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2
  • <53> 마지막 동행

     
    “은혁 동무.”
    “아, 예. 부조장 동무.”
    “동무가 부여받은 과업은 어케 되었소?”
    “마재성 회사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다목적 한국형 능동방어 시스템(KAPS) 관련 자료와 5년 단위로 군의 전력증강계획을 담은 <국방중기계획서> 및 장기적인 군사력 건설목표인 <합동전략기획서>, 그리고 제가 나름대로 파악한 전자전 공격에 대비한 남조선 정부부처와 금융기관의 대응매뉴얼, 또한 남조선의 국가안보망과 군통신망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킬 수 있는 취약점 등 그동안 수집한 중요 자료 일체를 프록시(Proxy) 서버로 우회해 이미 중국 심양으로 전송했습니다.”
    “중국 심양으로?”
    “그렇습니다. 그곳에도 통일전선부 산하의 전자전 지도국(사이버전 부대)이 있습니다.”
    “아니 왜 정찰총국 예하 121국으로 직접 전송하지 않았소?”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위험성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습니다.”
    “부득이한 선택?”
    “그렇습니다. 이미 몇 차례의 디도스공격으로 체신성이 보유한 중국 내 콤피터(컴퓨터)망은 대부분 남조선 정보 당국에 노출됐습니다. 때문에 이번 통신에서는 평양으로의 직접 전송방식이 아닌 우회 전송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계속해 보시오.”
    “때문에 만약 남조선 정보 당국이 우리가 서버에 심어놓은 암호화코드의 소스를 분석하더라도 전자전 지도국에 대한 관련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왜요?”
    “전자전 지도국이 중국의 합법적인 온라인 쇼핑몰업체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공화국의 정보전사(해커)는 영재 중의 영재라고 하더니 판단이 좋소. 수고했소.”

    그 시각 지원은 화원에 나가기 위해 거울 앞에 있었다. 거울은 자기 내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비밀통로다. 하지만 오늘 지원은 너무 깊게 들어갔는지 공포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처음에는 현우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악령의 주술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지원이 낮게 읊조린 독백이 악령을 깨운 것처럼 보였다. 악령의 주술은 강한 힘으로 지원의 의식을 바위처럼 짓눌렀다. 그리고 원시적인 불로 지원의 원죄를 태워 정화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분명 의식은 있었다. 하지만 그 의식을 통제할 권한과 능력이 지원의 몸 안에는 없었다. 지원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사고체계가 뜯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으으으.”
    “분주소장 동지, 인원점검이 인차(이제) 모두 끝난 것 같습니다.”
    “내부지도원 동무, 고성기(확성기).”
    “아, 예. 여기 있습니다, 분주소장 동지.”
    “흠! 동무들! 모두 조용히 하고 내 말 똑똑히 듣기오. 오늘 여기 이 자리는 계급적 원수를 처단하는 심판장이오.”
    “계급적 원수!”
    “조용!”
    “…….”
    “여기 이 간나의 가슴은 바로 반동의 소굴이었소.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이것들이 바로 그 증거요. 이건 남조선의 종파분자들이 공화국 인민들을 선동할 목적으로 날려 보낸 불온선전물이오. 그런데 이 종이돈과 휴대용 라지오(라디오)를 이 간나의 인민소비품 속에서 찾아냈소. 숨어서 이남방송을 몰래 듣고 동무들에게 나쁜 사상을 전파하려 했던 것이오. 또한 이 반역자는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를 남잡이(해코지)하기 위해 걸고드는(시비걸다) 영상물까지 숨기고 있었소.”
    “이거 은혜 동무에게 된벼락(호된 타격)이 떨어지겠군.”
    “동무들!”
    “예!”
    “사상투쟁회의 때 보위원들로부터 이런 불온선전물을 발견하면 어케 하라고 교육받았소?”
    “불온선전물을 발견하면 곧바로 분주소에 신고해야 합니다.”
    “그럼 이런 불온선전물을 발견하고 신고도 않고 제멋대로 손을 대면?”
    “남조선이 보낸 물건에는 독이 묻어 있어 손이 썩는다고 했습니다.”
    “좋소! 음식물을 먹으면?”
    “내장이 썩어 문드러집니다. 먹자마자 바로 죽는 것이 아니라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서서히 말라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소!”
    “아닙니다, 분주소장 선생님. 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 돼지가 감히 어디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목대줄(목에 있는 큰 핏줄)을 세워.”
    “퍽! 퍽! 퍽!”
    “헉! 윽!”
    “이 돼지, 왜 이리 말이 많아. 말이 많은 걸 보니 반동이 확실하구만. 너 이남방송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어. 당과 수령을 헐뜯고 체제와 인민을 배반할 음모를 꾸몄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듣기는 들었다는 소리군.”
    “그렇지 않습니다. 전 보지도 못했습니다.”
    “뭐가 아니야, 이 돼지야!”
    “으으으, 정말 모릅니다.”

    지원이 다음날의 일과를 모르고 사는 생활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정치범수용소 안의 형편은 더욱 나빠져 요즘은 강냉이밥이 아닌 죽이 나왔다. 그것도 하루에 강냉이죽 한 끼가 전부였다. 그런데 식사가 끝나자 오후 2시에 사형장에 모이라는 총감독의 갑작스런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 지원은 내일 두거지(논 사이의 뙈기밭)에 주기 위해 대한적십자사 표시가 선명한 요소비료를 손수레로 옮기던 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분주소에 거대한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아니, 현수막이…….”
    지원은 수용소에 와서 이미 현수막을 여러 차례 봤다. 현수막이 내걸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사형을 집행했다. 현수막은 사형집행을 알리는 안내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원은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원은 오마니와 지수가 남한으로 도주했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공포가 혈액 속으로 빠르게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은혜는 아주 가끔 분주소의 보위원이 부르면 저녁 점검시간을 끝내고도 나갔다. 그리고 모두가 잠들었을 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숨어들었다. 어제도 지원은 은혜가 분주소에 간 줄로 알았다. 그래서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잠을 청했다. 그런데 은혜가 오늘 매를 흠씬 두들겨 맞고 절반쯤 초죽음이 되어 이렇게 나타났다.

    “모른다! 그럼 그 물건들이 발이라도 달렸단 말인가? 아니면 남조선 반동들이 몰래 돼지에게 주고 갔다는 말인가?”
    “그건 저도 잘…….”
    “편히 죽게 은혜를 베풀 수도 없는 독종 같은 년.”
    “살려주십시오, 분주소장 선생님.”
    “동무들! 어케 하면 좋겠소. 동무들이 한번 반동적 간첩행위를 한 이 배신자를 심판해보시오.”
    “분주소장 선생님, 인민을 모욕한 저 반혁명종파분자에게 주저 없이 혁명의 준엄한 심판(처형)을 내려야 합니다.”
    “젊은 동무가 아주 사상이 투철하고 냉철한 판단을 하는구만. 동무의 이름이 뭐요?”
    “건설분조의 김철준입니다.”
    “흠, 김철준이라. 동무는 내일부터 양어장관리를 맡으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분주소장 선생님. 제가 가진 혁명적 열의와 창조적 재능을 높이 발양시켜 우리식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앞장을 서겠습니다.”
    “지켜보겠소. 그럼 이 돼지에게 어떤 종류의 처벌이 합당하겠소?”
    “혁명적 의리를 배반한 반당·반혁명분자에게 교수형은 사치입니다.”
    “그럼?”
    “공개총살형이 마땅합니다.”
    “옳소!”
    “아닙니다. 인민들을 수치스럽게 한 계급적 원수는 단매로 머리통을 짓부수어야 합니다.”
    “그것도 옳소!”
    “아닙니다. 역적죄는 돌탕(돌로 때려죽이기)을 쳐야 합니다.”
    “아닙니다. 그 종파분자는 지상낙원인 공화국을 배반하고 신념을 팔아먹었으며 인민의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당연히 군견들의 먹이로 던져주어야 합니다.”
    “혁명적 경각성을 높이는 아주 훌륭한 생각이오!”
  • 정치범수용소의 가을과 겨울은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만 잊으면 그런대로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봄과 여름에는 그악하게 버텨도 내일의 목숨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래서 정치범들은 틈만 나면 산과 들로 먹을 수 있는 풀과 나무껍질을 찾아 나선다. 그중 소화가 잘되는 도토리나무 이파리는 정치범들이 가장 좋아하는 먹을거리다. 그런데 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세게 부는 날이면 가끔 남한의 선전물이 수용소 내에 떨어지곤 했다. 물론 지원도 언젠가 도토리나무 이파리를 주우러 갔다가 그런 선전물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손을 대지는 않았다. 곧바로 경비대원 둘이 득달같이 달려왔기 때문이다.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던데, 동무는?”
    “난 떼놈들 것보다 맛이 훨씬 더 좋더라고.”
    “맞아. 우리 다음에도 다른 대원들에게 까밝히지(까발리지) 말고 이번처럼 나눠먹자고.”
    “크크크, 알았어.”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분주소 복도를 지날 때였다. 분명 남자위생실 안에서 경비대원들끼리 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새 나왔다. 지원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챘다. 하지만 못들은 척 그냥 지나쳤다. 사실 지원은 아바지를 통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발설한 적은 없었다. 그건 아바지와의 약속이었다. 물론 대부분의 정치범은 모략이 두려워 대북선전물을 발견해도 감히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주의사항을 지원에게 알려준 사람이 바로 은혜였다. 그런 은혜가 선전물을 숨겨두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집단생활을 하는 풍막에서 휴대용 라지오를 듣는다는 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돼지는 인민들에게 자본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퍼트리는 독초라는 사실이 증명됐소. 이 돼지의 첫 번째 죄목은 가장 반동적이고 반인민적인 극악한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오. 그리고 두 번째는 외부의 물품을 갖고 있거나 감추어 둘 수 없다는 관리소 내부규정과 법을 어긴 것이오. 더구나 남조선의 불온선전물을 숨긴죄(은닉죄)는 너무 크오. 또한 성실한 실천노동과 규율로 스스로를 단련시켜 지난날의 과오를 씻으려는 속죄의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소. 오히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절대적이어야 할 관리자에게 불복종하기까지 했소.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우리식 사회주의에 대한 제도비난과 탈북기도요.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로는 가장 큰 죄라 할 수 있는 반공화국음모요. 아니 그렇소, 동무들?”
    “맞습니다, 분주소장 선생님.”
    “혹시라도 내 판단에 이의가 있는 동무는 지금 앞으로 나서시오?”
    “없습니다!”
    “그럼 좋소! 동무들의 단호하고 견결한(굳센) 의지를 모아 반역자에 대한 최종 심판을 내리겠소. 계급로선을 탈선한 이 반역자는 일치가결원칙(만장일치)에 의해 총살형이오.”
    “!”
    “와! 와! 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만세!”

    악마의 심판은 그렇게 끝났다. 최후변론조차 허락하지 않은 완전히 불공평한 재판이었다. 구역에서 조직적으로 동원된 배심원들마저 한 사람처럼 완벽했다. 지원은 억이(기가) 막혔다. 그때 괴기스러운 군중들 틈에서 지원의 암울한 절망감으로 한줄기 빛이 떨어졌다. 보위과장이었다. 하지만 보위과장도 속 시원히 대답을 못했다. 그저 좌우로 고개만 힘없이 흔들 뿐이었다. 이제 하늘도 손끝을 대면 금방 툭 터질 것처럼 슬픔이 그렁그렁했다.
    “동무들! 이제 이동!”
    마침내 정치부부장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정치부부장이 곧장 향한 곳은 수용소에서 500m 정도 떨어진 산골짜기였다. 일명 ‘꽃동산’이었다. 꽃동산은 비명에 죽은 여자정치범들의 시체를 관도 없이 그냥 버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쥐들은 부패한 시신을 파먹었다. 그 억울한 원혼 때문인지 맑은 날에도 자주 희뿌연 안개가 꼈다. 은혜는 온몸이 밧줄로 묶이고 발에는 족쇄까지 채워진 상태였다. 인민경비대원이 AK-47자동보총(소총)으로 무장하고 은혜를 끌고 갔다. 평소 순아(純雅)한 모습의 은혜가 온몸이 퉁퉁 붓고 숯처럼 까맣게 얼굴색이 변해 있었다. 거기다 등은 새우처럼 굽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왜죽바리(절음발이)처럼 걸었다.

    “은혜야, 이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반당·반혁명분자야?”
    “나도 몰라. 하긴 지금까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단 한 번도 안 적이 없다.”
    “그럼 네 인민소비품에서 나왔다는 남조선의 불온선전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지원아, 내가 아는 건 오직 하나뿐이야.”
    “그게 뭔데?”
    “난 본 적도 만진 적도 없는 물건들이라는 거.”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나는 네가 그렇지 않다는 걸 믿어.”
    “하긴 너만큼은 믿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린 딱친구잖아.”
    “그래, 은혜야. 우린 딱친구야.”
    “그런데 지원아.”
    “응, 왜?”
    “우리 가족이야기 중에서 너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게 있어.”
    “알아.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하지만 그건 네가 솔직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 너가 정말 그렇게 믿었던 거야. 그러니까 변명하지 않아도 돼. 세상에 자신의 믿음을 변명하는 사람은 없잖아. 안 그래?”
    “그랬구나. 너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
    “비록 짐승처럼 살지만 우리도 사람이잖아.”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그래, 언젠가 우리 아바지가 그랬어. 희망이 있으면 사람이고 없으면 짐승이라고.”
    “생각난다. 네가 그랬지.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이겨내려면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내가 보기에 너의 희망은 어딘가에 가족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이었어.”
    “정말 그랬던 것 같다. 그 희망의 불꽃이 고통의 나날을 하루하루 버티게 해줬거든.”
    “은혜야, 생각나니? 우리가 함께 한 아름다운 시간들. 봄에는 호미로 달래를 캐고, 드릅(두릅)철에는 드릅을 따고.”
    “모두 기억해. 그런데 너와 함께 뽕잎계획량을 제일 먼저 초과달성하고 상으로 받은 강냉이국수가 제일 기억에 남아. 정말 맛있었는데.”
    “나도 먹어본 음식 중에 그게 제일 맛있었어.”
    “이젠 다시 먹을 수 없겠지?”
    “아마도.”
    “그런데 지원아. 내가 이렇게 죽어야 할 만큼 무슨 큰 죄를 지은 걸까?”
    “그러게.”
    “살기 위해 돌멩이 빼고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다 먹어봤잖아. 심지어 흙까지.”
    “그래도 매일 굶어죽은 시체가 담가(들것)에 실려 나가잖아. 그런데 은혜야. 너 혹시 분주소에서 무슨 일 있었니?”
    “얼마 전에 분주소의 확인원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은 달거리아픔(생리통)이 너무 심하다고 했어. 양도 많고. 그래서 달거리용으로 숨겨둔 천조각이 있는데 조금 나눠 줄까 하고 묻더라고. 바지에 피를 묻히고 다니면 관리자들이 싫어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어?”
    “나는 몇 달간 달거리가 끊겨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 게 전부야.”
    “몇 달이나?”
    “아마 한 다섯 달쯤 됐을 거야.”
    “주위에 다른 사람은 없었어?”
    “없었어. 나와 확인원뿐이었어.”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리고는 다음 날 점심때인가. 담화실로 통계원 부반장이 불러서 갔었어. 인민경비대원 한 명이 심하게 다쳐 피가 모자란다고 하면서 혈액형이 맞나 피뽑기(채혈)를 했어.”
    “피뽑기?”
    “하지만 경비대원이 죽었는지 더 이상 피뽑기도 안 했어.”

    은혜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지원은 그가 누구인지 대충 어방치기(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늦은 밤 가끔씩 은혜를 불러내던 보위원이었다. 소좌 소재철은 생감 등때기처럼 매우 뻔뻔스럽고 염치없게 생겼다. 그 느낌 그대로 은혜를 지켜주어야 할 지금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은혜는 순아한 품성과 호수처럼 잔잔한 눈동자를 지닌 소녀였다. 은혜는 며칠에 한 번씩 순번제로 분주소의 청소담당을 일 년 넘게 했다. 따라서 부화를 당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때 척근하게(늘어지다) 처진 두 어깨로 힘겹게 걷던 은혜가 그만 돌부리에 걸채여(무엇에 발이 걸리며 채이다) 앞으로 나뒹굴었다.

    “야! 이 돼지 좀 봐라. 몸은 여볐지만 가슴은 제법 뽀동뽀동한데.”
    “내가 마지막으로 젖싸개라도 하나 선물할까? 크크크.”
    “동무, 돼지가 젖싸개 하는 것 봤소?”
    “하긴 젖싸개를 하면 그건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지.”

    지원이 뛰어들어 황급히 은혜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그런데 그때 지원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은혜의 가슴 한가운데서 수줍게 머리를 쳐든 작은 돌기에 말간 이슬방울이 영롱하게 맺혀 있었다. 임신한 다른 정치범에게서 본 적 있는 초유(初乳)였다. 단지 은혜는 입쓰리(입덧)가 없어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이제 지원은 진실이 똑똑히 보였다. 은혜의 임신으로 부화가 들통 날 것을 두려워한 소재철이 간교한 누명을 씌운 것이다. 그런데 그때 화력군관이 나타나 걸음이 느리다며 지원을 정치범들 쪽으로 거칠게 떠밀었다. 지원은 힘없이 나뒹굴었다. 그리고 힘줄을 세워 한껏 고아대며(고함지르며) 은혜의 신다리(넓적다리)와 배를 군홧발로 마구 칼탕질(칼로 여러 번 내리찍어서 잘게 토막 치거나 다지거나 하는 일)했다. 결국 은혜의 몸은 피범벅이 됐다. 하지만 은혜는 이제 자신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없음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종파 새끼년. 더 죽탕을 쳐야 일어날래? 아님, 여기서 머리에 총알을 박아줄까?”
    “으으으.”
    “날래(어서 빨리) 일어나지 못 하갔어. 돼지가 어디서 엄살이야!”
    “예, 으으으. 일어날게요.”
    “야, 거기 에미나이. 이 종파 새끼년 좀 일으켜 세우라.”
    “예, 선생님.”
    “거기, 누구 천조각 가진 동무래 없소. 이거 군화가 완전 피떡이 됐구만. 젠장할!”
    “윽!”
    “은혜야, 일없니(괜찮니)?”
    “난 일없어.”
    “나한테 기대. 너무 많은 피를 흘렸어. 걸을 수는 있겠어?”
    “지원아, 울지 마. 너까지 의심받을 수 있어.”
    “그래, 그래. 안 울게.”
    “산발(산줄기)에서 불어오는 나실나실한 바람만 스쳐도 치가 떨리니까 오히려 배고픔을 못 느껴서 좋다. ! 그런데 지원아?”
    “응.”
    “오늘부터는 너 혼자 자야겠다. 지원이는 새벽에 누가 이불을 덮어주어야 하는데.”
    “은혜야, 네가 깊은 밤 별빛으로 내게 오면 되잖아.”
    “정말 그럴까?”
    “응.”
    “지원아, 내가 생각날 때면 여기에 놀러올 거지?”
    “그럼, 네가 외롭지 않도록 자주자주 놀러올게.”
    “고마워. 하지만 너무 자주 오지는 마. 작업반장이나 분조장의 눈에 띄면 또 흡뜰지도 몰라. 그러니까 탈곡장 근처의 밭뜰에서 김매기사업을 할 때 허리를 펴면서 한 번씩만 봐줘. 가축농장의 여물통 옆도 괜찮겠다. 알았지?”
    “아니,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바로 달려올 거야.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도 빠짐없이 들려줄게.”
    “얼마 살지는 않았지만 사는 동안 참 외롭고 그립고 가슴 아픈 시간이었어. 그나마 네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고마워”
    “나도 그래.”
    “이악스럽게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질은 왜 쳤는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희망이 내 손은 놓았지만 네 손은 꼭 잡아주었으면 좋겠다.”
    “…….”
    “아! 이제 그리운 사람들을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겠구나.”

    때론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고 섬뜩하다. 그런 현실에 삶의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빨리 자란다. 지원과 은혜도 인생의 키는 분명 어른만큼 자라 있었다. 계곡 사이로 표지봉 하나 없이 수풀만 무성하게 자란 처형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간 지원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은혜는 살눈썹(속눈썹)을 내리깔고 볼웃음을 말끔히 지운 채 주변을 다시금 찬찬히 여살폈다(눈 여겨서 살펴보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자 하늘에서 제대로 영근 빗방울이 떨어졌다. 지원은 얼른 비에 젖어 흘러내린 은혜의 하다분한(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그러자 은혜가 담담하게 빗속을 걸어갔다.

    “은혜야.”
    “…….”
    그사이 주변 환경이 빠르게 죽음의 그림자로 덧칠해졌다. 그리고 피에 굶주린 다섯 명의 경비대원들이 나타났다. 화력군관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경비대원들이 서둘러 AK-47자동보총의 탄창부터 확인했다. 그때 화력군관이 눈짓으로 구체적인 표적을 가리켰다. 그 가벼운 눈짓 하나만으로 은혜는 피에 굶주린 들개무리에 홀로 던져졌다.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무리에서 커다란 검은 수컷 두 마리가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였다. 지원과 은혜, 두 사람의 동행은 여기가 그 끝이었다. 그런데 은혜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무심하던 눈빛이 지금은 간절하게 변해 있었다.
    “지원아, 지금 생각났는데 어쩌면 희망은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까?”
    “!”
    “이 돼지가 지금 뭐라는 거라! 날래 못가갔어!”

    미리 세워놓은 처형장의 나무기둥에 묶인 뒤에야 은혜를 멸시하고 고통스럽게 하던 족쇄가 비로소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그 대신 눈이 가려지고 재갈이 물렸다. 이제 현실의 고통은 내려지고 혹독한 탄압과 감시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감옥이 사라지고 자유가 날아든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은혜의 얼굴에도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처럼 편안한 빛이 모였다. 빛은 파도처럼 물결을 만들어 얼굴가장자리로 퍼져나갔다. 곧이어 은혜는 살눈썹을 파르르 떨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세상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고 저주를 퍼붓는 것인지 아니면 편안한 죽음과 다음 생의 행복을 바라는 간절한 바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경비대 동무들! 모두 전투준비!”
    “철컥! 철컥!”
    “와! 와! 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 만세!”

    이내 화력군관이 권총을 추켜들고 고아대기 시작했다. 화력군관이 핏대를 올릴 때마다 정치범들의 광기어린 구호도 성난 파도처럼 거칠게 일었다. 지원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고, 호흡은 숨이 막혀 질식상태에 빠진 것 같았다. 그래도 지원은 화력군관의 마지막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죽음이 은혜에게 내려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원의 귓가를 울리는 화력군관의 연설은 손톱을 칼처럼 이용해 심장을 긁는 것처럼 잔인했다. 마침내 동정심과 배려심을 찾을 수 없는 화력군관의 연설도 그 끝을 보였다. 순간 악령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불길함이 지원을 덮쳤다.

    “이제 반당·반혁명분자이며 역적행위를 한 조은혜를 총살하겠소. 동무들! 겨눔(조준)! 반당·반혁명분자를 향해 복수탄(復讐彈·원수를 갚기 위하여 쏘는 탄알)을 점발로 쏴!”
    “탕! 탕! 탕! 탕! 탕! 탕!……탕! 탕! 탕!”
    “!”
    지루하게 이어지던 연설과 달리 공개처형은 한 걸음 쉬어감도 없이 그야말로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재빠름과 민첩함이 피에 굶주린 들개들의 본능 같았다. 무서운 굉음과 함께 수십 발의 총알이 은혜를 향해 우박처럼 쏟아졌다. 총알은 은혜의 심장을 뜯어먹는 붉은 메뚜기 떼 같았다. 얼마나 많은 총알을 퍼부었는지 눈과 목구멍이 연기로 매웠다. 총알이 한 발 한 발 은혜의 몸을 관통할 때마다 나무기둥이 파이고 날리며 고통의 파편처럼 튀었다. 결국 마른 짚단처럼 한 차례 허공에 떠올랐던 은혜의 몸은 제자리로 돌아올 사이도 없이 벌집이 됐다. 머리가 터지고, 팔과 다리가 떨어지고, 의식이 바람처럼 흩어지고, 차별과 멸시마저 사방으로 날아갔다. 마지막엔 몸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소용돌이를 치며 허공으로 솟구쳐 대지의 여신에게 바치듯 비로 내렸다.
    “아!”
    지원은 악몽으로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푹 숙이고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정말 아무 느낌도 없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지원은 은혜의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방법을 다시 배웠다. 이제 산골짜기에 퍼붓는 빗줄기가 지원과 은혜를 완전히 갈라놓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아직도 삶의 세상에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죽음의 세상에 존재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건 오로지 침묵의 진혼곡뿐이었다.

    “비극은 순수함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잊는 것이라고 생각해. 은혜야, 나는 너와 이 비극의 동산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심장이 터져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이 애끓는 느낌까지도, 절대로…….”
    “동무들! 자, 이제 작업반장과 분조장의 지휘 아래 다시 분조별로 지정된 작업장으로 가 오늘도 증산사업에 박차를 가하시오.”
    “와! 와! 와!”

    은혜의 짧은 생애는 체제와 폭정에 철저히 유린당한 채 파괴됐다. 그래서 마음 둘 곳 없던 은혜는 지원에게 더욱 기대고 의지했다. 그건 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제 지원은 그나마 유지되던 영혼의 형태마저도 완전히 깨지고 흩어져 산산조각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총살하는 것을 하도 많이 봐서 그런지 경비대원들과 정치범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리지어 산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딱친구 은혜야~!”
    홀로 남겨진 지원은 만신창이가 된 의식으로 은혜가 끌려간 길을 다시금 줄뒤짐(무엇을 찾기 위하여 하나하나 차례로 속속들이 뒤지는 일)하며 나갔다. 발이 눈밭에 빠진 것처럼 무거웠지만 빗줄기가 은혜의 흔적들을 파먹어 지금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 은혜야, 깨우지 않을게. 이제 고단했던 너의 역할극은 끝났어. 그러니까 오랜만에 푹 자.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꿈도 마음껏 꾸고. 나는 언제나 네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을게. 그러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마.”
    은혜는 오늘 하루가 몹시 고단했는지 지원의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곤한 잠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나무기둥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지원도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물레걸음(뒷걸음질)으로 물러났다. 은혜와 함께 차디찬 공간에 아픔과 상처를 남겨둔 채 이제 지원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은혜야, 내가 희망이 꼭 있다는 걸 보여줄게.”

    지원은 아바지와 은혜를 위해서라도 이악하게 견뎌야 한다고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현실은 채눈종이(모눈종이) 한 칸을 통해 보는 것처럼 좁고 답답했다. 그래서 수시로 인간의 교활함과 마주할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오목샘 주위로 살포시 번지던 은혜의 볼웃음을 떠올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좌절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다시금 삶에 대한 집착과 의지가 새싹처럼 솟았다. 하지만 지원은 자신이 커다랗고 순수한 눈을 가졌어도 몸은 괴물인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미노타우르스(Minotaurs)가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