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85> 인간제물


    “갈수록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이러다 정말 산 사람 입에 거미줄 치는 거 아닌지 몰라?”
    “거기다 오늘 저녁엔 비상사태 때문에 회사사람들 회식도 없겠지?”
    “히유!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름값 때문에 바다에 안 나가는 게 돈 버는 상황이니.”
    “그러니 오늘 같은 날 출항신고도 안 하고 외지낚시꾼들을 몰래 실어 나르는 배들만 탓할 수도 없다고, 안 그래?”
    “맞아, 목구멍이 포도청이지.”
    작은 포구에 낯선 외지 차량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승합차는 마을 주민 사이를 빠져나가더니 바닷가에 줄지어 늘어선 횟집 호객꾼들의 간절한 외침을 못 본 척 지나쳤다. 그리고 곧장 어선이 정박돼 있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접안시설에는 1톤도 안 되는 작은 낚시어선에서부터 수십 톤에 이르는 꽃게잡이어선까지 각종 크고 작은 배들로 만원이었다. 그런데 선착장 끝에 낡은 경운기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잠시 후 승합차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경운기 바로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곤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은혁이었다.
    “분명 영흥호라고 했는데. 음, 바로 저 배군.”
    은혁은 전화번호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자 수염이 덥수룩한 50대 남자가 배 위에서 고개를 내밀고 은혁을 향해 반갑게 손짓했다. 선장이 대충 정리를 끝낸 어선은 김밥처럼 생긴 빈 통발이 한쪽에 쌓여 있었다. 어선은 꽃게잡이배였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철 금어기(禁漁期)라 조업을 하지 않는 듯했다. 때문에 선장으로선 외지손님을 마다할 형편이 아니었다. 은혁은 어선을 확인하고 다시 승합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뒤 낚시가방으로 위장한 배낭을 든 피오기와 은혁, 그리고 홍화와 지원이 서둘러 어선으로 향했다. 피오기 일행이 어선 가까이 갔을 때 선장은 출항점검을 위해 조타실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피오기가 주변을 살피더니 홍화에게 지원을 먼저 태우라고 눈짓을 했다.
    “아이쿠! 이거, 여성분들도 출조를 나오셨군요. 제가 좋은 곶부리(주위의 다른 지역보다 바다 쪽으로 조금 튀어나온 지역)로 안내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아저씨.”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쪽 바다는 제가 손금 보듯이 물길을 훤히 압니다. 1시간 이내 거리에는 육섬·풍도·송봉도·대이작이 있고, 2시간 이상 나가면 울도·덕적도·굴업도·선갑도가 있습니다. 잡히는 주 어종은 우럭과 놀래미, 광어입니다. 손맛이 아주 끝내줍니다. 그런데 이쪽 분은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
    “속이 조금 불편한가 봐요. 휴게소에서 약을 사먹었으니까 아마 괜찮아질 거예요.”
    “아참! 손님. 따뜻한 외투나 긴바지는 준비하셨나요. 바다는 육지보다 체감온도가 5~10℃ 정도 낮거든요.”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 챙겨오셨군요. 그런데 네 분이 출어인원의 전부인가요?”
    “예, 왜요?”
    “저야 돈을 벌면 좋지만 네 분이 독선을 잡기에는 배가 크지 않나 싶어서요.”
    “하지만 작은 배로는 먼 바다로 나갈 수 없잖아요.”
    “아~예, 그럼 저는 출항준비나 마저 하겠습니다.”
    이제 피오기와 은혁이 배에 오를 차례였다. 그런데 갑자기 피오기가 홍화를 따라 어선에 막 오르려는 은혁을 불러 세웠다. 은혁은 피오기가 부르자 옮기던 배낭 두 개를 선수(船首)의 출입구 안쪽에 내려놓고 배에서 내려왔다. 피오기의 눈은 평소와 달리 겨울산의 계곡물처럼 맑고 투명했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눈을 멀게 하는 빛과 어둠의 대비처럼 강렬했다.
    “은혁 동무, 뒤쫓아 오는 남조선 반동들을 어케 했으면 좋겠소?”
    “글쎄요. 지금 상황에선 서둘러 남조선 영해를 벗어나는 것이 더 현명한 행동 같습니다.”
    “그런가, 하긴.”
    피오기는 은혁의 대답에 수긍하는 듯 잠시 빈 바다를 응시했다. 그런데 한 차례 감았다 뜬 피오기의 눈이 증오와 복수로 검게 불타기 시작했다. 동시에 허리춤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은행경비원에게서 빼앗은 전기충격기였다. 피오기는 엄지손가락으로 전기충격기의 옆면에 부착된 스위치를 조심스럽게 위쪽으로 밀었다. 순간 작은 원형의 밝은 램프가 점멸하며 앞면의 고압단자에서 160,000V의 강력한 전기가 발생했다. 하지만 은혁은 피오기의 의도를 짐작조차 못했다. 피오기는 유리로 된 스카이워크를 걷듯 조심스럽게 은혁에게로 다가왔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
    “헉!”
    순간적이었다. 은혁이 이상기류를 감지할 사이도 없이 전기충격기의 고압단자가 치타의 겹발톱처럼 옆구리에 깊게 박혔다. 피오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속도로 은혁을 타격했다. 근육질의 만능운동선수로 싸우는 게 제일 쉽다던 은혁조차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월등한 속도였다. 하지만 은혁도 정찰여단 출신으로 전형적인 살인병기였다. 한 번은 방심하다 당했지만 두 번째는 글자 그대로 치욕이었다. 그래서 왼쪽 팔꿈치로 간신히 피오기의 두 번째 타격을 물리치고 공격범위를 벗어났다.
    “으으으. 부조장 동무, 왜 이러시오?”
    “크크크.”
    안전거리를 유지하자마자 은혁은 가장 먼저 허리춤을 더듬어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앞선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80kg이 넘는 은혁의 몸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피오기는 그런 은혁을 불만에 가득 찬 찌푸린 얼굴로 비웃고 있었다. 피오기는 전기충격기를 바다에 버리는 교만까지도 부렸다. 이제 피오기는 일대일 맞서기를 준비했다. 그리곤 전광석화처럼 신속한 발차기공격부터 이어갔다. 그 역동적이고 정확한 발차기에 권총이 은혁의 손에서 떨어졌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할 수 없이 은혁도 독기를 뿜어내며 격술로 단련된 돌주먹을 움켜쥐었다.
    “으아아아!”
    하지만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돌주먹은 솜주먹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비해 피오기의 공격은 아주 극악하고 난폭했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빠른 속도로 신속·정확하게 상대의 급소만 노렸다. 피오기는 치명적인 공격무기를 갖고 태어난 야수였다. 그래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피오기의 주먹과 발차기에 은혁은 성벽이 허물어진 요새처럼 무력했다. 또한 돌처럼 탄탄한 맷집도 소용이 없었다. 은혁은 이미 의식에 금이 간 상태라 너무도 쉽게 깨지고 부서졌다. 단지 엄청나게 분비되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못 느낄 뿐이었다. 그러다 잡은 먹잇감의 뒷목을 둔기로 내리쳐 척추를 부러뜨리는 고통이 은혁의 온몸에 퍼지는 순간 승부가 결정됐다.
  • “은혁 동무,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가?”
    “으으으, 혹시 상부의 명령이오?”
    “몹시 억울하다는 말투로군.”
    “난 자폭명령을 전달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철수명령은 받았겠지.”
    “!”
    “그런데 동무의 직속상관은 나 아닌가? 내가 모르는 명령을 동무는 도대체 어디에서, 누구한테 받는 거지?”
    “동무처럼 위대한 당과 조국이오.”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오.”
    “뭡니까, 부조장 동무?”
    “설마 동무의 방에서 찾아낸 이 무선전파수신기를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헉! 그건?”
    “그런데 재미있는 건 우리 공작조의 비밀아지트에 무선전파송신기가 쫘~악 깔려 있더군. 어디 설명 좀 해보시오?”
    “그러니까 그게…….”
    “확인결과 정찰총국에선 동무에게 그런 분공을 할당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
    “…….”
    “아, 좋소. 정찰총국이 아니라면 하나밖엔 없지. 국가안전보위부 말이오. 그런데 동무는 행동을 좀 더 신중하게 했어야 됐소. 아니 그렇게 생각하오?”
    “…….”
    “이 종간나 새끼!”
    “헉! 으으으.”
    “그 날선 눈빛의 의미는 대체 뭐지? 동무에게 출세를 약속한 윗대가리들이 평양의 최고위층이라는 무언의 협박인가?”
    “부조장 동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동무의 지금 행동이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은 아닌지. 난 단지 거부할 수 없는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위기까지 모면하겠다. 참! 구차한 변명이로군.”
    “변명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어차피 인민의 생활은 감시를 필요로 하니 새로울 것도 놀랄 일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감시만큼 좋은 수단도 없다?”
    “그렇습니다. 감시라는 울타리가 없다면 인간의 탐욕 앞에 우리의 위대한 사회주의는 존속할 수가 없습니다. 남조선에도 법이라는 것이 있잖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히~유! 내가 이래서 국가안전보위부 반동들과 줄이 닿아 있는 동무들을 싫어한다니까. 필요 이상으로 말발이 세거든. 그나저나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뭘 말입니까?”
    “동무의 지금 그 발언은 단순히 통치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북조선이 진정한 의미의 노동자국가가 아니라는 의미처럼 들리는데.”
    “그게 무슨 모함입니까? 난 그런 불순한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안 했다? 흠! 노동자계급의 붉은 혁명으로 세워진 노동자국가에서 영웅인 노동자가 감시를 받는다. 그것도 개, 돼지처럼!”
    “!”
    “은혁 동무, 그것이 진정한 사회주의라고 생각하시오?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따라서 현재의 북조선은 썩어빠진 서방의 제국주의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도 못한 무늬만 사회주의인 기형적인 독재체제요. 거기다가 노동자국가라고 자처하면서 정작 노동자계급의 의사를 무시한 권력세습이라 나도 속고, 동무도 속고, 저 북조선의 헐벗은 하늘조차도 속았소. 이제 내 말뜻을 알겠소?”
    “부조장 동무! 그건 반혁명종파분자들이나 하는 극악한 발언입니다. 동무의 지금 그 발언을 공화국과 인민에 대한 배신으로 접수해도 되겠습니까?”
    “접수라! 내 발언에 대해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뜻이군. 하지만 역사의 복수대상은 내가 아니오. 바로 노동자국가(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철저히 기만한 인민의 적들이 몇 백배로 받게 될 것이오.”
    “설마 했는데……. 젠장! 평양에서 의심한 반공화국음모가 모두 사실이었군.”
    “동무가 틀렸어. 지금까지 난 한 번도 반공화국음모를 꾸민 적이 없어. 단지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공화국의 지도체제에 철퇴를 가하려는 것뿐이니까. 또한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 말머리를 돌리는 건 결코 배신이 아니지. 어떻게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내 충성심이 배신일 수 있겠소. 안 그렇소?”
    “…….”
    “솔직히 동무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졌을 때 감상에 빠지지 말고 나와 홍화 동무를 단숨에 제거했어야 했소. 그럼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지. 아무튼 동무는 영웅적인 투쟁을 하다 남조선에 낙오된 것으로 상부에 보고하겠소.”
    “낙오! 부조장 동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모르면 알려주지.”
    “핑!”
    “으으으.”
    “몇날 며칠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더 정확하고 손쉬운 복수가 없더군.”
    “지금 나를 남조선 반동들의 먹잇감으로 남겨놓겠다는 속셈입니까?”
    “이해가 상당히 빠르군. 왜 내가 너무 관대한가?
    “으으으.”
    “동무는 내가 남조선 반동들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음식과 포도주거든. 아, 아니지. 동무가 말한 인간제물이야.”
    “크크크. 이거 내 꼴이 아주 우습게 됐군. 부조장 동무?”
    “말하시오.”
    “동무는 지금 극도로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소.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비참한 운명을 면치 못할 겁니다. 더구나 그 게임에서 아직까지 승자가 바뀐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조장 동무도 고칠 수 없는 권력병에 걸렸나 보군요. 크크크.”
    “동무는 영원히 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어쩌면 이유 없는 반항아처럼 보일 수도 있고.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역사와 인민의 소모품인 내 처지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니까.”
    “어쨌건 승리를 목전에 두고 내 몫이 명예가 아니라 희생이라는 사실이 재미있소. 아주 재미있어! 수많은 전투를 통해 이젠 살육이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할 만큼 무감각해졌는데, 정작 일생을 건 여정이 이토록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손님들, 어서 배에 올라타세요. 지금 출발해야 물돌이(들물이나 날물이 끝나고 잠시 조류가 멈추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를 맞출 수 있습니다. 헉!”
    “선장, 주둥아리 닥치고 가만히 있으시오.”
    “총! 아, 예.”
    “부조장 동무, 더 이상 지체하면 탈출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홍화 동무, 잠깐만.”
    “!”
    “부조장 동무, 아니 왜 은혁 동무에게 권총을 돌려주는 거죠?”
    “바라는 게 뭡니까?”
    “그 총으로 동무가 동무의 인생과 죽음을 위대하게 결정하시오. 영광스럽게 끝낼 것인지 아니면 비참하게 끝낼 것인지. 알겠소?”
    “결국 총알받이가 되라는 소리군.”
    “그렇소. 죽음으로서 동무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시오.”
    피오기는 혈관벽을 녹여 출혈을 일으킬 만큼 독살스럽게 웃고 있었다.
    은혁은 반신반의하며 땅에 떨어진 권총을 선뜻 집어 들지 못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권총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은혁은 가장 먼저 탄창에 장전된 탄알부터 점검했다. 자신이 새벽에 장전했던 10발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순간 탄창을 다시 권총에 장전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슬라이드를 능숙하게 뒤로 당겼다. 찰칵하는 소음과 함께 총구가 정확히 피오기의 미간을 향했다. 동시에 분노에 찬 은혁의 눈동자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은혁의 위협적인 행동에도 피오기는 역시나 강심장이었다. 얼굴에서 두려움이나 공포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반혁명종파분자! 영광스런 죽음? 개소리 말라우! 감히 대장 동지와 당의 믿음을 배신해? 지금 반역자를 처단해 당과 조국의 명예를 되살리겠어. 잘 가라우!”
    “핑!”
    “컥! 홍화 동무, 동무가 왜 나를…….”
    “히~유! 이러다 동무의 몸이 벌집이 되겠군. 이젠 성한 곳은 팔과 다리 한쪽씩뿐인가.”
    “은혁 동무, 이건 감히 동무가 나를 기만한 대가요.”
    “그건 오해요. 난 단지…….”
    “오해라, 음. 은혁 동무?”
    “말하시오. 홍화 동무.”
    “믿음이 없는 보살핌은 감옥이에요. 내게 감옥은 북조선 하나로 족해요.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은 죽음도 함께 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이에요.”
    “그랬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하지만…….”
    “아참! 아직 모르지. 홍화 동무와 난 함께 고난의 행군을 가기로 했거든. 푸하하하!”
    “또한 내 미래를 건 부조장 동무와 운명도, 정신적인 순결도 함께 하겠다는 맹세이기도 하고.”
    “크크크, 그랬군. 그 남조선 반동의 말처럼 일종의 보험인 셈이군. 진즉에 말해주었으면 좋았을걸.”
    “그나저나 홍화 동무의 총질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도 다시 반으로 줄었군.”
    “남조선 반동들이 곧 들이닥칠지도 모릅니다. 지금 출발해야 안전구역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전투도 실패하고, 편한 죽음도 찾아 먹지 못하는 미시리. 처음으로 용기를 냈는데, 어쩌지? 무의미하게 끝났으니 말이야. 아무튼 홍화 동무와 내가 남조선을 빠져나갈 때까지 멸적의 투지로 적들에게 무자비한 불벼락을 퍼붓도록. 구체적인 전투의 실행계획은 동무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겠소.”
    “컥! 으으으.”
    “아참! 혹시라도 우리가 등을 보이면 스스로 자폭할까 봐 말해주는데, 내가 당과 군에 정황설명을 하지 않으면 동무의 가족은 인민부력부의 무자비한 보복을 당할 것이오. 혹시 또 모르지. 동무의 가족들이 관리소로 보내질지도. 관리소는 한마디로 피에 굶주린 승냥이우리라고나 할까. 죽지 못해 사는 거지. 배고픔은 제 살을 뜯어먹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거든. 물론 동무가 남조선에서 저지른 반공화국 행태를 인민무력부에 낱낱이 보고한 사람은 나요. 조국을 배신하고 국정원의 쁘락지노릇까지 했다고 말이야. 간첩행위에 반체제행위라. 거기다 국가기밀누설까지. 죄목만 들어도 하나같이 소름이 쫘~악 끼치는군. 푸하하하!”
    “이 악랄하고 무자비한 원수 반동 새끼.”
    “그 분노는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싸우겠다는 결의로 료해하겠소. 그럼 행운을 빌겠소. 크크크.”
    매우 사납고 음흉스러운 흉풍(凶風)이 은혁에게 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은혁은 건기의 산불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은혁은 자신의 무리에게 버림받은 맹수처럼 비참하고 쓸쓸한 최후를 떠올렸다.
    하늘에는 알을 깨고 나온 새끼들의 성급한 날갯짓으로 소란했다. 그중엔 제법 높고 힘차게 어미의 흉내를 내는 녀석까지도 있었다. 머리와 가슴·배는 흰색이고, 날개와 등은 고운 잿빛이었다. 꽁지깃 끝엔 검은 띠가 있어서 다른 갈매기와 구별도 쉬웠다. 그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비슷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울음소리가 어시장처럼 복잡했던 은혁의 머릿속을 말끔히 정리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은혁은 자기방어를 위해 몸을 한 덩어리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움직임이 가능한 왼팔과 달리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총상을 입은 오른쪽 허벅지에선 고통과 출혈이 심했다. 근육과 힘줄이 찢어지고, 뼈가 산산조각 났는지 몸을 제대로 세울 수조차 없었다.
    “부~욱!”
    하지만 가족을 위해 생존모드에 들어가야 했다. 우선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 응급처치로 다리의 상처부위를 단단히 감아 지혈을 했다. 그런데 마치 남의 다리처럼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은혁은 있는 힘을 다해 일어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나 무리였다. 다리가 몸을 지탱하지 못해 걸을 수조차 없었다. 최악의 상태였다. 그사이 피오기가 권총으로 선장을 위협해 어선을 탈취하고 조타실을 차지했다. 이어 홍화가 선장을 갑판으로 다시 끌고나왔다. 그리곤 주저 없이 가슴에 총알을 퍼부은 다음 선장의 사체를 바다에 버렸다. 선장은 엎드린 자세로 바다 위에 부표처럼 떠있었다. 마침내 기름타는 냄새가 연기와 함께 올라오고 주위를 소음 속에 몰아넣더니 낚시어선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다시 홍화가 무표정한 얼굴로 갑판 위에 나타났다. 그리곤 은혁이 어선에 실었던 배낭을 밖으로 집어던졌다. 피오기는 능숙하게 어선을 몰았다. 낚시어선은 천천히 접안시설을 벗어나더니 영흥대교를 등지고 경주로에 들어선 경주마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은혁은 어선이 방파제 끝에 다가가자 이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피 묻은 칼로 새로운 조국을 건설하겠다? 피오기 동무, 악수를 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동무 자신이야. 크크크.”
    바닷가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상황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적대적이고 위험했다. 은혁은 선착장에 혼자 고립된 상태였다. 더구나 분비됐던 아드레날린이 극감하며 극심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은혁은 무엇보다 안전한 엄폐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홍화가 던진 배낭을 챙겨 마지막 힘을 쥐어짜 몸을 끌기 시작했다. 마침내 승합차에 도착한 은혁은 오른팔 하나로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후미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배낭에서 AK-74를 꺼내들었다. 은혁은 가족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그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삼아 지나온 삶이 스쳐지나갔다. 과거에 했던 일들, 하고 싶던 일들, 가족들, 딱친구들이 영화필름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파도소리가 마치 오마니의 자장가처럼 들리는군. 날씨도 화창하고. 죽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야. 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고 싶다. 우리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