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회 이승만 포럼]
    2013. 2. 14(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이승만과 상투자르기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 소장)     
                              
                

  • ▲ 동아역사연구소장 이민원 박사 ⓒ 정상윤 기자
    ▲ 동아역사연구소장 이민원 박사 ⓒ 정상윤 기자

    머리말

    이승만은 지난 1백여 년의 한국사상 가장 주목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특히 국제무대에서보인 그의 활약과 외교적 ‘선수(先手)’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승만의 일생은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운동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기 중 하나는 청년시절 감옥에서 5년여의 시련을 겪을 무렵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후 민영환ㆍ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풀려난 이승만은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하와이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마침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해방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았다.
    이승만에 대한 저간의 관심은 대체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국외의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이후 초대대통령으로서의 정치활동이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이승만의 의식 세계를 전통에 대한 이해 및 태도와 결부지어 접근해 볼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한 거인의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승만의 청년기 의식과 세계관을 살펴볼 때 무엇보다 흥미를 끄는 것은 왕후시해(명성황후시해사건) 직후에 내려진 단발령 당시이다.
    1895년 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위정척사론의 입장에서 강력히 이에 반발하였다. 상투를 자르려거든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며 격렬히 저항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단발을 시행하려는 지방관을 왜의 앞잡이라 하여 처형했다. 그 후로도 일부 지방에서는 학동들에게 단발계몽 운동을 하는 지식인 청년들을 친일역적이라 하여 집단으로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위정척사론만 작용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러나 세계의 추세는 단발이었다. 그것은 일상에 유용하고, 건강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가면서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단발을 하게 되었고, 개화의 당위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1백 여 년이 지난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 남성들은 현재와 같은 상고머리를 하게 되었다. 백여 년 전 ‘5천년 한국인의 혼’이 담겼다고 한 상투를 자르느냐 고수하느냐 갈림길에 처했던 청년 이승만과 김구 등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했나. 흔히 역사에서 말하는 애국자와 매국노, ‘단발 문제’를 통해 새로이 생각해 볼 점은 없는가.

    조선의 상투와 단발령의 파장

    우리의 조부모 세대만 해도 머리 모양은 오늘날과 달랐다. 그중 성인 남성의 두발 양식을 상투라 했다. 상투는 누천년 역사를 지닌 것으로 유가적 이념과 사회 관습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즉 상투와 갓 장식 등은 부모에 대한 효의 표현이자, 성인을 뜻했고, 신분을 나타내는 수단이었으며, 조선인의 자존심과 혼으로도 인식되었다. 이처럼 소중히 여기던 상투가 사라지고 현재의 머리 모양이 등장한 계기는 1895년의 단발령이다.
    단발령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이 발생한지 석 달이 채 안된 시점에 예고 없이 내려졌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었다. 이를 내린 것은 김홍집내각. 단발령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편리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관민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부모가 물려준 신체와 머리칼을 훼손하는 것은 불효막심한 행위라 하여 낙향하는 관리가 속출하였고,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는 최익현의 항변을 필두로 전국에서 유생과 지방민들이 봉기하였다. 단발령 하나에 조선 전국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던 것이다.
    단발령은 국모시해사건으로 격앙된 조선인의 감정을 끝 간 데 없이 치솟게 하였다. 장안에서는 순검이 행인의 상투를 잘라댔고, 등짐을 진 지방민은 상투를 잘릴까 두려워 도성 출입을 피하였다. 열국공사의 가마꾼은 상투가 잘릴까 두려워 궁성에 가려하지 않았고, 서울의 상가는 문을 닫아걸고 말없는 항의를 표하였다. 물가가 폭등하여 아우성이었다.
    지방 사정도 말이 아니었다. 각지에서 일본 군인과 상인이 피살되는가 하면,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은 왜의 앞잡이라 하여 피살되는 사태가 속출하였다. 이에 중앙군이 사태 진압을 위해 요로에 파견되면서 중앙군과 지방민 사이에 소모적 충돌까지 발생하였다. 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가뜩이나 어수선한 때에 단발령이 겹치면서 조선의 사태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파국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이때 조선인들의 다양한 반응이 흥미롭다. 조선의 유생들은 한결같이 전통문화와 유가적 가치관의 파괴를 우려하였다. 그러나 서울 사람 일부는 단발령이 일본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들 역시 단발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강요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고, 그럼에도 이를 강요하는 이유는 일본상인의 진출을 돕기 위해서라는 분석이었다. 그런 분석은 일본 언론의 보도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측의 반응은 달랐다. 일본의 내각 총리 이토와 전임 주한공사 이노우에는 주일영국공사 사토우에게 일본거류민의 보호를 위해 일본군 파견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조선의 사태를 빌미로 일본군을 파병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언론에서는 단발령으로 인해 조선 문명이 일시에 약진하게 되었다고 선전하였다. 조선에서 양복, 모자, 시계, 셔츠, 구두, 양말 등의 수요가 폭증하여 일본상인이 호황을 누리고 있고, 개항장의 일본인 이발소는 문전성시(門前成市)라 하였다. 일본상인은 조선으로 돌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으로 격화된 조선 상황은 얼마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반전되었다. 일본의 위세가 추락하고, 일본의 위압 하에 있던 김홍집내각도 그날 붕괴되었다. 일본군에게 구원 요청하기를 거부한 김홍집은 서울의 백주대로에서 피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단발의 필요성을 인정했던 김홍집은 시행 자체는 신중해야 한다고 일본 측에 항변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럼에도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다 오히려 매국노로 낙인찍혀 자국민의 폭력에 희생되었다. 일본의 정략에 희생된 비운의 재상이었다.

  • ▲ 동아역사연구소장 이민원 박사 ⓒ 정상윤 기자


    19세기말의 상투와 단발 이야기

    ○ 조사시찰단과 유길준ㆍ윤치호의 사례
    1881년 4월 윤치호는 수십인 일행과 함께 일본까지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 혹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이라고 부르는 사절단이 바로 그것이다. 숭례문을 나선 일행은 중장년층과 청년층 등 두 패였다. 조선과 일본이 개항조약을 체결한 후 조정에서는 이미 1, 2차에 걸쳐 수신사를 파견한 바 있었으나, 이 같은 대규모의 사절단은 처음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각 성(省), 즉 내무성, 문부성, 사법성, 공부성(工部省), 외무성, 육군성, 대장성(大藏省) 외에 세관과 육군조련, 기선운항 상황 등을 각기 분담하여 시찰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총명한 청년 1~4명씩을 선발하여 수행원(隨員)으로서 동행하였다. 물론 조사 중에는 홍영식처럼 20대 인사도 있었고, 수행원 중에는 박정양을 수행한 이상재(1850~1927)처럼 30대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조사는 30~50대, 수행원은 20대의 청년들이었다.
    이중 윤치호(1865~1945)는 어윤중의 수행원으로서 합류하였다. 윤치호가 16세로 신사유람단 일행 중 최연소였다. 이들은 역마다 말을 갈아타면서 부산까지 갔는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일이 걸렸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나이의 윤치호는 중망있는 인사들과 함께 한 여행에서 귀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
    윤치호가 본 부산은 이미 딴 세상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문물의 교류로 얼마나 활기 있고 기운찬 발전을 보이고 있는지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일행이 탄 배는 안녕환(安寧丸)이었다. 거대한 배는 아니었지만, 윤치호는 처음 타 본 그 기선의 위용에 놀라 ‘세상에 이런 배도 있고나’ 하고 감탄하였다.
    항해 중 윤치호는 다른 젊은이들과 저녁 후에 갑판에 나와 황혼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모두 부푼 꿈을 간직한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상투 틀고 창옷을 입고 있었다. 20여 명의 청년들이 혹은 난간에 의지하여 서서히 변해 가는 석양빛을 바라보며, 더러는 갑판 위를 돌아다니며 기선의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고, 더러는 몰려다니면서 시시덕거렸다. 이때 선실에서는 12명의 인사들이 나라와 장래의 국제 정세를 놓고 심각하게 논의를 벌였다.
    한편 그 기선의 선장은 양복에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 사람이 순후하고 그 중에 가장 재능 있어 보이는 나이 어린 윤치호를 특히 우대하였다. 선장은 그에게 외국어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윤치호는 그 선장의 복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의복이 간편하여 일하며 다니기 좋고, 깎은 머리에 쓴 모자도 퍽 편리하게 보였다. 윤치호는 그 모자를 써 보겠다고 청하였다. 그 선장은 쾌히 허락하고 윤치호는 몰려든 청년 앞에서 그 모자를 쓰고 보란 듯이 거닐었다.
    그러나 “조선의 갓을 벗고 모자를 쓰다니!” 말은 귀와 귀를 지나 쏜살같이 선실에 모인 인사들에게까지 들어갔다. 벌써부터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선실에 있던 인사들의 생각이었다. 곧 바로 선실에서 윤치호를 불러들였다. 이어 엄한 꾸지람을 윤치호는 듣게 되었다. “예의의 나라 사람이 관을 벗고 모자를 쓰다니 주상께 여쭈어 벌을 받아야 할 게야.” 준엄한 질책이 내려졌다.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윤치호는 울었다. 호기심에 별 생각 없이 한 일이지만, 그 질책을 받으니 끝없는 부끄러움이 들었던 것이다. 이후 상투와 갓은 그가 중년기에 접어들 때까지 지속적으로 고뇌를 안겨 준 대상이 되었다.
    시찰이 끝나고 귀국할 때쯤 어윤중의 수행원이던 윤치호와 유길준은 남았다. 일본에서 일본어와 영어를 익힌 윤치호는 영어통역관으로 푸트 미국공사를 따라 귀국하여 조선정부와 미국공사관 사이에서 교량역을 담당하게 된다. 한편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유길준은 미국 현지에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유학생활 도중 유길준은 상투를 잘라 한국 최초로 단발을 한 해외유학생이 되었다. 하나는 국내에서 하나는 해외에서, 각기 고국의 미래를 걸머질 선구자의 운명을 안은 채 부지런히 향학열을 불태웠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계기로 두 사람은 다시 활동 무대가 바뀌었다.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유길준은 아깝게도 학업을 중지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인천항에 내린 그는 단발을 한 상태였다. 이후 그는 한규설의 별장에서 신변보호를 받으며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7년 사이에 그가 저술한 것이《서유견문(西遊見聞)》 등이다. 한편 갑신정변의 주역들과 교분이 있었던 윤치호는 얼마 후 상해로 떠났다.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이 있다하여 의혹을 샀던 것이다. 고종의 암묵적 승인과 미국공사의 도움은 있었으나 일종의 정치적 망명이었다. 이후 그는 상투를 자르고 단발을 하여 자유세계에서 마음껏 유학생활의 꿈을 펼쳐 갔다. 그가 조선에 돌아 온 것은 해외 생활 10년 후였다.

    러시아황제 대관식에 간 민영환 특사의 갓 소동

    아관파천 직후 조선내각에서는 이전에 김홍집내각에서 취한 조치를 되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상투만큼은 자르라는 것인지, 그대로 유지하라는 것인지 애매모호하였다. 전국유생과 일본의 정서로 보아 상투를 틀라고 해야겠지만, 정부의 뜻은 그게 아니었다. 앞서 김홍집내각에서 취했다는 단발을 그대로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일본이 취한 조치이니 무조건 반대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유용하다면 그냥 두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한동안 조선 내에서는 단발과 상투가 병존하였다. 관에서도 여전히 상투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민영환과 윤치호의 사례에서 그런 고민을 잘 엿볼 수 있다. 윤치호는 유학생활 중 단발을, 1895년 귀국해서는 다시 상투와 갓을 사용하였다. 단발을 하면 매국노로 인식하는 사회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내려진 단발령을 따르기에는 시대 분위기와 여론이 안 좋았다. 윤치호가 민영환 특사를 수행하여 러시아를 방문했던 1896년 아관파천 당시에도 일행은 상투를 하고, 갓을 썼다. 
    그러다 보니 외교 의전상 발생하는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결국 사절이 러시아에 갔을 때 황제대관식 참석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대관식 의전을 담당한 쪽으로부터 성당에 입장할 때 모두 모자를 벗으라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갓을 벗고 맨 상투 바람으로 참석하는 것이 가하냐  아니냐로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은 참석을 포기하였다. 이런 논란은 청국사절 이홍장에게도 그랬고, 이집트ㆍ터어키 사절도 그랬다.
    이 때 윤치호는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 나라의 사명을 띠고 왔으니 맨상투로라도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역관 김득련은 아무리 아라사라고는 해도, 우리는 조선인이니 동양의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민영환은 고민하다가 김득련의 주장을 수용하여 결국 대관식장 입장을 사양하였다.
    민영환의 그런 고민은 귀국 이후 조정에서 고려되었던 듯하다. 이듬해 1897년 봄 다시 서울을 떠나 유럽을 방문하게 된 민영환은 출발 당시 개항장 인천에서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출발하였다. 관료로서는 대단한 변화였다. 그렇지만 윤치호ㆍ이상재 등은 독립협회 운동 당시 여전히 갓을 쓰고 가두연설을 했다. 이들이 별다른 부담 없이 단발하고 양복을 착용한 것은 대한제국이 멸망할 무렵이었다.

    개화파 안태훈 진사와 보수유생 고능선의 ‘단발논쟁’

     
    단발령이 일본의 음모와 관련된 것이었다 할지라도 단발 자체는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던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개명된 그들은 소수였다. 《백범일지》에는 단발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한다. 주목을 끄는 것은 김구의 스승 ‘고능선’(高能善, 1842~1922)과 안태훈 진사(안중근 의사의 부친)의 대화이다. 단발령(斷髮令)이 내린 직후 군대와 경찰은 거의가 머리를 깎았고, 문관이나 각 군의 면장까지 단발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고능선 선생은 안 진사에게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였다. 이때 안 진사는 “승산 없이 의병을 일으켰다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그럴 생각이 없고, 천주교를 믿다가 후일 기회를 보아 창의를 할 것이며, 지금 당장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깎기까지 할 의향도 가졌노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고 선생은 두말 않고 절교를 하였다. 동학은 토벌하고 서양오랑캐가 하는 서학(西學)은 한다? 모름지기 의리 있는 선비라면, ‘지하에서 목이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머리카락 자른 사람 노릇은 할 수 없다(寧爲地下無頭鬼 不作人間斷髮人)’고 하는데, 안 진사가 단발 의향까지 보인 것은 의리가 없는 것 아닌가? 고능선은 그 당시 일반 유생들처럼 상투를 조선의 혼이자 자존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연히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반면 안 진사는 ‘지금 당장 머리를 깎아야 한다면 깎기까지 할 의향도 가졌노라’고 하였다. 안태훈은 어느 정도 서구 문명을 이해하고 있었다. 새로운 제도와 문물에 대해 청년 김구보다 한창 진보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안 진사의 생각은 당시의 지방 사정을 감안할 때 매우 개명된, 그러나 상당한 소신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자칫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유생들로부터 매국노라 지탄받을 수 있었고, 동학도의 공격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당시 안 진사 집안에서는 총기류를 구입하여 외부의 공격에 대비하여 자위 수단을 갖추었다. 동학도 봉기 당시에는 그들을 막기 위해 의려(의병)를 구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동학의 연비(連譬) 수 백 명을 거느린 팔봉 접주 김구가 ‘척왜척양’(斥倭斥洋)의 기치를 들고 해주성을 공격하다 패퇴하여 궁지에 몰렸을 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안 진사는 김구의 인물을 아껴 자기 집에 유숙하게 하였다. 거기서 김구는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스승으로 받들게 되었다. 김구는 존경하는 안 진사와 스승이 단발에 대한 인식 차이로 절교하기에 이른 상황을 곤혹스러워 했다. 그렇지만 기본 입장은 스승 고능선 쪽이었다. 적어도 단발령 직후 김구의 생각은 보수 유생의 사고와 다르지 않았다.

    청년 김구와 스승 고능선의 ‘단발논쟁’
     
    김구는 치하포에서 ‘일본군 밀정’을 살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천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김구가 수감되었던 인천감옥서는 부산과 원산에 이어 한국에서 제일 먼저 개항한 곳이었다. 이때 김구는 세계역사 지지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와 국한문으로 번역된 것들을 접하게 되었다. 김구는 이후 세계관을 확대하고, 종래의 사고를 전환하게 된다. 감리서원 중에는 김구에게 세계의 역사와 지지(世界歷史ㆍ地誌) 등 중국에서 발간된 책자를 국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감옥으로 갖다 주는 이들이 있었다. 김구는 이때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에 청계동에서 오로지 고 선생만을 하나님(神人)처럼 숭배할 때는, 나 역시 척왜척양(斥倭斥洋)이 우리 사람의 당연한 천직이요, 이에 반하면 사람이 아니요, 즉 금수(禽獸)라고 생각하였다. 고 선생 말씀에 우리 사람에게만 한 가닥 밝은 맥(一線陽脈)이 남아 있고, 세계 각국이 모두 ‘피발좌임’(被髮左袵)한 오랑캐라는 말만 믿었더니 태서신사(泰西新史) 1책만 보아도,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우뚝 서 원숭이와 멀지 않은 오랑캐들은 도리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아름다운 법규가 사람다운데, 우아한 갓을 쓰고 넓은 띠를 두른 선풍도골 같은 우리나라 탐관오리는 오랑캐라는 칭호조차 아깝다.’
    김구는 위정척사(衛正斥邪)적 사고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되면서, 서양인과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종래와 정반대의 생각을 갖게 되었다. 1898년 감옥을 탈출한 김구는 각지를 유랑하다가, 공주의 마곡사에서 삭발의식을 행하고 원종(圓宗)이란 법명으로 중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했던 김구는 결국 마곡사를 떠나, 해주로 돌아왔다. 그가 중의 행색으로 돌아온 후 부친은 다시는 삭발을 못하게 하였다. 까닭에 장발승이 되었다. 치마다래로 상투를 짜고 신사의 의관을 장속(裝束)하였다. 상투 튼 청년에서 머리 깍은 스님이 되었다가, 장발승이 되었다가, 다시 머리를 기르고 상투 튼 모습이 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던 그는 스승인 고능선을 몇 년 만에 찾아뵙게 된다. 스승은 김구에게 의암 유인석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갈 것을 권유하였다. 공맹의 가르침을 떠받들며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무사를 기르고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김구는 세계 사정에 대해 생각을 피력한다. 김구는 평소 교훈하시던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주의가 정당한 주의가 아니라는 것과, 눈이 들어가고 코가 높은 사람이면 덮어놓고 오랑캐라고 배척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그것은 개화꾼의 주장이라는 스승의 반박에 김구는 스승이 생각하는 국가의 장래 대계가 무엇인지 듣고자 물었다. 스승의 답은 공자의 말씀 그대로였다. ‘선왕(先王)의 법이 아니고 선왕의 도가 아닌 것은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다. 잘못하다가는 옷과 머리 모양이 다른 오랑캐가 될 수밖에 없을 뿐’이라 하였다. 위의《白凡金九全集》 1, 418쪽.
     
    이에 대해 김구는 “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서 크고 훌륭한 상투를 얹었다손 치더라도 왜놈이나 양놈이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이제부터라도 문명 각국의 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 세우고, 백성의 자녀들을 교육하여 건전한 2세로 양성해야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 잃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 나라가 발전하는 복락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답하였다.
    스승은 경악했다. 역적 개화당의 주장을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제자가 따른다고 탄식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신구(新舊)의 충돌이 생겼으니, 스승은 실망하였고, 제자는 답답해하였다. 그래도 김구는 고 선생 가정에서 외국 물건이라고는 당성냥 하나도 쓰지 않는 것을 보고 고상히 보았다. 스승댁에서 하룻밤 머물고 다음날 하직인사를 하고 나왔다. 김구와 스승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이후 김구는 황해도 지역에서 일반과 학동을 가르치며, 개화문명을 가르쳤다. ‘모두 어서 잠에서 깨어라!’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의 활동 방향은 자신이 동학도로서 혹은 의병으로서 매국행위라 생각했던 바로 그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사당에 고하고 상투를 자른 청년 이승만

     
    이승만 전기를 저술한 올리버 박사는 이승만이 단발을 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승만이 상투를 자르는 문제로 고민했던 과정과 엄숙한 단발 의식이 잘 드러난다.
    이승만은 개항 이후 조선에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깊이 관찰했다. 그는 보수적인 양반 집안의 6대독자였다. 그의 출신과 초기의 서당교육은 조선의 과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익힌 유교 경전을 통해 동양의 종교와 철학, 전통 사상에 정통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성적인 반항아였고, 구체제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고 확신했다. 한양은 들쑤셔 놓은 개미집처럼 웅성거리는 분위기였다.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과거제도가 폐지되었고, 새로운 관리임용제도는 외국어와 서구의 행정제도 시험을 실시했다. 과거 합격을 위해 이승만이 준비해 온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처음으로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고 거리를 나다니기 시작했다. 온갖 새로운 사상들이 사회를 휩쓸었다. 그런 것들은 지금 같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이승만도 모든 성인 남성들처럼 상투를 틀고 있었다. 외국인들의 눈에 그런 머리 스타일이 얼마나 기이하게 보였던지 초기 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 부인은 한국에 관한 자신의 책 제목을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쟁이들 틈에서 산 15년》)이라 했다.
    상투를 자른다는 것은 집안의 사당을 없애거나 거기에 모욕을 주는 것만큼이나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상투를 조선이 버려야 할 구습(舊習)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그 문제를 두고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와 있다가 평생의 친구가 된 애비슨(O. R. Avison) 박사와 오랜 시간 동안 의논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출타한 어느 오후 이승만은 사당으로 가 조상들의 위패를 꺼내 공손히 들고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상투를 자르겠다고 어머니에게 알렸다. 그리고는 어머니께 절한 후 위패를 다시 제자리에 놓고 며칠간 집을 비우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만류하지는 않았다. 에비슨의 집으로 간 이승만은 엄숙한 의식 속에 상투를 잘랐다.
    이승만의 단발은 구체제에 대한 단호한 결별 선언이었다. 이승만이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찾은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어머니는 마음 아파했지만 아들이 이제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현실을 예상보다 쉽게 받아 들였다. 이것은 당시 조선이 어느 정도 격변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세대를 막론하고 모두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었다. 노인들은 귀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고, 젊은이들은 어떤 도움도 없이 주저하며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제껏 자신들이 표준으로 삼아 온 것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죄의식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단발 과정을 통해 본 이승만의 개성

    이승만의 단발 과정은 한 걸음에 여러 단계를 뛰어 넘어간 느낌을 준다. 상투→단발로, 유교와 구학문으로부터 기독교와 신학문으로 전환한 과정과 흡사하다. 다만 상투와는 단호한 결별 같지만, 어디까지나 정중한 의식 절차를 밟아 누천년간의 전통과 유습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편 김구의 단발 과정 역시 흥미롭다. 상투→삭발→장발→상투(치마다래)→단발로 바뀌어 갔다. 인생의 파란만장한 역정 속에 단발에 대한 적대적 입장으로부터, 불과 수년 사이에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단발을 권유하는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그의 사상 역시 유학→동학→위정척사→불교→기독교로 전환되어 갔다.
    단발의 과정 속에 두 인물의 출생과 환경, 개성이 두루 녹아있는 셈이다. 이후의 인생 역정에서 이승만은 각종 중대 현안을 몇 단계 앞서 선구적 결단을 내린 경우가 허다하다. ‘반공포로석방’과 ‘이승만라인’, ‘역사적으로 대마도는 한국땅’이라는 외교적 선수(先手), ‘한미상호방위조약’ 등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다 보니 국가 경영에서 주변과 측근이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 않았나 생각된다. 선구자의 고독이다. 반면 김구의 경우는 주변과 함께 한 단계씩 경험을 쌓아가며 결단을 취하였다. 평범하면서도 측근과 함께 가는 대중적 독립운동가형의 리더였다고 생각된다. 두 거인의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