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서화 장편소설 '레드'-1
  • <31> 달래의 죽음


    현우와 지원은 ‘호모 나이트쿠스(Homo nightcus)’라는 속칭 올빼미족들 틈에 끼어 동화의 나라를 구경했다. 화려한 조명장치가 달린 놀이기구뿐만 아니라 밤이지만 낮 시간 못지않게 이색 볼거리가 많았다. 거기다가 낮에는 만질 수도 없는 환상까지 있었다. 현우와 지원은 마지막 퍼레이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둘러 놀이공원을 빠져나왔다. 역시나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 차들 속에 묻혀 서울로 돌아가는 길조차 잃을 뻔했다. 놀이공원을 나와 한 시간쯤 흘렀을 때 지원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전 가끔 혼자서 그네를 타요. 왠지 알아요?”
    “글쎄요, 잘…….”
    “훗! 현우 씨가 보이거든요.”
    “제가요?”
    “하늘로 날아오르면 마치 담장을 뛰어넘은 듯 옆집에 사는 현우 씨가 보여요. 유리공예를 하는 모습도 보이고요, 또 식사를 끝내고 베란다에서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는 모습도 보여요. 그럼 전 달빛을 보며 기도하죠.”
    “뭐라고요?”
    “제가 지금 달에 편지를 쓰니까 제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빛을 펼쳐 읽으라고요. 그러면 언제 어디서건 제가 늘 현우 씨 곁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잖아요.”
    “정말 좋은 생각인데요!”
    “그래요?”
    “저도 이제부터 매일 달에다 메모를 남길게요.”
    “정말요?”
    “예.”
    “약속?”
    “약속.”
    “집에 화전차(火前茶)가 있어요. 들어가서 마시고 가요.”
    “화전차요?”
    “거래처 사장님이 고향에서 보내온 거라고 나눠주신 거예요. 그분이 알려주신 건데요, 녹차는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음력 섣달에 따는 차는 납차(臘茶), 음력 2월 춘분 전후에 따면 사전차(社前茶), 한식의 금화(禁火) 이전에 따면 화전차(火前茶). 그리고 그 이후에 따면 화후차(火後茶).”

    더없이 행복했던 시간이 과거로 떠나기 싫은 듯 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린 현우는 몇 걸음 걷지 않아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빛도 극저온의 액화질소를 뒤집어쓴 듯 차갑게 얼었다. 현우가 보기에 지원의 집과 주변의 분위기는 예전과 분명 달랐다. 물론 집주인이 외출 중이라 외부로 새어나오는 불빛이 없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지원의 집은 마치 유령의 집처럼 위압적이고 공포심마저 갖게 했다.
    “어, 우리 집이 왜 유령의 집이 됐지. 분명히 나올 때 거실에 실내등 하나를 켜놓고 나왔는데.”
    “!”
    “혹시 피 씨 아저씨가 다녀가셨나. 아니면 내가 깜빡 착각한 건가?”
    “…….”
    “훗! 사실 저 가끔씩 깜빡깜빡 하거든요. 이거 비밀이에요. 약속할 수 있죠?”
    “예, 지킬게요.”
    “제 앞에선 그렇게 말해놓고 이따 집에 가면서 혼자 흉보면 안돼요. 절~대로.”
    “후후후, 예.”
    “현우 씨, 그럼 손 내밀어요.”
    “!”
    “싸인! 복사! 히유! 이제 안심이다. 히~.”
    어느새 두 사람은 어둠이 짙게 깔린 마당을 지나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지원은 토트백에서 현관열쇠를 찾아 열쇠구멍에 꽂았다. 그리고 문을 열면 어느 집이나 현관입구 안쪽에 있는 전등 스위치부터 찾았다. 그런데 지원이 전등스위치를 눌러도 웬일인지 불이 켜지지 않았다. 현우가 얼른 지원에게 누전차단기의 위치를 물었다. 달빛으로 어렵게 확인한 누전차단기는 짐작대로 내려와 있었다.
    “누전차단기가 왜 내려왔지?”
    “문도 잘 닫혀 있고, 주변에 딱히 어질러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사실 저도 조금은 무서웠거든요.”
    “이젠 괜찮으세요?”
    “예. 그럼 이제 우리 화전차나 마실까요?”
    “좋아요.”
    “그럼 현우 씨는 잠시 소파에 앉아 쉬고 계세요. 제가 얼른 가지고 올게요.”
    지원이 어깨 위로 우아하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주방 쪽으로 사뿐사뿐 걸어갔다. 현우는 부드러운 실내분위기를 연출할 목적으로 하얀 돌을 이용해 벽 전체를 꾸민 아트월(Artwall)을 감상했다. 아트월은 하얀 도화지 같았다. 그래서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심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때 갑자기 현우가 아트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지금껏 눈여겨 본 적이 없는 거실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현우 씨, 왜요? 거실바닥에 뭐가 묻었어요?”
    “아, 예. 그냥.”
    “외출하기 전에 제가 청소를 깨끗이 해놓고 나갔는데요.”
    “지수 씨, 이거 혹시 달래 발자국 아닌가요?”
    “달래요?”
    “예.”
    “그럴 리가 없는데. 달래는 일부러 제가 외출하면서 화원에 데려다놓았거든요. 화원에도 달래집이 있어요.”
    “그럼 현관문에서부터 이쪽으로 곧장 나 있는 이 흔적들은 대체 뭘까요?”
    “글쎄요, 저도 도무지. 더구나 아까 현우 씨도 보았다시피 현관문이 잠겨 있었잖아요. 잠긴 문을 달래가 어떻게…….”
    “그러게요.”
    “가만, 이 흔적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는데요.”
    “저쪽은 제가 가끔씩 사용하는 욕실인데. 이불 빨래와 달래 목욕을 시키거든요.”
    현우는 뭐에 끌리듯 욕실을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지원은 아직도 상황파악이 제대로 안 됐는지 우두커니 서서 현우의 이상한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 후 욕실 앞에 다다른 현우가 지원을 한 번 쳐다보고는 손잡이를 천천히 돌려 잠금상태를 확인했다. 욕실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현우는 한차례 깊은 심호흡을 하고 곧장 집을 흔드는 파열음을 내며 욕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안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원의 답답함은 불안과 공포로 변질돼 빠르게 증폭됐다.
    “현우 씨,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
    “혹시 멧돼지 같은 야생동물이라도 집에 들어왔나요?”
    “아니요.”
    “그럼 뭔가요. 부엉이 같은 날짐승인가요?”
    “아니요.”
    “그럼 아무것도 없어요?”
    “아니요.”
    “현우 씨, 저 궁금해요?”
    “지수 씨?”
    “예.”
    “달래가 죽었어요.”
    “!”
    달래의 죽음을 본 지원의 의식은 우주가 폭발하듯 산산이 깨졌다. 그리고 그 깨어짐이 너무도 지독해 의식을 잃었다. 현우는 지원을 조심스럽게 안아 소파에 눕혔다. 그리곤 바로 옆에 깨끗한 수건으로 감싼 달래도 뉘였다. 달래는 지원의 품에서 깊이 잠든 것처럼 편안했다. 하지만 굶주린 맹수에게 쫓기기라도 한 듯 몸의 털은 등줄기를 따라 사납게 뻗쳐 있었다. 현우는 달래의 몸에서 물기를 닦은 다음 이제부터라도 마음껏 뛰어다니도록 불편했던 다리를 똑바로 펴주었다. 그러자 달래는 더욱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현우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달래와의 추억을 동영상을 재생하듯 떠올렸다. 그리고 추억은 현실을 붙잡는 강한 힘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으으으, 현우 씨.”
    “지수 씨, 지금은 그냥 가만히 누워 있어요.”
    “아니, 괜찮아요. 우리 달래는요, 달래는 괜찮아요?”
    “…….”
    “아까 내가 잘못 들은 거죠. 그렇죠? 지금 이렇게 내 옆에서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잖아요.”
    “그게 저.”
    “제발 지금 자는 거라고 말해줘요, 예? 우리 달래 지금 자고 있는 거 맞죠, 그렇죠?”
    “미안해요, 지수 씨.”
    “아니야, 아니지. 달래야? 너 지금 피곤해서 자고 있는 거 맞지. 그치?”
    “감전사고 같아요.”
    “감전사고요? 그럼 죽은 거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달래는 절대 나를 두고 죽지 않을 거예요.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랑 영원히 함께 산다고 약속했어요.”
    “욕조에 물을 반쯤 받아 놓았는데 그 속에 드라이기가 빠져 있었어요.”
    “드라이기가요! 달래가 목욕하고 털을 말릴 때 사용하는 드라이기 말인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콘센트에 플러그가 꽂혀 있었어요.”
    “그럴 리가.”
    “아마 열린 욕실창문으로 들어온 달래가 욕조 안에 전기가 흐르는 줄 모르고 그만 실수로 거기에…….”
    “달래야! 우리 달래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언니가 잘못해서 네가 이렇게 됐나보다. 내가 보고 싶어 찾아왔었구나. 이제는 우리 달래 재롱을 볼 수 없어 언니는 어떻게 하니. 달래야, 제발 눈 좀 떠봐, 응? 달래야. 이제 새벽에 악몽을 꾸면 누가 내 눈물을 닦아주지, 달래야? 아무래도 언니가 전생에 아주 나쁜 사람이었나 보다, 그치? 저승에 가서는 좋은 주인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알았지?”
    “현우 씨, 이제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아니에요. 혼자 있는 게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몰라요. 달래와의 추억도 조금씩 정리해야 되고요.”
    아직도 지원의 눈빛은 그 경계가 허물어져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금방 동공이 푹 잠기도록 슬픔도 빠르게 차올랐다.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애완동물 전용장례식장에서 달래는 한 줌의 재로 돌아갔다. 하지만 달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돌려보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전류가 체내에서 10mA(밀리암페어) 정도 흐르면 참기 어려운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20mA에서는 근육이 수축돼 행동이 불가능하며, 50mA에서는 위험한 상태에 이른다. 그리고 100mA 이상은 즉사할 수 있는 치사전류량이다. 그런데 확인결과 누전차단기는 5~20mA 정도의 낮은 누설 전류에도 차단됐다. 즉 사람이 아닌 동물임을 가만하더라도 누설된 전류량에 비해 결과가 참혹했다. 순간 현우의 뇌리에 스치는 게 있었다. 만약 누군가 물의 전기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고의로 소금을 첨가했다면 달래의 죽음이 충분히 설명된다.

  • “팀장님! 아까 총무과에서 오늘은 출근 못하신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그래, 백 전무님 주변에선 뭐 좀 나온 게 있어?”
    “현재 전무님라인의 인적 구성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총무팀 우광재 차장님과 설유리 점장은 이미 모든 직원들이 다 아는 전무님라인이고. 그 외에 또 다른 사람은?”
    “그 외에 물류팀의 장윤석 부장님과 생산팀의 김웅태 과장, 거기다 영업팀의 석정균 차장님도 전무님라인이었습니다.”
    “석정균 차장이? 소비자의 선호도를 무기로 백 전무님의 결정사항에 매우 도전적이었잖아.”
    “틀림없습니다.”
    “그럼 이유가 뭐지. 대체 무엇 때문에?”
    “아무튼 완벽하게 쇼를 한 건 분명합니다.”
    “그것 참! 알 수가 없는 일이군.”
    “심각한 문제는 본사의 직원들보다는 영업팀 소속의 지역점장들입니다.”
    “지역점장들이 왜? 설마…….”
    “백 전무님을 중심으로 ‘미산(美山)’이라는 산악동호회를 만들어 매달 정기적으로 함께 산행을 하고 있답니다.”
    “사내모임은 친목도모를 위해 많이들 만들잖아. 회사 차원에서 적극 권장까지 하고.”
    “하지만 문제는 그 동호회가 인사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년 인사발령에서 그 미산의 회원들이 전원 승진 내지는 직급이 상향 조정됐습니다.”
    “당시 추 이사님의 지시로 더 이상의 루머 확대와 재생산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지만 적어도 일부 지점장과 점장들의 항의가 허위사실은 아니었다는 말이 되는군.”
    “맞습니다, 팀장님.”
    “좋아! 홍 대리. 그럼, 이번에는 전무님이 업무와 관련해 통상적으로 만나는 주변 인물들을 한번 추적해봐.”
    “알겠습니다.”
    ‘바둑의 수(手)엔 선도 없고 악도 없다’는 말이 있다. 즉 바둑을 둘 때는 친구도 적도 없다는 의미다. 현우는 지금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에 대해 그 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현우는 아직까지 식사는 물론이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허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 건 지원에 대한 걱정 때문임이 분명했다.
    “참! 동해야. 알아본 건 어떻게 됐어?”
    “그게 저……. 저희가 관할세무서 직원들처럼 세무조사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못 알아봤다는 소리야?”
    “아니요. 확인한 결과 예상과 달리 건물의 소유권자는 백 전무님의 딸 ‘백나영’이 아닌 제3자 다섯 명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었습니다.”
    “공동명의! 그게 정말이야?”
    “예.”
    “그리고 그 다섯 명 중 백씨 성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등기부상에 기재된 주소도 전국에 흩어져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회사 직원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어?”
    “단 한 명도 포함되어 있질 않았습니다.”
    “그럼 우리가 완전히 헛다리를 짚었다는 소리잖아?”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볼 때는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동해 씨, 그럼 쇼핑몰 쪽은 어때?”
    “직매장은 제법 매출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기간에 빌딩을 구입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럼 다른 임차인이나 공인중개소에 들러서 건물의 실제 소유주가 누군지 한번 알아보지 그랬어?”
    “당연히 물어봤죠. 그런데 팀장님, 정말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상한 점?”
    “다른 임차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인중개사조차도 백나영을 건물의 실제 소유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뭔가 앞뒤가…….”
    “그렇죠, 홍 대리님!”
    “혹시 지방에 있는 건물주들이 빌딩의 전반적인 관리를 백나영에게 맡긴 건 아닐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니, 뭔가 이상해. 빌딩관리를 사회생활 새내기인 백나영에게 굳이 맡길 이유가 있을까. 더구나 임차인과 공인중개소는 실제로 계약을 하고 주선하는 곳이잖아.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 어쩌면 등기부상에 기재된 내용보다 더 정확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긴 아직도 세금탈루를 목적으로 임대인과 임차인이 서로 짜고 이중계약서를 작성했다가 세금폭탄을 맞는 사람들이 종종 신문에 실리잖아요.”
    “그런데 내가 정말 의문스러운 것은 말이야.”
    “그게 뭔데요. 팀장님?”
    “만약 그 건물의 실제 소유주가 백 전무님이라고 가정하면 답이 안 나오거든.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백 전무님은 그 정도 재산가는 아니야.”
    “그렇다면 팀장님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답은 하나네요.”
    “글쎄. 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너무 앞서가는 것이고. 아무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설명해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지금부터 다시 찾아보자고.”
    “전 두 분이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그러니까 팀장님 말씀은 건물의 실제 소유주가 백 전무님이라면 반드시 개인적인 비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잖아. 더 나아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가짜 공동명의자를 건물소유주로 만들었다는 말씀이고. 즉 백 전무님이 자신 소유의 청담동 건물을 가짜 공동명의자들에게 수탁(受託)해둔 것이란 소리지. 이제 이해가 되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건 완전히 범죄잖아요?”
    “왜 아니겠어. 다만 우리로선 그렇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
    “동해 씨, 일단 공동명의자들을 추적해봐.”
    “지방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말입니까?”
    “당연하지.”
    “헉! 나는 이제 죽었다.”
    “크크크.”
    “저, 팀장님. 휴대전화 울리는 거 아니에요?”
    “!”
    현우는 얼른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져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LCD창에 뜬 발신자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처럼 백 전무였다. 사실 백 전무는 한때 평사원들에게 있어서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입사 초기부터 수평적 사고에 기반을 둔 그의 천재성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마법사처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리고 어떤 위기가 닥쳐도 반드시 해답을 찾아내는 순발력과 비범함은 곧바로 회사의 매출 증대와 연결됐다. 때문에 창사 이래로 가장 빠른 초고속 승진을 한 불세출의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천재성이 오히려 광기로 변질돼 있었다.
    “예, 전무님?”
    [나 팀장, 요즘 내 주위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역시 그랬군! 아무튼 고맙네. 지난번과 달리 솔직히 말해줘서. 그래, 뭣 좀 나온 게 있나?]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 말은 시간만 주어지면 찾아낼 수도 있다는 뜻인가?]
    “어쩌면 그럴 수도…….”
    [나 팀장?]
    “예, 전무님.”
    [세상에는 잘난 사람을 질시하는 눈이 의외로 많더군. 그런데 난 어리석게도 실력과 열정만 있으면 그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오만하게 생각했어. 실제로도 얼마 전까지 그렇게 살았고. 아마 나 팀장도 내가 어떻게 회사생활을 했는지 잘 알거야.]
    “물론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성공이 손에 막 잡히려는 순간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더군. 그래서 깨달았지. 내가 너무 아둔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게 무슨…….”
    [여태껏 단 한 번도 누가 나를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주지는 못했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자네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켜 줄 수가 있네. 그것도 지금 당장. 즉 현재의 자네 위치에서 성공까지 최단거리의 지름길을 알려줄 수 있다는 말이네.]
    “전무님, 그 말씀은…….”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자네가 뇌물성 대가라고 판단을 해도 좋아. 어차피 세상일은 각자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하지만 자네가 과연 누구를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지 잘 한번 생각해 보게. 바로 거기에 해답이 있으니까.]
    “…….”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지. 떡을 만진 이상 어떻게 떡고물을 안 묻힐 수가 있겠나, 안 그런가? 그럼 처음부터 우리 같은 샐러리맨들에겐 고물이 묻는 떡을 만지지 못하게 하던지. 일에 열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떡고물이 묻었는데 그걸 가지고 범죄인 취급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오늘 퇴근하고 잘 한번 생각해 보게. 난 개인적으로 명석한 나 팀장이 새로운 세계로 나가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네. 자신에게 온 기회를 잘 잡는 것도 분명 실력이겠지. 안 그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