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4> 진실게임


    “조은혜, 조국의 은혜로 태어난 아이. 그 조국이 입쌀밥(흰쌀밥)은 고사하고, 오히려 누명까지 씌워 처형했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생명까지…….”

    일란성 쌍둥이인 지원과 지수, 둘의 끝 글자를 합치면 ‘원수(元首)’였다. 즉 충성스런 원수님의 자식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원은 언제부턴가 ‘원수(元首)’가 ‘원수(怨讐)’로 느껴지며 새로운 공포로 자리 잡았다. 이제 거울 속 지원이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변 배경도 뒤틀림을 멈췄다. 하지만 아직 속이 메슥거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지원은 한참이 지나서야 의자 위에서 놀란 고슴도치처럼 동그랗게 말았던 몸을 천천히 폈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던 몸이 어느 정도 풀어지자 황급히 자전거를 타고 도망가듯 화원으로 갔다. 지원이 막 화원에 들어서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 최정원입니다. 지수 씨, 그동안 별일 없으셨죠?”
    “아, 예. 염려해주신 덕분에요. 그런데 주변에 소음이…….”
    “저 지금 공항에 있습니다. 아참! 두 분의 연애사업도 이젠 진도가 꽤 많이 나갔겠는데요?”
    “…….”
    “어쩌면 지수 씨가 가진 마음의 상처와 끔찍한 상실(喪失)을 지우기에는 사랑만큼 좋은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현우는 그런 지수 씨를 지켜주기에 충분한 친구고요.”
    “저도 만나는 순간 그걸 느꼈어요.”
    “제가 비밀이야기 하나 말씀드릴까요.”
    “뭔데요?”
    “전 분명히 보았습니다. 지수 씨의 사진을 보는 순간 현우의 심장에 불이 붙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저도 현우 씨를 만나면 영적 치료를 받는 것 같아요.”
    “그만큼 현우가 편안하다는 말씀인가요?”
    “예, 늦었지만 현우 씨를 소개해주셔서 최 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거, 맨입으로는 곤란합니다. 저도 현우를 아끼고 아끼다 지수 씨니까 두 눈 감고 소개시켜준 겁니다.”
    “!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제가 언제 한번 저녁식사에 정중하게 초대할게요.”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럼 오늘 전화를 드린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왜요, 무슨 일이도 생겼나요?”
    “혹시 주간잡지인 <시사춘추>의 경제부 문상원 기자를 아십니까?”
    “예, 화원에도 몇 번 들른 적이 있어요.”
    “문상원 기자가 어떻게 지수 씨의 소재지를 알아냈다고 하던가요?”
    “과거 오마니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주소도 군부대 강연을 다니던 오마니를 통해서 알게 됐고요.”
    “그랬군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지수 씨가 저희의 특별보호대상이라서 간단하게 주변 인물들에 대한 신원조사를 진행하는 것뿐입니다.”
    “아, 알겠다! 그러니까 문상원 기자가 저희 화원을 찾는 목적이 궁금하신 거군요?”
    “하하하, 맞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게 대답할까요? 아니면 솔직히 말하는 대신 팀장님을 안심시키는 대답을 할까요?”
    “저로선 진실하고 성실한 대답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 좋아요. 그런데 먼저 약속을 해주셔야 해요.”
    “약속이라고요?”
    “예.”
    “무슨 약속 말입니까?”
    “의문을 풀어드릴 테니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절대 비웃지 않는다는 약속 말이에요.”
    “사전절차가 까다로운 것을 보니 내용이 더 궁금한데요. 좋습니다. 무조건 약속하겠습니다.”
    “!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에 문상원 기자가 저희 화원에 찾아온 이유는…….”
    “뭐죠?”
    “칼럼 때문이에요.”
    “칼럼이요?”
    “예, <시사춘추>의 북한 경제와 관련된 칼럼을 제게 부탁했어요. 물론 제가 북한에서 경험한 주민들의 열악한 실생활을 곁들여서 말이에요.”
    “북한 경제와 관련된 칼럼이라. 흠, 제가 모르는 지수 씨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겠는데요.”
    “아마도 잡지사는 제 하찮은 이력보다는 과거 아바지가 외화벌이 일꾼이었던 점을 더 많이 고려했을 거예요.”
    “그럼 허락한 겁니까?”
    “아~니요.”
    “왜죠?”
    “꽃밖에 모르는 제 수준을 알면 곧 실망할 게 빤하잖아요.”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요. 제 생각에도 지수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정말요?”
    “물론입니다.”
    “훗!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한번 해볼까 하는 오만한 마음도 슬그머니 드는데요. 저 웃기죠?”
    “아닙니다. 지수 씨처럼 마음자리가 아름다우면 글도 곱게 나올 겁니다. 아무튼 진실한 대답 정말 고맙습니다.”
    “팀장님도 힘이 되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영화와 소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조작한 허구다. 하지만 백 퍼센트 사실인 현실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영화나 소설 못지않은 허구의 세계다. 즉 감정적이며 이기적인 요소가 우리들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실상도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감정에 수시로 휘두름을 당하는지도 모른다. 지원의 이성도 때때로 그 불안한 감성에게 무릎을 꿇었다. 어느 틈엔가 지원의 도톰한 아기입술이 중국의 강시인형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북극의 눈보라처럼 지원의 의식을 더욱 치밀하게 결빙시켰다.
    “으라차! 히~유!”
    물지게를 진 지원이 발에 맞지 않는 허름한 노동화를 신고 물을 길으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축농장 근처의 물가에 오리가족이 나와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멍한 눈에도 오리가족은 행복한 그림이었다. 그때 누군가 저 멀리서 지원을 불렀다. 지원은 황급히 옆에 벗어놓았던 물지게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관리자가 아니었다. 거적때기만 걸친 그도 가축농장에서 일하는 정치범이었다. 그는 불이 잘 붙는 마른 땔감을 지게에 한 짐 지고 걸어왔다. 지원은 그를 잘 알았다. 언젠가 한번은 그가 지원의 물지게를 몸에 딱 맞게 고쳐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지원은 그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지원아!”
    “아! 오빠.”
    그런데 오빠의 눈빛이 폭풍우를 만난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그 혼란스러움은 전염속도도 엄청 빨랐다. 아니나 다를까 오빠는 지게를 세울 때 버텨 놓는 지게 작대기의 아귀진 쪽으로 어딘가를 힘없이 가리켰다. 오빠가 걸어 내려온 산비탈이었다. 오빠는 얼른 가보라는 말과 함께 측은한 눈빛을 지원의 심장에 꽂았다. 잠시 후, 지원이 마주한 것은 3,300V의 고압전류에 시커멓게 그을린 아바지였다. 그런데 아바지의 품속에서 생활수첩(다이어리)을 뜯어낸 작은 종이가 나왔다. 그리고 그 종이에는 두 줄의 글토막(문장)이 적혀 있었다. 첫째 줄에는 “눈이 많이 내리면 뒤에 부는 바람도 드세다.”라는 삶의 지표였다. 그리고 둘째 줄에도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는 글토막이 적혀 있었다. 당시 지원은 두 번째 글토막이 윤일현의 유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지게에 짐을 싣고 잡아매는 지게꼬리처럼 굳게 다짐했다.
    “나는 이제 인간으로 살지 않을 거야. 인간 윤지원은 3,300V의 고압전기철조망에 타 죽었다고.”

  • 지원은 밤하늘의 달과 별처럼 현우의 마음 한가운데서 반짝거렸다. 그래서 현우는 언제부터인가 밝은 낮보다는 밤을 더 좋아하게 됐다. 더구나 그 밤에는 지원이 만드는 환상이 흘렀다. 사실 현우는 지원과 마주하면 거부할 수 없는 특별한 힘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운명 같았다. 문자조차 없는 지원을 걱정하며 현우가 휴게실 앞을 막 지나칠 때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형 평면TV 앞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20여 년간 지하에서 암약한 간첩조직 제2전선이 우리의 공안 당국에 적발됐습니다. 대변인의 수사결과 발표내용을 들어보겠습니다.]
    [이번에 검거한 제2전선은 충청 지역을 혁명의 전략적 거점으로 삼고, 국가변란을 획책한 지하당 성격의 간첩단입니다. 지하당총책 남운영은 과거 김정일로부터 직접 ‘남조선혁명의 지역지도부를 구축하라’는 접견교시를 하달받았습니다. 그리고 안정적인 활동기반을 위해 A중앙일간지 기자와 환경전문 케이블방송국 엔티비(ENTV)의 대표이사로 재직하는 치밀함까지 보였습니다. 2003년 7월, 남운영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전 간부 서강수·최대식과 함께 대전에서 지하당 제2전선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대전의 기반이 다져지자 활동영역을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북한은 2003년 봄, 남운영의 활발한 대남사업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황금색노력훈장과 훈장증을 수여했습니다. 현재까지 파악된 제2전선의 조직원은 진보성향의 정치인을 비롯해 전·현직 교사와 교수, 판사와 변호사, 종교인, 의료인. 심지어 국가공무원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작가들이 번역과 집필 등 다양한 친북·종북활동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특히 삼림청의 인가를 받은 우리강산해설가협회의 경우 협회장을 비롯한 회원 대부분이 제2전선으로부터 구체적인 행동지시를 받는 하부조직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럼 질문을 받겠습니다.]
    [그럼 지하당의 명칭인 제2전선은 어떤 의미입니까?]
    [‘적의 공격을 좌절시키기 위해서는 방어전과 함께 적후종심(敵後縱深)에 제2전선을 형성하고 배후를 강타해야 한다.’는 내용이 <김일성 비밀교시>에 있습니다. 아마도 노동자들 속에 깊이 파고들어 그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해 남한사회의 혼란을 조성할 목적으로 조직명을 제2전선으로 정한 것 같습니다.]
    [그럼 이번에 검거된 지하당이 과거에 검거된 간첩단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번에 검거된 제2전선은 과거의 지하당과 네 가지 면에서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큰 특징은 조직원을 방송제작진에 침투시켜 유사시 지역방송국을 장악하고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특징은 대부분의 조직원이 자신의 가족을 간첩활동에 적극 가담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특징은 서울경기 지역을 거점화하여 지방으로 확대하던 과거의 공작 패턴과 달리 그 반대 양상을 보였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조직원이 본격적인 테러활동을 개시했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 지난번 외교통상부 장동하 영사의 피살사건도 이들과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까?]
    [그건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그럼 이상으로 수사결과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 현우는 휴게실의 공기가 갑자기 무덥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아니, 하루 종일 잠을 자지 못하도록 서 있게 하는 교도소의 징벌방 같았다. 그래서 서둘러 복도로 빠져나오자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그때 주머니 속의 무언가가 손끝에 감지됐다. 휴대전화였다. 현우는 챔버에 들어서자마자 수신함을 열고 어젯밤 받은 장문의 문자를 소리 없이 읽어 내려갔다.
    [선물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절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저에 대한 감정을 남겨놓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섭섭하네요. 그 옷은 그동안 저에게 베풀어주신 친절에 대한 정말 사심 없는 선물입니다.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그 옷은 동종업체에서 받은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디자인한 옷입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너무 부담스러워 하실까 봐 안 했습니다.]
    “음.”
    [그리고 전 보이는 도도함을 벗겨내면 알맹이는 전체가 소심함이에요. 보이는 것과 달리 그렇게 화려한 생활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이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셔서 정말 힘겹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거든요. 그 과정에서 인척분의 따뜻한 도움도 받았고요. 그래서 제가 일찍 배운 건 포기가 아닌 열정이에요. 물론 한 번 퇴짜를 맞았다고 팀장님과의 사랑을 포기하면 그건 손비아가 아니죠. 아무튼 요즘은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시간이 없네요. 그럼 다음에 시간이 날 때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뵐게요. 괜찮죠? 손비아가.]

    “흠! 흠!”
    “어, 동해 씨.”
    “이거 말을 걸기가 오히려 송구스러운데요. 누가 보낸 애틋한 연서(戀書)인데 사람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십니까?”
    “그런 거 아니야.”
    “에이, 저도 그만한 눈치는 있습니다. 척 보니까 그냥이 아닌데요. 뭘! 그나저나 이거 제 쪽은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는데요. 공동명의자들 누구도 선뜻 입을 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단지 투자였다는 말만 녹음기처럼 되풀이합니다. 어쩌죠?”
    “흠! 백 전무 쪽에서 이미 입단속을 시켰겠지. 하지만 궁지에 몰린 쪽은 오히려 저들이야. 외부에서 강한 압력을 받으면 가장 약한 부분부터 터지는 게 상식이잖아. 분명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미 어딘가에서 실금이 가기 시작했을 거야.”
    “잘 알겠습니다.”
    “쾅!”
    “어, 마침 홍 대리님께서도 오시네요.”
    “하여간 사내에서 내 코를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하다니까. 왠지 들어오고 싶더라니.”
    “마침 잘 왔어. 그래, 홍 대리 쪽은 어땠어?”
    “김세령 씨의 이중적인 행동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계속 넘어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녀의 행적을 역추적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수확이 있었습니다.”
    “홍 대리님의 얼굴표정으로 보아 어째 대박을 터트린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하여간 김세령 씨와 친분이 있던 대전 지역 지점장의 진술에 의하면 평소 그녀의 씀씀이가 아주 컸답니다.”
    “사치가 심했다는 말씀입니까?”
    “응, 대전과 천안은 거리가 가까워 직원들이 사적으로도 매우 친했다는군. 그런데 대전 지역 지점장의 말에 의하면 김세령 씨가 사적인 자리에 나올 때는 명품으로 도배를 했다더군.”
    “김세령 씨의 가정형편은?”
    “인사과에 확인 결과 편모(偏母)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김세령 씨에 대한 목격담입니다.”
    “목격담?”
    “대전 지역 지점장이 가족과 함께 작년 여름 스위스로 여행을 갔었답니다. 그런데 거기에 김세령 씨가 어떤 중년의 남자와 여행을 왔는데, 그 뒷모습이 추 이사님과 매우 흡사했답니다.”
    “그래서 아는 척을 했답니까?”
    “그건 아니야. 옆에 있던 남편의 제지로 서둘러 그 자리를 피했다더군. 그 이후 김세령 씨에게 넌지시 스위스여행에 대해서 물으니까 시치미를 떼더래.”
    “그렇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못한 거네요. 대전 지역 지점장의 착각일 수도 있고요.”
    “홍 대리, 그럼 김세령 씨가 제출한 작년 휴가사용계획서는?”
    “휴가기간 일주일 중 추 이사님의 휴가와 4일이 겹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전 지역 지점장의 진술에 신빙성이 좀 더 실리는군.”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오늘 거하게 축하주 한 잔 내시는 겁니까?”
    “축하주는 오히려 김세령 씨의 행적을 추적한 홍 대리님이 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거 어째 두 분은 아직도 깜깜 무소식인 것 같은데, 맞습니까?”
    “무슨 소식 말입니까?”
    “이래서 마음의 벽이 더 무서운 법이라니까. 방금 전 사내게시판에 긴급공지가 붙었습니다.”
    “긴급공지요?”
    “그래, 그런 건 막내인 네가 좀 챙겨라.”
    “히~, 죄송합니다. 그런데 긴급공지라면 혹시 또 인사발령입니까?”
    “그러니까 축하할 일도 생기는 거겠지.”
    “그럼, 팀장님이 승진하신 겁니까?”
    “아니.”
    “예! 그게 무슨……. 승진도 아닌데 무슨 축하주를 사라는 겁니까?”
    “하지만 너와 나에겐 승진보다 더 좋은 소식이다. 감사팀으로 팀장님의 원상복귀 명령이 떨어졌거든.”
    “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오늘부터 팀장님은 물류팀 소속이 아닌 거네요?”
    “그렇다니까. 왜 내 말이 안 믿겨져?”
    “솔직히요. 물류팀으로 인사발령 난 게 얼마 되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런데 다시 인사발령이 난다는 건 좀.”
    “네 말대로 본사의 인사정책이 원칙이 없어 보이는 대목이긴 하지.”
    “홍 대리, 그래 인사발령 최종 승인자는?”
    “그게 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백 전무님입니다.”
    “예~에?”
    “뜻밖인데요. 추 이사님이 아니고요?”
    “응.”
    “백 전무님이 왜 스스로 폭탄을 끌어안겠다는 거죠?”
    “그러게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악의적으로 자폭(自爆)을 염두에 둔 건 아닐까요?”
    “그 속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팀장님.”
    “저도요.”
    “고마워. 오늘은 내가 간만에 화끈하게 쏠게.”
    “동해야, 너도 들었지?”
    “당근이죠. 그럼 오늘 술자리는 팀장님이 휘두를 사인검(四寅劍)에 대한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는 거네요.”
    “사인검? 요사스런 귀신을 물리친다는 그 신비로운 조선의 명검?”
    “예, 맞아요. 홍 대리님.”
    “하긴 사인검은 몰라도 고사(告祀)가 필요하긴 하지. 행운이 찾아오도록 신령에게 빌어야 앞으로 다시는 이번처럼 황당한 인사발령을 안 당하지.”
    “그럼 오늘 마실 술은 결정이 된 건가요?”
    “!”
    “고사를 지내야 하니까 하얀 막걸리로 말입니다. 캬~! 벌써 단맛이 혀끝에 녹아드네.”
    “그래, 그게 딱이다. 오늘은 길 건너 두툼한 해물파전으로 베고 덮고 누워보자.”
    “홍 대리님, 그건 노숙입니다.”
    “뭐?”
    “푸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