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이겼지만 공산주의자 배신·친일파 비적떼에 사라진 독립군
  •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민화 선생을 선정했다. 

    이민화 선생은 사관연성소 교관, 북로군정서 교성대 소대장으로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청산리 전투에 참전해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을 피해 이동하다 전사했다.  

  • 선생은 1898년 충남 아산군 염치면에서 태어났다. 충무공 이순신의 11대손으로 어릴 때부터 충무공의 무훈을 마음에 새겼고, 결혼 후 1917년 12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는 1911년 삼원포 추가가의 신흥강습소부터 시작해 독립군 양성의 요충지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 배출한 3천5백여 명의 졸업생들은 만주 무장투쟁의 주역으로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선생은 1920년 왕청현 십리평의 군사간부학교인 사관연성소 제2구대장 교관으로 활동했고, 북로군정서에서 가장 강력했던 부대인 교성대 소대장으로 활동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작전’을 전개하자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를 옮겼다.

    북로군정서는 김좌진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의란구, 연집강을 거쳐 청산리로 향했다. 이민화 선생은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천수평, 어랑촌 등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수 차례의 전투에 김훈, 백종열, 한건원과 함께 참전했다. 

    백운평 전투에서 선생이 이끈 부대는 경사 60도의 산허리에 매복해 일본군을 공격했고, 천수평 전투에서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선점해 적을 섬멸했다. 어랑촌 전투에서는 어느 전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봉오동 전투에 이어 청산리 전투에서도 패배한 일본은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이로 인해 사실상 간도지역에서 독립군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1921년 3월 대부분의 독립군이 이만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알렉쎄호스크)로 이동했고, 여기서 조선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해 대한의용군(사할린의용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빨치산 부대 내 공산주의자들의 배신으로 자유시 참변을 맞았다.
    자유시 참변으로 수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되었다.

    선생은 1923년 9월 13일 노령에서 다시 북만주로 돌아오던 중 밀산에서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중국 비적 떼와 교전하다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