIA를 통해 <A-12>에게 북한 정찰 임무를 맡긴다.

    이렇게 시작한 <A-12>의 북한 정찰은 모두 3번이었다.
    당시 <A-12>의 북한 정찰 항로는
    <푸에블로>호가 억류돼 있던 원산항 상공에서부터
    대동강 하구까지를 동서로 여러 차례 가로지르는 것이었다.

    최근 CIA가 공개한 [블랙 쉴드 작전] 자료에 따르면,
    <푸에블로>호가 납치된 이튿날인, 1월 24일 오전 10시 30분,
    美백악관에서는 <A-12>의 북한 정찰 임무를 허가할 것인가를 놓고
    <리처드 헬름스> CIA 국장과
    <폴 니츠> 국방부 차관,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린든 존슨> 美대통령은
    오후 6시 다시 연 안보회의에서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작전을 허가했고,
    <A-12>는 1월 26일과 2월 19일, 5월 6일 북한 상공을 정찰했다.

    <A-12>의 북한 정찰은 북 베트남에서와 달리 위험천만했다고 한다.
    1월 26일, 첫 북한 정찰 임무 때
    중공군이 <A-12>의 비행을 탐지하고 북한에 알려줬다.
    이 사실을 알아챈 CIA는 2월 14일로 예정돼 있던 두 번째 정찰을 연기한다.

    <A-12>는 첫 정찰에서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의 사진과 함께
    71개의 정찰목표를 촬영하고,
    <코미렉스>
    (Committee on Imagenary Requirement and Explotation,영상정보획득위원회)가
    지정한 정찰목표 81개, 보너스 타켓 752개를 촬영해 왔다.
    여기에는 13개의 지대공 미사일 기지와
    북한 주요 군사기지, 교통시설, 공업지역 등이 들어 있었다.

    <A-12>는
    1월 26일 오전 10시 11분,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를 출발해
    오전 11시 17분 53초,
    오전 11시 44분 9초,
    오후 1시 20분 21초에 북한 상공에 진입한 뒤
    오후 2시 11분 무사히 귀환했다.

    이때 <A-12>가 북한을 가로지르는데 걸린 시간은 약 4분.
    1초당 1km가 넘는 속도로 북한 하늘을 날아다닌 것이었다.

  • CIA가 공개한 A-12 전략정찰기의 모습.
    ▲ CIA가 공개한 A-12 전략정찰기의 모습.

    <A-12>가 촬영한 <푸에블로>호 관련 정찰 내용을 보면,
    <푸에블로>호는 원산 문평리 해군기지에 정박돼 있으며,
    2척의 북한 초계정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원산 공항에는
    미그 15 전투기 29대, 미그 17 전투기 25대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지대공 미사일 기지 6곳에 미사일이 장착돼 있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CIA는 국무부의 반대를 뚫고
    <A-12>를 두 번 더 북한 상공으로 보낸다.

    북한 정찰 때마다
    <A-12>는 임무를 기대 이상으로 잘 수행했지만,
    촬영한 필름이 직원의 실수로 다른 부서로 전달되는 등
    관계자들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소달구지>의 퇴역,

    전설의 <검은 새> 등장


    [블랙 쉴드 작전]은
    북한 상공 정찰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시작한다.

    불과 1년 남짓 동안의 [현역 시절]이었지만
    <A-12>의 놀라운 성능과 엄청난 잠재력을 본
    CIA와 美공군은
    이를 베이스로 해 더 많은 기술을 탑재한 전략 정찰기
    <SR-71 블랙버드>를 개발해 1968년 3월 가데나 공군기지로 보냈다.

    <A-12>의 동생뻘인 <SR-71 블랙버드>는
    지금까지도 그 이상의 정찰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다.

    <SR-71>의 등장은 <A-12>의 매력에 푹 빠진 美공군 때문이다.
    美공군은 마하 3이 넘는 속도로 지상 26km의 성층권을 누비고 다니는
    <A-12>를 활용하면
    대공미사일에 잡히지 않는 전투기와 폭격기 등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제작비와 운영비였다.

    <A-12>를 운용하던 CIA도 고민에 빠졌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CIA는 美공군과 적정한 수준에서 [타협]을 한다.
    美공군이 신형 전략 정찰기 <SR-71>을 도입하면,
    CIA는 비용 중 일부를 대기로 한 것이다.

  • 비행 중인 SR-71의 모습. 탠덤 형태의 2인승이다. 뒷좌석은 정찰담당이 탄다.
    ▲ 비행 중인 SR-71의 모습. 탠덤 형태의 2인승이다. 뒷좌석은 정찰담당이 탄다.

    이렇게 해서 개발한 <SR-71>은
    1968년 3월, 제9전략정찰비행대에 배속돼
    첫 임무를 수행한 때부터 1990년 1월 26일 은퇴할 때까지
    [전설]을 쓰게 된다.

    <SR-71>은 길이 32.74 m, 전폭 16.94 m, 높이 5.64 m,
    기체 중량 30.6톤, 최대 이륙중량 78톤으로 <A-12>보다 더 크다.

    덕분에 승무원 2명을 태우고도,
    정찰장비 1톤을 싣던 <A-12>에 비해
    1.6배의 정찰장비를 실을 수 있었다.

    <SR-71>의 최고 속도는 2만 4,000m 고도에서 마하 3.3이었고,
    항속거리는 5,400km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 일부 자료에서는
    <SR-71>의 최고 속도가 마하 4를 넘고
    최대 상승고도 또한 3만m 이상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SR-71>의 특징을 살펴보면 그런 주장도 이해가 된다.
    일반적인 항공기가 터보팬 제트엔진을 쓰는 반면,
    <SR-71>은 터보팬 제트엔진과 함께
    희박한 대기에서도 초고속 비행이 가능한 램제트엔진을 결합한
    [터보램제트 엔진]을 사용한다.
    그래서 연료도 일반 제트유(JP-4)가 아닌 특수 제트유(JP-7)을 사용한다.

    <SR-71>의 또 다른 특징은 일반 항공기와는 다른 구조와 재질이다.
    <SR-71>이 3만m 상공에서 마하 3 이상의 속도로 비행할 때는
    기체 표면 온도가 300℃, 배기구 온도가 1,100℃를 넘는다.
    때문에 <SR-71>은 전체 기체가 티타늄으로 돼 있다.

    또한 비행 중 생기는 열 때문에 부품이 늘어나는 것에 대비해 만들어
    지상에서는 부품 사이사이가 벌어져 있어
    이륙해서 적정 속도가 될 때까지는 연료가 줄줄 샌다.
    때문에 <SR-71>이 이륙한 다음에는
    하늘에서 대기 중인 공중 급유기로부터 연료를 다시 받은 뒤 임무를 수행한다.
    여기에 쓰는 연료가 일반 제트유가 아니기 때문에
    <SR-71> 전용 공중 급유기 <KC-135Q>가 여러 대 필요했다.

    조종사 또한 특별한 감압복을 입고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 대서양 상공 22km에서 SR-71 바깥을 찍은 사진. 마치 우주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 대서양 상공 22km에서 SR-71 바깥을 찍은 사진. 마치 우주비행 중인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관리와 유지가 어려운 <SR-71>은 그 [돈값]을 충분히 했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 아시아 공산국가들은
    꾸준하게 대공 미사일을 업그레이드해 <SR-71>을 노렸다.
    하지만 4,000여 번의 대공 미사일 발사에도
    <SR-71>은 단 한 번도 격추된 적이 없다.
    일부 서방국가는 레이더에 나타난 <SR-71>을
    [UFO]로 오인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가 <F-4 팬텀> 전투기를 도입할 때 큰 공을 세운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 <SR-71>이 등장한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이 도발했는데도
    우리는 김일성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냐]
    며 크게 분노했다.
    이때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이
    美공군참모총장의 도움을 얻어
    <SR-71>이 찍은 북한 사진을 얻어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장지량> 공군참모총장에게
    [사진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몇 장을 얻어갔다고 한다.

    며칠 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청와대에서 열린 회의에서
    [우리가 김일성이 있는 곳의 사진을 입수했다.
    이제 목 따러 갔다 오겠다]
    며 큰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것이 1968년 4월 중앙정보부의 명령으로 창설한
    공군 2325전대 209파견대,
    일명 [실미도 부대]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미래와 적을 바라보는 美CIA,
    과거와 내부만 보는 NIS


    <A-12>와 <SR-71>이라는 시대를 앞서간
    美전략 정찰기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강대국의 조건] 중 하나가
    [정보기관의 역할]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 SR-71과 U-2가 함께 비행하는 모습. 실질적으로는 둘 다 CIA가 운용한다.
    ▲ SR-71과 U-2가 함께 비행하는 모습. 실질적으로는 둘 다 CIA가 운용한다.

    [인간첩보](HUMINT)를 주로 맡는다는 CIA는
    1950년대 <U-2> 정찰기부터
    <A-12>, <SR-71>,
    그리고 지금의 <U-2S>까지
    전략 정찰기 운용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소련과 쿠바에서 격추된 <U-2> 정찰기부터
    지금 오산에 있는 <U-2S> 정찰기까지
    조종사는 모두 CIA 소속이다. 

    [이미지 첩보]를 담당하는 NGANRO
    지금까지 수천 기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NSA는 세계 140여개 나라에 있는 미군기지와
    동맹국 군사기지를 활용해
    전 세계를 감시하는 감청망을 구축했다.

    이들과
    미국으로부터 얻은 [사진 몇 장] 갖고
    [김일성 목 따러 가겠다]며 설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

    바로 [미래에 대비하는 자세]와
    [적을 24시간 감시하는 시선]일 것이다.

    미국은 1950년대 당시
    [적 전력]과 비교하면 [필요 없다]고 할 정도의 성능을 갖춘
    [괴물 정찰기]를 개발해 냈다.
    이를 요구한 기관은 CIA였다.

    민간 소형선박을 개조해
    적 진영을 비밀감청하고 감시하던 <푸에블로>호의
    장비는 모두 美국방부 산하 기관이었던 NSA가 준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미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강대국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미래를 선점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렇게 미국 정보기관들이
    1950년대부터 연구를 종용해 나온 결과물이
    지금의 휴대전화 기술(CDMA), 스텔스 항공기, 외골격 로봇,
    극초음속 항공기, 무인정찰기, 2차 전지, 반도체 등이다. 

  • U-2 전략정찰기 앞에서 선 CIA 소속 조종사들. 휴민트(HUMINT)를 담당한다는 CIA는 전략 정찰기도 운용하고 있다.
    ▲ U-2 전략정찰기 앞에서 선 CIA 소속 조종사들. 휴민트(HUMINT)를 담당한다는 CIA는 전략 정찰기도 운용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정보기관은
    80년대 이후
    현재 <남재준> 원장이 이끄는 국가정보원까지,
    모든 시선이 우리 사회 내부와
    청와대, 정치권, 언론, 북한 정권만 바라보고 있다.

    230개 나라에서 우리 국민이 활동 중이고,
    연간 한국 방문객이 1,000만 명을 넘어서고,
    경제규모가 1조 달러를 넘어선 지금
    우리나라의 안보 문제가 단지 한반도에만 국한될까.
    북한 정권 문제만 해결하면
    중국 공산당의 문제, 일본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까.

    물론 우리나라 정보기관이
    30년 째 정체 혹은 퇴행 현상을 보이는 이유는
    내부적 문제 보다는 [줄서기]를 강요하는
    청와대와 정치권, 언론의 문제가 더 크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 외부에 있다고 해서
    노력을 게을리 할 [명분]이 생기는 건 아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정보기관 요원들이
    지난 1월 24일 김정은 패거리가 <노동일보>에서
    [푸에블로호의 교훈을 잊지 말라]고 비아냥거린 것이
    단순히 미국을 향한 이야기라고 판단했다면,
    우리나라 정보기관은
    아직 멀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