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4> 숲


    정오 무렵 지원은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엘리스처럼 숲에 있었다. 그리고 수호천사가 화려한 나비날개를 활짝 펴고 그 주위를 자유로이 날아다녔다. 하지만 지원은 깊은 상념에 잠겨 세상과 담을 쌓고 있었다. 수호천사도 그런 지원을 그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수호천사는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꽃 위, 나뭇가지 위, 심지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티 없이 맑은 햇살을 미끄럼틀 삼아 혼자 놀았다. 수호천사가 다가갈 때마다 주위의 모든 사물은 애교를 부리며 반응했다. 하지만 그런 신기함도 지원의 시선을 끌지 못했다. 결국 수호천사가 날아가 지원의 손등에 앉았다.
  • “지원아!”
    “응.”
    “나야.”
    “수호천사구나! 그런데 어쩌지 너와 약속한 눈에 보이는 진실을 난 아직도 찾지 못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난 여태까지 진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왜, 내가 빌려준 요술날개인 상상력을 돌려주려고?”
    “응.”
    “아니야, 넌 찾을 수 있어.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진실에 다가갔는지도 몰라.”
    “그런가.”
    “응, 진실은 어둠 속의 불꽃같은 거야. 넌 지금 그 어둠 속에 있고.”
    “그럼 내 진실은 고통 속에 있다는 말이구나. 그리고 그걸 보려면 고통 속을 헤매야 하고 말이야?”
    “맞아. 두려움을 버리고 기억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불꽃이 더 크고 아름답게 보일 거야.”
    “그래, 알았어. 힘들더라도 다시 한 번 찾아볼게.”
    “그런데 네 마음이 절망으로 가득 찬 이유는 뭐니?”
    “그게 너한테도 보였어?”
    “응, 숲은 호수처럼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보여주거든.”
    “창피하지만 내 현재의 삶은 진실이 아니야.”
    “뭐!”
    “거짓이라고. 더구나 그 거짓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줬어. 물론 나는 그 미안함 때문에 늘 그 사람의 주위를 맴돌았고.”
    “네가 길 잃은 아기새처럼 외롭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구나?”
    “그래, 맞아. 결국 그 사람도 내가 거짓이란 걸 어렴풋이 눈치챘는지 내 곁을 떠나갔어. 어쩌면 그 사람을 위해 잘된 일인지도 몰라.”
    “아직도 그 사람이 그리워?”
    “그 사람이 들려주던 부드러운 귓속말은 파도소리야. 잠자리에 들면 침대 머리맡까지 밀려와 하얀 포말로 부서지지. 어느 땐 무모한 용기마저 생긴다니까.”
    “신기하네.”
    “맞아. 그리고 그의 눈빛은 암울한 세상을 온통 설렘으로 가득 채워.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는 그의 눈빛을 보노라면 거기에 놓고 싶지 않은 기회도 있어.”
    “너 정말 그 사람 사랑하는구나?”
    “처음엔 나도 단순히 부여받은 과업완수를 위한 게임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얄팍한 속임수를 부렸지. 게임의 세상에서 말이 된 사람들을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도 그 게임의 규칙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도 무척 재미있었거든.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어.”
    “무슨 착각?”
    “나도 그 게임의 지배자가 아니라 말이었던 거야. 더구나 내 사악한 기운이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어.”
    “그랬구나. 하지만 용기를 내. 그리고 진실을 찾으면 이별이 아픔으로 느껴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럼, 난 이만 간다. 안녕!”
    “그래 안~녕!”
    지원은 수호천사가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명상하듯 숲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삶에 깃든 불행과 고통을 숲의 기운으로 치료했다. 이제 지원은 생각이 정리되고 편안함을 느꼈다. 지원은 숲의 끝에서 현실로 다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아까와는 달리 부는 바람에 나뭇잎처럼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 알아서 비켜갈 뿐이었다. 오늘 지원의 마음을 채운 숲은 그만큼 녹음(綠陰)이 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