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40> 성당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나만 몰랐어.”
    이제 현우를 위한 선물상자가 짐처럼 느껴졌다. 지원은 어쩌면 자신의 꿈도 다른 사람에겐 볼품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갑자기 근거도 없는 여주인의 비웃음이 벌레처럼 날아와 목 언저리에서 스멀거렸다. 지원은 도망치듯 커피숍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부상을 당해 무리에서 떨어진 어린 물소처럼 거리를 떠나가며 천천히 멀어졌다. 이제 현실은 허상이 깨지고 원래의 무채색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지원의 발걸음이 자신의 의지에서 벗어나 어느새 알 수 없는 자유의 영역에 들어와 있었다. 자기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가 이끌어준 마지막 남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신부님, 저를 모르시죠?”
    “세상이 돌아가는 건 잘 모르지만 그 이외의 것은 듣기에 따분해서 그렇지 저도 조금은 압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바보처럼 저만 저 자신을 모르는 건가요?”
    “글쎄요. 우리 인간 스스로 자신을 만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빌린 몸에 대해 우리 인간이 속속들이 다 알겠습니까. 그건 지나친 오만입니다.”
    “그런가요, 신부님?”
    “그렇습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아주 가끔 삶에 지친 육신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의 마지막 울타리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신부님은 고통 없이 사람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아주 신비한 능력을 갖고 계시군요.”
    “최소한 그 정도의 재주는 갖고 있어야 저도 밥을 먹고 남들에게 그럴 듯하게 보일 것 아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지원이 처음 마주한 성당은 외관이 영국 세인트 폴 대성당의 축소판처럼 우아했다. 일반적인 기하학의 형태와 수학적인 대칭성에 건축미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우면서도 위엄을 갖춘 하나의 종교예술품이었다. 하지만 내부는 중세시대의 고딕 건축양식의 특징인 기이한 형태와 비율을 요소요소마다 빌려 쓰고 있었다. 그래서 지원의 눈엔 더 오묘하고 신비로웠다. 거기다가 신성함이 묻어나는 성화와 성물들의 화려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을 잊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어느 한 곳 건축가의 종교적 신념과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신부님, 전 수능을 본 고등학생처럼 지금 마땅히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그냥…….”
    “괜찮습니다.”
    “제가 비밀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비밀이야기요?”
    “예.”
    “비밀이야기인데 저에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비록 세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제가 고해성사를 한다고 생각하고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좋습니다.”
    “제게 있어 오늘은 최후의 심판이 내려진 날이에요.”
    “그렇다면 오늘밤 자매님을 위한 마음의 안식처로 여기만큼 적당한 장소도 없군요.”
    “세상에 저를 위한 곳도 있다니 너무 좋네요. 훗! 사실 전 밤마다 악몽을 꿔요. 제 주변의 유리나 거울이 산산이 깨져 저를 향해 날아오는 끔찍한 꿈이에요. 어느 땐 그 유리파편들이 제 눈앞에서 커다란 독니를 가진 뱀으로 변하기도 해요.”
    “자매님, 세상이 두려우십니까?”
    “예, 아주 많이요.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어요. 두려움이 나를 찾지 못하는 곳에 꽁꽁 숨고 싶어요.”
    “마음속의 뭐가 그렇게 우리 자매님을 두렵게 합니까?”
    “모르겠어요. 무엇이 나를 끝까지 적으로 여겨 절벽으로 내몰고 있는지. 전 아무래도 카인의 후예인가 봐요. 세상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를 핍박하거든요. 하다못해 제 인생의 진로까지도 함부로 거칠게 다뤄요.”
    “흠! 카인의 후예라. 자매님, 제가 보기에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왜죠?”
    “자매님이 정말 카인의 후예라면 아마 신은 자매님을 사막이나 광야에 내치고 길을 끊었을 겁니다. 더욱이 길을 내주며 신의 영광이 있는 이곳으로 인도하는 일은 절대 없었을 겁니다. 자매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런가요?”
    “예.”
    “신부님, 저는 왜 이 세상 사람들이 다하는 사랑조차도 못할까요. 사랑이 제게는 30캐럿짜리 다이아몬드처럼 사치인가요?”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평생 경험하지도 또한 가슴에 담아두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 자매님의 눈엔 저도 인생의 패배자로 보이십니까?”
    “아니요.”
    “사랑은 소중한 것이지 결코 길가의 돌멩이처럼 흔한 게 아닙니다.”
    “신부님의 곁에는 언제나 신의 영광이 함께 하시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신은 언제나 제가 그분을 올곧게 믿는 길로 오십니다. 비록 그 대상이 인간일지라도 사랑의 길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억지로 강요된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가 열어놓은 마음의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사랑을 얻을 수 없겠죠.”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정말 그러네요. 하지만 저의 사랑은 끝이 보이는 사랑이에요. 로미오와 줄리엣의 슬픈 사랑처럼 말이에요.”
    “비록 신(神) 안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사랑이 아름답고 위대한 것은 그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이미 질 것을 염두에 두고 꽃을 바라본다면 그 꽃이 뿜어내는 은은한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있겠습니까?”
    “!”
    “아마도 그 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운명의 굴레에서 불쌍해 보일 겁니다. 물론 사랑도 마찬가지겠죠. 자매님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거나 아니면 사랑의 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겠죠. 자매님이 지금 두려워하는 건 어쩌면 그 사랑의 힘을 완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십 년 동안 아마존에서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원주민마을에 유카(Yucca)와 고구마로 만든 마사토라는 전통주가 있습니다.”
    “마사토요?”
    “예, 한가할 때 마을 여자들이 공터에 모여앉아 정글에서 캐온 고구마를 씹습니다. 그리고 그 씹은 고구마를 항아리에 모으면 고구마 속에 스며든 침으로 발효가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술이 바로 마사토입니다.”
    “그 맛은 어떤가요?”
    “인식의 가시라 할 수 있는 선입견만 버린다면 생각하시는 것보단 아주 맛있습니다. 그런데 마사토란 술은 그저 즐기기 위한 단순한 술이 아닙니다. 원주민들에겐 전사의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매개체입니다. 제가 보기에 지금 자매님에게 필요한 건 용기 같습니다. 물론 제가 자매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것도 그것이고요.”
    “신부님, 하지만 용기도 자기의 모습이 진실할 때 견고한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제가 지금 자매님의 얼굴에서 보고 있는 건 무엇인가요?”
    “예?”
    “진실이 아닌 허상인가요?”
    “!”
    “자매님, 자매님의 마음속에 있는 절대적인 힘을 믿으세요. 자매님 마음속의 그 힘은 신을 위대하게 만들 만큼 너무나 강렬하고 보석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정말요, 신부님?”
    “남의 죄를 사하는 자가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나쁜 꿈은 내일을 위해 꾸는 겁니다. 자매님도 오늘이 끝나면 내일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죠?”
    “물론이죠.”
    “내일이 없다면 악몽을 꿀 이유도 없겠죠. 만약 천국이 없다면 신을 믿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도 아무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야기 하나를 자매님에게만 들려드리죠. 사실 저도 거짓말은 꽤나 잘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에게는 절대 안 합니다. 아니 못합니다. 왠지 아세요?”
    “글쎄요?”
    “저도 신을 팔아서 오래토록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게 저에겐 남는 장사거든요. 후후후.”
    “훗! 정말 재밌으세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신부님, 저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버지처럼 다 저녁에 어디 가시냐고 묻지는 않겠습니까? 하지만 얼룩진 화장은 고치고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후후후.”
    “신부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실거죠?”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매님.”
    “신부님, 그거 아세요?”
    “뭘 말입니까?”
    “말씀하시는 동안 정말 돌아가신 저희 아빠 같으셨어요. 훗!”
    “자매님,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랑은 마지막 전쟁이라고.”
    “신부님! 그 전쟁에서 이기면 꼭 다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