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쑥부쟁이가 되어버린 그대"...시인이, 그렇개 규정한 이유를 더듬네!
  • 그곳에서 쑥부쟁이가 되어버린 그대



    0. [프롤로그]

    시인이, 곱게 늙은 귀공자를 사정없이 패는 글을 썼다.
    세상은 [시인이 늙은 귀공자를 팼다]는 이야기만 가지고 떠든다.

    그러나 시인과 귀공자간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 왜 시인이 늙은 귀공자를 패게 됐는지....그 마음의 결을 더듬는 이야기는 없다.

    싸움 구경은 재밌다.
    하지만 잠시, 그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 더듬어 보자.
    제멋대로라도, 상상에 취해서라도, 엉터리 짐작으로라도 더듬어 보자.  

    패는 것은 시인의 몫이고, 더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1.

    시인에겐 이승과 저승, 빛과 어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졌다.
    뿌옇다.

    어렸을 때부터 죽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땅에 묻힌 물건을 보기도 했지만, 이토록 뿌옇지는 않았다.
    하얀 방, 뽑혀진 손톱자리에 조심스레 혀를 대어 침을 바르며 비릿한 피맛을 보면서도 이토록 뿌옇지는 않았다.

    그러나 캔버스 천으로 만든 자루를 이용한 김밥말이 다음부터 점점 뿌옇게 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시계 0?
    아니면 1m?

  • 놈들은 <스타로버>를 열심히 읽었음에 틀림없다.

    뱀발:
    <Star Rover>, 잭 런던의 소설. 1915, 책제목을 번역하면<별 여행자>, 국내 미번역.

    길게 갈라진 양 쪽으로 등산화 끈 구멍이 달린 길쭉한 자루.
    그들은 시인을 집어넣고 밟아가며 끈을 조인다.
    숨을 쉬기 어려운 지경까지 동여서 며칠 동안 내갈겨 둔다.

    스타로버의 주인공 스탠딩은 이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여행하는 법을 깨우쳐 우주를 떠돌기도 하고...500년 전, 지구 반대편의 조그만 나라로 날아가 정몽주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은 스탠딩이 아니다.
    그는 스탠딩 같은 생생한 여행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세계는 점점 더 뿌옇게 변해갔다.

     

    2.

  • 어느 순간부터 김밥말이가 뜸해졌다. 
    뿌옇게 되었던 정신이 되돌아 왔다.

    열한 편의 시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다.

    집에 갈 수 있으려나?
    이곳에서 죽어나가지 싶은데?
    못 돌아갈 거야.
    불귀(不歸).

    못 돌아가리
    한번 디뎌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얀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

    못 돌아가리
    일어섰다도
    벽 위의 붉은 피 옛 비명들처럼
    소스라쳐 소스라쳐 일어섰다도 한번
    잠들고 나면 끝끝내
    아아 거친 길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굽 높은 발자욱 소리 밤새워
    천정 위를 거니는 곳
    보이지 않는 얼굴들 손들 몸짓들
    소리쳐 웃어대는 저 방
    저 하얀 방 저 밑모를 어지러움

    뽑혀 나가는 손톱의 아픔으로 눈을 흡뜨고
    찢어지는 살덩이로나 외쳐 행여는
    여윈 넋 홀로 살아
    길 위에 설까

    덧없이
    덧없이 스러져간 벗들
    잠들어 수치에 덮여 잠들어서 덧없이
    한때는 미소짓던
    한때는 울부짖던
    좋았던 벗들

    아아 못 돌아가리 못 돌아가리
    저 방에 잠이 들면
    시퍼렇게 시퍼렇게
    미쳐 몸부림치지 않으면 다시는
    바람 부는 거친 길

    내 형제와
    나그네로 두번 다시는.


    S대 영문과 교수가 만든 문학계간지에서 열 한 편 모두를 실어줬다.

    잡지가 몽땅 회수되고 폐간되느니 마느니 말이 많았다.
    시인은 훤칠한 하얀 얼굴, 귀공자로 생긴 그 영문과 교수에게 미안했다.

    나갈 수 있으면 형 삼고 벗 삼고 싶어졌다.

     3.

    다시 김밥말이가 시작됐다.
    예전보다 더 뿌옇게 됐다.

    시도 때도 없이 형상이 나타나고 소리가 들리고 냄새가 맡아진다.

    낮인가?

    아니면 밤인가?

    4.

    처는 시인에게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냥 자유스럽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시인에겐 모든 것이 뿌옇게 느껴졌다.

  • 시인의 마음 속에 상념이 스친다.

    “자칭 후배라고 하는 사람이 자주 온다.
    곰곰 생각해 보니까 후배인 것 같기도 하다.
    자칭 후배는 약간 날카로운 미남자다. 

    처음엔 죽은 김수영 선배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 아닌가 싶었다.
    맞다. (김수영의 얼굴은 잘 기억난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 보자 김수영보다 얼굴 선이 좀 여리다.
    아무튼.

    김수영을 닮은 자칭 후배는 인사동에 찻집인지 술집인지 밥집인지를 낸다고 했다.
    뭐라고 웅얼거린다.

    알게 뭐람?

    뭐라고?

    지금 내 눈에 뭐가 보이냐고?

    니가 뭔데 물어?

    짜식이, 별 걸 다 물어.

    그래, 흙담이 보여.
    중학생 때 먼 발치에서 가슴 졸였던, 원주에서 제일 이쁘다던 여학생의 집을 둘러싼 흙담, 토담이 보여.
    그래, 토담!”

    시인의 후배는 ‘토담’이란 찻집을 냈다.

    감히 시인에게 “지금 눈앞에 무엇이 보입니까?”라고 물은 적이 없다.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제가요…인사동에 말이죠…
    찻집을 하나 내려고 하는데요….
    이름을 뭐라고 해야 좋을까요?”


  • 이렇게 뿌연 어둠 속에서 시인은 깊은 잠을 잤다.
    혹은 긴 여행을 했다.
    매일 귀신과 놀고 망자(亡者)와 이야기했다.

    서울에 있을 때엔 인사동의, 김수영을 닮은 자칭 후배네 찻집에 가서 소일했다.
    거기에도 재미있는 귀신과 망자들이 곧잘 찾아 왔다.

    바람을 쏘이러 원주로 나서면 산 속 오솔길 하나 하나에서 120년 전의 천주쟁이들이 나온다.
    치악산을 오르면 금강산 불맥(佛脈)의 당취(땡초)들이 보인다.
    해남에선 공동묘지 자리 전체를 마주할 수 있어서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 왔다.

     5.

    꿈이었나?
    생시였나?

    젊은 애들이 자꾸 몸을 던져 죽고 자기 몸에 불질러 죽었다.
    민중을 찾고 진보를 외치며 스스로 죽었다.
    죽는 게 유행이었다.

    “에이 씨팔!
    이 한갓진 뿌연 어둠 속에서 날 좀 놀도록 내버려 둬!
    하루 종일, 밤낮 구분 없이, 귀신, 망자와 놀도록 내버려 둬!
    시체 타는 냄새에 참을 수가 없잖아!”

    그래서 시인은 한 소리 꽥 질렀다.

    “민중이 뭔지 알아?
    생명이야!
    민중을 위한다는 놈들이 왜 지 몸에 불질러 죽는 거야?
    너희는 죽음을 예찬하는 거야!
    너희는 시체와 섹스할 참이냐?”

    1991년의 일이다.

    사람들은 시인의 일갈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이름을 달았다.

    세상에 대해 원한이 깊었던, 사나운 깡통들은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변절자! 배신자!
    아가리 닥치고 조용히 쭈그러져라!
    주둥이를 공업용 미싱으로 꼬매 줄까?”

    사나운 깡통들의 비난은 시인의 귀에 닿지 않았다.
    그들의 요란한 저주는, 시인을 겹겹 둘러싼 뿌연 어둠을 뚫고 전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6.

    문득 정신이 들었다.
    20년이 흘러 있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인지 뭔지 하는 상자 앞에 매달려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여?라고 시인은 생각했다.
    사람은 마땅히 책에 매달리든가, 자연에 매달리든가, 사람에 매달려야지, 왜 상자에 매달리는 거야?라고 시인은 생각했다.

    그 뿐인가?

    길을 걸으며 미친 놈처럼 혼자 떠드는 데, 그게 핸드폰 전화질이란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이야기하든가, 아니면, 끈달린 전화통을 붙잡고 이야기해야지, 어떻게 허공에 대고 이야기는 거야?라고 시인은 생각했다.

    이거 다 실성한 년, 놈들이 돼 가는 중, 아니야?라고 시인은 생각했다.

    시인은 결심했다.
    저 망할 놈의 상자에 매달리는 짓거리나, 실성한 채 허공에 떠드는 짓거리는 절대로 흉내내지 않겠다고.

     7.

    30년도 훌쩍 넘은 아득한 시절에 마주쳤던, 훤칠한 귀공자 교수의 이야기가 신문에 가끔 나온다.
    지금은 원탁 할배들의 대장이라나 뭐라나?
    귀공자 교수는 이제 곱게 늙은 할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노는 물이 더럽다.
    관상이 더럽게 생긴 흉악한 도적놈들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한다.

    사진에 나오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원탁이 있겠거니 상상했었다.

    그러나 원탁이 없는 것을 알게 되자 시인은 크게 실망했다.
    언어는 정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할배들, 가만 보니까, 아주 지능적으로 북한 편을 드는데?
    그 중에 한 놈은 김정일이 죽자 몰래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 김정일 미라, 관 발치에 꿇어 엎드려 눈물을 펑펑 쏟았잖아?
    염병 지랄하고 있네.
    낫살을 거꾸로 쳐먹었나?

    이 개시러배들이 지금 우리 귀공자의 혼을 후려서 얼굴마담으로 쓰는 거야, 무어야?
    우리 귀공자는 뭐하러 저런 도둑놈들, 독초들과 같이 어울리는 거야?

    뭐?

    귀공자가 죽은 깡통 저널리스트 리영희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고?
    차라리 개똥구멍에 낀 살구씨를 정신적 스승으로 모시지, 그래?
    아무리 개똥구멍에 끼어 있어도 살구씨는 정직해.
    여전히 살구씨잖아?

    하지만 리영희는 사악한 사기꾼이야.
    소련, 모택동, 북한이 진보라고 설레발 쳤잖아?
    3천만이 죽은 대약진과 1천만이 죽은 문화혁명을 찬양했잖아?”

    시인은 당장 사진 속으로 뛰어들어가 귀공자의 싸대기를 갈겨 정신을 버쩍 차리게 해 주고 싶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거의 40년 전, 내가 줬던 열 한 편의 시를 당신 잡지에 실었던 그 당당함은 어디 갔어?
    하마터면 잡지가 폐간될 뻔 했던 위기를 웃고 넘겼던 기개는 어디서 엿 바꿔 먹었어?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망가진 거야?
    안 보여?
    저 종북 깡통들이 당신을 얼굴 마담으로 이용해 먹고 있다는 사정이 안 보여?
    뭐?
    진심으로 리영희를 따른다고?
    그 깡통 가짜 사기꾼 저널리스트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고?”

    시인은 깊은 우울에 빠졌다.

    이 우울은 점점 깊어져 암갈색 돌덩어리가 되어 시인의 가슴 한 가운데에 매달리게 되었다.

    8.

    시인은 충청도의 단강과 강원도의 섬강이 남한강으로 합수(合水)하는 '흥원창'에 잘 간다.
    두 갈래 생명이 하나로 합쳐 내닫는 세물머리에 노을이 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명과 베풂의 이치가 천천히 가슴을 적셔 마침내 깊게 저미고 스며든다. 

  • 니체였던가?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

    넘쳐흐르기 원하는 그릇을 축복해 주소서!
    그 그릇에서 금빛 물이 넘쳐흐르도록 축복해 주소서.
    당신의 황금빛 즐거움을 고스란히 안고
    금빛 물결이 되어 온 세상에 흐를 수 있도록!

     
    9.

    흥원창의 노을에 온몸을 적신 채 시인은 문득 문득 귀공자를 생각한다.

    “그대는 왜 그 흉악한 사람들의 얼굴 마담을 하고 있는 거야?
    그대는 정말 영혼을 리영희의 악령에게 팔아 넘긴 거야?
    파우스트는 창의성을 얻기 위해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팔았지만, 그대는 창의성을 포기한 비참을 잊기 위해 영혼을 리영희에게 팔았구나!”


     9.

    시인은 흥원창을 벗어나 절로 가곤 한다.
    고려 이전부터 유명한 법천사(法泉寺)와 새로 등장한 거돈사(居頓寺). 

    행여 법천 어딘가에 샘물(泉)처럼 흐르는 불법(法)이 있을까, 거돈 어딘가에 [한 순간의](頓) 깨달음이 있을까(居), 희미한 기대를 안고.

    한 절을 둘러 보고 발걸음을 옮겨 다른 절로 간다.
    절과 절을 잇는 어두컴컴 한 오솔길.
    사방 천지에 온통 독초와 독거미풀 뿐.
    이 음산한 길을 걷는 걸음에는 그 나름의 보람이 있다.

  • 예를 들어, 단테의 <신의 코메디> (The Divine Comedy, 神曲) ‘지옥편’의 첫 구절을, 거의 할 줄 모르는 피렌체 이탈리아어로 간신히 소리만이라도 곱씹으며 걷는 재미가 있다.
    ‘황무지’를 지은 시인 엘리엇(T.S. Eliot)이 늙으막에 단테를 원어로 읽기 위해, 15세기 피렌체 이탈리아어를 공부했던 까닭을 알게 된다.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é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생의 한 가운데에서
    어두운 숲을 걷는 내 모습을 문득 알았네
    아, 나는 바른 길을 잃었네

     
    10.

    시인은 [독초, 독거미풀 우거진 황폐하고 어두컴컴한 좁은 길]을 헤쳐 나아가다 문득 장판지 한 장 크기의 햇살이 비쳐드는 곳에 자리를 잡은 쑥부쟁이 한 그루를 발견했다.

  • 시인은 잠시 쭈그려 앉아 물끄러미 쑥부쟁이를 들여다 봤다.
    그리고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쑥부쟁이야.
    너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니?
    여긴 온통 독초와 독거미풀 뿐이야.

    너는 들국화의 4촌이잖아?
    국화는  지조와 품격의 상징.
    꼿꼿함 그 자체.

    그런데 이런 음침하고 황폐한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독초와 독거미풀이 제 애인이고 벗인데요?”

    “뭐야?
    그게 무슨 넋 빠진 소리야?
    너는 저 양지바른 곳에서 들국화랑 어울려야 돼!”

    “저는 양지도 싫고 4촌 들국화도 증오해요.
    저는 이곳에서 독초, 독거미풀과 함께 뿌리박고 삽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쓰리썸을 즐기죠.”

    뱀발:
    threesome, 1대2 섹스.


    시인은 집을 향해 걸어 오는 길에 깊은 고민에 빠졌다.

    누가 저 쑥부쟁이의 정신과 영혼을 저토록 깊게 망쳐 버렸을까?
    저 멀쩡한 쑥부쟁이는 왜 저 지경까지 타락했을까?

    시인은 다시 쑥부쟁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갔다.
    시인은 다시 쑥부쟁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이번엔 말을 걸지 않고 하염없이, 이 음습한 죽음의 오솔길에 피어있는 쑥부쟁이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11.

    쑥부쟁이 꽃잎을 젖히고 얼굴이 하나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곱게 늙은, 40년 전에 헌칠했던 귀공자의 얼굴.
    그 얼굴에 겹쳐 광대뼈가 세게 나온 리영희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인의 척추를 타고 드라이 아이스가 달렸다.

    독초, 독거미풀이 문제가 아니다, 라는 진실이 뒤통수를 때렸다.

    “뭐야?
    쑥부쟁이에 두 놈이 숨어 있어?

    귀공자의 정신과 영혼은 다 썩어서 그 몸을 깡통 종북 리영희에게 바쳤구나.
    귀공자의 곱게 늙은 얼굴은, 북한이 좋다고 설치는 깡통들을 위한 아우라(aura)에 다름 아니구나!

    쑥부쟁이가 이 곳의, [죽음의 기운]을 감추고 있구나!”


    시인은 분노와 구역질에 몸을 떨면서 집으로 향했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들여 천천히 연필을 깎았다.
    아, 그래도 이제 시인이 쓰는 글은 사나운 호랑이처럼 귀공자를 덥칠 것이다.

    20년 넘게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이 뒤죽박죽 된 뿌연 세월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에 간직되어 있었던 귀공자에 대한 존중심은 이제 가없는 경멸, 구역질, 분노로 벼리어졌다.

    휘둘러 치는 일만 남았을 뿐.

    12.
    [에필로그]

    창의성이라는 [궁극의 파워]를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악마 숭배는 별 거 아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되고 닭을 잡지 않아도 된다.

    훨씬 더 간편한 방법이 많다.
    예를 들어, 어두운 밤, 사방에 촛불을 밝히고 머리띠를 두르고 꿇어 앉아 스스로에게 무도덕, 무가치, 무중력의 주문을 되뇌면 된다.

    파우스트가 그랬고, 마르크스가 그랬다.
    불르스의 아버지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도 그랬다고 전해진다.

  • 그러나 창의성을 욕심내서 악마를 섬겼던 사람에게는 구원의 찬스가 있다.

    뱀발:
    아, 참, 나는 무슨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회 안 다닌다.


    악마로부터 받은 창의성으로 악마를 조롱하는 것, 즉 [악마로부터 받은 재주]를 사용해서 [생명이 벋어가는 길]을 노래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강의 용기이다.

    “악마를 네다바이 하라!”

    로버트 존슨이 그랬다.
    그의 노래 ‘나와 악마’(Me and the Devil) 전체를 옮긴다.

    새벽에 악마가 방문을 두들겼네
    새벽에 악마가 방문을 두들겼네
    아, 사탄이시여, 이제 갈 때가 됐군요
    나와 악마는 어스름한 새벽길을 나란히 걸었네
    나와 악마는 어스름한 새벽길을 나란히 걸었네
    잠시 그녀를 보러 들러야지
    그럼 기분이 좋아질 거야

    (중략)

    내 안에 오래 오래 깃들어 있던
    사악한 악령이 당신 마당에 날 쓰러뜨리겠지.
    내 시체를 어디든 묻어도 좋아.
    고속도로 옆에 묻어도 좋아.
    어차피 죽었잖아.
    어디다 묻든?
    고속도로 옆에 묻어도 좋아
    오랫동안 내게 깃들어 있던 사악한 악령이
    그레이하운드 버스에 올라타겠지

    아, 참,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

    나의 사악한 악령은,
    또 다른 먹이감이 될
    새 깜둥이 하나 위에 올라타서
    혹은 계곡을 가로질러
    낮과 밤을 나누며
    "내가 곧 죽음이다!"라고 외치며
    죽은 고기를 먹는 커다란 독수리가 되어 울겠지.

    나의 악령은,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은 영혼의 바다를  떠도는, 뗏목같은,
    썩은 고기 덩어리를 던져줄 테지

    나는 나의 악령이
    뜨거운 심장을 빼내어 차가운 놈들에게 주며 떠나는 것을 보네

    그 놈에겐 빈민가가 천국인 게야
    그 비열한 놈에겐...
    가슴이 부서지는 슬픔에 가득찬 황야
    절망으로 물든 사막
    '악마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
    끔직한 공포를 나팔처럼 부는 거야!

    예를 들어 줄까?
    엄마에게서 아이를 뺏어봐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슬픔이 생기잖아?

    썩은 고기를 뜯어 먹는 흉측한 독수리가 오는 것을 보면
    그 독수리가 네 맘 속에 빙빙 날기 시작하면
    벗어날 길 없어
    바짝 뒤를 쫓아오지...
    아, 내게 약속해 줘

    싸움을, 악령과의 싸움을

    당신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을 위해


    악마 네다바이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창의성을 위해 악마에 영혼을 팔았던 사람—[스스로] 무도덕, 무가치, 무중력을 선택했던 사람—만이 악마를 네다바이할 수 있다.

    그러나 창의성이 고갈되었을 때—[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아의 독립성]을 포기했을 때(뱀발: ‘세계로부터 분리된 독립성’이 바로 창의성의 원천이다!)—엄습하는 비참함을 잊기 위해, 악마(=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 전체주의를 추종하고 옹호하는 썩은 풍조)에게 굴복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구원의 대상’이 될 정신과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운명은?

    만약 훤칠한 귀공자의 모습, 혹은 곱게 늙은 귀공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면?

    종북을 위한 얼굴마담, 혹은 아우라가 제격이다.

    아…그대…
    그곳, 죽음의 오솔길에서 쑥부쟁이가 되어버린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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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친초(종북-친북-떼촛불 혼합체) 문화권력에 대한 선전포고 4부작>

    1편 : 3류 안도현! 김지하가 연탄재보다 못하냐?
    2편 :
    김지하가 '깡통' 백낙청 걷어찬 10가지 이유
    3편 :
    진영전쟁: 김지하가 백낙청을 깐 까닭
    4편 :
    그곳에서 쑥부쟁이가 되어버린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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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칼럼] 종친초(종북-친북-떼촛불 혼합체) 문화권력에 대한 선전포고! ②

    김지하가 '깡통' 백낙청 걷어찬 10가지 이유!

    "문화대국으로 가는 한류-르네상스 분출 가로막는 못된 쑥부쟁이!"


  • 강원도 원주의 부론·문막 옆 손곡에 있는, 고려 이전부터 유명한 법천사(法泉寺)와 새로이 등장한 거돈사(居頓寺).
    두 절 사이가 매우 가까운데도 길이 없다.
    시퍼런 독초와 독거미풀만 무성하다.

    법천사의 섬세·심오한 유식학인 법상종과, 참선으로 일관한 거돈사의 선종(禪宗)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길래?
    그곳은 컴컴 칠흑 속 텅 빈 지름길 위에 못난 쑥부쟁이가 한 송이 피어 있을 뿐이다.

  • 이 부근엔 절절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많다.
    견훤이 15만 정예 병력으로 문막을 노리며 기다리던 후용.
    궁예와 왕건이 수십만 대군을 부딪쳐 싸운 문막 벌판.
    오대산 월정사까지 이어지는 구룡사를 비롯한 화엄 사찰들.
    여성적 경제 원리의 상징인 팔여사율(八呂四律)이라는 이름의 월봉.
    그 봉우리 옆에 충청도의 단강, 강원도의 섬강, 경기도의 남한강이 합수(合水)하는 '흥원창'.

    절절한 사연을 가진 장소가 주변에 즐비하건만, 법천사·거돈사 사이에는 독초·독거미풀·쑥부쟁이가 버티고 있다.

    우리 문화계도 똑같다.
    곳곳에 막강한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건만, 독초·독거미풀에 이어 머얼건 쑥부쟁이같이 누군가 길목을 막고 버티고 있다.

    싸이의 말춤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참석하는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욘사마에 이어 한류의 붐이 와 있다.
    한류-르네상스의 핵은 '시와 문학의 참다운 모심'이다.    

    그런데 이 못된 쑥부쟁이가 한류-르네상스의 분출을 가로막고 있다.

    잘라 말한다.

    자칭 한국 문화계의 원로라는 '백낙청'이 바로 그 쑥부쟁이다.

    왜?


  • 첫째, 백낙청은 한국 문학의 전통에 전혀 무식하다.
    그저 그런 시기에 '창비'라는 잡지를 장악해 전통적인 민족문학 발표를 독점했을 뿐이다.

    둘째, 백낙청은 한류-르네상스의 핵심인 '시'의 '모심'에서 가장 중요한 리듬, 즉 시 낭송의 기본조차 전혀 모른 채 북한 깡통들의 '신파조'를 제일로 떠받들고 있다.
    우리 시 문학의 낭송에는 적어도 아홉 가지의 당당한 방법이 있는데도 여기에 대해선 전혀 무식하다.

    셋째, 수십년 동안 창비출판사에서 단 한 번도 지나간 한국 시문학사의 미학적 탐색을 시도한 적이 없다.
    무식 때문이다.

    넷째, 그는 그 긴 세월을 내내 마치 한국 문화사의 심판관인 듯 행세해왔고 그 밑천을 겨우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소설가 몇 사람 공부한 것으로 내세워 왔다.

  • 다섯째, 그의 사상적 스승이라는 '리영희'는 과연 사상가인가?
    깡통 저널리스트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리영희를 앞세워 좌파 신문에서 얄팍한 담론으로 사기행각을 일삼는다.

    여섯째,
    그의 평론 행위는 평론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것은 공연한 '시비'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박경리씨의 소설 <시장과 전장>에 관한 평이다.
    그것도 문학 평에 속하는가?
    너절하고 더러운 방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발표하고도 '심미 의식'인가?

    일곱째, 그 깡통 같은 시국담이다.
    무슨 까닭인지 그의 입은 계속 벌려져 있는 상태다.
    그렇게 벌린 입으로 과연 지하실 고문은 견뎌냈을까?
    그런데 하나 묻자.
    백낙청은 지하실에 가 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여덟째,
    계속되는 졸작 시국담에 이어 '2013 체제'라는 설을 내놓았다.
    그것도 시국 얘기인가?
    아니면 막걸리에 소주를 섞어 먹은 상태인가?
    그런 짓 하면 안 된다.
    그러고도 '원로'라니?


  • 아홉째, 백낙청은 우선 정치관부터 바로 세워라.
    그런 것도 없는 자가 무슨 정치 평을 하는가?
    내가 '깡통 빨갱이'라고 매도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으로 알라!
    마르크스는 읽었는가?
    <자본론>은 읽었는가?
    <경제학·철학본고>는?
    <도이치 이데올로기>는?

    열째,
    마지막으로 묻자.
    문학을 해서 날조하려는 것이냐?
    본디 '시 쓰기'는 고통의 산물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원로' 대접을 받기 전에 먼저 삶의 '원로'가 되어야 하는 법이다.

    이제 이 민족은 지난 시절을 훌쩍 벗어던지고 있다.
    이번 선거의 개 똥구멍 같은 온갖 개수작들이 역설적으로, 과거가 끝났다는 증거이다.

    문학자는 참된 마음으로 문예를 부흥시켜 이 나라를 '문화대국'으로 키워가야 한다.
    이게 바로 15세기 피렌체 르네상스에서 배워야 하는 테마다.

    각오가 돼 있는가?
    스스로를 욕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것이다.

    손곡 쑥부쟁이가 스스로 사라지는 날을 기다리는 사람은 뜻밖에도 많다.
    알았는가?




  • 박성현 저 술가/뉴데일리 논설위원. 서울대 정치학과를 중퇴하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대 최초의 전국 지하 학생운동조직이자 PD계열의 시발이 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의 핵심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지도 민주화보상법에 따른 보상도 일체 청구하지 않았다. 
    한국일보 기자, (주)나우콤 대표이사로 일했다.
    본지에 논설과 칼럼을 쓰며, 두두리 www.duduri.net 를 운영중이다.
    저서 : <개인이라 불리는 기적> <망치로 정치하기>
    역서 : 니체의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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