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정희의 [10월 유신]-[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수수깨끼..한 꺼풀 베일 벗다!
  • [다빈치 코드]는 팩션이다.
    [박정희 코드]는 현실이다.

    그것도 냉혹한 우리 현실!!!

    [박정희 코드]의 양대 기둥은 무엇일까?

    [10월 유신][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그렇다!!!  

    [박정희 코드]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박정희는 비밀리에 독자적 핵개발을 추진했다.
    그러다, 미국의 제지를 받았다.

    [김일성 김정일]은 중국의 사실상 묵인 아래 독자적 핵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성공했다.
    동시에 지금, 우리를 겁나게 겁박하고 있다.

  • ▲ 마오쩌둥과 만난 닉슨 美대통령. 이들은 공식적으로 수교하기 전에도 만남을 가졌다.
    ▲ 마오쩌둥과 만난 닉슨 美대통령. 이들은 공식적으로 수교하기 전에도 만남을 가졌다.

    [1971년 7월], [197년 10월], 그리고 [1972년 2월].
    미국의 키신저와 닉슨, 중국의 주은래와 모택동은 박정희의 머리 위를 넘나들었다.

    박정희와 대한민국 국민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미국과 중국은, 대한민국을 자기들 발 톱속 때만큼도 취급하지 않았다. 

    닉슨은, 박정희와 대한민국을 [개무시] 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김일성을 [대우] 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미·중 간 협의에 대해 상당한 정보를 김일성에게 주었다.
    의견도 들었다.

    이게 그 당시 긴박하게 돌아갔던 [국제정세]였다.
    당시 박정희 입장에선, 뒤통수를 해머로 강타 당한 듯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1972년 10월].
    박정희[10월유신]을 단행했다.

    1973년에는 베트남도 미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20년간의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뺀 파리협정도 닉슨·키신저 작품이었다.

    [10월유신][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박정희 코드]
    를 추적할만한 단서가 나타났다.

    이번에 비밀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에 그 단초가 숨어있다.

  • ▲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이야기 중인 키신저. 키신저는 닉슨과 함께 중국과의 수교에 열심이었다.
    ▲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이야기 중인 키신저. 키신저는 닉슨과 함께 중국과의 수교에 열심이었다.

    “1953년 나는 부통령으로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승만(한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구두 메시지를 전달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고, 나는 그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미국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유쾌한 말을 했다.
    내가 그 말을 전달했을 때 이승만은 나에게 소리를 질렀던(cry out) 것으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1972년 2월 21일 오후 2시40분]
    .
    중국 베이징의 공산당 고위간부 거주지인 중남해(中南海)의 마오쩌둥(毛澤東) 거주지 풍택원(豊澤園).

    리처드 닉슨 美대통령,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모였을 때 닉슨이 한 이야기라고 한다.

    닉슨은 사흘 뒤 조어대(釣魚臺) 국빈관에서 저우언라이와 회담을 하며 “한국인들은 충동적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일보>가 10일 보도한 美정부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에 보관된 비밀해제 문서 내용 중 일부다.

    당시 미국과 중국 정부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 속에 朴대통령이 핵개발을 추진하게 된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문서에 따르면, [1971년 7월 인민대회당에서 있었던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대화], 같은 해 즉 [1971년 10월] 2차 대화, [1972년 2월]의 닉슨과 마오쩌둥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했다.
    미국은 여기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북한 김일성 부탁!!!

    그대로 전하는 중국,

    그걸 믿은 미국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먼저 꺼낸 건, 김일성의 부탁을 받은 중국 쪽이었다.
    미국은 중국 수뇌부의 요구에 “우리 우방을 괴뢰정부로 부르는 쪽과 대화하기 어렵다”는 정도의 ‘저항(?)만 있었을 뿐, 줄곧 수동적인 태도를 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중국이 미국에게 전달한 8개의 요구사항은, 사실 김일성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이었다.

    주한 미군 완전 철수
    미국의 핵우산 제공 중단
    북한에 대한 미국의 정찰 활동 중단
    한·미·일 합동 군사훈련 중단
    일본 군사력의 한반도 진출 반대
    미국의 남북한 협상 개입 중지
    유엔에서 남북한 동등 대우
    등등 

  • ▲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저우언라이와 함께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김일성은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다.
    ▲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저우언라이와 함께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김일성은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다.


    이때 미국 수뇌부는 대한민국을 향해 ‘배신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중국과의 회담 내용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알려주기는커녕 철저히 배제했다고 한다.
    심지어 사후통보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과 '긴밀하게 협의'를 한 닉슨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축 등의 움직임을 보이며, 중국 수뇌부로부터 “감사하다”는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이때 중국은 미국과 회담을 하면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김일성에게 알려줬다.


  • ▲ 닉슨 대통령은 국내 여론에 밀려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뺀다. 이를 위해 키신저를 보내 파리협정을 맺는다. 키신저는 이 협정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 닉슨 대통령은 국내 여론에 밀려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뺀다. 이를 위해 키신저를 보내 파리협정을 맺는다. 키신저는 이 협정으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관계 물꼬를 튼 여파를 몰아, [1973년]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평화협정’인 파리협정을 이끌어 내 20년 동안 치렀던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버렸다.

    닉슨이 자국 내 여론에 밀려 베트남에 이어 한반도에서도 ‘발을 빼려’ 했던 정황이 이 대화록에 생생히 수록돼 있다.

    이 같은 미국과 중국 간의 미묘한 변화를 박정희는 알아챘다.
    닉슨 대통령 측에 수 차례 한미 정상회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결국 ‘미국’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비밀리에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실제 박정희는 닉슨 대통령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유재흥 당시 국방장관에게 털어놓았다.

    국제정치학자 조철호 교수가 쓴 「한국 핵정책의 이상과 현실」이라는 책에 나온 유재흥 장관의 증언이다.

    “...‘닉슨이 미군 뺀다, 그놈 자식...’

    이렇게 말이야.

    아주 욕도 하시고 괘씸하게 생각...”

  • ▲ TOW 대전차 미사일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닉슨 행정부'의 배신을 눈치채고 자주국방에 나선다.
    ▲ TOW 대전차 미사일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 대통령은 '닉슨 행정부'의 배신을 눈치채고 자주국방에 나선다.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은?

    결국!!! '생존을 위한 투쟁'


    박정희는 닉슨 정권이 베트남에 이어 한반도에서도 철수를 계획하자 [자주국방]에 나섰다.

    닉슨 정권이 '도망치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건 이미 몇 년 전이었다.
    아시아에서 발을 빼려던 닉슨은, [1969년]에 美7사단 철수를 시작한 상태였다.
    키신저의 '립서비스'가 있었지만, 주한미군의 추가 철수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었다. 

    美7사단의 철수는 [1972년]에 마무리 됐다.
    주한미군은 6만여 명에서 4만여 명으로 줄었다.

  • ▲ 1971년 3월 당시 美7사단은 한창 철수 중이었다. 美7사단의 사단가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아리랑'이라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 1971년 3월 당시 美7사단은 한창 철수 중이었다. 美7사단의 사단가가 이승만 대통령이 하사한 '아리랑'이라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박정희는 이런 닉슨과 키신저를 믿을 수 없었다.
    박정희
    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을 선포했다.
    당시 국민투표에 부쳐진 [10월 유신]은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다.

    박정희는 美7사단이 철수를 시작한 직후인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를 창설했다.
    국방과학연구소에는 독자적으로 탄도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사이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1974년 포드 행정부가 들어섰다.
    포드 행정부는 태도를 바꿔 '한미동맹 강화'를 내세웠지만 박 대통령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 ▲ '카터-박근혜 회담' 당시의 모습. 이때 박근혜 現대통령은 카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한다.
    ▲ '카터-박근혜 회담' 당시의 모습. 이때 박근혜 現대통령은 카터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고 한다.

    1977년 들어선 카터 행정부는 닉슨을 뛰어넘었다.

    '도덕성'을 내세운 카터는 '독재자'라고 박 대통령을 비난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강력 추진했다.
    그는 심지어 박정희에 대해 "골치아픈 사람"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비난했다.

    카터가 방한해 주한미군을 모두 철수시키려 할 때 당시 영애였던 박근혜 현(現)대통령이 이를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카터 행정부는 '국가안보'에 있어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능력 정권이었다.

    하기야 카터는 냉전이 최고조였던 70년대 말 CIA 직원들을 대거 숙청해 미국의 정보기능을 망가뜨린 장본인.
    이때 숙청된 CIA 요원 일부가 남미 마약카르텔로 가면서 문제가 더욱 커졌다.

  • ▲ 해외 네티즌이 만든 1979년 혁명 전 이란군과 2009년 이란군의 비교사진. 이렇게 될 중동 최대의 우방국을 잃을 때 카터 정권은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런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도 모두 철수시키려 했다.
    ▲ 해외 네티즌이 만든 1979년 혁명 전 이란군과 2009년 이란군의 비교사진. 이렇게 될 중동 최대의 우방국을 잃을 때 카터 정권은 무능력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런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도 모두 철수시키려 했다.

    카터는 1979년 아야툴라(종교 최고 지도자) 호메이니를 따르는 과격 이슬람 세력이 중동 최대의 우방국 정권인 이란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릴 때도 그저 무기력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이란 시위대에 잡힌 자기 국민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애꿎은 미군만 죽었다.

    당시 카터 행정부는 자국내 좌파세력들의 여론에 휘둘려, 아시아의 동맹국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국 행정부를 보면서 박정희는 "미국에게 우리의 안보를 모두 맡길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리고 장거리 탄도탄과 핵무기 개발을 차근차근 진행시켜 나갔다.

    그 첫 성과는?

    [1978년] 최초로 자체개발한 탄도탄 ‘백곰’ 미사일이다.

    백곰 미사일은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은 나이키 허큘리스 대공 미사일의 몸체를 활용한 것이었다.

  • ▲ 육군 탄도탄 사령부에 있는 현무 미사일. 현무 미사일은 전두환 정권 당시 모두 사라졌다 아웅산 테러 이후 다시 재개발, 개량을 거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육군 탄도탄 사령부에 있는 현무 미사일. 현무 미사일은 전두환 정권 당시 모두 사라졌다 아웅산 테러 이후 다시 재개발, 개량을 거듭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백곰' 미사일에 이어 사정거리 180km의 '현무' 미사일도 만들어냈다.
    사정거리 180km이면 전방에서 평양 인근까지 타격할 수 있었다.

    '현무' 미사일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박정희는, 핵무기 독자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는1981년 10월 1일 국군의 날에 핵무기 개발성공을 공개한 뒤 하야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측근들에게 귀뜸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흉탄이 [박정희의 꿈] [박정희 코드]를 무참하게 꺽어 버렸다.

  • ▲ 박정희 대통령이 선우연 의원에게 했다는 말을 한 네티즌이 그림과 함께 정리했다.
    ▲ 박정희 대통령이 선우연 의원에게 했다는 말을 한 네티즌이 그림과 함께 정리했다.



    박정희는 서거 전 “현재 핵개발 진척도가 88%”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확인할 수 없게 돼버린다.
    전두환 정권이 모든 자료를 미국에 넘겼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이렇게 우리나라 자체적인 탄도탄 개발과 핵무기 개발은 백지화됐다.
    국방과학연구소도 해체됐다.


    [깡통진보]가 욕하는 '10월 유신'

    그 시작은 닉슨!!!

    닉슨은 왜 욕 안하나?


    [10월 유신][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
    [깡통진보]들이 박정희를 비난하는 핵심코드다.

    그러나 [10월 유신][비밀 독자 핵개발 추진]은, 박정희가 더 오래 집권하기 위한 게 아닌 듯하다.

    이것이 [박정희 코드]의 수수께끼인가?

    우리는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 역사적 배경이 되는 닉슨-키신저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간의 대화록을 한자한자 새겨 읽어여 한다.

    이 대화록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닉슨-키신저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사이에 있었던 세 차례의 대화록을 담고 있다.

    2001년 4월, 비밀해제 후 美정부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보관 중이다. 

    온라인으로는 존스홉킨스大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에서도 PDF 파일로 찾아볼 수 있다. 

    http://www.gwu.edu/~nsarchiv/NSAEBB/NSAEBB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