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광화문에선 국회의원 22명참석 '빨치산 추모제' 열렸다
  • “빨치산 찬양교사 무죄” 선고

    진현민 판사 나와!!!

    대법원이 뒤엎은 전주지법 “전교조교사 무죄” 망판(亡判)

      오 윤 환


    3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싹” 내려갔다.

    28일 대법원 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가  학생들을 빨치산 추모제에 이끌고 간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기소된 전북 임실 관촌중 김형근 전 교사(53)에게 내려진 “무죄”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돌려보냈다는 뉴스를 읽고서다.

    2010년 전주지법으로부터 “무죄”를 선고받고 동료 전교조 교사들로부터 축하를 받으며 웃던 김형근 얼굴은 지난 3년간 정말 끔찍한 ‘악몽’이었다.

    대법원 파기환송은 “유죄” 취지다.
    아무리 전주지법이 [좌경판결의 본산지]라지만,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파기환송을 외면하지 않겠지?  

    대법원 판결을 접하자마자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진현민 판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설마 아직도 법원에 몸담고 있지는 않겠지?”


    천만의 말씀이다.

    <진현민>을 치자,
    그는 서울고등법원 공보판사로 거침없이 등장했다.

    전주지법에서 2010년 5월 검찰의 징역 4년과 교사 자격정지 4년 구형을 묵살하고,
    “김현근 교사의 행위가 자유민주주의 정통성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며 무지막지하게 “무죄”를 선고한 그가 여전히 법복을 입고,
    그 것도 모자라 승승장구해 서울고법 [공보판사]로 재임중이다.

    이건 3년 전의 [악몽]보다 몇배 더 지독한 [악몽 중의 악몽]이다.

    진현민 판사가 “자유민주주의 정통성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고 한 김형근의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 2005년 5월 말.
    전북 순창 회문산 자락 청소년수련원.
    [남녘 통일 애국열사 추모제]가 열렸다.

    [애국열사] [빨치산]을 미화한 빨갱이들 용어다.
    회문산은 6.25 빨치산 본거지 중 하나.

    김형근은 학생 180여 명을 인솔하고 첫날 전야제에 참석했다.
    김은 전교조 전북지부 통일위원장이 집회을 주도했다.

    학생들은 빨치산 출신 장기수들을 [훌륭한 분]이라고 표현한 편지를 낭독했다.


    “전쟁 위협하는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하자!"


    학생들은 구호를 제창하며 손뼉을 쳤다.
    학생들은 차례로 무대에 올라 [평양학생에개 보내는 통일편지]를 읽었다.

    주최 측은 학생들에게 [통일에 기여헌 공로]로 표창장도 줬다.
    빨치산 출신들은 감격에 겨워 외쳤다.


    "제주도 양키군대 (미군)를 한 놈도 남김 없이 섬멸하자!

    남한 정부는 괴뢰정부다!"


    학생들의 편지 낭독 사진들이 학교 홈페이지에 올려졌다.
    학생들의 노트에선 [국가보안법 때문에 통일이 저지된다]는 글이 발견됐다.

    아이들은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다.


    "남한은 미국에 휘둘리는데,
    북한은 미국 간첩선 푸에블루호를 대동강변에 전시해 놓고 있지만, 미국이 어쩌지 못한다.
    남한은 북한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배워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속국"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가 괴질이나 걸렸으면 하는 큰 소망이 있다"


  • 김형근은 미전향 장기수 3명을 학교로 초청해 학생들과 좌담 행사를 갖게 했다.
    미전향 장기수들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세뇌교육을 했다.


    "남한 권력자들은 민족 배신자였다!"


    김형근은 전교조 교사들에게도 이메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전파했다.
    인터넷 포털에 [반전 카페]를 열어, 고교생들에게 [친북-반미 사상]을 가르치고 토론했다.

    북한 핵무기에 대해서도 이런 글을 올렸다. 


    "북한은 전쟁을 원하지 않고, 핵무기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맺기 위한 수단이다."


    김형근은 인민군 혁명가 등 다수의 이적표현물을 베껴 소지하면서 이런 문건들을 인터넷 등에 게시했다.


    <6.15 시대 전진을 가로막은 미국의 죄악>

    <김일성 주석 탄생 94돌>


    그의 집에서는 이런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북한군 혁명가요>를 암호로 베껴 적은 것,
    북한에서 작성된,
       <위대한 김정일 장군남께서 창조에 관해 하신 명언>
       <주체사상은 인류의 진보적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상>
                    -<검찰공소장 축약>


    이 끔찍한 혐의가 “자유민주주의 정통성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진현민의 판단.

    <전주>가 빨지산 아지트 <회문산>과 가까워서였을까? 
    그는 전남 고흥 출신이다.

    <진현민>이 다가 아니다.
    전주지법의 사법농단은 진현민 이후 계속된다.  

    전주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김병수 부장판사)는 김형근 항소심에서 검찰 항소를 기각하고 역시 “무죄”를 선고했다.

    김 부장판사는 판겷룸에서 이렇게 판시했다.


    "빨치산 행사에 참가한 피고인의 행위가 이 사회가 수용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나, 참가 자체로 국가의 존립 안정과 자유민주주의의 정통성을 해칠 만한 실질적 해악성이 없다."


    얼씨구~다.

    어린 학생들과 일부 학부모까지 빨치산 찬양모임에 인솔하고 빨치산들로부터 "남한 권력자들은 민족 배신자였다“는 헛소리를 듣게 하고, 그 미친소리를 들은 학생들이 '국가보안법 때문에 통일이 저지된다'는 강정구나 송두율같은 주장을 하도록 만든 게 ”국가의 존립 안정과 자유민주주의의 정통성을 해칠 만한 실질적 해악성이 없다"는 것이다.

    김형근은 학생들을 빨치산 추모제에 끌고가기 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3년간 복역한 전과자]다.
    국가보안법 재범은 사실상 확신범이기 때문에 "무죄" 선고는 사실상 불가능한 판결이다.

    진현민은 빨치산 찬양교사 무죄판결에도 불구, 승승장구했다.
    서울고법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것도 <공보판사>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역시 “무죄“를 선고한 김병수 부장판사의 행적은 찾지 못했다.
    혹시 전주지법 부장판사를 끝으로 퇴임해 변호사로 호남의 향판(鄕判)으로부터 전관예우를 즐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 김병수 부장판사의 행적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가 [빨치산 찬양 전교조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진현민 판사처럼 잘 나가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지경이다.
     
    대법원 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이렇게 판시했다.


    “빨치산 추모 전야제는 순수하게 사망자들을 추모하고 위령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북한 공산집단에 동조하고 빨치산의 활동을 미화·찬양하는 성격이 담긴 행사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도 김씨 행동을 반국가단체 활동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은 [법리를 오해]했거나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또 단언했다. 


    “김씨가 소지하거나 반포한 일부 이적표현물은 대법원 판결에 의해 이적단체라고 확인된 범민련 남측본부 등에서 작성된 문건이거나 이를 필사한 문건이다.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선전하거나 동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대법원에서 “김형근 무죄“ 판결을 완벽하게 뒤엎었는 데, 진현민 판사가 아직 법복을 입고 있고 서울고등법원에서 <공보판사>를 맡고 있다는 것은 [기적]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 기자들은 오보(誤報)를 내면 징계를 받는다.
    오심(誤審)에 대한 책임조차 지지 않는 판사와 사법부는 성역인가? 

    그 것도 빨치산 찬양에 학생들을 동원하고,
    반국가단체를 선동-동조한 전교조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 판결이 대법원에 의해 완벽하게 부정됐는데,
    아직도 판사질하고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지금은 <우리법연구회>를 감싸고 돌며 승진시키고 요직에 꽂아박은,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도 아니지 않은가?

    대법원으로부터 [법리를 오해] 했다는 지적을 받고도, 어떻게 법대에 앉아있을수 있을까?

    김병수 부장판사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을 경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헌법소원을 낼 계획”이라고 기고만장했던 김형근진현민, 김병수의 얼굴이 악몽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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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기사/ 2007년]

    국회의원도 참여한,

    광화문 [간첩-빨치산] 추모제

    간첩에 [통일조국사업 위해 남한에 파견] 미화
    한나라당 국회의원도 추모위원으로


    金成昱  

    단속은 하지 않는가?
    『지난 10년 동안 저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속 안 하나?
    『세상이 그렇게 되 버렸다』




  •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국회의원 22명이 추모위원으로 참여한 「간첩·빨치산」추모행사가 열렸다.


    배일도 의원,

    『문제 되지 않는다』


    좌파연합체인 한국진보연대 등은 10월13일 오후 5시 광화문 열린공원에서 「열사(烈士)의 정신으로 일어서라! 민중이여!」라는 구호 아래 소위 「제18회 민족민주열사·희생자 범국민추모제」를 개최했다. 

    열린공원에 설치한 분향소·전시물의 추모대상인 500여 명의 소위 「열사(烈士)」 중 상당수는 건국 이후 간첩·빨치산 활동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들이었다.



  • 공식자료집에 따르면,
    이날 행사에는,
    한나라당 배일도, 원희룡 의원을 비롯해,
    강기갑, 강창일, 권영길, 김원웅, 김희선, 노회찬, 단병호, 문병호, 심상정, 오영식, 우상호, 이기우, 이목희, 이상민, 이영순, 이인영, 정청래, 천영세, 최순영, 현애자 등 국회의원 22명이
    ,
    추모위원으로 참여했다.

    기자는 이들 국회의원 가운데 한나라당 소속 원희룡, 배일도 의원과 통화해 보았다.

    원희룡 의원은 『민주화운동 관련 팩스가 여러 차례 왔던 것 같기는 한데, 이런 행사에 이름을 넣으라고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간첩·빨치산 출신들을 추모하는 행사임을 알았다면 수락했을 리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배일도 의원은 『추모대상에 간첩이나 빨치산 출신들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나는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간첩에 『통일조국 사업 위해 남한에 파견』>

    이날 행사 추모대상에는 남파(南派)간첩 출신 「금재성·김도한·김남식·신창길·왕영안·윤용기·진태윤·최백근·최남규·최인정·」, 빨치산 출신 「권양섭·김광길·김병인·김용성·김현순·류낙진·박판수·손윤규·안상운·윤기남·장광명·정대철·정순덕·주명순」 등 다수의 共産혁명기도자들이 포함됐다.

    행사장 전시물은 남파간첩 출신과 빨치산 출신들을 가리켜 『동지』와 『열사』로 호칭하며, 각각 『통일조국을 위한 사업을 위해 남한에 파견』, 『조국통일투쟁에 전념하시다』 등으로 미화하고 있었다.

    간첩·빨치산 출신들 이외에도 1979년 검거된 共産혁명조직 「남조선민족해방애국전선(南民戰)」의 주범 이재문·신향식, 1968년 검거된 조선로동당 지하당 「통일혁명당(統革黨)」 간부로서 越北해 조선로동당에 입당했던 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간첩전력자들도 추모대상에 들어가 있었다.

    수령영생론(永生論) 등 김일성주의를 퍼뜨려왔던 김남식이나 범민련남측본부에서 이적(利敵)활동을 벌여 온 신창균 등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던 反국가행위자들은 일일이 세기 어려울 정도였다.




  • 『反통일(?) 세력,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도록...투쟁』


    이날 행사는 오후 3시 시청 앞에서 집회를 마친 좌파단체 회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앞선 집회에서 10·4선언 실천을 위한 평화협정 체결, 국가보안법 폐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었다.

    추모제는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오종렬(舊전국연합 상임의장)의 대회사로 시작됐다.

    오씨는  『자주평등 평화통일 민중해방 세상은 열사(烈士)의 꿈이자 살아있는 우리의 꿈』이라며 『민족을 목 조르는 한미동맹을 해체할 것』『멸망의 재앙덩어리 전쟁기지를 없애버릴 것』『생존과 번영의 6·15선언을 이행해 자주통일·민중해방을 앞당길 것』을 주장했다.

    행사는 「섬뜩한」 결의문 채택으로 마무리됐다.

    결의문은 『열사(烈士)들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자신의 목숨을 민중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 속에 자신을 던지셨다』며 간첩·빨치산 출신을 미화하면서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철수를 반드시 이룩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냉전적 법·제도를 즉각 폐지시키길 것』과 함께 『냉전수구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내려 보내야 할 것』, 『反민주·反민중·反통일적 세력이 더 이상 이 땅에 존재하지 못하도록 투쟁할 것』 등을 결의했다.  


    [관련기사-1]

    <소위 '민족민주열사' 면면(面面)>


    추모제가 진행됐던 소위 「민족민주열사」들의 구체적 面面은 좌파단체의 발간책자와 인터넷홈페이지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밖에도 좌익들이 출간한 《쓰여 지지 않은 역사(김민희 著)》, 《감옥에서 죽은 비전향장기수들의 이력서(1992년 3월 월간 말지 민가협 권낙기 著)》,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월간 말지 刊)》 및 2006년 1월 소위 『파쇼독재 잔당들과 후예들에 대한 매장, 처벌, 처형』을 주장하며 북한이 보내 온 《비전향장기수 공동고소장》에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이 기술돼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소위 「민족민주열사」들 중 간첩·빨치산 출신들은 검거 후 전향을 거부하다 옥사 또는 출소 뒤 지병(持病)으로 사망한 인물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29년을 복역한 뒤 1995년 사망한 빨치산 출신 윤기남은 비전향장기수를 다룬 영화 「송환」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과 조국에 대한 임무를 마무리 못해 죄송스럽습니다. 나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조국의 젊은이들이 승리해줄 것을 바랍니다. 끝까지 굳게굳게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최후까지 그날까지 나아가겠습니다』


     

  •  


    『백두산 장군에 대한 충성』으로 전향 거부한 간첩


    소위 「민족민주열사」 중 간첩·빨치산 출신 일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최남규는 19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체포된 후 1973년 출소했다. 출소 후 3년 간 엿장수 생활을 하다 75년 7월 사회안전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돼 89년 풀려났다. 그는 출소 직전인 89년 5월11일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쓴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가고픈 내 고향에 가고파도 내 못가네. 광복된 이 조국에 38선 웬 말인가 이 땅 뉘 땅인데 주인행세 누가하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짓밟질랑 말고서 돌아가라, 사라져라, 어서 꺼져버려라. 고-홈 고-홈 양키 고 홈』

    1999년 사망한 최남규는 스스로 『백두산 장군(金正日)에 대한 충성 때문에 전향하지 않았다』고 밝혔었다.


    류락진은 6.25사변 당시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57년 가석방된 후 63년 「혁신정당」사건, 71년 「호남통혁당재건委」사건, 94년 「구국전위」사건, 2002년 빨치산위령비 비문(碑文)작성 사건으로 거듭 처벌받는 등 2005년 사망 시까지 대한민국 파괴활동에 매진(?)해왔다. 이 중 구국전위는 「조선노동당」의 남한 지하당으로서 창립선언문과 강령 및 규약에서 북한의 主體思想을 조직의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있다.

    류낙진은 이적단체(利敵團體)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그의 가족들은 부의금 5천만 원을 통일운동에 써달라며 범민련 남측본부에 기탁했다.
    류낙진은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조부로도 알려져 있다. 


    △금재성은 1956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체포돼 1972년 출소한 뒤 1998년 사망했다.

    진태윤은 1962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체포돼 1988년 출소했다가 1997년 사망했다.

    김도한은 1957년 간첩으로 남파됐다 마곡사 승려로 암약해 오던 중 체포됐다.

    최인정은 1964년 목재보트를 타고 남파했다가 체포됐다.

    왕영안은 해방 직후 남로당 활동을 벌이다 월북, 1958년 남파됐다 체포됐다.

    윤용기는 북한 건축국 문화부장 출신으로 1959년 남파됐다 체포됐다.

    신창길은 1959년 간첩으로 남파된 후 암약해오다 1973년경 체포됐다.

    최백근은 해방공간에서 국회프락치 공작 등을 벌이다 6·25당시 월북한 뒤, 1952년 지하당 재건 사명을 띠고 남파됐다가 위장 자수했다. 이후 『사회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한 사회당건설을 주도하다 5·16직후 사형됐다.

    박융서과 김용성은 각각 1958년과 1962년,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로 검거돼 복역하던 중 1974년과 1980년 옥사했다. 



  • 윤기남은 1951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됐다. 1968년 비전향 만기출수 후 1971년 지하당 사건으로, 1979년 반공법 위반으로 거듭 구속됐다.  

    장광명은 1951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검거됐다.

    김현순은 1952년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검거됐다가, 1972년 통혁당 사건으로 재수감됐다.

    김용성은 간첩미수죄로 1964년 검거됐다.

    권양섭은 남로당 활동하다 복역해 나온 뒤 1972년 조선로동당 지하당 통혁당 사건으로 다시 복역했다.   

    박판수는 남로당 항양군 군당부책으로 일하던 중 6·25가 벌어지자,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검거됐다. 그

    정순덕은 6.25사변 발발 후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남편을 따라 1951년 이후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63년 11월 체포됐다.  

    김병인은 1950년 지리산 빨치산 활동을 벌여오다, 1951년 전남 도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1953년 검거됐다.

    손윤규는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체포됐다.

    김광길은 화순군당 위원장으로 빨치산 활동을 벌이다 검거돼 1969년 출소했다.

    정대철은 빨치산 출신으로 21년 6개월간 수감됐다가 1990년 사망했다.

    장광명은 6·25당시 전북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 중 체포돼 1971년 출소했다.

    안상운은 빨치산 활동을 벌여오다 1953년 검거됐다. 



  • [관련기사-2]

    『단속 안 하느냐』에

    『세상이 그렇게 됐습니다』


    기자는 행사직전인 14일 토요일 오후 4시 경 광화문 열린 공원에 도착했다.
    간첩·빨치산 출신에 대한 노골적 미화와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는 전시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둘러 본 후, 행사보호(?)를 위해 대기해 있던 전경들에게 『저런 실정법 위반행위를 단속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이미 허가 난 행사』라며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담당 부서인 종로경찰서 정보과로 전화를 돌렸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가?

    호통!!!


      -지금 열릴 예정인 광화문 민족·민주열사 추모제는 허가를 내준 것인가?
    『주최 측이 신고했다. 신고하면 된다. 허가 사항이 아니다』

     -행사를 보니까 간첩·빨치산을 추모하는 행사이다. 남파간첩들에 대해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이런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

    『행사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향인지 사전에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나? 국가보안법 등 현행법 위반으로 보이는데?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가? 우리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집회 신고가 들어오면 처리하는 곳이다』

     -경찰에서 단속하지 않느냐는 질문이다.

    『빨갱인지, 빨치산 행산지 우리 소관 사항이 아니다. 보안과에 물어봐라』



    『답변 드리기 어렵다』는 보안과



     기자는 다시 보안과로 전화를 돌렸다.

    -광화문 민족·민주열사 추모제가 열리는데 내용을 보니 간첩·빨치산 추모까지 하고 있다. 간첩들에 대해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단속하지 않나?

    『예민한 사항이라 뭐라 말하기 어렵다』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 위반 아닌가? 경찰이 법집행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전 잣대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예전 잣대라니? 남파간첩이 『조국통일을 위해 내려온 민족·민주열사』라고 시내 한 복판에서 반국가단체 종사자들을 찬양·고무하고 있다. 예전 잣대를 적용해서는 안 된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나도 책임자가 아니라 딱히 말씀드리기 어렵다. 아마도 보고는 있을 것이다』

     -누가 보고 있다는 말인가? 아무도 채증하지 않고 있다.

    『채증해서 자료를 보내주면 조치하겠다.』

     -경찰이 이런 식으로 답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아무리 채증해서 기사를 쓰고 자료를 보내줘도 단 한 번도 조치를 취한 적이 없었다. 경찰 차원에서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그 부분은 답변 드리기 어렵다』



    왜 단속 안 하냐는 질문에 『허허허』



     오후 5시, 행사 시작이 가까워오면서 경찰 배치가 늘어났다. 기자는 간부로 보이는 경찰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지금 하는 행사 내용이 뭔가? 간첩·빨치산까지 열사라고 추모하고 있다. 남파간첩들에게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경찰은 왜 단속하지 않는가?

    『허허허』

     -... 단속은 하지 않는가?

    『지난 10년 동안 저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속 안 하나?

    『세상이 그렇게 되 버렸다』



    배일도,

    『나는 국가보안법을 반대한다』



     기자는 제18민족민주열사추모제의 추진위원으로 이름이 올라 있는 배일도·원희룡 의원과 통화해 보았다. 아래는 배일도 의원과의 일문일답이다.

     -민족민주열사추모제 추진위원에 동의하신 것인가?
    『그렇다』

     -행사내용을 보니까 간첩·빨치산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간첩들에 대해 『조국통일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는 게시물까지 있다. 알고 있었나?
    『그렇다』

     -문제라고 보지 않나?

    『한 단면만 보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민족민주열사에는 간첩·빨치산 출신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노동열사들도 많다. 나는 노동자 출신으로서 그에 동의해 서명했다. 문제되지 않는다고 본다』

     -간첩·빨치산 추모제가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인가?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인가? 나하고 싸우자는 것인가?』

     -이런 행사는 현행법 위반 아닌가?

    『지난 시대에 현행법을 위반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묻는 것은 지금 광화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사가 구가보안법 등 현행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의원께서 이런 행사의 추진위원을 맡은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가?

    『나는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국가보안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렇다』 


     [ 2007-10-14, 10: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