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왜 해양대통령이 되었나?

    해양법 전공자 이승만 박사 때문에 일본도 쩔쩔매었다

    김성국 박사/한국해양대학교 

     
      

  • ▲ 1950.10.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자료: 6·25전쟁60주년 사업위원회(국가기록원 / NARA /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은 슬픈 상처를 남기고 있다. 김일성이 저지른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민간인 피해만 100여만명에 이른다. 종북주의자들은 같은 시기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혹독한 반면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있다.
    ▲ 1950.10.22 평양, 북한 주민의 학살 현장.자료: 6·25전쟁60주년 사업위원회(국가기록원 / NARA / 군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은 슬픈 상처를 남기고 있다. 김일성이 저지른 한국전쟁은 우리나라 민간인 피해만 100여만명에 이른다. 종북주의자들은 같은 시기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혹독한 반면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있다.


    종북주의자들은

    살인마 김일성에게는 침묵하고

    건국의 아버지는 홀대


    우리나라 역사상 잘못 평가된 대통령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한 명에 속한다.
    무릇 한 국의 건국에 기초하고 초대 대통령으로써 일그러진 평가를 받는 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4.19혁명을 주위로 한 시대적 평가에 집중된 나머지 공산세력으로부터의 나라를 지키게 해 준 “건국의 아버지”의 평가가 상당히 부족하다.

    특히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치룬 김일성의 경우, 한국전쟁 기간에만 우리나라 민간인 100여만명에게 피해를 일으킨 살인마이다.
    참전한 연합군과 한국군에게 입힌 피해는 80여만명에 달하고 있어서 무려 180여만명의 피해자가 불과 3년 만에 발생했다.

    하지만 종북주의자들은 김일성과 그 가족들에게는 침묵하면서,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에게는 독재자라는 평가만을 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국가의 존망에서 나라를 지켜내고, 그 토대로 세계 무역대국에다가 세계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온 대한민국의 토대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금 세계 최강이라는 미국도 1775~1783년에 걸쳐 5만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 미국독립전쟁 이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국의 아버지의 공과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불운한 사고방식이며 종북주의자의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 ▲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이승만.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해양문명권을 선택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활동했던 구한말에는 지식인들은 크게 두가지 파로 갈려져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즉, 중국의 대륙문명권에 머물면서 전통을 지키자는 위정척사파였고, 다른 한 지식인들은 일본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을 받아들이자는 문명개화파였는데, 이승만은 해양문명권을 받아들였다.

    세계사의 패권은 지정학적인 위치에 따라 대륙문명권과 해양문명권의 충돌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원로정치학자인 Brzezinski(1997) 역시 영국, 미국 등의 해양문명권과 독일, 러시아 등의 대륙문명권간의 끊임없는 세계패권 충돌로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건국대학교 이주영 교수의 “이승만의 역사적 위치(2006)”라는 글을 보면 보다 명확하게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가 왜 해양문명권을 택했는지 알 수 있다.


      
     

  • ▲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학위 논문(Neutrality as Princeton 대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써 국제해양법에 근거한 논문이다. 원문은 미국 전자도서관(http://archive.org)에서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 박사학위 인준에 관한 내용을 보면 지도교수는 Princeton 대학교의 학장 Edward Elliott 교수이다.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2)
    ▲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학위 논문(Neutrality as Princeton 대학교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써 국제해양법에 근거한 논문이다. 원문은 미국 전자도서관(http://archive.org)에서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 박사학위 인준에 관한 내용을 보면 지도교수는 Princeton 대학교의 학장 Edward Elliott 교수이다.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2)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국제해양법을 공부하면서

    해양문명권을 선택하였다


    이승만은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George Washington대학교에서 학사학위와 Harvard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이후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외교를 통해서 중립국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법규에 근거한 중립국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당시 거의 유일한 국제법으로 인정받고 있는 해양법을 전공하였다.

    박사학위 논문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은 오늘날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Grotius는 자유해양론(Mare Liberum, 1609)을 통해 해양자유의 원칙에 따른 통상과 무역과 항해의 자유로부터 시작한다.
    이승만은 해상에서 중립교역을 역사적으로 개관함과 동시에 전쟁중에도 중립교역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미국 주도의 국제관행의 성립배경에 대해 연구하였다.

    즉, 조선의 항구적인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립이라는 국제적인 근거를 확보해야 했다.
    따라서 당시에 신생독립국이면서 세계의 슈퍼파워로 등장하고 있는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전쟁 중에서 획득한 중립교역의 사례가 국제관행이 되었음을 밝혀서 조선에 적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미 조선은 일본에 병합되어 식민지가 된 상황이었고, 청년 이승만은 강력한 해양국가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는 미국을 지켜보고 있게 되었다.

      

  • ▲ 경향신문 1953년 9월 17일자 제1면 기사.신문제목: 侵犯船(침범선) 擊沈不辭(격침불사)/ 平和線(평화선) 守護(수호), 政府當局(정부당국) 警告(경고)
    ▲ 경향신문 1953년 9월 17일자 제1면 기사.신문제목: 侵犯船(침범선) 擊沈不辭(격침불사)/ 平和線(평화선) 守護(수호), 政府當局(정부당국) 警告(경고)

    미국 Wilson 대통령과의

    숙명적인 만남


    일본으로부터 광복을 맞이하게 된 원인 중에는 미국 28대 대통령인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가 크게 영향을 끼쳤다.
    당시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은 윌슨주의를 추종하게 되었고, 스탈린주의를 추종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3.1 독립만세운동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3.1독립정신을 이어받아 광복하게 된 대한민국은 Wilson 대통령이 은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승만과 각별한 관계가 있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의 박사학위 지도교수는 Edward Elliott 교수로써 당시 Princeton 대학교의 학장이었다.
    박사학위 수여당시의 Princeton 대학교 총장이 바로 미국의 28대 대통령이된 Woodrow Wilson이었다.
    그리고 지도 교수였던 Elliott의 부인은 바로 Wilson 대통령의 사촌관계였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가난하고 나라마저 없는 청년 이승만이 기댈 큰 언덕이 Wilson 대통령이었고, 당차게 행동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 ▲ 평화선을 넘어 조업한 혐의로 우리 해군의 심문을 받고 있는 일본 어민.(연합뉴스)
    ▲ 평화선을 넘어 조업한 혐의로 우리 해군의 심문을 받고 있는 일본 어민.(연합뉴스)


    일본을 굴복시킨

    해양법학자 이승만의 평화선


    해양법학자 이승만 박사의 해양에 대한 관심은 유별났다.
    그가 전공한 국제해양법과 공부하였던 시기에 미국이 해양대국으로 나아가고 있던 시절이라 미국식 사고가 많이 개입된 것으로 추론되는 행적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제2대 국방부 장관으로 신성모를 내무부장관 겸직으로 발탁하였고,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손원일을 기용한 것이다.
    이들 2명의 국방부 장관은 공통적으로 식민지 시대에 상선학교에서 항해학을 접하고 해군장교를 거쳐 광복된 대한민국에서 해군을 건설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공통점이 있다.
    이후 국방부가 거의 대부분 육군출신으로 장관이 배출된 것에 비하면, 건국초기에는 미국식의 사고가 영향을 많이 끼친 것 같다.

    그리고 대표적인 해양법학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18일 확정한 국제적 선례에 의거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될 요구에 의하여 해안에서 50∼100마일에 이르는 해상에 선을 긋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 선언’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평화선(Syngman Rhee line)”으로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대한민국 국무원 고시 제14호)을 통해 선포하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강력한 항의와 평화선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1952년의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중으로 UN 연합군이 참전하고 있는 전쟁 중의 국가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기에 일본과 동등한 수준의 외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스스로가 당시 최고 권위의 대학중의 하나인 Harvard, Princeton 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하였고, 은사가 세계 최강 미국의 대통령을 역임하는 등 평화선에 대한 논리는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은 분명하였다.
      
     

  • ▲ 이승만의 평화선(이승만라인)과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집회(마이니치 신문. 1953.9.15)
    ▲ 이승만의 평화선(이승만라인)과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집회(마이니치 신문. 1953.9.15)



    해양 대통령 이승만은

    독도를 지켰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1945년 미국 Truman 대통령이 성명한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과 ‘해저와 지하자원에 관한 선언’을 비롯하여, 멕시코·페루·칠레·코스타리카 등에서 채택한 유사한 선언에 의해서 확립된 국제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자 일본으로선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일본은 이를 ‘이승만 라인’이라 부르고 철폐를 강력히 요구했다.

    일본 정부가 어민들에게 ‘이승만 라인’을 무시하라고 하자, 한국 정부는 군함까지 동원해 ‘평화선’을 넘는 일본 어선을 가차 없이 나포했다.
    1965년 6월 한일조약에 의해 실질적인 평화선 폐지 때 까지 평화선을 넘어왔다는 이유로 억류된 일본인수는 3,929명, 나포된 선박은 328척이었다고 한다.

    평화선은 독도와 NLL을 포함한 북한 수역까지를 포함하여 선포한 개념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독도에 대한 영유권 침해에 대한 근거 문서로써 평화선을 지적하고 있는 만큼, 이승만 대통령은 미래를 내다보는 해양대통령임에는 분명하다.

    이제 새로운 정부가 10여일 후에 출범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서 UN연합군이 나라를 지켜줬던 보잘 것 없었던 국가가 이제 세계의 무대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의 새로운 정부 출범이다.

    만약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주지 않았고, 산업화의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성장토대를 만들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종북주의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그간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종북세력들에 의하여 마지막 재임시절의 부정선거로 촉발된 정권교체의 과오만 알려져 왔다.
    이 분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김일성과 그 가족들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폭압적이고 가난한 나라로 변해버린 북한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그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미리 그 역할을 한 해양대통령의 평가는 해양수산부가 부활하는 박근혜 정부에서 꼭 해주길 바란다.
    [빅뉴스=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