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친은 주도권이 있을 때 하라"

    퇴계(退溪)의 안보관과 북핵 공갈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6자’의 합의 이행•파기 … 엿장수 맘대로 였다


  • ▲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북한의 핵포기를 성사시키기겠다고 시작됐던 6자회담은 2009년 5월의 두번째 핵실험 이후에는 결렬도 아니고 타결도 아니고, 무작정 공전만 하다가, 드디어는 3차 핵실험을 둘러 쓰고 말았다.
    북의 핵 불바다 공갈과 동맹 미국의 핵투하 중폭격기가 한반도 위에서 발란스를 잡고 있는 오늘이다.

    회담 실무에 간여했던 한 당사자는 북핵 문제 전과정을 돌이켜 보고서,
    [합의→파기→핵위기 로 이어지는 20년간의 고질적 악순환]이었다고 했다.
    요령좋게 압축해 보인 지적이라 할 것이다.

    6자회담에서의 합의는, 북이 조주(助走)에 필요한 힘을 받고서는, 그것을 깨고서 다음 단계의 보다 큰 핵위기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회담을 통해 [핵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하려는 미국의 정책을 연화(軟化)시키고, 바람을 빼는 쪽에 우리 정부인 노무현 정권은 있었던 것을, 오늘의 핵공갈 밑에서 한번 상기할 일이다.

    그때 우리 한국정부가 강조했던 것이 [평화적 해결] 원칙이었다.
    합의 이행 여부가 엿장수 맘대로인 판에 엿장수 편에서 시침떼고 올라타고서는, 한술 더떠 남북간에 [평화]한답시고 돈만 퍼준 결과가, 오늘의 핵 초토화 공갈로 국민들 머리위에 와 있다.

    정권을 욕하기 전에, 그 정권을 있게 한 우리 국민들 속에, 아니 내 속에 있는 공짜 평화의 환상과 착각을, 내속에 있는 전략적 백치성 아니 순진성을 이럴 때 한번 쓸어 낼 수는 없을 것인가.

    좀 돌아가는 것 같아도, 역사에서 한번 지혜를 찾아 보겠다.


    ○                         ○


    퇴계(退溪)선생보다 250여년 늦게 살다 간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그의 <속유론(俗儒論)>에서 참다운 선비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진유(眞儒)의 학문은 본래, 치국안민(安民)을 위해 이적(夷狄)을 쫓아 버리고,
    재용(財用)을 여유있게 하고,
    문(文)을 잘하고, 무(武)를 잘해서, 그 어느것도 짊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 후세의 유자들은 성현의 본 뜻을 모르니까,
    인의(仁義)나 이기(理氣) 이외의 것을 발언하면 이를 일러 잡학(雜學)이라 한다.”

       -강재언(姜在彦), <朝鮮儒敎の二千年>


    우리는 본질적으로 경세가(정치가)이거나 정치가 후보격인 사림의 선비들이 본무여야 할 치국(治國)안민을 위한 군사나 경제를 [잡학]이라고 경시하면서, [의•예(義禮)]나 [이기(理氣)]의 논쟁에, 당파를 갈라 다투다가 나라가 기울어버린 역사를 알고 있다.


    군사(軍事)를 경시하는 오늘의 인텔리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 정신사의 거봉 퇴계는 달랐다.

    분란을 일으키고서 다시 엎드려 수교(修交)를 비는 왜인(倭人)들에 대한 대책을 놓고서,
    벼슬살이 중에 퇴계 이 황(李滉, 1501-1570)은 상소문을 올렸다.
    그 속에 퇴계의 탄탄한 안보-국방 사상이 개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날에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원칙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어서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상소 전후의 왜인(倭人)관계


    퇴계가 [개도둑], [쥐도둑]이라고 표현하는 왜구(倭寇)는 고려말 이래로 반도의 연안일대에 출몰하여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다.
    조선조가 되어서는 세종 때에 왜구의 소굴로 지목했던 대마도를 한번 정벌하고서는, 일본 중심의 아시카가(足利) 정권에게 왜구의 금압(禁壓)을 요청하고, 대마도주에게 그 책임을 맡기는 대신에, 조선과 무역하는 특권을 주어 대응했다.
    반도 동남에 제포(웅천)-산포-염포(울산)의 삼포를 열어, 왜선이 기항케 하고, 왜인들이 상주도 하였다.

    15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서, 조선의 물품, 특히 당시의 신개발품인 무명배가 전국(戰國)의 무장들 뿐만 아니고 호상들의 관심을 끌면서, 공인(公認)의 사절선(使節船) 외에도 사무역의 밀수선이 급증하였다.

    조선측의 단속이 있었고, 이에 불만인 왜인들이 대마도 측도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1510) 이를 진압한 조선 측은 왜인들이 거주하는 삼포를 폐쇄해 버렸다.

    궁지에 몰린 대마도주가 통교를 요청하여 새로 약조를 맺게 되었다.(1512)
    새 약조는 무역량을 줄이고, 왜관은 제포(薺浦)한 곳에만 두게했다.

    일본의 소호족들과 상인들에게 불만이 쌓여 갔고, 끝내는 퇴계가 상소문-갑진걸물절왜사소(甲辰乞勿絶倭使疎)를 내기 1년전인 1544년 4월 고성 앞바다의 사량도에 왜선 20여척이 쳐들어 오는 분란이 있었다.

    조정은 강경했다.
    왜인들과의 통교를 일체 금지하자는 [절왜론(絶倭論)]이 팽배했다.

    이 같은 정황속에서 관직에 나온지 10여년 되는 45살의 퇴계가 상기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 ▲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퇴계의 도이(島夷)관


    상소에서 퇴계는 당시 유자들의 왜인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도이(왜인)는 이적(夷狄)이므로 금수(禽獸)라 하는데, 심한 말이기 보다는 그 풍습이 예의(禮義) 문화 밖에 있어서 이를 뿐,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접할 때에 이쪽의 기준을 적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다스리는 원칙을 말한다면 [불치(不治)의 치(治)]이고, 춘추(春秋)경에 쓰여있는 대로 [오는자를 거절하지 않고(來者不拒), 가는 자를 만류하지 않는다(去者不追)]라야 한다는 것이다.

    퇴계는 왜사(倭使)를 받아주라 하고 있다.
    상소의 주지를 발췌요약으로 보아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 … 왕의 길은 넓은 것입니다.
    … 상대편이 진실로 굴복하는 마음으로 오면 받아들일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인들이 하는 요청은 허락할 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어느 때가 되어야 허락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 서로가 양보없이 맞게 되는 셈이니, 무식한 이 소인배들이 반드시 앞으로 크게 원한을 품게 되어서 뒷날 끝없는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변방의 약점이 한번 드러나면 전쟁이 이어져서 겉잡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감화시키고자 하면 더욱 심하게 굳어질 것이고, 화친을 하고자 하면 이미 칼자루가 우리 손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 지금 섬오랑캐(島夷)가 우리 조정에 오고 싶어 하는데 그 소망을 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내 쪽에서 앙화와 난리를 불러 들이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 한편, 나라가 그들에게 화친을 허락하되 방비는 조금도 늦춰서는 안될 것이며, 예절로서 대접하되 너무 지나치게 양보해 주어도 안될 것입니다.
    더욱이 한번 불쾌하다고 종신토록 내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 조정에서 왜인들의 요청을 거절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속으로 잘못이 아닌가 걱정하고 있습니다.
    생각컨대 이일은 수백년 나라의 존망에도 관계있고, 천만 백성의 생명과도 이어져 있기에 제가 죽은 뒤에라도 원한이 남지 않도록 삼가 말씀 올리는 것입니다.

    …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이글을 올립니다.”
          -이윤희, <왜의 사신을 끊지 말기를 바라는 상소>, <퇴계가 우리에게>, 예문서원



    권(權)과 세(勢)를 놓지마라.

    – 화친의 전략원칙


    소(疎)는 왜인들의 요청을 조정이 들어주기를 권하면서 두가지 논리를 들고 있다.

    첫째는 예부터 제왕들이 오랑캐를 다스리는 방법은 화친을 우선으로 했다는 것이다.
    용병(用兵)의 지경에 이르러도, 인명을 해치는 접근만 못하게 하였을 뿐, 해(害)의 요소가 제거되면 용병도 중지하였다.
    그러므로 왜사(倭使)는 받아줘야 한다는 논리이다.

    두번째 논리가 권(權)과 세(勢)를 기준에 둔 [화친의 전략원칙]이다.

    권과 세가 이적(夷狄)편이 아닌 내편에 있을 때 화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권(權)]이라 함은 주도권 혹은 문화적 우위성에의 상대의 승복 같은 것이고,
    [세(勢)]라 함은 세력, 힘의 사용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퇴계의 특징적인 측면은, [권과 세]의 전략원칙을 조정은 왜사(倭使)를 견고하게 거절하는 데만 원용하고 있다고 지적해 보인 것이다.
    퇴계는 [권•세] 전략원칙을 대왜(對倭) 통교 문제에 발전적으로,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조정의 논의와는 달리 왜인의 요청을 들어 주라한 것이다.

    소(疎)의 관계부분을 여기 옮겨 본다

    “또다른 일설(一說)의 이적(夷狄)과 화친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본디 당연히 조종(操縱)과 신축(伸縮)과 가부(可否)의 권(權)과 세(勢)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권과 세를 반드시 항상 우리쪽에 있게해야 되고, 저쪽에 있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臣)도 역시 조정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조정이 이를 무겁게 보았기에 이토록 견고하게 거절을 논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가 있으면 (화친을) 끊고, 스스로 새롭게 변하면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권과 세가 우리 쪽에 있어서 타당하게 그렇게 시행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타당하게 그렇게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을 때(제때•時宜)라 합니다. 이 때를 어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권(權)은 견지한 채, 그 세(勢)는 잊은 채로, 아무런 사심없이 저들을 조처하면, 저들도 반드시 크나큰 덕으로 여겨서 마음으로부터 감동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저들은 서로 타일러 정성을 내보일 것인데, 이를 이른바 [그것을 화(化)한다]하는 것입니다.
    이 화(化)라는 것은 [화친] 따위와는 말할 나위도 못됩니다.”


    퇴계는 [권•세]의 전략원칙을 발전적으로 적용했을 때의 가능성을 일반론으로 풀어 놓고서는,
    당시 현실에서의 조정의 논의가, 이 전략원칙을 안이하게 적용한 결과로 생겨나고 있는 문제점과 위험을 에누리 없이 지적하고 있다.

    “지금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하지 못하고 그 권(權)을 잡고 세(勢)를 거머쥐어, 저들이 선(善)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완고하게 저지하여 허락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런즉 상대편과 내쪽이 간격이 있게 되고, 피차가 서로 각이 지니, 저 못난 것들이 꿈틀대어, 장차 반드시 큰 원한을 품게되어, 뒷날 끝없는 우환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盧相福 역 참고


    일본의 퇴계연구학자 다까하시(高橋進)는 위 인용의 마지막 구절 [장차 반드시 큰 원한을 …](必將大爲怨恨, 而啓後日無窮之患矣)을 들어, 퇴계가 끝내 도래하고 마는 "임진왜란을 명확하게 내다 본 것”이라 하면서, 그의 우국의 심정(深情)과 역사를 꿰뚫는 통찰력에 감명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있다.(<李退溪와 敬의 철학>, p103)

    이 [권과 세]의 전략원칙의 적용에서 퇴계가 경계해 보이는 것이 있다.

    이 전략원칙을 위에서 보았던 것 처럼 창조적으로 적용할 [때]를 놓쳐 [화(化)]의 기회를 잃고 만 후에, 변방의 약점이 노출되기라도 하면, 저들은 또다시 행동으로 나올 것이고, 화친에 필요한 [권과 세]는 저들과 나누어 가지는 입장으로 떨어져, 화친 조차도 뜻대로 기하기 어려울 것이라 하고 있다.

    퇴계는 피아(彼我)간의 [권•세]의 전략 발란스는 유동하는 것이므로, 집정자가 때를 알아볼 것을 강조하고, 제때에 때를 굳힐 액션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朱子)의 주전론(主戰論)과 권•세 문제


    퇴계는 상소문에서 남송(南宋)의 주자(朱子)가 금(金)나라와의 강화를 강하게 부정해 보인 언급을 인용하고 있다.
    휘종(徽宗)-흠종(欽宗) 두 황제가 납치 당하고 나라가 망해 남쪽으로 밀려난 송(宋)의 군신들이, 피난국가를 세워 놓고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는 갚을 엄두도 못내고, 돈으로 산 평화에 자족하는 안일에 길들어 세월이 가니, 세상의 도의는 무너지고, 지식인의 사기마저 피폐하여 망하는 일만 남게 된 국정을 그때의 충신-의사는 통탄했던 것이다.

    밀봉상소문(壬午応詔封事, <世界の名著-朱子 王陽明>, 中央公論社) 등에서 드러나는 주자의 주전론은 흔히 말하는 명분론이나 관념론은 아니었다.

    열살 때 화의(和議)론의 수장인 간신 진회(秦檜)에게 추방당해 부친을 잃은 아픔을 잊지 못하는 주자의 주장은 구체적이었고 실전적이었다.
    그가 문제제기 했던 핵심은 [화(和)전(戰)의 실권](주도권)을 금나라에 넘겨버리고서 평화에 연연해하는 눈앞의 현실 그 자체였다.

    주자가 종합 국력에서 여유가 있었던 남송(南宋)의 군신들을 향해 촉구해 마지 않았던 것은, 금(金)나라가 차지해 버린 화(和)전(戰)의 가부를 가르는 [권과 세]를 송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대국 남송의 무기력한 지식대군은 끝내 화(和)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퇴계의 전략원칙과 남북상황에의 시사점


    화(和)냐 불화(不和)냐의 주도권을 금(金)에 제압 당한 채, 국력이 있어도 위정자들이 그 추로(醜虜)의 환심을 사기에 바빠, 행여 그것을 잃을까 겁나서, 국가 구원(久遠)의 대계를 잊어, 중원회복의 기를 놓져버린 것이 남송(南宋)의 역사였다.

    지난 선거에서 DJ-노무현 정권의 연장에서 세상이 바뀌었다면, 한국도 남송과 다르지 않은 길을 갔을 것 같아, 오싹한 느낌이 든다.

    주자의 위와 같은 [화(和)•불화] 주도권의 문제성 지적은 퇴계에 의해 소화되어, 화친의 도(道)로서의 [권•세]의 전략원칙으로 다듬어져 나온 것이다.

    생사와 승패를 종국적으로 가름하는 전략원칙은 옛날 것이라고, 서양것이라고,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월남전에 패한 미국의 펜타곤(국방성)이 한번 돌이켜 보면서, 생겨난지 2천년도 더되는 중국의 <손자병법>을 진작 읽어 보지 못했던 것을 후회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정일(精一), 집중의 경(敬)을 체화하여 살았던 마흔 다섯살의 퇴계가 대국(大局)을 파악하는 안목으로 진단한 현실은 “국운은 어렵고 막혀만 가고 있었고, 근본은 흔들리고 불안했으며, 변방의 방비는 허술하고, 병기는 소모되고 양식은 떨어졌던”(상소문 중에서) 것이었다.
    퇴계가 어찌 만고에 통할 전략원칙을 다듬어 보려 들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인가.

    퇴계에게서 오늘의 핵 상황에 유용한 교훈을 찾고자 한다.


    [신뢰 프로세스]는 퇴계의 교훈에 주목하라


    한국은 통일방식에서 무력통일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라도 통일문제를 들먹이면,
    북의 상대와 화(和)와 신(信)의 관계를 만들어 내는 일에 집념할 수 밖에 없다.

    또한 DJ-노무현 정권의 10년간은 화(和), 불화(不和)의 주도권을 북에 둔 채, 화(和)의 관계를 만들어 내어 흥청거린 10년이었다.
    정부가 들어 전략적으로 수탈 당하는 기만적 화의(和議)관계에 국민들의 의식이 길들고 마비되도록 각종의 정책을 동원한 홍보적 현실이 있었다.

    이를 이어받은 MB정권은 미국의 의중을 받아, 북핵문제에는 기계적 대응을 보였으나, 국민들의 오도된 대북화의 의식을 문제삼는 사고 자체가 없었고, 종북적 존재들의 공략에 의식의 밭을 열어둔 채 5년을 허송세월 했던 것이다.

    국민 속에는 [권•세]나 핵의 존재 같은 것 아랑곳 없이 북과 대화만 하고 관계 증진만 하면 뭔가 되는 것인줄 여기는 의식이 팽배해져 버렸다.
     
    이 같은 문제의식 위에서 우리민족의 위대한 우국의 선철이기도 했던 퇴계로부터 위의 논술을 정돈하여 적과의 화친과 관련된 몇가지의 교훈을 얻어 보겠다.

    첫째로 적과의 화의는 기본적으로 전투적 공존(combative coexistence – 키신져, ) 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퇴계는 왜인들의 통교요청을 들어 주라면서, 방비는 엄히 하라고 했다.

    둘째로 [화•불화]를 주도할 수 있는 [권과 세]가 우리측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화친은 가능하다것이다.
    DJ정부 이래, 3차 핵실험을 한 지금까지, [화(和)•불화(不和)]의 [권(權)과 세(勢)]는 북이 가졌지, 우리는 못가지고 있다.
    북이 대화하자면 하는 것이고, 치면 맞는 것 뿐이었다.
    [권•세]를 돌보지 않고 화(和)를 물신숭배하면서, 북방기마민족들한테 돈만 갖다 바치고, 망해간 송나라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화•불화]를 주도하는 [권과 세]가 저쪽에 있는데, 전쟁공갈 등에 못견뎌 화의를 한다해도, 저쪽의 적의(敵意)는 감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화친에 의해서는 어떠한 전략적 이익도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전략적 수탈만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남송이 금나라에 화의하여 갖다 바친 돈과 비단은 오랑캐의 군대를 강대하게 할 뿐이었다.
    지난 시절 남북관계 증진의 이름 밑에 각종 수법으로 북으로 간 수십억불은 지금 뭐가 되어 있는가.

    넷째로 통일로 가는 친화를 추구할 진대, 국가의 정책적, 전략적 노력은 북으로 기울어져 있는 [권•세] 발란스를 우리쪽으로 역전시키는데 집중되어야 할 것이다.
    한•미 동맹의 효능은 핵우산을 넘어 이 [권•세] 발란스의 역전에도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정책당국의 발상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지막으로, 퇴계가 건의했던 왜인과의 화친은, [권과 세]가 이쪽에 있을 때에 시작하여 [권(權)]은 가진 채 [세(勢)]는 쓰지 말아서, [화친]을 넘어서는 화(化) 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퇴계가 말하는 화(化)의 의미는 이적(夷狄)의 마음 속에 있는 적의(敵意)가 일시적인 휴지(休止)가 아니고, 질적변환이 일어나서 공생(共生)적 화(和)에 가서 닿는 것일 것이다.

    전쟁수단을 배제해 놓고 있는 민족통일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지를 퇴계는 암시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동시에 오늘 박근혜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또한 그 바닥에 신(信)과 인(仁)의 정치이념을 깔고 있는 것이라면, 위에서 본 퇴계에서 얻는 교훈으로 성사를 위한 전제조건 충족의 길을 열어 볼 수 있을 것이다.(2013.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