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서 [UN과 한반도; 역사와 전망] 학술심포지엄

[건국외교] 감독 이승만, 주연 장면, 조연 바티칸-미국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 신생독립국 [한국의 UN 승인 비화] 공개이승만의 외교업적 재평가..“남북 분단의 주범 주장은 명백한 오류”굿소사이어티, 한국현대사학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공동 주관

양원석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3.03.29 11:57:55

▲ 1948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사진은 당시 유엔총회의 투표용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1946년 6월 이승만 박사의 [정읍선언]을 한반도 분단 고착화의 원인으로 보고 있는, 기존 국사학계의 입장을 뒤엎는 견해가 학계 내부로부터 나왔다.

[통일지상주의 사관]이 지배하는 국사학계는, 그 동안 이승만 박사의 정읍선언을 근거로, 남북 분단의 책임이 이 박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건국세력에게 있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대한민국의 건국외교와 UN]이라는 논문을 통해, 정설처럼 굳어진 기존 주류 국사학계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특히 허 교수는 논문을 통해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음을 밝혀, 대한민국 건국과정에 대한 기존 학계의 오류를 분명하게 지적했다.

나아가 허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략적 판단과 대한민국 UN특사단의 헌신적인 노력, 바티칸과 미국의 결정적 후원 등, 그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대한민국 UN특사단의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승인] 과정에 얽힌 비화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번 논문은 28일 오후 1시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 심포지엄 <UN과 한반도 : 역사와 전망>의 1주제로 발표될 예정이다.

이날 심포지엄은 재단법인 <굿소사이어티>와 <한국현대사학회>,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공동 주관한다.

다음은 허 교수의 논문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UN의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 승인]

‘찬성 48 vs 반대 6’의 의미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거의 결과, 8월 15일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 해 12월 12일 파리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을 얻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받았다.

표결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찬성 48 vs 반대 6.

공산진영의 집요한 방해와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에 냉담했던 국제정세, 전문 외교관 하나 없었던 대표단, 혼란한 국내 정세 등을 생각할 때 이것은 [기적]이었다.

대한제국과 임시정부가 국가로 정식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점, 미국 등 연합국 등의 신탁통치 실시 계획 등에 비춰 볼 때도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을 지고의 가치로 하는 [통일지상주의 사관]을 견지하는 한국사학계는, 이승만 박사와 대한민국 건국세력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선언을 근거로, 분단 고착화의 주된 책임을 대한민국 건국세력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틀 아래서는, 대한민국의 승인을 위한 건국 외교활동도 남북분단의 고착화를 촉발한 암울한 역사의 개막에 지나지 않는다.

종래 한국사학계에서는 분단 고착화의 주된 원인을, 1946년 봄에 열렸던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와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이승만의 정읍선언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스탈린의 지령]은 이승만이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이미 내려졌다.
소련은 남북의 통일을 원치 않았다.
이른바 미소공동위원회도 겉치레에 불과했다.

일제 패망 후 남북한을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 모두, 자국에 적대적인 국가가 한반도에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된 국가의 수립이 불가능했던 것이 당시 국제정치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현대사의 전개과정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을 넘어 국공내전 등 주변국가에서 일어난 일들과 강대국 간 국제관계를 주목해야 한다.



불행한 김구의 북행,

북한에는 [정당성] 제공...

대한민국 건국사에는 큰 상처

 
스탈린은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됐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6년의 이른바 정읍선언을 계기로 갈라선다.

남한만의 총선거를 거부한 김구는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김구의 남북협상은 소련의 통일전선 전술에 철저히 농락당했다.
남북협상이 열리기도 전에 결의문은 이미 [채택]돼 있었다.

심지어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이후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주구가 아니라,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바꾼 주도자! 


수정주의적 입장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정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본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이승만과 미국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중국에 딸린 변방으로 인식했다.
더구나 미국은 1947년 봄 이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미 합참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뒤 미국이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한 것은, 미국이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돼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랬던 미국이 결정적으로 태도를 바꾼 것은 이승만의 영향 때문이다.
미국보다 앞서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도 이승만이었다.


▲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승만의 제안은, 1947년 9월 미국이 유엔을 통한 남한만의 단정 수립을 결정한 것보다 앞선다.

이승만은 미국의 괴뢰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채택한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 결정 역시, 이승만의 전략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북한은 1946년부터 임시인민위원회 설치-조선인민군 창군-조선임시헌법 초안 발표 등을 고치면서, 이미 단정 수립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당시 고립무원의 섬과 같았던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건국을 서두른 이유는, 남한에서라도 40여년간 독립운동을 이끌며 꿈꿔 온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워 국제적 지지를 통해 지키려 했던 데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외교의 숨겨진 비밀]

감독 이승만, 주연 장면·조병옥

조연은? 바로 바티칸과 미국


대한민국이 건국 직후인 9월 3일 북한정부가 들어섰다.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은 정통성 확보와 국가 생존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로 부상했다.

당시 신생 대한민국은 심각한 안보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미군은 1948년 말까지 철군할 것이라는 공식발표가 나와 있는 상태에서, 북한은 무력통일로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소련의 지원 하에 급속하게 무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대한민국의 전략적 가치를 경시하는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위기상황 타파를 위해,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유엔의 승인을 얻기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 대한민국 제1호 외교관 여권. 1948년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UN총회에 참석한 장면 박사의 여권.ⓒ


당시 국제정세는 신생독립국 대한민국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UN의 승인을 얻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UN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승인을 얻어내야 할 막중한 임무를 받은 대표단은 수석대표 장면, 차석대표 장기영, 정치고문 조병옥, 법률고문 전규홍, 경제고문 김우평, 고문 정일형, 김활란, 모윤숙 등으로 이뤄졌다.

전문 외교관은 전무했다.
이들이 직업외교관들을 상대로 국가의 사활이 걸린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교섭을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제주4.3폭동과 여순반란사건 등 요동치는 국내 정세도 대표단에겐 짐이었다.

10월 13일 국회에서는 외군 철퇴안이 동의되고, 11월 3일에는 김구가 미․소 양군 철퇴 후 통일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요지의 담화를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내는 등 정정불안은 심각했다.

대한민국의 국가 승인을 막기 위한 공산진영의 노골적인 반대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호주와 인도, 아랍권 국가들도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대표단은 기적과도 같은 압도적 찬성을 이끌어내면서 과업을 완수했다.

대한민국 건국외교의 빛나는 승리는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과 헌신적인 노력, 미국과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국제문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바티칸의 절대적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장면을 대표로 발탁함으로써, 건국외교 승리의 초석을 놓았다.

바티칸 뿐만 아니라, 유엔한국위원회로부터도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한 이승만의 선택이 없었다면, 건국외교의 기적적인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

<UN과 한반도 : 역사와 전망> 학술심포지엄의 기조발제는, 이호진 전 유엔 차석대사(재단법인 굿소사이어티 이사)가 맡아 <북한핵 : UN제재와 북한의 체제붕괴>를 발표한다.

심포지엄은 모두 4부로 나뉘어 학계 전문가들의 주제발표와 지정토론으로 진행된다.
주제별 발표자와 지정토론자는 다음과 같다.

▲ 1주제 허동현 교수
     <대한민국의 건국외교와 UN>


▲ 2주제 박흥순 선문대 교수
     <UN의 역할과 한반도 평화 : UN 안보리와 한국의 외교·안보>


▲ 3주제 우평균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
      <북한 급변사태와 국제사회의 개입가능성>

▲ 4주제 박성현 뉴데일리 주필
     <UN을 통일에 끌어 넣어야한다 :
       국제공조체제를 활용한 북한지역 과도행정기구 설치 가능성>

▲주제별 지정토론자
김명섭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1주제), 이신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2주제), 정영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교수(3주제), 강규형 명지대 기록과학전문대학원 교수.

28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층 강당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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