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은 천수천안(千手千眼)일수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교훈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 대국은 흔히 위기가 닥치면, 그들의 역사체험에서 지혜를 얻고 해법을 찾는다.

    핵전쟁 1보 전까지 다가가 현대사에 우뚝했던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 간을 오늘의 한반도의 핵위기에 필요한 만큼만 들여다 본다.

    미국이 U2기의 정찰로,
    소련이 약속을 어기고 쿠바에 건설중인 핵 미사일 기지의 존재를 알게되는 1962년 10월 16일부터,
    후루시초프 구 소련 수상이 쿠바로부터 미사일의 철거를 표명하는 10월 28일까지가 13일간이었다.


    위기 발생 동시에

    [전략 고수](高手) 15명, 백악관에 포진


    당시의  J.F.케네디 대통령은 위기 발생과 동시에 대통령 직할로 위기 대응 특별 그룹을 조직-가동시켰다.
    그룹은 맥나마라, 러스크 등 국방-국무 양성의 최고위급 책임자들과 CIA의 장, 재무장관 말고도 대통령의 사적 보좌, 고문진, 군부에서는 합참의장만, 그리고 대통령의 친동생인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 등 15명으로 구성되었다.
    재임시에 전략가로 이름을 날렸던 재야의 인사들도 불려왔다.
    그룹 내에서는 비밀보지를 위해 스탭의 보조를 일체 배제했고, 계급장을 떼고 막장 토론을 했다. [출신 부처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을 대표하는 15인의 인간]으로 기능토록 기대되었다.

  • 소련이 쿠바에 비밀배치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 소련이 쿠바에 비밀배치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이 속에서 특출하게 활약했던 로버트 케네디가 68년 암살되고 나서, 맥나마라(국방장관. 세계은행 총재 경력)는 그를 추모하여 [에네르기와 용기와 애정과 영지가 비범하게 결합된 인간]이었다고 했다.

    이 케네디는 그가 남긴 쿠바 위기 회고록 <13일간>에서 그룹의 면면들이 [최고도의 지성과 근면함과 용기를 갖고서, 일신을 들어 나라의 행복에 바친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 로버트 케네디가 남긴 '쿠바미사일 위기' 회고록 <13일> 번역판 표지.
    ▲ 로버트 케네디가 남긴 '쿠바미사일 위기' 회고록 <13일> 번역판 표지.

    케네디 대통령은 이 그룹에 [다른 일은 쳐다보지 말고, (나라에 닥쳐 온) 위험과 있을 수 있는 대응 행위의 모든 노선을 신속하고도 철저하게 검토] 하도록 명했다.
    이들은 투철한 소신과 지력으로 격돌했지만,
    토론은 창조적이었고 종국에는 교향악적이었다.

    동생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이들이 누구 하나 최초로부터 최후까지 자설을 고집한 자는 없었다]고 특기하고 있다.
    대통령은 반드시 벽두에 반론의 존재를 확인하고서야 회의를 진행했다 한다.

    그룹의 결론이 대통령의 행동지침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위기 내내 이 그룹 속에서 토론하고, 자문하고, 결단하고 집행했던 것이다.

    이들이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 흔한 타이틀만 봐도 짐작이 가는 속칭 전문가는 아니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친소를 뛰어넘어 사적 통찰력으로 점찍은 국가전략의 고수들이었다.
    개성있고, 지적이고 아메리카에 헌신하려는 열정 넘치는 열다섯의 두뇌로 하여금 대통령과 동격의 책임감으로 생각하고 뛰게하여, 그 두뇌의 교향악을 스스로의 자아속에 자양으로 흡수하고 결단력의 바탕으로 한데서 케네디 리더십의 요체와 탁월성을 느끼게 된다.


    미-소의 핵대결,

    인류를 멸망의 나락으로 몰아


  •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동생 로버트 케네디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미-소 양핵대국의 대결]이 드디어 불러오고 만 위기로서, “세계가 핵에 의해 파멸하고, 인류가 멸망하는 나락으로 내 몰리는” 위기(<13일간>, 뉴욕, 1969)로서 감지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10월 16일 쿠바의 핵 미사일 존재를 보고 받자
    바로 ‘우리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면서 친동생 등 상기 그룹의 요원들을 직접 전화로 불러 백악관에 모았다.

    이 그룹이 밤낮없이 일주일간 토론-고구(考究), 점검한 결론의 대응책이 쿠바 해양 봉쇄령이었고,
    대통령은 이를 채택하여 10월 22일(월요일) 미국과 세계 앞에 공표했다.

    길 수 밖에 없는 설명과 분석을 다른데로 미뤄놓고, 간략히 더듬어 본다.

    봉쇄는 공폭(空爆)의 대안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봉쇄에는 처음부터 쿠바 공폭, 침공으로 이어지는 무력행사의 에스카레이션의 사다리가 붙어 있었고, 군비태세를 현시하여 소련 측의 미사일 철거를 위협-압박하고자 했다.

    그러나 봉쇄는 소련 측의 철거를 관철시키겠다는 미측의 결의를 분명히 해 보일 뿐으로,
    쿠바에 도입된 미사일 설비가 급템포로 실전용으로 정비되어 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 쿠바에 비밀리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자료사진)
    ▲ 쿠바에 비밀리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자료사진)

    분석자들은 해상봉쇄가 미사일을 철거시키겠다는 미국의 결의에 대응할 시간을 후루시쵸프 소련 수상에게 주었을 것으로 계산한다.
    해상봉쇄가 발효하고서 3일이 지난 토요일(10월 27일) 저녁,
    위의 그룹 즉 최고집행회의는 후루시쵸프의 제의에 답하는 모양으로,
    소련의 미사일 철거와 미국의 쿠바 불침공 보장을 맞바꾸는 안의 편지를,
    대통령은 소련 측으로 보냈다.

    오후 7시가 넘어 이날의 회의를 끝내고 일어서면서,
    대통령은 동생 케네디를 불러 따로 편지 사본을 갖고서 도브리닌 주미소련 대사를 만나,
    대통령의 비상한 걱정을 친히 일러주라 했다.

    동생 케네디는 밤 8시 가까이 되어 전화로 소련 도브리닌 대사를 법무성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회고록에 이런 얘기가 쓰여있다.

    “우리는 내일까지, 이들 미사일 기지가 철거될 것이라는 확약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
    이건 최후 통고가 아니고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이 미사일 기지를 철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제거할 것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
    아마도 당신들 나라는 보복행위를 취할 필요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나기 전에 미국인이 죽을 뿐만 아니고, 러시아인도 죽어 있을 것이다.”
       -<13일간>


  •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케네디 법무장관(오른쪽).
    ▲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케네디 법무장관(오른쪽).


    미국은 최후통첩 뒤에

    핵전쟁을 각오하고 있었다


    다음날 10월 28일 아침 국무성으로 소련 측으로부터, 미사일 철거에 동의한다는 통고가 있었다.

    위기가 지나가고 다음해 2월 맥나마라는 의회에서, 동생케네디가 행한 최후통첩 뒤에 미국은 핵전쟁을 깔아 놓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우리쪽에는 쿠바침공 준비를 완료한 수십만의 병력이 있었다.

    아무런 의문도 없이 후루시쵸프는 핵병기를 포함하는 아메리카의 전군사력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핵병기를 발사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후루시쵸프)가 이들 병기를 철거한 이유, 그 단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
    레함 앨리슨, <결정의 본질>에서


    줄여 말하면 쿠바위기는 케네디 대통령이 핵전쟁을 결심해 보임으로써,
    핵전략에서 하위에 있던 소련의 후루시쵸프가 굴복하여,
    전쟁없이 핵미사일을 철거해 낸 것이 쿠바미사일 위기였다.

  • 쿠바 미사일 위기 1년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만난 후르시쵸프 소련수상과 케네디 미국대통령.
    ▲ 쿠바 미사일 위기 1년전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만난 후르시쵸프 소련수상과 케네디 미국대통령.



    케네디의 핵전쟁 결심의 위협이 어떻게 세련되게 분산되어,
    세계 앞에 해상봉쇄 쇼도 열어놓고,
    U2기 추락 등의 계기도 만나면서,
    후루시쵸프의 자존심이 수용가능하게 전달되었던 가는 따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핵전쟁 결심은 케네디 대통령의 영혼을 헤어나기 어려운 오뇌(懊惱)로 몰아부쳤다고,
    동생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어떤 환영(幻影)>이란 장을 따로 만들어 서술해 놓았다.

    형 대통령이 핵 판 위에서 사즉생(死即生)의 진실 앞에 일신을 던지려 든 일순,
    대통령의 뇌리를 엄습했던 고통스런 상념을,
    그 혼에 공명하여 살았던 동생 케네디는 놓지지 않았다.

    “대통령이 신경 쓴 것은 미국인들의 일뿐만 아니었다.
    또 어느나라에 대해서도, 나이든 세대를 먼저 신경 쓴 것도 아니었다.
    대통령을 가장 번민케하고,
    전쟁의 전망을 다른 경우에 예상되는 것보다 한층 공포스럽게 한 것은,
    미국과 전세계의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환영(幻影)이었다.

    어떤 역할도, 어떤 발언권도 갖지 못하고 대결의 사실조차 모르는 어린 아이들 –
    그런데 이 생명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려 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결단을 내린다든지,
    투표를 한다든지,
    입후보하든지,
    혁명을 지도하든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챤스는,
    영구히 와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커다란 비극은, 만일에 잘못을 범하고나면,

    우리 자신의 장래 뿐 아니고 나라까지도 그르치고 말 뿐만 아니라,

    아직 어떤 역할도 수행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젊은이들의 생명, 장래, 희망 뿐 아니고, 그들의 나라들을 그르치고 만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을 가장 번뇌하게 하고, 비상한 고통을 안긴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13일간>



    <뉴욕타임스>의 선제폭격론


    지난 4월 12일자 <뉴욕타임스>에 미국의 한 교수가 글을 실어 [북한이 미사일을 쏘기 전에 선제적으로 폭격하자]고 제안했다.
    일부 한국 신문에도 그 사실이 보도되었다.

    그동안 북핵문제에 한번도 사즉생(死即生)의 자세로 임하지 못하던 미국사회가,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이제서야 보다 진지해 지려나 싶어 관심이 간다.

  • 북한 장사정포와 미사일.
    ▲ 북한 장사정포와 미사일.

    위에서 보았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사일 기지에 대한 공폭(空爆)안은 처음부터 최고집행회의에서 거론되었다.

    공격용병기를 쿠바에 두지 않겠다던 소련측의 약속을 믿었던 케네디 대통령은,
    심한 배신감으로 최고집행회의의 중론과는 달리 처음부터 공폭 쪽이었다.

    대통령이 봉쇄 쪽으로 돌아선 것은 토론이 3~4일간 있고서 결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였다.
    대통령은 공폭안에 대한 미심쩍음을 떨어버리려 전술공군사령관과 담판했다.
    사령관은 대규모 기습 폭격을 해도, 쿠바에 있는 미사일기지와 핵병기를 100% 확실히 파괴할 수는 없다고 했다.
    발견되지 않은 미사일과 폭격기 등의 다른 운반수단에 의한 핵공격을 유발할 뿐임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로서 대통령은 확실히 봉쇄안으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이 이동미사일 등을 동해안 등으로 돌린 것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면밀히 공부했을 북한 당국이,
    3차 실험 이후 있을 수도 있는 미측의 외과수술적 공폭을 모면하려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안일에 끝없이 물러빠진 남쪽 여론에 겁주어 국론분열도 시도할 겸.

  • 김일성 생일날 금수산궁전에 참배하는 김정은과 군부수뇌들.
    ▲ 김일성 생일날 금수산궁전에 참배하는 김정은과 군부수뇌들.

    북핵대책에 관심갖는 미국의 일반식자들에게 한마디 있어야겠다.
    60년대 초 미국의 쿠바 미사일위기 속에는 북핵문제를 향해서도 분명 교훈이 있다는 것,
    한국사람들이라고 마구잡이 실험대상은 되기 어렵다는 것 등이다.

    쿠바 위기 속에서는 해결주체인 미국대통령에게 사생관 결단의 자세가 있었다.
    지난 20년 간의 북핵문제 속에서는 한-미 쪽 해결주체 어디에도 사생관적 결단이 있었다는 얘기 듣지 못했다.

    사생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한,
    힘은 강대해도 북으로부터 주도권을 탈취하기는 무망하고,
    문제는 더욱 커져갈 뿐이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반도의 북핵위기에 주는 교훈을 다음번에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