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6> 쇠막대


    아침은 하얀 종이처럼 단순하면서도 순수하다. 밤 시간 동안 망각이 일상의 가시를 뽑아준 덕분이다. 하지만 현우는 아직도 그 가시가 완전히 뽑히지 않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히려 가시가 더 굵어져 현우의 의식을 갉아먹고 현실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현우의 표정에서 이상함을 느꼈는지 검문하듯 누군가 막아섰다.
    “저 실례 좀 하겠습니다. 혹시 감사팀의 나현우 팀장님 맞습니까?”
    “아, 예. 제가 나현우입니다. 그런데 누구시죠?”
    “전 서울 OO경찰서의 문정민 형사과장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다름이 아니고 디자인실의 손비아 씨 아시죠?”
    “물론 압니다.”
    “어젯밤 손비아 씨가 자신의 오피스텔 지하주차장에서 누군가에 의해 흉기로 살해됐습니다.”
    “예~에?”
    “그래서 나 팀장님에게 몇 가지 여쭐 내용이 있습니다.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죠. 그런데 그게 정말입니까. 형사님?”
    “그렇습니다. 우선 어제 퇴근 이후 어디에 계셨는지 그것부터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내게시판에 붙어 있습니다.”
    “사내게시판에 붙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제부로 제가 물류팀에서 감사팀으로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그래서 감사팀 동료들과 길 건너 파전집에서 조촐한 회식을 했습니다.”
    “그럼 그 회식에 참석했던 사람은 누구누구입니까?”
    “저까지 총 다섯 명입니다. 홍석우 대리, 천동해 사원.”
    “그럼 나머지 두 명은 누구입니까?”
    “회식 중간에 거기서 만나 동석했던 생산팀의 주상규 대리와 총무과의 권은숙 씨입니다.”
    “혹시 회식 중간에 팀장님 혼자 술자리를 먼저 뜨지는 않았습니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저를 위한 회식자리라서. 아무튼 다섯 명 모두 3차까지 갔습니다.”
    “그럼 술자리가 모두 끝난 시간은 대략 언젭니까?”
    “천동해 사원이 지방에서 올라오신 어머님의 전화를 받은 직후입니다.”
    “그게 정확히 몇 시입니까?”
    “아마 새벽 두시쯤 됐을 겁니다.”
    “새벽 두시라,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최근에 나현우 팀장님이 손비아 씨를 여러 번 찾았다고 하던데.”
    “맞습니다.”
    “혹시 두 분이 사귀는 사이였습니까? 예를 들자면 사내커플 같은 거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게 뭐였더라. 아, 그래! 가먼트백. 그럼 왜 가먼트백을 들고 손비아 씨를 찾으신 겁니까? 적어도 옷은 마음이 없으면 선물하지 않는 물건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휴대전화에 있습니다.”
    “휴대전화요?”
    “예.”
    “이게 그저께 손비아 씨가 제게 보낸 문자메시지입니다. 이것을 보시는 것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그럼 제가 좀……. 흠! 그러니까 손비아 씨가 나 팀장님에게 사랑을 고백했는데 팀장님이 받아주지 않으신 거로군요. 아닙니까?”
    “받아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더 정확히는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럼 혹시 두 사람 사이에 장애물이라도 있었다는 말입니까? 예를 들자면 이미 다른 여자 분을 사랑하고 계신다거나.”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은 비교적 알리바이가 확실하시군요.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웠습니다. 참고 조사가 더 필요할 경우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저, 형사님.”
    “왜 그러시죠. 제게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손비아 씨가 어떻게 살해된 겁니까?”
    “일단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이 결여된 흉악범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참혹한 현장상황이 용의자가 정신병리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도살자임을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럼 단순 강도사건이 아니었다는 말씀인가요?”
    “현장에서 살해도구로 의심되는 물건을 수거했는데 일반 가정에서도 파이프로 사용하는 쇠막대였습니다.”
    “쇠막대요?”
    “예. 차 안에서 발견된 손비아 씨는 턱뼈가 산산조각 나 있었습니다. 코뼈와 두개골도 골절돼 있었습니다. 게다가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폐기흉(肺氣胸)까지 발견됐습니다. 자동차문이 안에서 잠겨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누군가 차량 외부에서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손비아 씨는 부상 정도가 심각해 사건현장에서 바로 숨진 것으로 보입니다.”
    “세상에! 누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잔인한 사건의 경우는 대개 범인이 애정이나 금전 등 원한관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사전에 미리 계획된 의도적인 살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도 가장 먼저 피살자의 이성문제와 채무관계 등 주변을 탐문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팀장님도 찾아뵌 것입니다. 아, 물론 주변의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이코패스의 범행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그럼 오피스텔 지하주차장과 외부에 감시카메라도 없었습니까?”
    “역시 감사팀 팀장님이라 다르시군요. 지하주차장에 설치된 CCTV는 용의주도하게 모두 스프레이페인트를 뿌려 무용지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무인관리실의 방범창살을 뜯고 들어가 저장파일을 없애려고 영상녹화장치에 불까지 질렀습니다. 그나마 오피스텔 외부의 감시카메라에 후드셔츠를 입은 남자가 잡히긴 했는데 평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녹화상태가 좋지 않은가 봅니다.”
    “그렇다면 대검찰청 디지털 포렌직(Digital Forensics·컴퓨터 등에 저장된 문서나 자료를 수집·복구·분석해 법정에 제출할 증거를 확보하는 수사)센터에 영상기록의 복원을 의뢰해보시는 것도…….”
    “이거 뜻밖인데요. 대검의 디지털 포렌직 센터까지 아시다니. 아무튼 CCTV 선명화 프로그램을 통한 화면보정 결과가 나와야지만 저희도 몽타주를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전 이만.”

    형사과장은 충격의 뒤처리를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아침부터 회사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사무실을 들쑤시고 돌아다닌 형사는 그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비포장도로의 흙먼지처럼 뽀얗게 잃어난 회사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직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면 예외 없이 불붙은 성냥통처럼 계속 옮겨가며 루머가 활활 탔다. 그만큼 손비아의 죽음은 의외성이 강했으며 충격적이었다. 현우는 거기에 미안한 감정까지 뒤섞여 몸과 마음이 악몽의 믹서기 같았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은 어쩌면 하늘이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건을 따지는 만남이 아니라면 우연과 뇌가 만들어내는 단순한 전기신호인 마음이 좌우한다. 현우의 마음과 우연은 분명 지원에게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손비아는 가슴앓이를 했다. 더구나 손비아가 들려준 성장과정은 좀처럼 현우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현우는 익숙하지 않은 이별과 그렇게 할 수밖에는 없었던 경계에 서 있었다. 그때 문득 보라색의 라벤더꽃 이미지가 떠올랐다. 라벤더꽃은 비록 생명력이 열흘 남짓하지만 그 향기는 아주 오래간다. 바람처럼 스쳐간 인연이지만 손비아가 그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