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9> 피살사건


    “난 음식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함께 먹으면 우정과 유대감도 깊어지죠.”
    “그건 심장이 혼(魂)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마시는 청주(淸酒)도 외세로부터 쌀을 지키지 못했다면 맛볼 수 없는 귀한 것이고 말입니다.”
    “회장, 내 개인적인 비밀이야기 하나 할까요?”
    “경청하겠습니다.”
    “사실 나는 어린아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왠지 귀찮고 성가시거든요. 하지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아이를 안고 뽀뽀해야 합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정치는 그랬습니다. 여우만큼 교활하고 늑대만큼 무자비합니다.”
    “전 평소 ‘정치는 순응이고 순응은 생활이다’는 소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 말은 ‘정치는 생활이다’라는 민주당의 슬로건과 정확히 일치하는군요.”
    “어느 면에서 인간의 역사는 정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맞아요.”
    “그만큼 인간의 행동은 정치적입니다. 따라서 정치의 속성인 교활함이나 무자비함도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또 다른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정치가 무섭지는 않습니까?”
    “무섭다, 글쎄요. 오히려 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흠! 결국 자신의 극단적인 사고가 한낱 출세를 위한 도구라고 자인(自認)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정치는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차별과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은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겁니다. 따라서 한순간의 실수가 곧바로 치명적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진짜 인생의 길은 죽음의 입을 통해 듣는다고. 죽음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해가 지기 전에 결코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답니다. 전 단지 신(神)의 제국을 위한 인간탄환이 돼서 돌아가려는 것뿐입니다.”
    “그럼 회장이 가고자 하는 정치의 끝은 어디입니까?”
    “일왕 중심의 제국주의로 재무장한 민족주의입니다.”
    “허허허, 오늘 내 귀가 호강하는 날이군요.”
    “고대 이집트에선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은 죽음을 상징했답니다. 우리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벌써 70년 가까이나 먹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동안 먹은 썩은 고기로 인해 우리 몸이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늙고 쇠약한 수사자를 초원에서 축출하고 권좌를 차지해야 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건 무모한 도전이 아닌 용기이며 명예입니다.”
    “내가 생각을 고쳐 이 자리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그럼 혹시 회장이 믿는 신과 내가 믿는 신이 서로 다르지는 않습니까?”
    “의원님, 그게 무슨……?”
    “회장 스스로가 대일본제국과 텐노헤이카(일왕)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냐는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과대망상적인 국가철학을 담아낼 그릇이 못됩니다.”
    “그건 사사로운 아욕(我欲)이 없다는 뜻이군요.”
    “세상과 역사를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텐노헤이카뿐입니다. 제 운명은 단지 황국신민으로서 충의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장은 살인을 몹시 즐긴다고 하던데 그것도 오로지 살인 그 자체를 위해서…….”
    “어디나 못난 사람들은 위험을 만나면 문제해결이 아닌 자기 변명거리부터 찾습니다. 그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푸하하하! 무례했다면 용서하시오. 역시 본부장님의 절대적인 신뢰엔 충분한 이유가 있었군요. 생각과 행동이 아주 구체적이고 선명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난 이제 네마와시(뿌리를 옮긴다)를 준비해야겠군요. 그것도 꽃이 아름답게 피는 사쿠라(벚나무)로. 그런데 나무를 옮겨심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하는 작업이 뭔 줄 압니까?”
    “뿌리의 일부를 미리 잘라주는 작업입니다.”
    “맞아요. 그래야 잔뿌리가 많이 나거든. 하하하!”

    호텔 탤런트(Talent)의 20층은 바(Bar)가 갖춰진 VIP전용 클럽라운지와 식당공간이었다. 그중 일식당은 홀 안쪽이 독립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금 그 별실 중 하나에 일본식 일품요리를 사이에 두고 중년의 두 남자가 마주앉아 있다. 도미머리요리와 장어화로요리 앞에 앉은 50대의 의원은 시종일관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기로 가면을 쓰고 좀처럼 내면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활복회와 맑은 활복탕을 주문한 회장은 40대 중반으로 인간미가 없고 이기적인 카리스마가 넘쳤다. 그러나 매우 공손했다.

    “자, 우리 이럴 게 아니라 건배를 합시다. 구호는 회장이 선창(先唱)을 하시오. 그럼 내가 재창(再唱)을 하리다.”
    “예, 그럼. 이치오쿠교쿠사이(一億玉碎)!”
    “이치오쿠교쿠사이!”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는지 곧바로 쌀과 물이 맛있다는 니가타(新潟)의 명주인 쿠보다 만쥬(久保田 萬壽)로 건배를 했다. 물론 팽팽하던 긴장감이 어느새 녹아 술맛처럼 부드러웠다. 그런데 의원이라는 사내가 말한 네마와시(根回し)의 속뜻은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당사자들 간에 미리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시켜 두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그것은 최상의 의사결정을 이루고 일단 결정된 사항은 신속하게 시행하도록 도우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회장이라는 사람이 선창한 ‘이치오쿠교쿠사이(一億玉碎)’는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의미로 제국주의 일본이 전 국민을 침략전쟁에 총동원하기 위해 사용한 구호였다. 그 시각, 지하 3층의 주차장에선 정원이 막 차에서 내려섰다.

    “유진 씨, 혹시 주변 조사도 끝냈어?”
    “특별히 살해될 만한 주변 문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채권·채무나 원한관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범행동기가 외부에 있다는 소리군. 사망추정 시각은?”
    “12시 32분경에 사건현장 부근의 보안카메라 C-4에 마지막으로 찍혔습니다.”
    “현재까지 찾아낸 용의자에 대한 단서는?”
    “그게 저……. 현장의 사체 외에는 전혀 없습니다.”
    “지하주차장의 보안카메라는?”
    “주차장이 사건 당시에는 차량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때문에 숨을 공간이 많고 범행 후 도주하기도 용이했습니다. 주차장의 이런 특성과 보안카메라의 사각지대를 이용해 저지른 교묘한 범행입니다.”
    “사체의 맨 처음 발견자는?”
    “1시간 30분쯤 전에 호텔의 청소원 아주머니였습니다.”
    “피살자는 무슨 일로 호텔에 온 거지?”
    “동료 말로는 전화를 받고 나갔답니다.”
    “전화?”
    “예, 추정컨대 제보자의 전화 같았답니다.”
    “제보자의 신원정보와 통화내용에 대해 알아낸 것은 있어?”
    “추적결과 통화상대는 중국대사관의 류가흔(柳嘉欣)입니다.”
    “류가흔?”
    “예. 그런데 그녀는 전혀 다른 진술을 했습니다.”
    “어떻게?”
    “류가흔이 오늘 밤 6시 귀임(歸任)할 예정이었답니다. 그래서 출발에 앞서 그동안 도움을 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고요. 물론 그 대상에 사망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변경돼 오늘 오후 3시 귀임하게 됐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점심약속을 취소할 수밖에는 없었고요.”
    “그럼 지금쯤이면 이미 비행기를 타고 있겠군. 귀임사유는?”
    “외교통상부에서 확인해준 정보는 순환근무랍니다.”
    “그런데 고맙다? 뭐가 고맙다는 거지?”
    “거기까지는 저도. 단지 피살자의 업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정할 뿐입니다.”
    “그런데 왜 사망자는 약속이 취소된 사실을 몰랐지?”
    “그 점은 통화기록에서 확인을 했는데 짐을 정리하느라 깜박 잊었답니다. 그게 정확히 12시 30분입니다.”
    “류가흔의 아버지 류승리(柳勝利)가 중국 심양(瀋陽)시 동북구 군구사령부 사령관 맞지?”
    “예, 맞습니다.”
    “사망자의 최근 행적과 관련된 특이사항은?”
    “최근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담당관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범행도구로 사용한 살상용 도검의 형태가 마치 악마의 칼 같았습니다.”
    “악마의 칼?”
    “예, 칼날의 형태가 좁으면서 비대칭이었고 손잡이에는 섬세한 무늬가 있었습니다.”
    “경찰 측의 판단은?”
    “과거 호텔에서 근무한 외국인 근로자의 단순 강도사건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판단 근거는?”
    “고가의 최신 노트북은 그대로 둔 채 지갑에서 현금만 빼갔습니다.”
    “유진 씨의 생각은 어때?”
    “글쎄요. 그런데 저는 왠지 사망자의 담당 업무가 자꾸 뇌리에 남습니다.”
    “나도 그래.”
  • 정원은 범행현장인 남자화장실로 들어섰다. 남자화장실은 과학수사관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과학수사관들은 사실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지문이나 족적 등 유형의 증거 확보에 열중이었다. 하지만 남자화장실은 방금 청소를 끝낸 것처럼 깨끗했다. 정원은 곧바로 사망자가 있는 칸막이화장실로 갔다. 그리곤 좌변기 뚜껑 위에 고개를 숙인 채로 앉아 있는 사체와 마주했다. 유진이 말한 도검이 왼쪽 어깨의 정중앙에 수직으로 박혀 있었다. 그것도 어깨의 양쪽 뼈를 움직이는 승모근 바로 앞에 있으면서 어깨를 들어 올릴 때 사용하는 견갑거근을 정확히 관통했다.

    “말레이시아의 전통무술인 시라트(Silat)의 전사들이 사용하는 크리스(Keris)야.”
    “예! 뭐가요?”
    “살상용 도검 말이야. 영혼이 깃든 특별한 크리스는 미신적 경외감의 대상이야. 그 마력이 크리스의 주인에게 신비한 능력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거의 판타지 수준인데요.”
    “크리스는 무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살아 있는 존재라고나 할까.”
    “그런 상징과 주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조선시대의 사인검과 비슷한 검이네요.”
    “맞아.”
    “크리스에도 종류가 많은가요?”
    “물론. 사용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야. 그중 적을 죽이기 위해 만든 실전용 도검을 판단 사라브 크리스라고 하지.”
    “판단 사라브 크리스요?”
    “치명상을 입힐 목적으로 측면에서 복부 깊숙이 칼을 꽂지. 그러면 칼날의 굴곡 때문에 간과 폐 등 여러 장기를 동시에 공격할 수 있거든. 심장도 크리스의 주요 공격타깃 중 하나야. 거기다 칼을 비틀어 빼면 늑골 골절을 발생시켜 매우 위력적이고. 말레이시아엔 크리스보다 더 무서운 극강의 무기도 있어.”
    “그게 뭐죠?”
    “호랑이 발톱모양으로 생긴 카람빗(Karambit)이야. 너무나 작아서 상대가 칼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이면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봐도 무방해.”
    “그럼 사체에 박힌 크리스가 판단 사라브 크리스인가요?”
    “아니.”
    “예? 그럼요?”
    “사체에서 발견된 크리스는 다른 종류인 판장 크리스야.”
    “그건 또 어떤 거죠?”
    “크리스의 칼날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돼. 일직선인 것과 뱀처럼 구불구불한 것. 그런데 사체에 남아 있는 건 범죄인을 처형할 때만 사용하는 일직선 형태야.”
    “예~에?”
    “사형집행인은 판장 크리스를 범죄인의 어깨에 찔러 넣은 뒤 칼이 박힌 주위에 솜을 대지. 그런 다음 다시 더 깊게 찔러 넣어 그대로 심장을 관통시켜. 솜을 대는 이유는 칼을 뺄 때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고.”
    “헐!”
    “그렇다면 그건 외국인 근로자의 범행으로 추정한 경찰의 판단이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네요.”
    “그런데 문제는 시신이 말하는 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거야.”
    “시신이 진실을 말했다고요?”
    “응, 범인이 시라트 전사들의 비기인 크리스를 사용했다면 당연히 전통무술인 시라트를 배웠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시라트에 상가 마우트라는 속박기술이 있어.”
    “속박기술이라면 조르기기술 말씀인가요?”
    “응. 가장 먼저 상대의 아래팔을 급습해 골절을 유도해. 두 번째 단계에선 상대의 어깨를 결박하고 뒤로 당겨 인대를 끊는데 심하면 탈구까지 발생해. 세 번째 단계는 무릎 뒤쪽을 재빨리 차서 무릎을 꿇도록 만들어.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선 목을 졸라 기도폐쇄와 경동맥 압박을 동시에 병행하지. 그렇게 하면 뇌로 가는 혈류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상대는 호흡이 끊기고 의식을 잃고 말아.”
    “그런데요?”
    “사체 어디에도 그런 상가 마우트를 사용한 흔적이 없었어. 바로 목을 조르고 크리스를 이용해 심장을 관통시켜버렸거든.”
    “그렇다면 직접적인 사인은 목 부분의 압박에 의한 질식사가 아니라 심장의 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이군요.”
    “아마도. 더불어 눈 주변에 피가 중력과 반대방향으로 흐른 자국도 없었어. 그리고 사체에는 반항한 흔적도 없었어.”
    “그러니까 팀장님의 판단은 단순 강도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응. 우선 최근에 피살자가 왜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의 담당관을 만났는지 그 이유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겠지?”
    “알겠습니다, 팀장님.”

    유진은 어딘가로 급히 휴대전화를 했다. 그리곤 메모지에 무언가를 열심히 채워나갔다. 그 사이 정원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갔다. 정원의 모습은 흡사 의식을 길게 늘어뜨리고 사막에서 물을 찾는 코끼리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습관이란 게 있다. 출퇴근할 때 같은 길로만 다니는 것도 그중 하나다. 범인이 일정한 수단과 방법을 반복함으로써 정형화되고 고정화되는 범죄행위의 유형적 특징도 일종의 습관이다. 이를 흔히 범죄수법이라 부른다. 정원은 다시금 사건현장과 현장증거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사체는 범인의 심리에 대해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 걸까? 흠.”
    “저 팀장님, 본인의 말과 달리 피살자는 류가흔과 별다른 친분관계가 없답니다.”
    “그럼 류가흔 자신이 도움을 받았다고 언급한 부분은?”
    “얼마 전 사망자가 통일부와 함께 작성한 심층자료를 중국대사관 측의 요청으로 건네준 적이 있답니다. 그 자료를 수령해간 사람이 바로 류가흔이었습니다.”
    “심층자료의 구체적인 내용은?”
    “지난 10년간 북한의 작황(作況)과 군의 비축미에 대한 정부 통계자료를 기초로 북한 어린이들의 만성적인 영양실조와 외부지원식량의 분배, 유통 구조의 불평등과 관련된 연구자료였답니다.”
    “그런데 동북구 군구사령부에도 북한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정보기관이 있잖아. 따라서 북한관련 통계자료라면 외교통상부보다 그쪽에 부탁하는 것이 더 쉽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심층자료는 대외비로 분류되지 않은 말 그대로 단순 통계자료입니다.”
    “한마디로 그저 필요에 의한 단순 요청이었다.”
    “맞습니다. 혹시 중국이 유엔과 주변국들의 객관적인 통계자료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요?”
    “그럼 피살자가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의 담당관을 만난 이유는?”
    “간단히 말씀드리면, 북한의 현재 식량사정은 최악이 아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자료만 보더라도 최근 몇 년간의 작황은 아사자가 발생하는 350만t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오히려 어린이들의 영양실조와 아사자들의 수를 부풀려 외부지원을 늘리려는 불순한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그대로 말했군.”
    “그 반증으로 북한은 잠재적인 가치가 61조에 이르는 금(金)을 팔거나 해외 비밀자금을 식량 구입에 사용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주요 대북 원조국들은 대북식량지원을 좀 더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뭐, 그런 내용의 의견교환이었답니다.”
    “북한의 체제 자체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중국이 지금처럼 먼 산 불구경하듯 하지는 않겠지.”

    정원의 눈은 유진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무의식적으로 지하주차장에 남겨진 장동하의 흔적을 찾았다. 분명 금품을 탈취하기 위한 단순 강도사건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게 보이게끔 하는 것 자체가 계획된 살인을 의미했다. 이제 정원의 의식은 본격적으로 의혹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처럼 주변의 소음에도 흐려지지 않던 정원의 눈빛이 동요를 일으켰다.

    “유진 씨, 저곳으로 침입하는 게 지하주차장의 보안카메라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는데…….”
    “주로 시설팀 직원들이 시설물 점검을 할 때 사용하는 비상계단입니다.”
    “비상계단?”
    “예. 하지만 호텔 내부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호텔 외부로 연결된 비상계단입니다.”
    “그럼 평소 관리상태는?”
    “상하수도 파이프라인과 공기정화·환기시스템 외에는 특별히 중요한 시설물이 없습니다. 그래서 잠금장치는 되어 있지만 편의상 그렇게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정원은 목표물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그리고 별빛만 있는 어두운 밤에 냄새와 소리만으로 먹잇감을 추적하는 사자처럼 은밀하게 접근했다. 유진은 그런 정원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원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무언(無言)의 몸짓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진이 감탄하는 정원의 또 다른 능력이기도 했다. 경험상 정원의 직감은 다소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이성과 상식의 판단을 뛰어넘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다.
    “팀장님, 같이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