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61> 자아비판

    “……저는 적후에서 혁명의 피로서 맺어진 전투적 동지애를 이색분자처럼 모독했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조장 동무의 정당한 권리까지 침해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공작조직의 단결력과 힘의 원천을 갉아먹는 반동적인 행동입니다. 거기다 실수를 정통으로 찌른 조장 동무의 냉철한 발언을 듣고도 높은 혁명적 열의로 더욱더 분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장 동무를 탓하며 날카롭게 맞서기까지 했습니다. 그 엄청난 과오를 조원 동무들 앞에서 엄중히 자아비판하겠습니다. 또한 조원들의 사상적 통일 및 공통된 지향과 열의는 당과 조국이 우리에게 부여한 혁명과업 완수를 추동(推動)하는 기본동력입니다. 동시에 통일혁명을 촉진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사실도 망각했습니다. 물론 앞으로 우리 공작조직의 혁명성과 공고성을 허무는 그 어떠한 행동도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저 스스로가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장군님과 대장님의 영정 앞에서 굳게 다짐합니다.”
  • “홍화 동무, 동무는 앞으로 어케 해야 된다고 생각하시오?”
    “이 시간 이후로 헝클어진 혁명사상을 다시금 정돈해 부족한 부분을 대담하고 근본적으로 시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의 잘못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고쳐나가겠습니다. 물론 경각성도 더욱 높이겠습니다.”
    “동무가 이번의 과오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무엇이오?”
    “제가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상부의 지시에 대해 옳은 태도를 취해야지 자신과 맞지 않는 미미한 점이나 결함이 있다고 하여 몽땅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큰 깨달음을 준 당과 조국, 그리고 조장 동무와 조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자아비판의 내용이 구체적이고 상세하며 전면적이고 진술에도 일관성이 있었소. 또한 냉철한 자아비판을 통해 앞으로의 사업과 생활에 도움이 될 경험과 교훈도 찾은 걸 확인할 수 있었소. 지난번 일일총화와 오늘의 생활총화를 통해 홍화 동무의 사상검토는 이만하면 충분히 됐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호상비판을 생략하겠소.”
    “고맙습니다, 조장 동무. 과오를 시정할 기회를 주셔서.”
    “그리고 생활총화를 마치기에 앞서 전달사항이 하나 있소.”
    “…….”
    “피오기 동무!”
    “!”
    “동무에게 평양에서 지시사항이 하달됐소.”
    “지령문의 내용이 무엇이오?”
    “현재 진행 중인 서울 도심 지역의 드보크(Devok·간첩장비 비밀매설장소) 설치과업이 종결되면 즉시 귀환하라는 소환령이 떨어졌소.”
    “남조선에서 반제(反帝)혁명투쟁을 벌이는 전투원에게 갑작스런 소환령이라. 크크크, 결국 조장 동무가 원하는 대로 됐군. 아니 그렇소?”
    “피오기 동무, 이번 일은 나도 모르는 일이오.”
    “소환을 입버릇처럼 말하던 동무가 모르는 일이라. 그걸 지금 나에게 믿으라는 것이오?”
    “그렇소.”
    “아니, 부조장 동무 왜 이러십니까?”
    “아니면 내 분노의 총알이 그 진실을 똑똑히 말해주겠지. 아니 그렇소?”
    “이런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소. 그건 누구보다 피오기 동무가 잘 알지 않소. 그보다는 공작조의 부조장으로서 상부의 지령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만 묻겠소. 내게 소환을 지시한 곳이 어디요?”
    “정찰총국은 아니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남은 곳은 국가안전보위부밖에는 없군. 아니오?”
    “맞소.”
    “조장 동무, 아직도 부정할 말이 남았소?”
    “부조장 동무, 권총을 내려놓으십시오.”
    “이건 또 뭔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변수로군. 은혁 동무, 정찰총국의 작전부 소속인 동무가 한통속이 되어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인 조장 동무를 감싸주겠다. 오호라! 난 동무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는데 동무는 그동안 나에게 숨겨둔 감정이 아주 많았나보군.”
    “부조장 동무,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단지 혁명과업 중인 우리 공작조가 적후에서 분파(分派)로 인해 스스로 와해되는 걸 사전에 막으려는 충직성만 있을 뿐입니다.”
    “와해를 막는다? 그 말이 내겐 위험성만을 줄이려는 기회주의자들의 변명처럼 들리는데.”
    “또한 혁명적 열의로 불타는 부조장 동무가 상부의 지령을 거부해 적후에서 즉결사살 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어서 권총을 내려놓으십시오.”
    “안 내려놓으면 동무가 나에게 총탄을 박아 넣을 텐가?”
    “그건…….”
    “이거야 원! 드높던 내 자존심과 영예가 한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던져지는 느낌이군. 그런데 어쩌지, 죽이든 살리든 은혁 동무의 마음대로 해. 난 결코 조장 동무 앞에서 개처럼 바닥을 기지는 않을 테니까.”
    “부조장 동무,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지로서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권총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제가 잘 볼 수 있도록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려주십시오.”
    “오늘따라 곁불질(옆에서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동무의 모습이 안슬프군(안쓰럽군). 그래 좋소! 동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권총은 여기에 놓겠소. 아참! 손도 머리 위로 올리랬지. 하지만 조장 동무, 분명히 알아두시오. 나는 소환령을 따를 수 없소.”
    “동무가 즉결사살을 감수하면서까지 버티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군?”
    “이유라. 첫째로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곳은 국방위원회와 그 산하의 정찰총국뿐이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평양에서 직접 부여받은 중요 과업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마지막 세 번째는 내 과업은 지령을 내린 국가안전보위부보다 분명히 상부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조국과 인민이오.”
    “음, 조국과 인민이 지시했다.”
    “그렇소.”
    “좋소! 사실 나도 의외였소. 그럼 동무의 소환은 적후의 갑작스런 정치상황 변화로 인해 다소 지체된다고 평양에 보고하겠소. 물론 차후에 발생하게 될 후과는 전적으로 동무의 책임이오. 어떻소?”
    “물론 지겠소.”
    “부조장 동무, 이제 손은 내리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은혁 동무.”
    “예, 부조장 동무.”
    “내가 충고 한마디 하겠소. 한 번의 판단은 인생을 성공시키기도 하고 또 망치기도 하지. 나를 원수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섣불리 나서지 마시오. 난 내 앞을 가로막는 건 그것이 무엇이든 다 적으로 보이니까.”
    “!”
    피오기의 말은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말처럼 보복심과 집념이 대단히 강해 적이 되면 반드시 피를 뿌렸다. 그런 피오기가 오늘은 경고성 눈빛을 이용해 지원과 은혁을 향해 노골적인 적의까지 드러냈다. 물론 은혁도 강철처럼 단단한 근육과 돌주먹을 가졌다. 그리고 평소 스스로도 입버릇처럼 “싸우는 게 제일 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은혁조차 피오기의 뜨거운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지 못했다. 그만큼 피오기의 눈빛은 온몸을 얼어붙게 할 만큼 섬뜩했다. 피오기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끌어안고 곧바로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곤 현관문을 향해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한차례 쏟아내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