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62> 복마전

    “들어오세요.”
    “!”
    늦은 밤. 이제 막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한 피오기가 숙소의 2층에 나타났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홍화의 침실공간은 욕망과 쾌락, 그리고 혼돈이 뒤섞인 환락의 무덤이 아니었다. 홍화는 그야말로 로맨틱한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흰색 커튼이 쳐진 창가는 헤드보드의 볼륨감이 돋보이는 고급침대의 차지였다. 그리고 창가에 세워둔 플로어조명의 은색 갓 사이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와 침실도 신비감으로 넘쳤다. 오히려 역한 냄새는 저 멀리 도심에서 불어왔다. 피오기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말라버린 호수 같은 눈빛으로 싱글장 바로 앞에 놓인 S자형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거야말로 혁명전사에게는 비방과 오욕의 방이군!”
    “…….”
    그 사이 홍화는 미니오디오를 틀고 변신을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정적뿐이던 침실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2번 교향곡 부활(Resurrection)>이 맑은 샘물처럼 흘러들었다. 라디오 진행자는 말러가 ‘9번 교향곡의 저주’에 걸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20세기 예술가들을 유혹하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었던 말러의 부인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에 관한 에피소드로 넘어갔다. 순간 불에 데인 듯 피오기의 감정적인 동요가 무의식적으로 홍화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홍화는 애써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변명의 지붕 위에서 무시의 땅바닥으로 성큼 뛰어내렸다. 역시나 그 순간 화장대의 스윙거울에는 인간의 눈이 사라지고 청색에 민감한 고양이의 눈이 나타났다.
    “우르르! 팅, 팅, 팅!”
    그런데 홍화가 갑자기 화장품들을 짜증스럽게 한쪽으로 쓸어버렸다. 마치 삶의 의미를 부정하는 행위처럼 거칠고 난폭했다. 이제 홍화는 의자에 앉아 다리 한쪽을 꺾어 다른 쪽 허벅지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양쪽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스커트라인이 엉덩이에 걸려 매끄러운 허벅지를 깊게 파먹었다. 홍화는 피오기를 움직이는 돌과 별반 다름없이 취급했다. 홍화는 머리에서 핀들을 제거하고 다시 갈퀴손을 만들어 머리카락을 덤불처럼 헤쳤다. 그때 피오기가 뱀허물처럼 벗어놓은 홍화의 옷가지를 집어 침대 위로 차갑게 던졌다.
    “! 드디어 단둘이 있게 됐군요.”
    “홍화 동무, 내가 충고 한마디 하겠소.”
    “충고라, 그전에 지난번 조장 동지와의 사상투쟁 때 부조장 동무의 편을 들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적어도 한 번쯤은 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흠! 그렇군. 그땐 정말 고마웠소.”
    “좋아요. 이젠 부조장 동무의 충고를 듣죠.”
    “말과 행동만이 그 사람의 사상을 노출하는 건 아니오.”
    “그럼요?”
    “평소의 몸닥달(몸단장)과 옷차림도 개인의 사상과 정신상태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그러죠.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요?”
    “!”
    “뭐 하나 물어봐도 되죠?”
    “…….”
    “조장 동무를 좋아하나요?”
    “동무는 유독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군.”
    “여자의 직감으로 볼 때 그렇다는 소리예요. 아닌가요?”
    “공방살이(독신생활)하는 방에서 웬 남자냄새가 지독히 나는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대답하기 싫은 건가요? 아니면 마지막 남은 동무의 자존심인가요?”
    “그건 동무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그럼 저도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
    피오기의 말투는 몸에 밴 야생성 때문에 시종일관 명령투였다. 그에 비해 홍화의 말투는 상대의 심리를 읽는 데 초점을 맞춘 탐색투였다. 거기다 두 사람의 대화는 늑대와 고양이처럼 무미건조하기까지 했다. 그때 홍화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하던 피오기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안락의자 밑에 떨어져 있던 이어링이었다. 이어링은 군청색의 원석과 붉은 산호, 그리고 하얀 진주와 흑진주로 포도송이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침대 위에 던진 옷가지에 박힌 장식도 그와 유사했다. 그사이 홍화는 와인냉장고 문을 열고 반쯤 남은 보드카를 꺼내들었다. 잠시 후 홍화는 뱀파이어가 흡혈을 하고 피를 닦듯 손등으로 입가를 한 번 쓰윽 문질렀다.
    “나도 부조장 동무에게 충고 하나 해드리죠. 동무가 목을 빼고 쳐다보고 있는 달은 이미 너무 멀리 있어요.”
    “그거 충고가 맞소? 어째 동무가 나를 미시리로 숭(흉)보는 소리로 들려서 말이오.”
    “하긴 동무가 내 충고를 순수하게 받아들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죠. 아, 좀 덥네요. 내 방이니까 편하게 있어도 되죠?”
    홍화는 피오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리고 거침없이 단추를 셔츠에서 빼내기 시작했다. 온전히 드러난 홍화의 상체는 상상한 것 이상의 블루다이아몬드였다. 홍화의 몸에는 남자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강한 점성이 있었다. 그리고 홍화는 그 점성을 먹이잡이에 사용했다. 사실 홍화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과감한 포즈와 농염한 유혹이 일상이자 과업이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과 어깨선을 타고 넘어오는 특유의 강렬한 눈빛도 홍화의 고혹함을 담아내는 그릇이었다. 아무튼 홍화의 몸은 지루함이나 단조로움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홍화가 더욱 도발적인 포즈를 취했다.
    “혹시 부화방탕한 남조선 반동들을 상대하다보니까 동무의 혁명의식까지도 썩어빠진 부르죠아(부르주아) 사상문화와 퇴폐적인 생활양식에 물든 건 아니오?”
    “물론 그 말은 나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원색적인 비난이겠죠?”
    “!”
    “그런데 부조장 동무, 우리 공화국이 그 부화방탕한 남조선보다 먼저 무너졌어요. 그 이유가 과연 뭘까요?”
    “동무가 지금 나와 사상투쟁을 하자는 것이오? 내가 보기에 동무는 사상투쟁보다는 혁명의식을 높이는 사상개조학습이 더 필요한 것 같군.”
    “인간의 욕망은 처음부터 통제대상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남한과 북한의 승패로 극명하게 드러났잖아요.”
    “홍화 동무!”
    “아, 그렇지! 남조선과 북조선이지. 시정할게요. 엎어치나 둘러치나 매한가지지만.”
    “반역자의 시작은 언제나 말반동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걸 잊지 마시오.”
    “아무튼 부조장 동무의 눈엔 내가 매음과 불량자적 행위를 일삼는 인간추물로 보이겠죠. 하지만 그거 아세요?”
    “뭘 말이오?”
    “나도 누군가의 여자이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거.”
  • “여자라, 마치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동무에게 씌워진 오명이라는 소리군.”
    “부조장 동무는 최소한 무지와 편견에 갇히지 말라는 소리예요. 그나저나 내 방은 처음이죠? 너저분해도 이해하세요. 난 전투원이지 가정부녀가 아니거든요.”
    “나도 남조선 반동들처럼 노랑진(기름진) 말은 하지 못하오. 온통 혁명의식을 좀먹는 비사회주의적인 남조선 창녀들의 물건뿐이니.”
    “창녀라, 남성 동무들은 환상과 욕망의 대상이라서 밤거리를 헤매며 일부러 찾지 않나요?”
    “난 일탈에 오염된 남조선의 반동들처럼 불나방이 아니오.”
    “하지만 대상공작자의 위선과 가식을 벗겨내기엔 이보다 더 좋은 올가미가 없죠. 적당히 보여주고 적당히 들어주면 모두가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거든요. ! 참 어리석죠.”
    “!”
    “아무튼 나는 욕망과 쾌락의 불에 타지 않는 남성 동무를 여태껏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어요. 그들은 자신의 정액을 배설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영혼이 강탈당한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더라고요.”
    “그건 착각이오. 세상의 모든 남성 동무가 동무의 발밑을 기어 다니길 원하지는 않소.”
    “날 깨진 흑요석처럼 노려보는 것을 보니 그 말은 맞는 것 같네요. 난 그저 생각은 안 하고 행동만 하는 동무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호기심을 자극한 것뿐이에요.”
    “동무, 내게 있어 유일한 기쁨이자 자랑은 죽음으로 적과 싸우다 적후에서 장엄한 화폭(火爆)이 되는 것이오.”
    “내가 순아한 에미나이였다면 좋았을 걸. 그런데 어쩌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동무의 그 무심한 눈빛에서 진실을 읽거든요.”
    “그래, 뭘 읽었단 말이요?”
    “부조장 동무의 잠자는 본능, 억눌린 욕망 말이에요.”
    “동무, 벌써 술에 취했소?”
    “알아요. 부조장 동무는 얼음처럼 차가운 심장을 가졌다는 거. 하지만 실제로는 몸속에 내재된 힘과 폭력이 탈출구를 찾지 못해 요동치며 용암처럼 뜨겁죠.”
    “난 기딴 것 모르오. 오로지 내 가슴속에 있는 건 혁명전투를 완수하기 위한 영웅적인 투쟁의지뿐이오.”
    “물론 전투완수를 위한 동무의 집중력과 기질, 그리고 열정과 승부욕까지 모두 높이 살만 하죠. 한마디로 원시적이면서도 위험하고 거칠죠. 거기다가 동무의 눈엔 어두운 기운이 가득해요. 악마적인 냉혹함이라고 할까.”
    “동무, 혁명적인 신념과 양심은 혁명가와 배신자를 구분 짓는 기본 지표요. 지금 동무의 위험한 상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소.”
    “마음이나 욕망은 부정한다고 없어지지 않아요. 아마 억누를수록 폭발력이 증가할 걸요.”
    “듣기에 역겨우니까 반동적인 말은 삼가시오!”
    “! 그거 알아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말.”
    “아니, 이 동무가 정말. 내가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지. 타락한 여성 동무를 상대할 때는 고도의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먼 바다에서 아주 느리게 움직여야 한다는 거.”
    “난 암초가 아니에요. 동무의 육체도 그 용도가 단지 살인기계뿐이 아니고요.”
    “오그랑수(속임수) 쓰지 마시오. 나에겐 전사로서의 육체만 있소.”
    “남자로서의 욕망은 이미 죽었다? ! 거짓말.”
    “그러고 보니 동무도 남조선을 해방시키러 왔다가 계급 대립에 굴복해 사상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한 것 같소.”
    “사실 공화국은 어느 면에서 내 가치를 남조선 반동들과의 오락행위(야간이나 한적한 곳에서 남녀가 정사를 벌이는 것)로 판단하죠. 나 역시 과업완수를 위해 자제력을 잃은 욕망을 최대한 이용하고요. 그게 죄악인가요?”
    피오기는 언제부턴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입주위에서 사악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카람빗(Karambit)이었다. 피오기의 카람빗은 칼날이 극단적으로 휘어 방어용이 아닌 공격무기였다. 그런데 피오기는 강렬한 눈빛만 뿌릴 뿐 카람빗을 밖으로 꺼내들지는 않았다. 보상심리가 작용해 홍화에게 기회를 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전투원의 머리는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좋소.”
    “하지만 단순하면 할수록 혁명일꾼으로서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한 영리함이나 잔혹함도 기대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사실 지금 내 눈에 부조장 동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요?”
    “…….”
    “한낱 여성 동무를 상대로 신념이 강하다는 걸 한껏 자랑하고 싶은 비열하고 유치한 영웅처럼 보여요.”
    “그건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눈빛을 보니 진실이군요. 하나만 물어볼게요.”
    “뭐요?”
    “내가 조장 동무보다 많이 못한가요? 저 곱지 않아요?”
    “!”
    “! 됐어요.”
    홍화는 다시 보드카를 거칠게 들이켰다. 그리고는 몽롱한 시선으로 담배를 찾았다. 홍화가 길게 내뿜는 담배연기엔 많은 상념들이 녹아 있었다. 아니 빛이 새어들지 못할 만큼 혼탁했다. 그런데 갑자기 리듬에 갇힌 몸을 요염하게 흔들며 산보를 나온 밤고양이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화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걸어와 대담하게 피오기의 허벅지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았다. 홍화의 욕망은 저녁 하늘처럼 불타고 있었다.
    “!”
    순간 피오기가 홍화의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치우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홍화의 올가미도 생각보다 단단했다. 피오기를 막아선 홍화의 시선은 뇌쇄적이고 끈적끈적했다. 이제 홍화가 손가락 끝으로 피오기의 몸을 풀잎처럼 스치며 동심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피오기의 죽은 피부세포들이 깨어나며 본능의 촛불이 하나둘 켜졌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홍화가 이번에는 피오기의 굵은 목선을 따라 피오기의 내부로 거침없이 침입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강력하고 집요한 공격이었다. 아니 숨 막히는 공격이었다.
    “설마 평양의 지시는 아닐 테고…….”
    “왜요, 두려운 가요?”
    “내 운명엔 날개가 없으니까.”
    “날개가 없다? 그건 꿈과 희망, 그리고 미래가 없다는 소리와 같지 않나요?”
    “!”
    “마치 나를 뱀의 꼬리를 가진 괴물로 보는군요. 하지만 틀렸어요. 이건 죽음의 덫이 아니라 과감한 베팅이니까. 도박 말이에요.”
    “난 걸 게 없소. 거기다 내가 이기더라도 동무에게 돌아갈 몫이 없는데도?”
    “무솔리니가 그랬다고 하잖아요. 모든 인간은 승자의 편이라고. 내 몫은 따로 필요 없어요. 난 그 승자를 차지하면 되니까.”
    “그런데 어쩌지, 난 동무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소. 물론 그럴 생각도 없고.”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르죠. 아참! 내 다리매(각선미)가 어때요?”
    “흠! 난 아무것도 못 봤소.”
    “아무것도 못 봤다? 난처하군요. 내가 운이 없는 건가요. 아니면 동무가 운이 없는 건가요.”
    “이런 사촉한(부정적인) 짓거리는, 웁!”
    “쉿! 못 봤다면서 어떻게 내 행동이 사촉하다는 걸 알죠?”
    “간교하고 교활하군.”
    “뜨겁고 거친 거예요. 동무는 비겁하고요. 사실 동무는 내가 찾던 완벽한 남자예요. 욕망, 호기심, 갈증. 그 모두가 이 크고 단단한 근육 속에 있죠. 거기다 다른 남자들에겐 찾아볼 수 없는 악마성까지 갖고 있어요.”
    “나는 동무의 유혹에 넘어갈 만큼 허술하지 않소.”
    “갈등하지 말아요. 꽃봉오리가 벌어지려는 욕망을 굳이 이성의 손톱으로 할퀴어 동무가 얻는 게 뭐죠?”
    “……”
    “선택은 오로지 동무의 몫이에요. 욕망이든 배설이든 난 기딴 거 상관없어요.”
    “!”
    “정말 아무것도 안 느껴지나요?”
    “도저히 못 참겠소. 정황을 통제할 수 있는 내 인내심의 한계는 여기까지요.”
    “곧은박이(고집불통)인 건 좋지만 다른 사람의 호의를 이렇게 무시하면 안 되죠.”
    “동무가 내게서 얻으려는 것이 단지 하룻밤의 쾌락이오?”
    “! 동무는 의심과 불신이 너무 강해요.”
    “그럼 대체 뭐요?”
    “바로 정신적인 위로죠.”
    “동무는 내가 무섭지 않소? 난 동무가 갖고 놀기엔 너무나 위험한 장난감이오.”
    “그건 관점의 차이 아닌가요? 내가 아는 동무는 적어도 어설픈 이상주의자는 아니죠.”
    “나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투로군.”
    “솔직히 난 부조장 동무가 어디를 보고 뭘 생각하는지 모두 알고 있어요. 결코 쉽지 않은 길이죠.”
    “그게 무슨 뜻이오?”
    “드디어 나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소린가요?”
    “엄중히 다시 묻겠소. 방금 동무가 한 말이 무슨 뜻이오?”
    “우린 어둠에 익숙하죠. 하지만 누군가는 눈이 퇴화되기 전에 그 어둠을 몰아내야 해요. 아닌가요?”
    피오기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카람빗을 꺼내들었다. 이미 피오기의 눈은 핏물이 스며들어 잔인한 야수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홍화의 피와 심장을 양식으로 상상하는지 입맛까지 다셨다. 피오기가 카람빗의 예리한 칼날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치 맹금류가 사냥을 하기 전에 깃털을 고르는 의식과도 같았다. 시퍼런 칼날에 쪼개진 날카로운 빛의 입자가 방 여기저기에 파편처럼 튀었다. 그 파편들 중 몇 개가 홍화의 눈을 할퀴었다. 순간 피오기의 입가에 비열하고 잔인하며 얼음처럼 차가운 조소가 흘렀다.
    “정말 놀랍군! 아니, 감탄했소. 하지만 동무는 내 마음을 읽었더라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았어야 했소.”
    “‘대장부는 사리를 따지고, 졸장부는 주먹질을 한다’고 우리 아바지가 그러던데. 지금의 부조장 동무가 그렇군요.”
    “동무, 이제 내가 어떻게 처리해주길 바라오?”
    “굴욕적이군요.”
    “굴욕적!”
    “그래요. 내가 더 손쉬운 방법을 알려줄까요?”
    “!”
    “침대 시트 밑에 장전된 권총이 있어요. 소음기도 달렸고요. 그냥 방아쇠만 살며시 당기면 돼요. 어서요?”
    “으으으.”
    “미시리.”
    “미시리!”
    “그래요. 아마 내가 동무의 적이었다면 부조장 동무는 이미 제거됐을 거예요. 아닌가요?”
    순간 피오기의 입에서 가르랑거리던 약탈자의 울음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흑마법에 걸린 피오기의 카람빗이 허공을 둘로 가르며 사방에 어둠의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카람빗은 빠르게 회전하며 화살처럼 직선으로 날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과녁을 꿰뚫었다. 그런데 곧이어 들려온 건 홍화의 신음소리가 아니라 과녁에 꽂힌 화살처럼 파르르 떠는 진동음이었다. 그 진동음은 공간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두려움 같았다. 분노가 잦아들자 카람빗도 잠에 빠져들 듯 조용히 빛을 거두었다.
    “언제부터 알았소?”
    “처음부터, 더 정확히는 전투원에 뽑힐 때부터죠.”
    “뭐라고?”
    “우리 아바지가 그러셨거든요. 동무의 그 야만적이고 잔인한 성격이 이번 혁명전투의 성공확률을 높인다고. 그리고 부조장 동무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과장도 없다는 말씀도 하셨죠. 1992년 이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양성한 공작원들 중 단연 최고라고 하셨어요.”
    “동무의 아바지가 대체 누구요?”
    “역사적인 이번 혁명전투를 처음부터 계획한 인민무력부의 리명수 상장(남한의 중장).”
    “리명수 상장 동지! 아니, 그게 정말이오?”
    “왜요? 제 뒷배경이 상상 이상으로 화려한가요?”
    “그런데 동무가 어케 여기에?”
    “그러게요. 하지만 이것도 제 운명이겠죠. 용은 구름을 타야 영험하고 호랑이는 바람이 쫓아야 신묘하잖아요.”
    “그 말뜻은 혹시…….”
    “맞아요, 난 동무의 그림자예요. 달리 표현하면 내가 남파된 목적이기도 하고요. 따라서 동무의 적은 바로 내 적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랬군! 역시 상장 동지는 전투준비가 철저하시오.”
    “아직도 나를 분탕질로 평양에 보고할 생각인가요?”
    “흠! 아니오. 내가 보고를 해도 상부에는 닿지 않을 것 같소.”
    “웁!”
    관능적인 홍화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가 유혹무기였다. 홍화는 술기운이 한껏 올라 볼가에 엷은 홍조를 띠었다. 그런 홍화가 대담하게 피오기의 입술을 덮쳤다. 메마른 사막을 흠뻑 적시고도 남는 단비가 쏟아졌다. 처음엔 피오기도 망설였다. 하지만 홍화의 적극성에서 그녀의 행동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읽었다. 그래서 피오기도 생각을 바꿨다. 피오기의 입술을 맛있게 탐닉한 홍화가 포만감을 느꼈는지 잠시 입술을 떼었다. 그리곤 피오기가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거칠게 뜯어버렸다. 홍화는 벌어진 셔츠를 양손으로 잡고 피오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실 나도 참을성이 그렇게 많지가 않아요. 충동이 너무 강하죠.”
    “지금 동무의 눈빛이 어떤지 아오?”
    “어떤데요?”
    “텅 빈 눈빛이 카람빗의 서슬보다 더 시퍼렇소.”
    “! 그래요? 걱정 하나는 덜었네요. 자, 이제 나를 안아줘요.”
    “좋소! 보상이 위험보다 크다면 기꺼이. 하지만 오늘밤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을 것이오.”
    “때늦은 후회는 안 하는 것만 못하죠. 제 마지막이 화려한 불꽃이면 그것으로 만족해요.”
    “동무는 남성 동무들이 난파할 수밖에 없는 서해바다요. 물과 바람, 그리고 암초, 그 모든 것이 뒤섞인 게 바로 동무요.”
    “부조장 동무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들을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