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대통령은 왜 안중근 장군을 숭모했나?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 ▲ 이현표씨.
    ▲ 이현표씨.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

    박근혜 대통령은 28세 때인 1980년 3월 26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거행된 안중근 장군 순국 70주기 추념식에 참석했다. 그곳은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쓴 ‘民族正氣(민족정기)의 殿堂(전당)’이라는 친필 휘호가 가로 6.4m, 높이 3.3m, 두께 1.2m, 무게 60톤의 거대한 현무암에 새겨져있는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중근 장군 탄신 100주년이던 19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휘호를 내리고 기념관을 이충무공의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聖域)으로 조성하려고 계획했다. 즉, 민족정기의 화신(化身)으로 추앙받아 마땅한 안중근 장군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동격의 위인으로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26일 시해됨으로써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 1979년 9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쓴 친필 휘호.‘民族正氣(민족정기)의 殿堂(전당)’
    ▲ 1979년 9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쓴 친필 휘호.‘民族正氣(민족정기)의 殿堂(전당)’

    박근혜 대통령이 부친의 서거 5개월만인 1980년 3월 26일 안중근 기념관을 찾은 것은 바로 안중근 장군을 숭모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뜻과 계획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인(故人)을 대신해서 그곳을 찾았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박정희 대통령처럼 안중근 장군을 존경하고 숭모했던 정치지도자는 대한민국에 없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안중근 장군을 모독하는 것이라느니, 심지어는 안중근 장군이 이토를 처단한 날에 박 대통령이 시해됐다며 두 분을 상극의 인물로 선전ㆍ선동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묻고 싶다! 당신들은 안중근 장군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장군의 자전적인 기록인 <안응칠 역사>를 두 번도 아니고 단 한 번만이라도 책상에 반듯이 앉아 정독해본 적이 있는가? 안중근 장군에 관한 일제 검찰의 신문(訊問)기록과 일제 법정의 공판기록을 꼼꼼히 읽어본 일이 있는가? 그렇지 않고 혹시 영화, 소설, 뮤지컬 등을 통해서 안중근 장군의 허상(虛像)을 보고 그분을 잘 안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13년 3월 26일은 안중근 장군이 순국하신지 103주기가 되는 날이다.
    이 경건한 날, 생각해본다. 왜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9월 안중근 장군 추모시를 전라남도 장흥에서 거행된 장군의 추도식에 보냈을까?

    왜 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1972년 1월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라는 휘호를 보내고, 1979년 9월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또 하나의 휘호를 하사해 현무암에 새겨지도록 했을까? 

  • ▲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 1972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기념으로 내린 휘호
    ▲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 1972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기념으로 내린 휘호
     
  • ▲ 祖國統一 世界平和(조국통일 세계평화): 1972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이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기념으로 내린 휘호

    박정희 대통령이 그토록 안중근 장군을 존경하고 숭모했던 이유에 대해 필자는 짚이는 것이 있다.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발간된 <안중근 의사 자서전>(<안응칠 역사>, 검찰 신문 조서, 공판기록 등 포함)을 1979년 11월에 처음 읽고 장군의 너무나 인간적이고 위대한 삶에 매료되고 감동을 받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필자보다 훨씬 먼저 그런 체험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양평화와 인류애를 향한 크고 고귀한 삶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장군!
    그분의 죽음을 흔히 순국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부르기에는 그분의 이상이 너무도 크고 고귀하다. 장군은 국가를 초월하여, 동양평화를 염원했고, 나아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선각자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통일 세계평화’라는 휘호는 바로 장군의 그런 이상을 경모(敬慕)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여순형무소 사형집행실.
    안중근 장군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남긴다.

    “내가 행한 행동은 오로지 동양평화를 도모하려는 진실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바라건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일본 관헌들도 나의 변변치 못한 충정을 잘 헤아려,
    너와 나 구별 없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해서 동양평화를 기필코 도모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같은 최후의 유언을 남긴 장군은 “동양평화 만세3창을 하고자한다” 고 제안을 했으나,
    일제의 사형집행관은 이를 제지했다. 그러자 장군은 2분 동안 조용히 기도한 후, 형리에 이끌려 교수대에 올라 30년이라는 너무도 짧고 아쉬운 삶을 마감했다.

    1910년 2월 12일 오전, 여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안중근 장군은 제5회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한다.
    “나는 자객이 아니라, 대한의병 중장이다. 이토는 한일친선을 저해하고, 동양평화를 어지럽힌 장본인이다. 때문에 나는 그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희망은 동양평화를 이루고, 5대주 6대양에 우리 동양인들이 모범을 보이자는 것이다.”

    이틀 후 일제의 지방법원 재판장은 안중근 장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얼마 후 장군은 일제의 고등법원장을 만나,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도록 사형집행 날짜를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 자로부터 충분한 시간을 주겠다는 약속을 얻고는 항소를 포기했다.

    장군은 1) 서문 2) 전감 3) 현상 4) 복선 5) 문답 등 다섯 개 항목으로 나누어 <동양평화론>을 쓰겠다고 구상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그러나 간악한 일제는 서둘러 형을 집행함으로써, 장군은 서문과 전감의 일부만을 유고로 남긴 채 순국했다. 그 결과 <동양평화론>은 다음과 같이 섬뜩하고 예언적인 경고의 글귀를 끝으로 절필되었다.

    “슬프다! 자연의 형세를 돌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 중국 하나라의 걸왕‘桀王’이나 은나라의 주왕‘紂王’과 같이 폭정과 주색을 일삼은 포악무도한 군주. 맹자는 천심과 민심을 잃고 버림받은 잔인한 도적에 불과한 이런 자들을 제거해도 된다고 함)가 당하는 재앙을 틀림없이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로부터 35년 후, 일제는 처절하고 끔찍한 재앙을 맞으며 패망했다.

  • ▲ 안중근 장군의 젊은 시절 모습: 우리는 아직도 일제가 선동ㆍ선전의 목적으로 남겨 놓은 초췌한 죄인의 모습의 안중근 장군 사진을 버젓이 사용한다. 통탄스런 일이다. 이 사진의 질은 좋지 않지만, 일제가 남긴 사진이 아니어서 귀중하다.<이현표 소장>
    ▲ 안중근 장군의 젊은 시절 모습: 우리는 아직도 일제가 선동ㆍ선전의 목적으로 남겨 놓은 초췌한 죄인의 모습의 안중근 장군 사진을 버젓이 사용한다. 통탄스런 일이다. 이 사진의 질은 좋지 않지만, 일제가 남긴 사진이 아니어서 귀중하다.<이현표 소장>

    한국 근대사의 가장 위대한 거인

    우연일까? 일제에 맞선 우리 현대사의 세 거인이 모두 황해도 출신이라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은 1875년 평산에서, 김구 선생과 안중근 장군은 각각 1876년과 1879년에 해주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안중근 장군만이 일제에 의해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기고 시신이 암매장되어, 제사상 한번 제대로 못 받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더구나 안중근 장군은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남겨놓지 못했다.
    일제는 그토록 잔인했다. 아니 장군을 무서워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그분의 모습은 말 타고 총 쏘며 사냥을 즐겨했던, 힘세고 기골이 빼어났던 젊고 패기 넘치는 안중근 장군, 대한 독립과 동양평화를 설파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다. 거의가 일제의 선전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초췌한 죄인의 형상일 뿐이다.

    그러나 일제의 안중근 죽이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분에 대한 우리 민족의 사랑과 존경심을 증폭시켰다. 천박한 비교일 수도 있지만, 오늘날 안중근 장군이 남긴 유묵은 이승만 대통령이나 김구 선생이 남긴 그것보다도 훨씬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또한 안중근 장군은 중국의 근대혁명과정에서 우파나 좌파를 떠나 모든 중국인의 우상이었다.
    중국의 국부 손문(孫文,1866-1925)은 “백세의 삶은 아니지만, 죽어서 천추에 빛나도다”라고 장군을 기렸고, 중국의 레닌 진독수(陳獨秀, 1879-1942)는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안중근과 콜럼버스가 되기를 바란다”라는 경구를 남겼다.

  • ▲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나라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대해 애타는 마음으로 걱정한다): 안중근 장군이 옥중에서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四郞)이라는 일제 검찰관에게 선물한 글씨
    ▲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나라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대해 애타는 마음으로 걱정한다): 안중근 장군이 옥중에서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四郞)이라는 일제 검찰관에게 선물한 글씨
     
  • ▲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여순 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안중근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안중근 장군의 유묵.
    ▲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여순 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안중근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안중근 장군의 유묵.

    뿐만이 아니다. 안중근 장군을 대면했던 일제의 관헌들도 그분의 높은 이상을 존경하게 되어, 지필묵을 넣어주며 서예글씨를 써주도록 청탁했다. 장군은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四郞)이라는 일제 검찰관에게 ‘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안위노심초사: 나라의 안전과 위태로움에 대해 애타는 마음으로 걱정한다)라는 글씨를 선물했다.

    특히 여순 형무소에 근무하면서 안중근 장군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장군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그는 귀국 후, 장군으로부터 받은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분: 나라위해 몸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과 위패를 모셔놓고, 평생 아침저녁으로 장군의 명복을 빌어드렸다.

    무엇이 안중근 장군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도대체 우리 민족은 그렇다 하더라도, 중국과 일본인들까지 안중근 장군에게 매료되고, 그분을 존경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박정희 대통령은 왜 ‘民族正氣(민족정기)의 殿堂(전당)’이라는 생전의 마지막 휘호를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 하사하고, 그곳을 현충사에 버금가는 성역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을까?

    그것은 안중근 장군이 지녔던 나라사랑, 동양평화 염원, 인류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면 타고났든 배웠든 적어도 그러한 이상을 품고는 있는 것 아닐까?

  • ▲ “안중근 의사는 애국단심(愛國丹心: 나라 사랑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세계만방에 떨쳤도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시가 게재된 <안중근 의사전기> 표지
    ▲ “안중근 의사는 애국단심(愛國丹心: 나라 사랑하는 정성스런 마음)을 세계만방에 떨쳤도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추모시가 게재된 <안중근 의사전기> 표지

    필자가 <안응칠 역사>, 그리고 일제의 신문기록과 공판기록을 여러 차례 정독하고 느낀 그분의 위대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야한다고 교육받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말로는 바르게 산다면서도, 실제로는 옳지 못한 방법으로 권세를 얻고 돈 버는데 혈안이 된 채, 제 몸과 제 가족의 안락만이 전부인양 그릇되게 살아간다. 그러나 안중근 장군은 바른 삶, 언행일치의 삶의 전형을 실천한 유별난 분이었다. 권력과 돈 있는 자들에게 큰 소리쳤고, 벼슬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으며, 나라를 구하고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처자식 굶기면서 헌신하다가 가문을 위태롭게 했다.

    둘째, 안중근 장군은 평생 즐기는 네 가지가 있었다.
    1) 친구와 의리를 맺는 것
    2)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
    3) 총으로 사냥하는 것
    4) 날랜 말 타고 달리는 것.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이 회복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결심한다.
    그 이후 순국할 때까지 그분은 그리도 좋아하던 술을 단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다.
    장군은 나라 잃은 설움을 술로 달랜다거나 자살하는 졸장부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대장부였다.

    셋째, 안중근 장군은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내공을 쌓은 겸손한 분이었다.
    장군은 “글은 이름이나 적을 줄 알면 그만이다”라는 초패왕 항우(項羽, BC 232~202)의 말을 인용하면서, 장부의 삶을 살겠다고 친구들에게 얘기했었다. 그러나 거사 후, 신문 및 공판 과정에서 장군이 보여준 학문·지식·정보·지성은 일제관헌을 압도했고 감동시켰다.
    장군은 힘만 믿고 학문을 멀리한 항우를 능가하는 영웅이었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으며, 강제로 남의 나라 국권을 빼앗고,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하는 등 동양평화를 해친 일제의 상징이었다. 흉악하고 음흉한 독부(獨夫)였다.
    안중근 장군은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독부를 제거한 영웅이다.
    몇 만 대군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장군의 행위가 죄 없고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 테러행위였더라면, 또한 이렇게 탁월한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했다면, 그분의 이상(理想)이 아무리 숭고했더라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묻혀버렸을 것이다.

    다섯째,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參謀中將)은 국제법을 준수한 정의로운 지휘관, 인류애와 박애정신을 실천했던 지휘관이었다. 장군은 일본군 포로들을 총포까지 되돌려주고 석방하는 이상주의적인 행동으로 동지들로부터 소외당하고, 패전하는 쓰라림을 감수해야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장군은 자신이 흠모했던 미국 독립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중장(中將, 1732~1799, 미국 초대 대통령)보다도 더 인간미 넘치는 군인이었다.

    <안응칠 역사>를 읽자

    이렇게 위대한 영웅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배울 것인가?
    안중근 장군에 관한 책자, 영화, 드라마, 다큐 등은 그분에 관한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러나 군더더기 붙고, 극화된 자료들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분을 접할 수 있다면 그보다 유용한 것은 없을 것이다.

  • ▲ 19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발간된
    ▲ 19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서 발간된

    <안응칠 역사>라는 제목의 안중근 자서전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서전은 그 춥고 지옥 같은 여순 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부터 1910년 3월 15일까지 93일 동안 그분이 직접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통탄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일본 당국으로부터 안중근 장군의 유해는 물론, 그분이 남긴 순한문으로 된 자서전 친필 원본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안응칠 역사> 친필 원본을 보고 누군가가 필사해 놓은 자료, <안응칠 역사>의 등사본, <안응칠 역사>의 일본어 번역본을 등사한 자료 등이 남아있다. 아쉽지만, 이 자료들만으로도 우리는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 같다. 이 세상 어디에서 이렇게 꾸밈없고 진솔한 자기 고백을 만날 수 있을까? 이 세상 어디에서 이보다 더 위대한 영웅의 생애를 접할 수 있을까? 

    자기 절제의 삶을 배우자

    안중근 장군은 1905년 두 가지 충격적이고 비통한 일을 당한다.

    첫째는 을사늑약의 체결이다. 우리가 모두 알듯이 이는 우리 민족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의 간계에 의한 한반도 강점의 시작이다.

    둘째는 부친이 작고한 것이다. 안 장군의 부친 안태훈 진사는 학문이 깊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재산도 많았다. 특히 1894년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병을 조직해 동학당을 섬멸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16세의 안중근은 큰 전과를 세운다. 한편 안태훈은 당시 동학란에 가담했던 19세의 김구 선생과 그의 부모를 수개월 동안 자택에 은신시켜주는 자비를 베풀었던 인물이다.

    1905년은 이렇게 안중근 장군에게 일생 중 가장 분하고 슬픈 시기였다. 그런 분통과 슬픔을 보통 사람 같으면 술 마시고 달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 장군은 그런 염세적인 인간들과는 달리 술을 끊었다. <안응칠 역사>에는 그때의 결심이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돼 있다.

    “나는 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술을 끊기로 했다.”

    참고로 이토 처단 후에 일제 검찰관의 신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안중근 장군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두 차례에 걸쳐 진술한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위대한 결심인가? 이는 안중근 장군이 세계의 다른 위인들과 무엇이 다른지를 확연히 구별해주는 대목이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절제할 줄 아는 인간이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이 아닐까?

    우리 한민족은 국토가 분단된 채 이념대립을 하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민족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지도자나 사회지도층 인사 중에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술을 끊는다든지, 폭탄주를 하지 않는다든지, 골프채를 잡지 않는다든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있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우리의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
    안중근 장군의 무엇이 위대한지를 제대로 알고 또 가르쳐야 한다! 우리 지도층의 사고방식이 먼저 바뀌어 조국을 위해 자신을 절제해야한다!

  • ▲ 말 탄 안중근 장군 초상화(필자 제공)
    ▲ 말 탄 안중근 장군 초상화(필자 제공)

    안중근 장군에게 국군 계급장을 추증하자

    안중근 장군은 일제의 법정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고 진술했다. <안응칠 역사>에는 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두성, 이범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김두성은 총독으로 이범윤은 대장으로 이미 결정됐고, 나는 의병 참모중장에 피선됐다.”

    당시 우리나라 군대는 해산됐고, 실질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따라서 안중근 장군은 대한제국의 군인이 아니라 독립군이었다. 미국 독립전쟁도 마찬가지다. 1776년 미국은 영국 식민지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783년까지 7년간 독립전쟁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지 워싱턴은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을 뿐이지, 국가조직이 없었고, 정규 군대도 없었다.
    그러니 독립군 총사령관이라는 조지 워싱턴의 직위도 미국 정규군이 아니었다. 그저 별이 세 개 달린 제복을 입고 싸웠던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는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1787년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흥미로운 것은 조지 워싱턴이 미합중국의 군인으로 되는 과정이다. 그가 미국의 정규 군인이 된 것은 2차례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타계하기 1년 전이다. 즉, 그는 1798년에 미군 중장 계급장을 받았다. 그리고 미국 독립 200주년인 1976년에 포드 대통령에 의해 대원수로 추증됐다.

    안중근 장군은 조지 워싱턴을 흠모했던 분이다.
    그분의 자서전에는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벌이다 패전해서 열흘 이상 먹지도 못하고 죽을 고생을 하며 도망가면서 다짐하는 기록이 있다.

    “옛날 미국 독립의 주인공 조지 워싱턴은 7~8년 동안 바람과 먼지 속에서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떻게 참고 견뎠을까? 참으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웅이다. 앞으로 내가 일을 성취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가서 워싱턴을 추모하고 숭배하며 그가 남긴 뜻을 기념하리라.”

    필자는 모른다.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조지 워싱턴이 그랬던 것처럼 중장 계급장을 달고 전쟁에 임하고 싶어 했는지를. 그러나 확실한 것은 조지 워싱턴은 미군 계급장을 가졌는데, 안중근 장군은 아직도 대한민국 군인 계급장이 없다.

    늦었지만 안중근 장군에게도 국군 중장 이상의 계급이 추증돼야하지 않을까?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너무 늦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제가 선전용으로 남겨둔 초췌한 죄인모습의 안중근 사진대신, 별들이 번쩍이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군인 제복을 입은 안중근 장군의 초상화를 보게 될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 ▲ 壯烈千秋(장렬천추: 씩씩하고 불타는 뜻 천추에 빛나리):
    ▲ 壯烈千秋(장렬천추: 씩씩하고 불타는 뜻 천추에 빛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