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투쟁부터 독립군 활동까지 했던 ‘항일무장투쟁의 별’
  • 한상렬.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이 있다.
    한 분은 의병 활동부터 무장독립투쟁에 앞장서다 ‘빨갱이’에게 암살당했다.
    다른 사람은 민족반역자 김정일-김정은 체제를 찬양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31일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병장 한상렬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상렬 선생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 후 강원도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 대일항쟁을 전개하고, 만주로 망명한 뒤에는 독립군 참모로 활동하다 공산주의자에게 암살 당했다.


  •  
    한상렬 선생은 일제가 1907년 서울의 시위대(황실 근위대)를 시작으로 대한제국군 해산을 추진하는 데 반기를 들었다.

    일제가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대장 박승환 참령은 자결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위대 대원과 지방 진위대가 봉기하면서 의병들이 일어서게 된다.

    강원도에서는 민긍호 의병장의 원주진위대가 가장 먼저 봉기했다.

    한상열 선생은 고향인 강원 횡성에서 지역민 200여 명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민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전개했다.
     
    이후 일본군 진압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강원도 횡성, 홍천, 원주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이후 민긍호 부대와 함께 충주성을 공격해 일본군에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일본군의 탄압으로 민긍호 의병장이 체포되어 순국하자 활동무대를 만주로 옮긴다.
     
    만주로 간 선생은 이범윤, 유인석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서 활동했다.

    선생은 1915년 창의소(彰義所)를 조직, 중대장이 돼 경흥지역의 일본군 습격 등을 계획했다.
    이후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에 들어가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을 맡으며 무장독립투쟁을 계속 했다.

    대한군정부에서는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을 맡아 만주-연해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다.
     
    선생은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 내 동우회에서 선전계-군자금모금계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에서 의용군에 참여했다.
     
    선생은 만주에서는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 군자금 모집 등을 맡았고, 재편되는 독립군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선생은 그러나 1926년 9월 19일 독립군 분열을 책동하던 공산주의 단체 ‘주중청년총동맹’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