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9> 상황 반전

    “차장님, 현재 하청업체들이 갖고 있는 1년짜리 어음의 회수기간 재조정은 결재가 났습니까?”
    “아니.”
    “왜요? 문제해결이 더 늦어지면 하청업체 쪽에서 태업이라도 할 분위기던데요.”
    “그러게. 백 전무님은 오늘 몸이 안 좋아 일찍 조퇴를 하셨다는군.”
    “장비 체질인 백 전무님이 말입니까?”
    “응. 그러니까 칭얼대는 하청업체 쪽은 김웅태 과장이 맡아서 하루 더 달래봐.”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어제는 결근, 오늘은 조퇴. 다른 건 몰라도 결근과 조퇴는 백 전무님이 가장 싫어하는 게으름이잖습니까?”
    “가는 세월을 누가 잡을 수 있겠어.”
    그 시각 사무실로 현우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손비아의 피살사건을 담당하는 문 형사였다. 문 형사는 형사 특유의 억양과 발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가 오늘 발견한 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그런 특징이 아니라 그의 강한 집념이었다. 분명 그는 소설 속 허구보다 더 허구적인 상황을 현실로 끌어내 구체화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형사과장님, 디지털 포렌직센터에 CCTV의 화면보정을 의뢰한 건 결과가 나왔습니까?”
    “예.”
    “그럼 오피스텔 외부의 감시카메라에 잡힌 후드셔츠를 입은 용의자의 몽타주도 이미 작성이 됐겠네요.”
    “아직요. 예상과 다른 결과로 인해 현재 수사가 답보상태입니다.”
    “CCTV 선명화 프로그램을 통한 화면보정도 실패한 겁니까?”
    “딱히 그렇다고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게 무슨?”
    “CCTV에 잡힌 용의자가 실리콘가면을 착용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실리콘가면이라면 혹시 할리우드 영화소품 제작사가 특수효과용으로 제작한다는 가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용의자가 쓴 일명 보스가면을 제작사에 문의한 결과 백인이 흑인으로 변장하고, 20대 청년이 80대 노인으로 위장하는 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범행이었다는 의미가 되는 건가요?”
    “그런데 피해자의 주변 조사 결과 채무관계와 이성문제, 직장에서도 특별히 살해당할 만한 원한을 샀던 일은 현재까지 밝혀진 게 없습니다. 그래서 수사력을 총동원해 범행현장의 증거들을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용의자나 범인을 찾을 만한 중대 단서는 전무합니다. 그나마 조사를 진행할수록 사건이 일어난 정황이 우발적이지 않다는 설득력 있는 증거들만 속속 확인되고 있습니다.”
    “설득력 있는 증거라면…….”
    “이번 살해사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방법상의 잔인함입니다. 즉 초범이나 단순 강·절도범의 우발적인 살해일 경우 피해자가 저항의지를 꺾으면 범인은 더 이상의 공격성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행태입니다. 물론 애초 노린 것도 피해자의 현금이나 귀금속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범인은 피살자의 유류품을 고스란히 차 안에 남겨두었습니다. 거기다 사체를 가리거나 다른 곳에 유기(遺棄)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살해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했다는 말씀이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사건은 증거부족, 단서부족, 목격자부재 등 수사에 제동이 걸리는 부분이 유독 많습니다. 마치 범인이 우리 경찰의 수사력을 조롱한 것 같거든요. 이런 용의주도한 일련의 행동들이 가리키는 건 범인이 상습범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번 피살사건은 지능범에 의한 범죄로 추정됩니다.”
    “‘사건 뒤에는 반드시 증거가 남는다’는 수사원칙을 무시했다, 그리고 이치에 닿지 않을 만큼 기괴한 범행현장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교활한 범인의 심리라. 그럼 망상에 사로잡힌 사이코패스(Psychopath)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주변 조사에서 개연성을 높일 만한 사이코패스나 과거 범행방법이 유사한 동종 전과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것 자체가 무형의 유류물이라고도 할 수 있잖습니까. 또한 수사력을 조롱한 심리적인 특징으로 보아 극악한 범행을 자랑하기 위해 단서를 남겼을 가능성도 높고 말입니다.”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기존의 수사방식을 바꿔 범인의 정형화된 범죄수법의 특징을 알아내는 데 모든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저는 범인이 군에서 특수훈련을 받았거나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든 누범자일 가능성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행한 잔인함과 극악한 살인기술의 정교한 결합을 설명할 방법이 없거든요. 범인의 특징과 행태를 분석한 프로파일러도 저와 동일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참! 그런데 혹시 알고 있었습니까?”
    “뭘 말입니까. 형사과장님?”
    “이 회사 백도균 전무가 피살자의 이모부라는 사실.”
    “!”
    “또한 아버지가 유복자라서 친인척도 이모가 유일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모르고 계셨군요. 그럼 전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